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화 〉 천일의 밤 (6)
"아이고 배부르네. 잘 먹었다 마하야."
"멀리 와줬는데 햄버거 정도는 내가 사야지."
"야. 이제 뭐 할래? 간만에 밤에 모였는데."
"그러게. 노래방이나 갈까? 피씨방? 아니면 둘 다?"
"너네끼리 가. 집에가서 쉴래."
"그럼 넌 가서 템버린만 쳐. 우리끼리 놀게."
"하나 빠지면 3:3 배틀넷 해야 된다고. 워크도 해보니까 재밌더만."
"피곤해. 다음에."
"아 가자. 이렇게 학원 안 가고 있기도 흔한 기회 아닌데."
"마하야. 기운 없으면 우리 집 가서 야동 하나 구워줄까? 내 동생이 요즘 괜찮은 거 많이 받아뒀던데."
"하하하... 됐어. 딸 칠 기운도 없어."
친구들이 신경써주는 건 고맙지만 집으로 돌아섰다.
놀 기분이 나질 않는다.
"새끼. 진짜 상처받았나 보네."
"구마하 주제에 저러고 있으니까 나까지 기운 빠지네..."
"정석아. 근데 지금 너희 집 가도 되냐?"
"왜?"
"나 씨디 구워줘."
"너가? 포경 안 했잖아."
"병신이냐? 대가리에 칼 맞았어? 포경이랑 자위랑 아무 상관 없거든."
"이제와서 뭐하지만 남수는 여자친구 있을 때가 좋았어..."
"그러니까... 하나는 정상인이 있어야 나름 균형이 맞는데."
* * *
"형 나 왔어..."
"어? 너 내일 온다며?"
"그냥 일찍 끝나서 바로 왔어."
"시합은?"
"내일 얘기하자. 피곤해서 먼저 잘게."
"야. 씻고 자."
"괜찮아. 옷 갈아입고 왔어. 선선해서 땀도 다 식었고."
"양치는?"
"아 내가 애냐!"
방에 들어와 풀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뇌리에 잔상이 남는다.
경기장의 열띤 분위기. 최선을 다하던 선수들의 열정.
고대하던 시합이었는데 너무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다.
"마하야."
"..."
"불도 안 켜고 뭐하고 있냐."
형이 따라와 방불을 켜며 물었다.
"왜? 잘 안 됐어?"
"보면 알잖아..."
"...감독님한텐? 연락 드렸고?"
"아니."
"전화 드려. 그래도 사부님인데 소식 기다리고 계실 거 아냐."
형은 늘 무공의 기본은 예의라고 강조하는 사람이다.
운동도 무공수련과 똑같이 보는 우리 형.
한 감독님이고 누구고 귀찮아 죽겠지만 혼나기 싫어 핸드폰을 들었다.
"감독님."
"어 그래 마하야."
"저... 떨어졌어요."
"안다. 주영이랑 통화했어. 올라왔다며? 지금 어딨니? 친구들이랑 같이 있었다고 하던데."
"집에 왔어요. 저나 제 친구들이나 술 같은 거 마시는 애들 아니에요."
이 감독님께 들으셨는가, 한 감독님도 성적이나 기타등등 많은 것을 알고 계셨다.
인솔 교사 없이 혼자 고생했다는 위로를 들었지만 목소리에 싸늘함이 묻어 나오는 거 같다.
"쉬어라. 학교 와서 이야기하자."
"감독님. 저한테 실망하셨죠?"
"솔직히 아니라곤 못 하지."
"죄송합니다... 시합에 집중을 못 했어요."
"그건 어쩔 수 없어. 너는 아직 큰 경험이 없으니까. 꼴찌를 했어도 상관없다."
"...그럼 왜?"
"이 감독이 그러는데, 다쳤다면서?"
"..."
"꾀병이지?"
"...어떻게 아세요?"
"야 인마. 우리는 보면 다 알어."
이주영 감독님이 말씀하시길 내 얼굴에 투지가 죽어있었단다.
죽은 동태 눈깔을 하고 있어 더 해봤자 무리겠구나 싶어 올라가라고 하셨단다.
"팔 다리가 없는 선수도 시합에 최선을 다한다. 근데, 사지육신 멀쩡한 녀석이 해보기도 전에 경기를 포기해? 뭐라고 해야되는 거냐."
"감독님..."
"주영이는 한 대 치려는 걸 꾹 참았다고 하더라. 내가 옆에 있었어도 똑같았을 거야."
"근데 감독님. 진짜 자신이 없었어요..."
"언제는 자신 있어 뛰었어?"
"..."
"운동 취미로 하는 거냐? 니가 말한 올림픽이라는 건 그 정도 밖에 안 되는 거야?"
"아니요..."
"잘한다 잘한다 해주니까 그게 너의 본 모습 인 줄 알았다면, 앞으론 코치 하는 것도 다시 생각해 봐야겠다. 선수가 지레 포기하는데 내가 뭐 하러 열정을 쏟아야 되냐."
시합에 집중 못 해 제 실력을 발휘 못 한 것만 따지고 있었다.
시합을 포기했다는 건 큰 의미 부여 안 하고 있었는데...
그렇구나. 경기를 포기했구나. 누가 시킨 것도 아닌 내가 그런다고 결정했지.
근데, 정말 자신이 없었단 말이야.
질 걸 알면서 뛰는 게 더 이상하잖아.
괜히 혼자 발악하는 거 같고... 그래서 더 비참해지고...
다음날 나는 학교를 빼먹었다.
어차피 대회일정에 맞춰 이틀 결석한다고 말해뒀으니 그거 믿고 멍하니 시간만 죽이고 있는 중이다.
"..."
최선이라... 최선을 다했으면 뭐가 달라졌을까?
세상 아무리 노력해도 여자들의 시선은 변하지 않고, 잘 생긴 놈들은 가만히 있어도 알아서 물고 빨고 다니는 세상인데...
죽든 살든 어떻게든 시합을 이겼어야 하나...?
아 젠장. 다 지난 판국에 뭘 이제와서...
이것저것 곱씹어 보고 있는데, 그러는 가운데서도 틈틈이 문자가 들어온다.
"얜 왜 자꾸..."
혜정이였다.
시합 잘 끝났어? 나도 전주 가보고 싶다. 등등.
가슴 콩닥거리고 아드레날린 샘솟을 이야기들을 차갑게 쳐다보며 답하지 않았다.
"..."
얘 잘못이 아니야. 내가 못 난 거지. 그리고 그 형이 자기 생긴대로 살고 있을 뿐이지.
처음부터 오르지 못 할 나무를 쳐다봤을 뿐. 혼자 주절주절 마음만 우울하게 변해가고. 급기야 이럴 거 차라리 운동을 시작하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후우..."
아니다. 운동을 시작한 건 좋은 일이었어.
그래. 그것도 따져봄 혜정이였지.
얘를 통해서 성욕에 눈을 떴고 욕망을 어떻게든 달성하고 싶어 시작한 거잖아.
그렇게 올림픽이란 꿈을 품었고, 몸을 바꾸고 내공을 알았다.
가능성을 보았고 주변의 기대도 있었다.
그저 내가 다 걷어차 버렸을 뿐이다.
정말 왜 그랬을까...
왜 도망쳤을까...
이제와 상처 하나 둘 더 생긴다고 뭐가 달라진다고.
"..."
시계를 보니 오후 네 시. 대회 일정이 끝났을 시간이었다.
경험은 짧아도 나도 남들 못지않게 열심히 했는데. 그럼 나를 믿었어야지.
자신감은 누가 주입해 주는 게 아닌, 스스로 믿는 힘이라고 그렇게 각오했으면서 결정적일 때 그걸 못 해가지고...
"와 안되겠다. 남한산성이라도 한바퀴 뛰고 와야지."
늦은 시각. 한심한 생각에 잠겨버리는 게 두려워 밖으로 나서는데, 아파트 입구에서 집에 오던 혜정이와 마주쳤다.
"어? 마하야."
"..."
"끝내고 온 거야?"
"아니... 집에 있었어."
"근데 왜 답장 안 했어...?"
"......"
그래. 니가 뭔 잘못이 있겠냐...
너나 나나 돌아보지 않는 누군가를 좋아했을 뿐이지...
"가. 나 운동가야 돼서."
마음은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도 혜정이를 싸늘하게 대하고 있었다.
물론, 그런 마음 눈치 못 챌 정도로 얘가 둔한 사람이 아니긴 하지만.
"왜 그래? 경기 잘 안 됐어?"
"졌어..."
"뭐 어때. 대회는 또 오잖아. 열심히 하는데 반드시 좋은 결과 있을 거"
"지민이 형 다른 애 만나고 있어."
"...어?"
말을 싹둑 자르고 형 소식을 전해줬다.
혜정이도 충격을 받은 듯, 눈이 커다란 해져서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경기장에서 봤어. 기연정인가 뭔가 하는 앤데, 선수래. 둘이 사귀기 시작했다고 그러던데."
"어... 어. 그래...?"
"두 사람 보다가 난 시합 다 망쳤어. 그러니까 앞으로 이런 걸로 나한테 지민이 형 소식 물어보지 마."
"..."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괜히 분풀이를 하고 있다.
못난 내 자신이 혐오스러워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지만, 울먹이는 걸 간신히 누르고 있는 혜정이를 무시할 수 없어 쉽게 돌아서지도 못 했다.
"미안. 근데 알려줘야 할 거 같아서."
"아냐. 뭐가 미안해... 그냥 그런 건데..."
"..."
"혹시, 잘 못 본 건 아니지?"
"야. 당사자가 한 말이야. 못 믿겠으면 니가 그 인간한테 전화해서 물어보든가. 내가 그랬다고는 하지말고..."
"근데, 왜 너가 우리 때문에 시합을 망쳐... 신경 끄고 경기에나 집중하지."
혜정이도 싫은 소식에 심술이 나는지 목소리가 날카롭게 바뀐다.
내몰리는 감정에 결국 해선 안 될 말을 꺼내고 말았다.
"내가 너 좋아하니까."
"..."
"갈게. 들어가."
최악의 타이밍에 최악의 고백을 한 거 같다.
애들이라도 불러서 제발 나 좀 욕하고 쥐어패달라고 하고 싶었다.
오래오래 꾹꾹 눌러왔던 감정들이 와그르 무너져 내린다.
어떻게 지켜왔는데. 어떻게 여기까지 가까이 왔는데. 이렇게 한 순간에...
이런 기분으로 남한산성까지는 도저히 무리라, 아파트 뒤편 주택가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병신같이 훌쩍이다 집으로 돌아갔다.
* * *
다음 날. 학교는 운동회를 하고 있었다.
"야 야 반장 설마 또 빅맥이냐? 버거킹으로 하자니까."
"니들이 사냐! 우리 엄마가 사지! 주는대로 처먹어!"
오늘도 기운이 나질않아 빼먹을까 했는데, 친구들이 내가 계주선수가 됐다는 말에 일단 운동장에 나와 앉아 있었다.
"마하야. 콜라 남았냐?"
"여기..."
"땡큐."
"축구는 어제 떨어졌다고? 좀 잘 하지 새끼들."
"지랄하네. 그럴 거면 지가 나와서 뛰든가."
"괜찮아. 남수도 떨어졌어."
"하하! 남수는 원래 개발이잖아."
밴치에 앉아 이것저것 구경하고 있는데 정석이가 감자튀김 우적우적 씹으며 운동장 구석을 가리켰다.
"야. 저기 여자애들도 피구 결승 하나보다."
"어디. 오~ 혜정이도 있네."
"..."
"우리도 가까이 가서 보자. 애들도 많이 가서 구경하는데."
"그러자. 마하야 이것 좀 들어라."
"너네끼리 가서 봐."
"왜? 너 혜정이랑 친하잖아. 응원 안 해?"
"귀찮어..."
누가 눈칫밥으로 먹고 사는 놈들 아니랄까 봐 태윤이랑 정석이가 바로 표정이 바뀌어 물었다.
"뭐냐? 너 또 뭐 있지?"
"없어."
"이 새끼가 형한테 솔직하게 말 안 해?"
"아 귀찮다고 좀 저리가. 그리고 이미 시합 다 끝났는데 보긴 뭘 봐."
우리끼리 옥신각신 하는 사이, 혜정이가 마지막으로 남아 이쪽저쪽 날아드는 공격을 피하고 있었다.
스포츠 정신은 쉽게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절대 이길 수 없는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반등을 꾀하고자 흙바닥을 구르는 혜정이를 보고 있자니 나도 달려가 포기하지 말라고 해주고는 싶지만.
내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을까...
어제의 못난 모습이 자꾸 겹쳐 엉덩이가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아. 졌네. 열심히 했는데."
"저거저거, 못 생긴 것들이 예쁜 애라고 일부러 공 더 쎄개 던진 거 같은데?"
"정석아."
"응?"
"좀 닥치고 있으면 안 되냐. 어!!"
"태윤아... 이 새끼 갑자기 왜 이러냐?"
"야. 너 왜 그래 병신아?"
"후우... 미안. 갑자기 니 말이 존나 재수없게 들려서."
"이 씨발년이..."
"그래. 너도 모르는 애들 상대로 못 생겼니 뭐니 그런 말 함부로 하지 마."
"하루이틀이냐고! 갑자기 난린데!!"
애들이랑 투닥거리고 있는데, 시합을 마친 여자애들이 지나갔다.
혜정이와도 잠깐 눈이 마주쳤지만, 쟤가 먼저 고개를 피하고 나도 모르는 척 시선을 돌려버렸다.
근데 또 그걸 두 놈이 봤다.
친구들은 여러가지 상황을 유추하며 질문을 퍼붓는다.
"뭐야? 싸웠어?"
"방금 뭔가 일부러 외면하는 듯한 분위기가 연출됐는데, 의도한 거 맞어?"
"아 진짜, 뭘 숨기지를 못 해요."
안 그래도 속이 답답하던 차라 자리를 옮겼다.
"남수 없는데 진짜 말해도 돼?"
"니네는 내 친구 아니냐."
"해봐. 뭔데? 내용에 따라서 내가 아까 한 실수를 사과해줄 수도 있어."
정석이한테 사과 들을 거 없고, 그냥 욕 한 바가지 먹고싶어 솔직하게 말했다.
지민이 형과 혜정이의 관계. 내가 혜정이를 보면서 몰래 키워왔던 마음들.
어쩐 일로 친구들도 헛소리 안 하고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고 있었다.
"뭔가 존나 찌질해 보이네..."
"맞어. 찌질했지..."
"아니. 난 이 새끼 이해 돼. 처음으로 잘했다는 칭찬을 해주고 싶다."
"뭐가?"
"내가 뭘 잘했어?"
"이혜정한테 지랄 한 거."
정석이는 결국 혜정이가 내 마음 알면서도 지 편할대로 가지고 논 거라고, 제대로 되갚아 줬다고 해줬다.
"야. 걔가 마하를 갖고 놀았다고 볼 순 없지 않나?"
"갖고 논 거지! 뻔히 중요한 대회 나가는 거 알면서 그런 걸 왜 물어보는데. 지 남자친구면 지가 알아서 하든가."
"글쎄 난 걔도 오죽 절박하면 그랬을까 싶은데..."
"새끼야. 넌 그래서 문제야."
"..."
"맨날 상대만 생각하다 정작 니 꺼 못 챙겨먹는 그 친절함. 넌 감정 없냐? 니가 걔 하루 이틀 쳐다봤어? 쟨 너가 지 좋아하는 거 진작 알았을 걸. 그런데도 지 남자친구 뭐하는지 알아봐달라고 했으면 들어야지. 마하가 뭘 잘 못 했는데."
정석이가 침을 튀기며 열변을 쏟아내고 있다.
더럽다고 피하지도 못하고 멍하니 듣고 있으니 녀석이 눈에 힘을 바짝 쥐고선 경고하듯 쳐다본다.
"너도 사람이면 니 감정 무시하지 말라고. 이용당하지 말고. 알았어!"
"어... 알았어."
"뺏기지마 병신아. 포기하지도 말고. 그래서 보란 듯이 따먹으면 될 거 아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