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륜기로 가버렷-31화 (31/401)

〈 31화 〉 메달의 그림자 (2)

훈련에 훈련. 짬짬이 학교에서 친구들과 나누는 시간들.

혜정이도 입시학원을 다니느라 약속이 줄어들고, 운동이 매일인 단순하면서 무식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이래서 프로선수들이 학창시절에 운동말고 한 게 없다는 말들을 하는구나. 작년 한 해라도 원 없이 학교를 다니길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늘 기록을 잰다."

4월 초 한주 고등학교. 육상시즌을 앞두고 본격적인 기록훈련에 돌입했다.

"잘 안 나온다고 기죽지 말고. 늘 내가 어디쯤 있는가 마인드 컨트롤 하라는 의미로 재는 거니까. 다들 최선을 다해주길 바란다."

*    *    *

"마하 이 자식. 기록 또 줄었어."

"음... 상률아."

"왜?"

"...역시 마하 중거리는 포기시키자."

"갑자기 왜? 슬슬 중거리도 나오기 시작하는데."

구마하의 4월 기록. 100미터 10.58. 200미터 21.30.

삼개월 전 겨울. 처음 10초대를 찍었을 때보다 월등한 기록 단축이었다.

0.1초의 시간을 줄이기 위해 남들이 피땀 흘릴 때, 나 혼자 수직상승하는 구마하의 성장은 이주영에게 커다란 아쉬움을 남겨준다.

"무엇보다 니가 하자고 했었잖아."

"내가 무슨 상관이야. 선수가 재능을 보이는 쪽으로 가야지. 어떻게 보면 지금보다 더 잘 할 수 있는 거, 괜히 중거리 끼어들어서 안 되고 있을 수도 있어."

"...괜찮겠냐? 정성 많이 기울이는 거 같던데."

"마하를 생각해."

구마하를 제자로 받아들인 이주영이지만 그럼에도 한주 고 선수는 아니었다.

우리 학교 학생이 아니라는 것이 참으로 아쉬운 지점이다.

*   *   *

"수고하셨습니다!!"

훈련을 마치고 짐을 챙기고 있는데, 동민이가 툭 치면서 말했다.

"살살 좀 해. 이 새끼 손님이면 손님답게 밥이나 먹고 갈 것이지, 분위기를 주도하고 있어."

"에이 아무렴 카리스마 넘치는 주장님을 넘어설 수 있나."

"그래도 니가 있어서 그런가, 애들이 훈련하라고 지랄하지 않아도 알아서들 잘 하네."

"내가 뭐 한 거 있다고."

"어쭈 겸손을 부려? 이 새끼 잘 뛴다 이거지?"

"아 저리꺼져. 피곤해."

"아이고 이래서 천재를 곁에 두면 안 된다고. 마음만 씁쓸하구나."

"됐어. 새끼야."

동민이와 주절주절 가방을 챙겨 나오는데 감독님들이 부르셨다.

"마하야. 잠깐만 와봐라."

"동민아. 먼저 가. 나 부르셔서."

"어. 내일 보자."

두 분 감독님들이 단거리 기록이 좋은 만큼 중거리는 포기하자는 말씀을 해주신다.

"네? 이제와서요?"

"그렇게 하도록 해."

"전 중거리도 나가고 싶은데요."

"알어. 노력한 게 있어서도 해보고 싶겠지. 근데 이건 주영이 뜻이라."

"이 감독님...?"

"왜?"

"...잘 할 거라고 하셨잖아요."

나라는 놈이 이만큼 선수가 돼가는 데 있어. 한 감독님도 한 감독님이지만, 역시 이주영 감독님의 노고를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400은 역시 너무 어려웠다.

차라리 같은 중거리라도 조금 파워가 덜한 800미터로 나가서 새롭게 호흡이나 밸런스를 맞추고 있는데.

"마하야. 지금와서 새 옷을 입기는 조금 늦은 감이 있어."

"..."

"다 잘하고 싶은 마음은 알지. 너도 열심히 했고. 근데, 지금은 욕심이라고 봐야 돼. 자칫 잘못하단 단거리 성적도 무리가 될 수 있으니까.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자."

"네. 알겠습니다."

"그래. 이제 한국 신기록까지 0.1초 남았다. 힘내보자."

말씀은 그렇게 하시지만, 아쉬워하는 이주영 감독님의 표정을 무시할 수 없었다.

800미터.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운동장 두 바퀴. 이 감독님도 기쁘게 해드리고 싶었는데...

*    *    *

"흠."

커다란 내공을 갖게 되며 그에 맞춰 몸도 빠르게 변화해 왔다.

음양의 조화도 잘 어우러져 전과 달리 높은 성과를 거두고 있다.

그런데도 안 되는 것이 있다니... 아직 내 몸이 다 깨어난 게 아닌가?

"마하야. 씻으러 들어간 놈이 뭐해?"

"..."

"...뭐하는 거야?"

옷을 다 벗고, 처음 환골탈태를 겪었던 자세 그대로 혼자 씩씩 거리고 있었다.

기마자세를 취하고, 한 손은 단전 한 손은 머리.

전신에 기가 순환하는 느낌을 떠올리며 새롭게 내공운행을 돌려보려고 하는데.

"야?"

"아 말 걸지마. 지금 내공운행 중이잖아."

"...하나도 안 도는데?"

"젠장. 역시 그런가..."

"그리고 그건 이제와서 아무 의미없지. 왜? 뭐하고 있던 거야?"

"형. 아무리 뛰어도 지치지 않는 무공 같은 건 없어? 숨 안 쉬고 살 수 있는 그런 거?"

하늘을 날고 물 위에서 잠도 잤다는데, 그 정도는 간단한 거 아닐까 싶었는데.

없단다. 생명이 있는데 어떻게 숨을 안 쉬고 살 수 있냐면서. 뜬금없이 과학적이다.

"쳇. 쓸데없는 무공 같으니라고. 그러니까 총한테 졌지."

"이 자식이 무슨 말을"

"아니. 다른 게 아니라."

오늘 이러저러한 일들이 있는데, 이주영 감독님 얼굴이 굉장히 마음이 쓰인다고 전해줬다.

"그렇잖아. 그분이야말로 당장 우리 학교에서 나가라 해도 뭐라 할 수 없는데, 완전 자기 학생들같이 대해 주시고. 신경 써주고."

"음. 사부님의 마음에 보은하는 건 당연하지."

"근데 잘 안돼. 진짜 뭔가 어려워. 왜 그럴까? 이미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는데."

"그건 아마 공력이 부족해서 그럴거야."

공력은 또 뭐냐? 여전히 무공 관련 이야기는 난해하고 어렵다. 대충 쉽게 이해하자면.

"그러니까 내공이, 지식 메모리 하드용량 이런 거면, 공력은 활용도 숙달 뭐 이런 건가? 뭐 뭐를 공부해서 뭐 뭐를 잘했다 같은?"

"그렇지."

"결국 내가 아직 내 몸을 다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네?"

"마하야. 너 지금 수련한지 이제 겨우 1년 됐어. 왜 이렇게 욕심을 부려. 수련 1년차면 아직도 마당에서 빗자루나 쓸고 있어야 하는 단계야.."

"뭔 소림사 노파들이나 할 법한 이야길 하고있는거야...."

우리 몸이란 생각보다 연약하고 섬세하기에 단기간에 빠르게 효과를 보려면 그만한 리스크를 감수해야 하는 일이란다.

"타이레놀도 효과 직빵이지만, 그게 그렇게 간을 훼손한다고 그러잖아."

"...무공 얘기하다 갑자기 뭔 타이레놀이야? 시간 갭 뭔데?"

"아침마당에서 그러더라고. 약이 쎄다네."

형도 감독님들 말씀을 들으란다.

내가 그분들을 생각하는 정성이면 될 것이라고, 당장 몸이 상하게 되는 일은 금물이라고 했다.

"너가 하루아침에 빠르게 변했다는 걸 잊지 마. 이미 충분히 위험한 강을 건너왔어."

"그래도 건강한데?"

"마하야. 내상이라는 건 보이지 않기에 위험한 법이야."

*     *     *

오늘은 한주 고 훈련이 없는 날.

학교 운동장에서 혼자 뛰고 있는데, 혜정이가 놀러왔다.

"남들 다 야자로 교실에 묶여 있는데, 운동하는 사람 팔자 좋네."

"뭐야? 학교에선 아는 척 잘 안 하더니?"

"그냥 답답해서. 산책 나왔어."

"그래? 하긴 요즘 많이 못 했지. 어디 화장실이라도 갈까? 아니면 1학년 빈 교실?"

"..."

"농담이지. 웃자고 한 말이야."

"하여튼 틈만 나면..."

쳇. 교실 플레이는 정말 하고 싶었던 건데... 아쉽군.

요즘 공부는 어떠냐고 물었다.

그렇게 성적을 등한시 한 편도 아닌데 갑자기 모의고사니 뭐니 벅차단다.

"넌 모의고사 몇 점 나왔어?"

"몰라. 잤어 그냥. 전날 훈련이 빡세서."

"좋겠다."

"뭐 좋아. 대신 나는 다다음 주 시합 망치면 그대로 끝인데."

"흠. 준비는 어때?"

"단거리는. 10초 58. 200도 나쁘지 않고."

"와~ 뭔가 엄청 빨라 보이는데?"

"한국 신기록이랑 0.1초 차이야."

"그럼 금방 따라잡겠네!!"

"아냐. 그 사이에 선수가 50명은 있어. 엄밀히 내 기록도 공식기록 아니고."

단거리는 괜찮은데 중거리가 약하다.

두 종목 다 잘 하고 싶은데 마음같이 쉽게 되지를 않는다.

"정리하자면 지속력이 떨어진다는 소리같네."

"진짜... 우리학교 남자애들이 너가 이런 야한 애라는 걸 알아야 하는데..."

"이게 진짜."

"어? 찼어? 고맙다. 덕분에 오랜만에 팬티 봤다."

"속바지거든!"

"내 입장에선 똑같은 거지."

아무튼, 가까운 시일에 한번 보자며 혜정이가 약속을 잡잔다.

"시합 끝나고."

"진짜?"

"왜?"

"아니. 너가 거절할 줄 상상도 못 해서."

"나도 하고싶지. 미치겠지. 근데 이번 시합은 그 이상으로 중요해. 나 요즘 자위도 안 해 그래서."

혜정이도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럼 방해하면 안 되겠네. 혼자 하는 것도 참고 있다는데."

"대신 끝나고. 정말 화끈하게 해줄게."

"후후. 됐거든. 지 좋을대로만 움직이려고."

"이래보여도 운동엔 진지하다고. 어쩔 수 없어."

"알어. 나중에 또 연락해."

혜정이가 엉덩이를 툭툭 치며 일어난다.

"마하야. 근데 난 니가 그렇게 지속력이 떨어지는 애라고 생각하지 않어. 오히려 지루라 문제지."

"역시. 경험자의 말은 뭔가 달라도 다르구나."

"이게 진짜 죽을라고!!"

"크하하! 알았어. 아 알았다고... 그만 좀 때려. 맨날 때려..."

자기랑 할 때 끝까지 참고 또 참는 그런 근성을 운동에 발휘해 보면 어떻겠느냐고 말을 마지막으로 혜정이는 교실로 돌아갔다.

"참고 또 참는다라."

결국 문제는 호흡이니까 아주 틀린 말은 아닐지도.

중거리 후반 체력이 확 떨어지는 것도 호흡이 일정치 않기에 급속한 피로도가 몰려오는 탓이다.

단거리의 호흡이 심장만 직결로 펌프질을 하는 것 같다면, 중거리 호흡은 일정한 리듬을 타며 심장이 아닌 전신을 이끌어 가는 느낌이다.

그것을 참는다.

사정 전 지금 싸면 끝이니까, 그러니까 조금만 더 참자는 식으로 똘똘이 끝에 모든 신경을 끊어버리는 그런 방법을 말하는 건가?

"흠. 어떻게 보면 일리있는 소리 같기도 하고."

사정을 참는 방법은 사정을 의식하지 않는 것이다.

참는다고 되는 게 아니다. 괜히 중간에  시선 피하고 동해물과 백두산을 노래하는 게 아니란 말이지.

그렇다면, 같은 말로 호흡을 의식하지 않기에 호흡에서 오는 어려움을 방지할 수 있다는 말도 된다.

"한번 뛰어볼까?"

체력은 충분했다. 800정도는 전력으로 뛰어도 큰 무리가 없다.

그러나 잘하고 싶었다.

그 마음을 버리고 비우는 것이다.

이건 그냥 보너스 같은 거니까.

단거리에서 잘 하면 되지. 뭐 욕심을 부리고 그래.

곤륜은 도가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있고, 도가엔 무위자연(無爲自然)이란 사상이 있다.

무위자연은 말 그대로, 억지로 행하지 않고 생긴대로 살아가는 방법을 뜻한다.

목 마른 소가 개울을 찾는 것이다. 억지로 끌고가 물을 먹이는 게 아니다.

하고 싶어 하듯이. 단지, 달리고 싶어 달린다.

근데 그게 딱 800미터 였고, 이왕 하다보니 최선을 다하자는 것 뿐이다.

"훅. 훅~"

서두르지 않는다.

그냥 내 몸에 맞게. 몸이 원하는대로. 몸이 되는 선까지만.

힘들면 숨을 들이 마쉬고 괜찮으면 속도를 올린다.

"훅! 후욱!"

그렇게 뛰다보니 전에 없던 평점심이 마음에 자리하게 됐다.

오~ 빠른데? 이거 나쁘지 않은데?

젠장. 의식하지 마.

난 그냥 뛰고 싶어 뛰는 것 뿐이라니까?

이거 뭐 별 거 라고.

라고 혼잣말을 되내이지만, 정말 무시할 수 없는 감각이었다.

차분함이 뛰는 가운데 느껴진다.

오래 달린다는 게 이런 거구나.

생각을 할 수 있어.

단거리는 총알같이 지나가는데, 이건 뭔가 다르다.

발끝부터 올라오는 진동.

복근의 당김.

힘차게 내저어지는 두 팔의 탄력.

그리고 마지막으로 호흡.

모든 것이 하나로 어우러져 나 구마하의 움직임이 된다.

"헉. 헉."

아 젠장. 아무도 없었다는 게 너무 아쉽네.

얼마나 나왔을까. 분명 최고기록이었을 거 같은데.

"후후후. 하나 알았다."

됐어. 서두르지 마. 대회 나가서 재보면 되니까. 이 감독님에게 깜짝 선물을 해드리자.

일주일 뒤, 춘계대회를 찾아왔다.

100. 200. 마지막 800미터까지.

이제는 도망치지 않는다.

오늘. 세상에 나를 알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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