소설리스트

오륜기로 가버렷-21화 (21/401)

〈 21화 〉 천일의 밤 (5)

"지민이 형."

"어 마하야. 예선 끝났어?"

"네. 통과했어요."

"하하! 축하한다."

혜정이는 잠시 접어두고 형이랑 인사부터 나눴다.

"여기는 성운여고 기연정이라고 너랑 갑. 여자 400미터 계주선수."

"아. 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이쪽은 구마하. 먼저 얘기 했었지?"

"오빠 이겼다는 분? 육상천재?"

"육상천재요? 제가요?"

"하하! 아니 우리 합숙 때 얘기해줬거든."

합숙 때라. 역시 그때 밤마다 통화하던 건 혜정이가 아니다.

뭐. 이 형이 누구랑 연락하든 나랑 아무 상관 없지만.

둘이 대체 무슨 관계지?

"야. 애들이 그러는데 너 이번에 중거리도 나간다며?"

"네. 감독님들이 해보라고 해서. 형 저 다른 사람들 인사 좀 하고 올게요."

"그래."

자리를 피해 한주 고 사람들을 만나고 왔다.

조언도 듣고 예선에서 떨어진 친구들도 위로해줬다.

이주영 감독님과도 잠깐 면담을 나누고 다시 원래 위치로 돌아오는데, 그때까지도 지민이 형은 기연정이란 선수와 사이좋은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왔냐."

"형. 감독님이 형 어딨냐고 물어보시던데요."

"나중에 간다고 그래."

"오빠. 그럼 이분은 혼자 있는 거야? 코치님 없으셔?"

"친구들 놀러와서 같이 있어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연정아 나도 너랑 같이 있을까?"

"뭐래. 진짜 미쳤나봐."

아무리 봐도 보통 사이가 아니다.

혜정이보다 예쁜 거 모르겠는데 그냥 건강하고 발랄한 거 말고는 딱히 뭐...

그래도 누가 운동하는 애 아니랄까 봐 허리도 가늘고 다리도 늘씬하고 목도 긴 거 같고... 생긴 것도 뭐 이만하면. 머리도 포니테일이고...

운동복이 아닌 교복이나 일상복 차림으로 생각하면...

"뭐 할 말 있으세요?"

"아니요. 그냥 어떻게 아는 사이신가 해서. 지민이 형 남중 남고 나왔다고 들어서."

"하하! 그게 왜 궁금해?"

"오빠. 근데 나 진짜 가야 되겠다. 우리 차례 오는 거 같애. 힘내세요. 나중에 뵈요."

"어. 이따 봐."

"가세요. 파이팅."

기연정은 생기 넘치는 미소로 가버리고, 지민이 형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해줬다.

"어떻게 알긴 어떻게 알어. 매년 시합 나올 때마다 얼굴 보고 그러다보니 친해졌지."

"그렇게도 여자애들 알 수 있어요?"

"그럼. 어떠냐? 괜찮은 거 같냐?"

"뭐. 성격은 좋은 거 같기도하고."

"애가 점점 예뻐지더라고. 지난 주부터 사귀기로 했어."

"..."

"왜?"

"형. 근데 우리학교에 여자친구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혜정이? 야 걔는 벌써 끝났지."

"어어..."

"잘 안 맞더라고. 은근 집요하게 구는 것도 귀찮고."

그렇구나. 아 네... 그럼 저도 가볼게요 하면서 돌아섰다.

"집요하다라..."

혜정이 같은 애를 귀찮다는 듯이 말할 수 있다니...

태윤이가 말했던 예쁜 애들 그 위에 있는 잘생긴 인간이라는 게 이런 건가?

"넌 시합 있다는 새끼가 어딜 그렇게 싸돌아 다니냐?"

"감독님 보고왔어..."

"마하야. 아까 어떤 아저씨가 200미터 참가자들 모이라던데 너 아니냐?"

"맞어. 갔다올게."

친구들 말대로 200미터 예선이 잡혀있었다.

바로 운동장으로 내려오니 멀지 않은 곳에 기연정을 비롯 다른 선수들이 시합을 준비하는 게 보인다.

"..."

여자 선수들은 처음 보는 거 같다.

예전에는 운동하는 여자는 다 우악스럽고 여성스런 매력이 떨어진다 생각했는데 막상 보니까 괜찮은 애들이 많구나.

무엇보다 운동을 해서 그런가 다들 몸매가 좋다.

리듬체조만 생각했는데 육상도 나쁘지 않어.

세상 어디를 가나 여자들이 있다. 전국체전에도 여자가 있어.

누군가는 학교를 가도 여자가 있고, 운동장을 와도 여자가 있고.

만나고 사귀고 헤어지고. 귀찮다는 듯이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반면... 나라는 놈은...

후우...

기운이 쭉 빠지는 거 같다.

쉽게 쉽게 진행되는 남녀 관계에서도, 나라는 놈은 올림픽이란 힘겨운 무대가 아니면 아무도 상대해주지 않을 거 같은 절망감이 들었다.

무엇보다 혜정이한테 뭐라고 하냐...

지난주부터 사귄다고? 그럼 양다린가?

저 형이 우리한테 실수한 건 없지만 뭔가 좀 그렇네.

애한테 말해줘야 되나...?

뭐라고 하지. 집에가면 분명 이것저것 물어볼건데... 미치겠네 진짜.

"다음. 준비하세요."

제기랄 정신차려. 지금은 전국체전이야. 이런 걸 생각할 때가 아니라고!

시합 뛸 놈이 뭘 고민하고 있는 건데.

여자, 섹스, 솔로가 되는 혜정이. 선수들의 늘씬한 다리나 짧은 바지 등등.

여러모로 집중력이 흐트러지고 있었다.

집중을 할래도 할 수 없어, 내공이고 뭐고 발휘가 안 됐다.

결국 200미터 예선에서 떨어지고 만다.

실력이 부족한 게 아닌, 잡생각에 빠져있다 출발신호를 놓쳐버린 실책이었다.

"죄송합니다 감독님..."

"긴장했냐? 그거보단 더 빠르게 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딴 생각을 좀..."

"사람도 많고 집중도 안 되지?"

"네..."

쓸데없는 생각에 빠져있느라 반응이 늦었음을 솔직하게 고백했다.

이 감독님은 그런 것도 다 포함해 연습 때 실력을 다듬는 거라 해주신다.

"마하야. 원래 실전은 연습량의 딱 절반만 나오는 법이다."

"반밖에 안 되나요... 되게 적네요."

"적지. 그러니까 연습을 많이 하지. 특히 너는 다른 애들보다 경험도 부족하잖아."

"네..."

"고개들어. 그래서 첫 참가라는거야. 큰 대회에 나왔으면 뭐가 부족한지 알아가면 돼."

부족한 거라...

멘탈 실력 연습량 피지컬. 어디 한 두가지여야지...

늦게라도 남은 100미터에 최선을 다해보고 싶었지만 한번 흔들린 마인드는 쉽게 돌아오질 않았다.

결국 반도 아닌. 반의 반도 본실력을 발휘하지 못 하고 나의 첫 전국체전 단거리 일정을 마치게 됐다.

100미터 준결승, 200미터 예선탈락이란 저조한 성적이었다.

"잘했어. 뭐 어때."

"그래 새끼야. 운동시작한지 1년도 안 된 주제에 준결승까지 갔으면 잘 한 거지."

"야. 니네 오늘 밤 올라간다고 했지."

"왜? 같이 가게?"

"너 내일 중거리 있다며?"

"...잠깐만 감독님 좀 보고올게."

자신이 없다. 준비되지 않은 몸으로 시합을 뛴다는 자체가 다른 선수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거 같다.

"햄스트링이 올라왔다고?"

"죄송해요. 아까 혼자 준비하다가..."

"그러니까 몸 풀 때 조심하라니까."

중거리는 포기했다.

지금 내가 가진 능력 외, 내면에 있는 내공이라도 끌어당겨 어떻게든 해볼까 하는 생각도 해봤지만. 그런 힘은 명경지수가 될 때 제대로 본힘이 발휘된다.

온갓 잡다한 생각에 마음이 흔들리는 이 상황에서  무슨 수로 내공을 끌어 쓴단 말인가. 아직 그 힘이 어떤 건지도 잘 모르는데.

답답하다. 초인적인 능력이 있음 뭐할나. 쓰는 놈이 부족한데...

결국 연습 부족이었다.

변명할 여지가 없다.

실력이 딸린다는 걸 뼈저리게 인식하는 경험이었다.

*   *   *

친구들과 올라가는 길이었다.

"잘했다니까 왜 이렇게 침울한 표정을 하고있어."

"그냥. 어쨌든 끝났잖아. 결과도 별로고..."

"병신이냐? 이런 데 처음 와놓고 되도 않는 욕심을 부리고 있어 건방지게."

"야. 니네가 감독이냐? 애한테 존나 지랄이네."

둘 둘 나눠서 버스를 타고가고 있었다.

대전 지나고 있는데 태윤이 정석이는 쿨쿨 코를 골고, 남수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눴다.

"안 자? 안 피곤해?"

"그냥 기분이 별로네..."

"그렇게 분하냐?"

"그게 아니라... 아까 200미터 할 때 병신같은 생각 하느라 제대로 못 뛰어서..."

"뭐 어때. 애들 말대로 첫출전인데 앞으로 더 연습하면 되지."

"...더 잘 할 수 있었어."

"야. 너 나 연정이랑 깨졌을 때 뭐라고 했어. 끝난 건 끝난 거라며."

"그쪽도 연정이었냐..."

"그럼 연정이가 또 있어?"

"많지."

기연정이란 친구. 걔도 지민이 형이랑 했을까?

혜정이에 기연정이라.

동네가 무슨 동급생이야 뭐야. 육상 선수고 학교 미녀고 왜 다 한 사람만 좋아하는데... 젠장...

"후우."

"한숨 좀 그만 쉬고. 자. 도착하면 내가 깨워줄게."

"남수야. 너 아라비안 나이트라고 들어봤냐?"

"그럼. 나이트클럽 아냐."

"후우우~! 후욱! 후욱!! 씨발놈아."

"뭐. 램프의 병신아."

천일야화. 아라비안 나이트.

신밧드 알라딘 등도 포함된 구전동화를 엮은 소설로 원래는 굉장히 끈적한 배경을 가지고 있는 이야기다.

중동 아시아. 사산조 페르시아 왕국에 굉장히 인품 좋고 백성들의 칭송이 자자한 형제가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동생 왕이 왕비가 노예와 바람피는 모습을 목격하며 충격에 빠졌다.

"왕이라는 새끼가 그런 걸로 충격에 빠져?"

"...왕비라고. 와이프가 바람 피는 걸 봤다잖아."

"아니. 왕비 정도면 노예를 딜도로 썼을 수도 있잖아."

"몰라 씨발 뒤로 했나보지."

그렇게 동생 왕이 두 사람을 죽이고 형한테 건너가 요양을 하는데.

이번엔 형수 되는 사람이 집단으로 파티(?)를 벌이는 모습에 2차 충격에 빠진다.

"그룹이냐?"

"야. 이슬람이면 존나 빡신 나라 아니냐?"

"니네 자고 있던 거 아녔어...?"

"그보다 이 시끄러운 버스 안에서 우리 소리가 들려...?"

"잘 들려."

"뭔데. 계속 얘기 해 봐."

정숙하지 못한 여인들의 작태에 상처를 입은 형제는 복수를 다짐한다.

왕국의 처녀란 처녀는 죄 따먹고 죽이고 다니기 시작했다.

백성들은 왕에게 보내던 찬사를 멈추고 그들을 죽여달라 알라에게 빌었다.

이때 현명한 재상의 딸 세혜라자드가 나섰다.

"여동생을 데리고 갔데."

"오~ 자매덮밥."

"김태윤 씨발년아! 조용히 하라고. 존나 개념없어."

"야... 내가 이렇게 욕먹을 정도로 뭘 잘 못 한 거냐...?"

"의외로 정석이가 이야기 듣는 태도가 좋네."

"나 이런 얘기 좋아하거든. 그래서? 동생 왜 데리고 갔는데? 계속 해 봐."

거사를 치룬 여자는 죽임을 당한다.

왕이 세혜라자드의 목을 내리치기 전, 딱 그때 동생이 나서서, 언니 어차피 이대로 갈 거 재미난 이야기 하나만 들려주세요 라면서 천일의 밤이 시작된다.

"여기서 말하는 천일이 숫자 1001이라는 뜻이거든."

죽을 듯 죽지 않는 긴장감의 밤은 계속됐다.

3년 가까운 시간동안 이어진 정성과 즐거움이 가미 된 세혜라자드의 이야기는 왕의 복수심을 녹여버렸다.

그동안 매일 밤을 함께 보낸 두 사람은 자식도 셋이나 낳고, 여동생은 동생 왕과 혼인하며, 보고 또 보고를 찍고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로 아라비안 나이트는 끝을 맺는데.

"천일을 계속했어도, 마지막 하루를 놓쳤다면 자매는 죽었겠지. 나도 마찬가지야. 아무리 연습을 하면 뭐하냐. 마지막 결과가 좋지 않은데."

"그 얘기 였구나."

"병신이냐? 잠이나 자 새끼야. 쓸데없는 소리하고 있어."

건너편으로 넘어가려는 걸 남수가 힘으로 눌러 막는다.

"이 새끼들이 지들이 길게 떠들게 만들어 놓고서"

"하하! 좀 가만히 있어."

그렇게 우승하고 싶었냐고 묻는 말에 조용히 답했다.

"그럼... 이기고 싶었지."

"올림픽에 나가기 위해서?"

"아니 그냥. 이기고 싶었어. 순수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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