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륜기로 가버렷-25화 (25/401)

〈 25화 〉 도전하는 자세 (2)

"어우. 다시는 100바퀴니 뭐니 깝치지 말아야지..."

10월 마지막 주.

비몽사몽 운동장 100바퀴의 피로가 가시질 않아 며칠 새벽 운동을 건너뛴 거 말곤 특별할 거 없는 아침.

슬슬 동복 위에 코트를 꺼내입어도 될 정도로 추운 그런 날이었다.

띵.

"..."

그런 가운데 묘하게 샴푸냄새가 나더라니 엘리베이터 안 저 뒤에 혜정이가 있었다.

우리만 있는 게 아닌, 다른 이웃들도 함께있어 굳이 아는 척은 하지 않았다.

운동회 이후로 가끔 스쳐가도 모르는 척 했는데 오랜만에 아침에 보는 거 같다.

"아으 추워라."

"으으. 목도리를 들고 나올 걸."

날이 춥긴 추운가 다들 자가용이나 버스정거장으로 서두르고. 어느덧 우리 밖에 남지 않았다.

집에서 학교가 먼 건 아니지만 제법 걸어야 했다.

그냥 아파트 입구에서 빠져나올 때 안 춥냐고 물어볼 걸, 막상 이렇게 있으니 더 뻘쭘해지네.

"저기..."

"응?"

"..."

"왜?"

아차. 그러고보니 나 얘한테 좋아했다 뭐다 그런 개소리를 했었지.

아이고 그냥 모른 척 갈 걸 그랬나. 괜히 의식하고 있었구나.

"오늘도 운동하고 왔어?"

"아니. 요즘 추워서. 이럴 때 괜히 잘 못 뛰면 부상 입는다고 그래서."

"으음. 저기... 있잖아..."

"뭐. 할 말 있으면 해."

"그날 고맙다고."

"뭐가?"

"계주할 때. 내가 넘어졌는데 이겨줘서."

"아. 그거."

"완전 반대편에 있느라 못 봤는데, 친구들이 멋있었었데."

진짜? 누구? 누가? 근데 왜 나한테는 그런 소리가 안 들리지? 맨날 이상한 놈들이 와서 팔씨름 한판만 하자고 그러고.

"됐어. 딱히 널 떠나서 내가 지고싶지 않아 그랬던 거니까."

"그래도 고마운 건 고맙지. 애들도 다들 밥 먹을 때 그 얘기하는데."

"당사자한테 와서 하라고. 왜 뒤에서들 떠들어."

"부끄럽잖아."

"못생긴 인간이랑 말하는 게 쪽팔린 건 아니고?"

"으음. 하긴, 그런 문제도 있겠구나."

"야."

서먹한 분위기는 장난섞인 혜정이의 미소로 사그라든다.(장난이겠지?)

우리는 보폭을 맞춰 걸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래도 잠깐 같이 산책 좀 했다고 함께 있는 게 그렇게 어색하진 않다.

"지민이 오빠가 너 빠르다고 했을 때 얼마나 빠르길래 저러나 싶었는데. 확실히 다르구나."

"뭐. 그냥 어떻게 컨디션이 좋았던 거 뿐이지."

"오빠 일도 고마워."

"고마울 것도 많다..."

"신경쓰게 만들었잖아. 미안하기도 하고..."

"됐어. 지난 거 일일이 꺼내지 마."

"..."

거 참 좋은 분위기에 왜 또 불편한 이름이 튀어나와서...

"먼저 오빠 만났고 왔어."

"어."

"수능 있어서. 엿이랑 떡이랑 전해준다고."

"그래. 잘했네."

"아니라고 믿고 싶어..."

"..."

"원래도 친한 여자애들 많은 사람이니까, 그러니까"

"저기 혜정아 잠깐만."

긴 콧김으로 한숨을 내쉬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미안, 너한테 할 얘긴 아닌데..."

"그게 아니라. 너가 누구를 만나든 나랑 아무 상관 없지만."

지민이 형은 분명 좋은 사람이다.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도 좋고 후배들도 두루두루 잘 챙기고 나한테도 실수한 건 없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그와는 별개의 문제였다.

"다시는 남 연애사에 끼어들고 싶지 않은데, 그 형은 아니야."

"..."

"좋은 사람 만나. 너 정도면 충분히 더 인물 좋고 괜찮은 인간들 만날 수 있잖아."

"괜찮은 사람 누구?"

"뭐. 능력이 좋다든가. 아니면 공부를 잘 한다든가."

"학생이 능력이 있어봐야 얼마나 있다고..."

"어쨌든 바람 피는 놈은 아니라는 거지. 왜 매달려 뭐가 부족해서? 빚 졌어? 약점 잡혔어?"

"그런 거 없어... 오빠 나한테도 잘 해줬어."

"그럼 끝내. 마음 떠난 사람 뭐하러 구질구질하게 그러고 있냐."

"..."

"여기까지 하자. 이 이상은 나도 아는 형이라 말하기가 조심스럽다."

그렇게 뭐라도 된 듯 떠들다보니 이 말도 전해주고 싶어진다.

"그리고 먼저 내가 했던 말도 신경 쓰지 마. 어차피 좋아한다는 말 한두 번 들은 것도 아니잖아."

"그렇게 많은 편도 아니야."

"있긴 있네. 익현이도 너 좋아한다고 했었다며?"

"걔는. 걔야말로 완전 아니지... 딱 싫은 스타일인데."

혜정이가 아주 질린다는 얼굴로 인상을 구기고 있다.

아이고 익현아. 그렇게 잘난척 하더니 겨우 이런 평가 받고있냐.

그래도 나는 체육인이 아니던가.

조롱과 비하는 스포츠 정신에 어긋난다. 후후 난 이미 이겼거든.

"왜? 그래도 익현이 정도면 우리 학교 킹카지."

"허세 있는 애 정말 싫어. 그런 애보단 너가 백배 나."

"..."

의식하지마라. 생각없이 하는 말이야.

애들도 그러잖아 여자애들 하는 말이나 행동 하나하나 담아두는 것 자체가 인기 없다는 반증이라고.

개보단 고양이가 나. 탕수육보단 깐풍기가 나. 그런 의미로 한 말일거야.

"바람기 있는 건 좋고?"

"야."

"큭큭."

"웃지마. 짜증나."

"알았어."

그리고 다시 조용히 걷는데 혜정이 친구들이 나타났다.

"나 애들 있어서 먼저 갈게."

"어. 가."

혜정이와 친구들이 슬쩍슬쩍 돌아보며 뭐라뭐라 떠드는데 고개를 끄덕끄덕 해줬다.

그래. 나야. 덕분에 밥 빨리 먹어서 좋지? 좋으면 예쁜 애들 좀 소개시켜주면 안 될까?

이혜정. 나의 첫사랑이자 욕망.

올 봄만 하더라도 말도 못 걸던 애랑 자연스럽게 등교도 같이하고, 속 깊은 이야기도 나누고 있구나.

나도 그만큼 컸다는 증거겠지. 역시 노력은 배신하지 않어.

너도 그럼 돼 혜정아. 사람은 변할 수 있어.

다시는 이상한 놈들한테 휘둘리거나 하지말고 가서 좋은 사람 만나.

충분히 인기 얻을 수 있는 애가 왜 그러고 사냐. 보는 사람 마음 아프게.

처음으로 혜정이를 보면서 마음 편안하게 그런 생각을 했던 거 같다.

뭔가 그런 내가 엄청 어른스럽고 여유가 넘치는 것 같아 자뻑에 빠지고 있는데

"뭐하냐? 혼자 우두커니 서서?"

"..."

"뭐? 야한 여자라도 봤어?"

진짜 애들 말대로 남수는 여자친구 있을 때가 확실히 정서적으로 안정감이 있었어.

"아냐. 가자."

"너 아까 멀리서 보는데 누구랑 같이 가는 거 같던데?"

"혜정이. 오늘 나오는 시간이 같았거든."

"그래? 사귀재?"

"병신이냐. 그러고보니까 그때도 니 때문에 더 힘들었던 거 아냐."

"뭐가 니가 상담해 달라며."

시간은 또 흘러간다.

11월 첫 주. 수능이 끝나고 마침내 우리들 차례가 됐다.

몇 몇 애들이 오전 수업만 마치고 집으로 돌아간 고3 교실에서 문제지도 챙기고 버려둔 체육복도 줍고 거지같은 생활을 이어가고 있을 때.

나는 친구들과 꽤 심도깊은 고민을 나누고 있었다.

"그래서? 결론을 말해. 뭘 하자고?"

"파티지."

"..."

"마하야. 크리스마스하면 파티. 파티하면 크리스마스. 모르냐?"

"몰라 처음 들어. 여긴 엄밀히 100년 전 조선이란 나라였어."

"암튼, 그날 너네 집 비는 거 맞지? 형 늦게까지 장사하잖아."

"야. 잠깐만."

여름과 똑같은 레파토리로 말하고들 있다.

여름에도 인생 마지막 여름이라면서 난리부르스를 추더니 이번엔 수능 전 마지막 크리스마스라 허투루 보낼 수가 없단다.

"오케이. 파티 한다 쳐. 파티 때 뭐하는데?"

"치킨같은 거 시켜먹고."

"너 모아놓은 야동 봐도 좋고."

"..."

"고스톱칠까? 밤새 놀기엔 그만한 게 없던데."

"이 새끼들 진짜로 눈물 날라 그런다 젠장..."

나도 친구들과 좋은 추억 만들고 싶지만 뭔가 좀 아닌 거 같은데...

아니 왜 크리스마스까지 우리끼리 보내야 되는지...

"그러지말고, 차라리 명동 같은 델 가는 건?"

"야. 너 미쳤냐!!"

"이 븅신이 거기가 어디라고 아다 새끼가 함부로 겁도 없이."

"아니. 그냥 좀 특별한 분위기를 느끼자는 거지..."

"마하야. 명동가서 뭐 할 건데? 커플들 봐서 뭐하려고?"

"그렇게 비참해지고 싶냐? 인생 망가뜨리고 싶어?"

"이 새끼 혹시 사람들 보면서 아. 오늘 저렇게 둘이 하겠구나 그런 상상하는 거 아냐?"

"..."

"..."

"..."

"왜? 아 왜? 뭐!"

"씨발... 정석아..."

"너 지나가는 커플들 보면 그런 생각해...?"

"봤지. 내가 말했지. 이 새끼 미쳤다고. 제정신 아니라고."

"아니! 나는 그냥 구마하 놀리다 보니까!!"

좋은 날 혼자 있기도 뭐하고 애들끼리 약속을 잡았다.

12월 첫 주 기말고사를 치루고. 마지막 남은 학사일정을 끝내자 더 없이 여유로운 시간이 찾아왔다.

반에서 영화나 보고 낮잠이나 잔다.

인생 다시 없을 느긋한 순간에 태윤이가 다가왔다.

"요즘은 운동 안 하냐?"

"겨울은 조심해야 돼서. 가끔 집 근처 헬스장에서 근력만."

"마하야. 우리 너네 집 가는 거."

"어."

"여자애들 한번 불러보지 않을래?"

"...여자 누구?"

"뭐. 혜정이도 괜찮고."

어떻게 그런 생각이 들었냐니, 지네 학원에 우리 학교 여자애들이 제법 있는데 그렇게 내 얘기를 하더란다.

"죽는다."

"진짜라고 병신아."

"후우. 야 씨발 됐어. 꺼져. 나 졸려."

"아 이 새끼 진짜."

그때 정석이가 반 친구들과 매점을 다녀왔는가 빵이랑 과자를 들고 나타났다.

"야! 정석아! 일로 와 봐."

"안돼. 가루만 남았어. 못 줘."

"아 그게 아니라, 그때 우리끼리 있을 때 너도 분명 들었지."

정석이도 태윤이가 해준 이야기에 공감하며 말한다.

"어. 이 새끼 말 맞어."

"..."

"너 요즘 은근 여자애들 사이에서 인기 좋아."

주제가 주제다보니, 다른 반 친구들도 삼삼오오 모여앉아 말했다.

원래 우리 때 여자애들이 뭐든 좋아하고 보는 법이란다.

연예인이라든지, 만화 캐릭터라든지. 없으면 동성 친구까지.

근데 나는 원체 평생을 좆밥으로 지내다보니 딱히 나쁜 소문이 있거나 누굴 괴롭힌 것도 아니고.

남자애들은 원래 나를 좋게 봐주고 있어 평판도 괜찮고.

갑작스레 쑥 커진 몸과 적당히 비율이 맞는 몸매. 거기 플러스 알파로 운동회 때 활약까지.

"진짜야. 너 은근 인기 있어. 나도 들었어."

"마하는 확실히 희소성이 있지. 아직 저평가를 받고 있다라고나 할까"

"봤냐? 이래도 내가 놀리는 거냐."

"..."

"거기다 또 뭐냐. 어. 혜정이랑 친하잖아."

"그건 왜 인기 요인이 되는 거야??"

그날 같이 등교하던 날. 그때 혜정이와 같이 있는 내 모습이 뭔가 엄청 듬직해 보였단다.

예쁜 애한테 매달리는 것도 아니고 편안하게 대해주면서 쿨하던 모습.

진짜 여자들이 보는 남자란 복잡하구나.

우리는 그냥 머리가슴배면 끝인데.

"내 친구도 혜정이가 너 재밌다고 했다 그랬어."

"혜정이가 내 개그를 좋아하긴 하지."

"하여튼 칭찬을 해주면 안돼요."

아무튼 반 친구들이 모여있다보니 뭔 얘기를 하다 이런 주제가 나왔냐는데.

"파티 한다고?"

"혜정이도 와?"

"아니. 파티까지는 아니고... 그리고 걔는 아직 말이 나온 것도 아닌 게."

"야. 나도 갈래. 껴줘!!"

"나도 가도 되냐?"

"마하야. 뭐 사가야 되냐? 설마 술 마시고 그러는 거야??"

잠깐만. 너무 급물살을 타고 있는데...

나중에 남수까지 찾아와서 말했다.

"야. 왜 너네 집에서 모이는 걸 우리 반 애들이 알고 있냐?"

"후우..."

"봤지. 일이 여기까지 온 이상 물러설 길은 없다."

"시끄러! 니가 만들었잖아!! 뭘 물러설 길이 없어."

"야 흥분하지말고, 태윤이 말 들어 봐. 가서 한번 물어보라니까."

"아니 대체 뭐라고 하라고?!"

"그냥. 그날 약속 없으면 같이 놀자고."

"그 형이랑 끝났다며. 남자친구도 없는데 아쉬울 거 없잖아."

"혜정이도 약속이 있겠지. 자기 친구들도 있고 가족도 있는데."

"그럼 같이 오라고 해."

"어른들도...?"

"은근 그럴 때 어른들 있음 재밌어."

"어. 맞어."

절대 물러설 수 없다. 의견이 갈리면 논리보다 내 자존심이 우선이다.

지들 집 아니라고 쉽게쉽게 말하는 놈들 상대하느니 남수랑 밖으로 나왔다.

"하여튼 병신들. 얘기하다보면 짜증이 머리끝까지 올라선다니까"

"가보자 마하야. 내가 같이 얘기해줄게."

"야 됐어. 가만 있어. 얘들 말 듣지 마."

하지만 남수도 우리끼리 보내는 것 보다는 여자애들 몇 명 있는 게 확실히 분위기가 달라진다며 물러서지 않는다.

"크리스마스잖아."

"크리스마스가 뭐라고 대체..."

"가봐. 밑져야 본전인데 뭐 어때."

"아... 형한테 아직 말 안 했는데."

꼬추들끼리 발냄새 풍기는 구질구질한 밤을 보낼 것이냐.

그 가운데 조금 향긋한 냄새를 더해 웃음 꽃 피어나는 밤이 될 것이냐.

모든 것은 내가 아닌 남수의 입에 달려 있는데.

"어? 뭐라고?"

"아니... 그게 그러니까... 그게... 저기. 마하네서..."

"..."

"이브에... 애들이랑 어..."

이 새낀 또 뭐하는 거야?

해운대에서 말빨 조졌다더만 왜 이렇게 더듬거리고 있어?

"혜정아 잠깐만. 미안."

"뭐야. 나 잘 이해가 안 되는데."

"잠깐만."

남수를 데리고 뒤로 와서 물었다.

"너 뭐해? 모르는 여자들한테 말 잘 했다면서 왜 이래?"

"나 원래 이랬는데."

"..."

이게 친구들이 말하던 지난 여름 해운대를 휘어잡은 남수의 자신감인가...

얘가 이 정도면 태윤이랑 정석이는 대체 얼마나 말을 못 하길래...

"마하야?"

"후우..."

"야. 뭐해. 혜정이 부르잖아."

"닥쳐 확 씨... 죽여버리기전에..."

그래서 그냥 내가 물어보았다.

조금 불편하고 두근거리지만 편한 목소리로.

"아니. 다른 게 아니라. 크리스마스 이브에 집에서 애들끼리 놀려고 하는데 혹시 시간 있음 오지 않을래 싶어서?"

"나 혼자? 너네들 있는데?"

"친구들 데리고 와도 돼. 우리도 지금 누가 모일지 몰라서. 먹을 건 애들이 사온다고 했어."

"그렇구나. 근데 나 그날 약속있어서..."

"후후후. 그래. 그럼 그렇지."

"진짜야."

"알어. 나도 애들한테 그렇게 말했어."

"...근데 왜 물어봐?"

"저 병신들이 계속 가서 물어보라고 그러잖아."

"으음."

돌아와서 친구들에게 제대로 뭐라고 했다.

니네나 나나 똑같은 상등신들이었는데, 그동안 이런 걸로 내 앞에서 여자니 뭐니 했던 거면 다 나가 뒤지라고 저주를 퍼부어줬다.

"근데 확실히 마하 혜정이랑 친하긴 친한 거 같더라."

"그래? 어땠는데?"

"서로 되게 편하게 대하던데."

"오오~ 구마하 주제에."

"씨발년아. 너 이렇게 강하게 큰 것도 다 우리 덕인줄 알어"

"후우우..."

그리고 마침내 겨울방학이 시작되고 크리스마스가 다가왔다.

12월 24일. 누구 말대로 고등학교 2학년 마지막 크리스마스 이브.

"아 제대로 당했어... 이런 식이면 매년 크리스마스 이브가 마지막이지."

형한테는 친구들이 놀러올 거 같다고 미리 허락을 구했고. 술도 몇 병 받아뒀다.

"과자? 그걸 왜 내가 사. 난 술이랑 장소였잖아."

"아 좀 사오라고. 우리가 가서 돈 준다잖아."

"야. 지금 여기 치킨 살라면 전쟁이야 새끼야."

태윤이랑 정석이가 치킨을 담당, 남수도 케익 하나 사오려고 한 시간째 줄을 서고 있단다.

크리스마스는 크리스마스구나.

아무튼, 집에 있는 사람이 제일 한가하니 아파트 앞 슈퍼라도 다녀오려고 집을 나서는데.

"어?"

"흐윽. 흐으윽..."

"혜정아...? 너 왜 그래?"

"으흑. 마하야..."

있는대로 멋지게 꾸며입고 화장까지 빡시게 한 혜정이가 아파트 입구에서 엉엉 울면서 들어오고 있었다.

오늘 약속이 있다더니 그게 지민이 형과의 약속이었단다.

상호간에 정하지 않은 혼자만의 약속.일방적인 부딪힘.

그렇게 상처를 입고 돌아오는 혜정이가 애기같이 울면서 터덜터덜 안겨왔다.

"나쁜 새끼... 진짜 개새끼. 어떻게 나한테..."

"아이고... 그러니까 내가 끝내라고 했잖아."

오후 5시. 친구들이 오기까지 앞으로...

모르겠다. 치킨이랑 케잌 사면 연락하겠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