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륜기로 가버렷-33화 (33/401)

〈 33화 〉 메달의 그림자 (4)

"마하야. 너 오늘 컨디션 좋다?"

"주영아. 운동장 봐라. 잘 생긴 놈들이 안 보이잖아. 마하 컨디션 최고지."

"아 감독님. 진짜 왜 그러세요..."

"하하하! 잘했어."

두 분 감독님과 예선 통과의 기쁨을 누리는 가운데, 대회는 순차적으로 진행되어 다음 라운드 진출자를 가려낸다.

[1번 레인. 용인 한주 고등학교 이동민]

"동민이 파이팅!!"

주목해야 할 시합이었다.

동민이가 뛰기도 하지만, 이번 시합에 전년도 전국체전 우승자가 나온다.

[6번 레인 서울 대한체육 고등학교 권지성]

"쟤가 걔구나. 니가 말한 고교 챔피언."

"음."

모든 이목이 운동장으로 집중되고 있었다.

권지성. 나도 기억하는 이름이다. 작년 첫 참가했던 전국체전 고교부 100미터 우승자. 심지어 그땐 1학년이었지.

학년이 바뀐 만큼 올해는 더 기량이 상승했을 것이다.

이 감독님 말씀대로 명실상부 현 고등학교 선수들 가운데 본좌에 올라있는 인물이었다.

탕!

"동민아!! 뛰어!!"

친구를 응원하면서도 시선은 권지성을 보고 있었다.

완벽한 폼이다. 달리는데 군더더기가 보이질 않는 것 같다.

10초 62. 심지어 기록도 나보다 빨랐다.

"역시, 잘하네."

"대한체고잖아."

동민이도 11초 초반 안정적인 기록을 내며 준준결승 진출을 확정지었다.

"감독님 동민이도 잘하면 10초 끊을 거 같은데요?"

"마하야. 저 녀석 10초 나오면 한 턱 쏘라고 해라."

"제가 왜요? 지가 잘해서 그런 건데."

빠른 동료가 있어 모두의 기록을 당긴다는데, 그래도 선수 본인의 노력 없이 어떻게 발전이 있을까란 생각이다.

"겸손 떨지 않아도 돼. 에이스는 에이스의 숙명이 있는 법이야."

"잘 모르겠어요..."

"그보다 주영아. 저 권지성이란 애는 언제부터 운동했냐? 폼이 배우는 폼이 아닌데?"

"아마 초등학생 때도 대회 나오고 했었지? 대학 관계자들도 탐내는 사람들 많다고 들었어."

"초등학교라... 저한테는 엄청 대선배네요."

"그럼. 늘 말하지만 경력은 무시할 수 없는 거야."

"근데, 왜 그런 애가 조영욱이 밑에 있냐. 아무리 대한체고라고 해도 그렇지."

"상률아. 학교 아니야. 듣는 사람 많어."

"..."

어려서부터 쭉 상위권을 유지해온 선수.

어른들의 사정이야 어찌됐든 한번 이겨보고 싶다.

*    *    *

"아이고 빡시다. 마하야 나 결승 갈 수 있을까...?"

"병신이냐? 시작도 하기 전에 약한 소리 하고 있어. 후배들도 있는데."

준준결승을 앞두고 다시 운동장. 조 편성을 기다리는 중이다.

한주 고 동민이와 1학년 신입생 하나가 다음 라운드에 진출해 셋이서 소곤소곤 수다나 떨고 있었다.

"아~ 너도 체고 시험 봤었어?"

"아무래도 운동하는 애들은 다들 한번 쯤 도전해 보니까요."

"떨어졌냐?"

"아니요. 붙긴 붙었어요."

"근데 왜 우리 학교를 왔어?"

"감독님이 한고로 오면 장학금 준다고 그러셨거든요. 체고는 아무래도 선수층도 너무 두껍고."

"운동하는데 그런 것도 따져야 되는구나."

"너랑 한 감독님이 특이한 거야. 보통 그래."

"맞아요. 다른 학교 운동장 쓰면서 시합 준비하는 사람 거의 못 봤어요. 보통 그런 상황이면 전학을 보내는데."

"동민아 이거 니네 후배가 나한테 텃세 부리는 거 아니냐?"

"그러게. 이 새끼 고참되면 멋대로 애들 집합시키고 짬질 갑질 장난 아니겠는데?"

"아니요! 그런 건 아니고요!!"

여러모로 학교와 선수 운영과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오~ 여자애들 멀리뛰기 시작하나보다."

라는 말 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모든 대화가 끊겼다.

시합은 뒷전이다. 텃세니 운동장이니도 중요하지 않다.

모두들 멀리뛰기 경기장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보면 볼수록 육상복 디자인 잘 했어. 수영이 부럽지가 않어."

"암. 오히려 수영복은 물 밑에 있어서 볼 수가 없지."

"하하하! 아 형들!"

여자 육상선수들 운동복은 짧은 팬츠와 상의로 구성된다.

특히나 멀리뛰기 같은 경우 자세부터가 다리를 넓게 벌리며 뛰기 때문에.

"와~~"

"우와~~!"

"짝짝짝짝!"

착지와 동시에 팬츠 끝이 엉덩골에 끼거나 하는 일도 가끔 벌어져 보는 이를 즐겁게 만들어 준다.

누가 육상의 꽃은 남자 100미터라고 했는가. 여자 멀리뛰기야말로 서면 작약 뛰면 모란 착지하면 백합이다.

나중에 죽어 흙으로 돌아가면, 누군가 넓이뛰기 모래밭에 뿌려졌으면.

"삑삑! 거기 남학생들! 선수들 방해되니까 다른 쪽 봐주세요."

아름다운 광경에 넋을 잃고 있으니, 심판진에서 호루라기를 불며 파리 치우듯 훠이훠이 손짓을 한다.

"뭐야 응원하고 있었는데. 존나 건전하게 보고 있었거늘. 괜히 저러냐."

"그러니까. 여자애들도 우리 뛰는 거 안 보는 것도 아니고."

"아 형들 쪽팔리게 왜 그러세요 진짜..."

"뭐 새끼야! 지도 박수 쳐 놓고서!"

한주고 애들과 쑥덕쑥덕 거리고 있으니 주변 선수들이 키득키득 웃으며 말을 걸었다.

"야. 니넨 그러고 있으면 선생님들이 뭐라고 안 하냐?"

"별로. 시합 본다고 뭐라고 할 게 있나?"

"그러게 만진 거도 아니고."

"하하하!!"

두런두런 시합을 앞두고 농담도 나누며 긴장감을 덜었다.

잘 뛰자. 힘내자. 나는 구마하라고 한다. 너는? 그렇게 친목을 다지며 사람들을 알아가는데.

"수원 애들이 성격이 좋네."

"아무래도 같은 도민이다 보니까. 무엇보다 옆 동네잖아."

"반면 저기는 뭔가 분위기부터 대한체고다 싶은 걸?"

"거긴 초 엘리트니까."

초 엘리트 집단. 같은 체고 중에서도 최고들만이 모이는 곳.

대한 체고 애들은 대한 체고 애들끼리만 어울리고 있다.

특히나 그 중에서도 권지성이란 동생은 마치 저 혼자 외국이라도 와 있는 것 같은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었다.

"뭔가 시합 앞두고 저런 모습 보니까 헛소리나 지껄이고 있는 내가 민망해 지는데."

"됐어. 쟤도 지금 너 의식하고 있을 거야."

"날? 진짜?"

"아까 예선전 할 때, 나한테 구마하란 형이랑 같은 학교냐고 물어봤었어."

"흠."

"적수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겠지. 다들 좆밥이라고 보고 있었던 거지. 그런데 갑자기 너 같은 상대방이 나왔다? 쫄리는 건 권지성이야."

동민이와 나는 준준결승을 통과했지만 한주 고 동생이 떨어졌다.

동민이도 준결승에선 최선을 다 했지만 아쉽게 기록에서 밀려날 거 같다.

그리고 마침내.

[2번 레인. 성남 영군 고등학교 구마하]

[5번 레인. 서울 대한체육 고등학교 권지성.]

준결승. 나도 권지성과 같은 시험대에 올랐다.

"후우~"

경기를 앞두고 긴장감을 풀고 있는데, 어딘가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려보니 녀석이 보고 있었다.

부드러운 미소로 눈 인사를 해줬더니, 어쭈? 어린 놈의 새끼가 쌩까?

"훗."

그래. 한번 붙어보자.

이건 시합이지. 친목이 아니니까.

실력은 백중지세. 자신할 순 없지만 즐겁게 임해주겠다.

"준비."

생각을 멈추고 자세를 갖춘 뒤 총성을 기다리고 있었다.

경기를 앞둔 정적과 숨이 멎을듯한 이 순간이 좋다.

꼭 팬티를 벗기기 전 상대방의 두 다리를 하나로 합치는 듯한 그런 기분이라서.

탕!

그리고 힘차게 몸을 뻗으며 달려나갔다.

기울어진 자세로 속도를 내기 위해 팔 다리를 휘저으며 상체를 끌어당긴다.

"훅!"

깊게 숨을 들이마쉬며 다시 스퍼트!

남은 거리는 50, 30, 10!!

결승 선까지 이제 한 걸음 남은 그때.

"우와아아!!"

관중석의 함성이 터져 나오며 옆으로 그림자 하나가 빠르게 지나쳤다.

"헉! 허억."

"후. 후우..."

누가 이겼지? 분명 권지성이었는데.

누구냐 누가 이겼냐? 나냐 저놈이냐?

서로들 숨을 헐떡이며 저 먼 곳 전광판을 보고 있었다.

파라락 하는 소리와 함께 결과가 나온다.

위부터 순차적으로 구마하 10.54. 권지성 10.56 이라는 기록이 떴다.

10.54라...

분명 춘계대회 기록이 10초 58인가로 알고 있었는데.

*    *    *

"예선전보다 0.1초를 더 줄였다고...?"

"잘했다! 마하야! 이 자식! 고교 신기록이라니!!"

"어이 상률이 선수. 1년 안 남았지만, 지금이라도 우리 학교로 전학 올 생각 없나?"

"아니. 이런 애를 왜 니네가 데리고 있는 거야? 어떻게 된 거야?"

"시끄러 좀 비켜봐! 나도 우리 애랑 얘기 좀 하자!"

준결승을 마친 선수들이 관중석 아래로 다가갔다.

각 팀 코치와 감독들이 상체를 빼들고 위로와 칭찬을 건네주고 있다.

한상률과 이주영 주변도 동기동창들이 모여 소란스런 반응을 보이고 있는데.

"후우..."

정작 대회 신기록을 세운 구마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한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제가 조금 늦었습니다..."

"으음. 아니야. 결승이 남았잖아. 아직 죄송할 건 없다."

"..."

"아직은."

2위를 기록한 권지성이 코치 조영욱의 앞에서 고개를 숙인다.

운동장과 객석의 높이와 거리차로 마치 왕 앞에 죄를 고하는듯한 분위기다.

한상률도 제자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뒤 입을 열었다.

"뭘 그렇게 보냐? 재밌는 거라도 있어?"

"아니요. 그냥 대회 신기록이라고 하니까..."

"자식. 올라와라. 점심이나 먹으러 가자."

"네."

운동장 인근에 위치한 국밥집으로 이동.

서로 마주 보고 앉은 스승과 제자가 이런 저런 감상을 나눈다.

"결승인데, 떨리거나 그런 건 없지?"

"네. 그럼요. 그냥. 얼떨떨해요."

"뭘 얼떨떨해. 이겨드린다 어쩐다 큰소리는 다 치고 다니더니."

"하하... 진짜 이길 줄은 몰랐어요."

"그래도 그렇지. 대회 신기록을 세우다니. 먹고 싶은 거 얘기해라. 다 사줄게!"

"그럼 국밥 두 그릇으로"

"사장님! 저희 국밥 세 그릇 주시고요. 두 개는 곱빼기요. 편육도 하나 주세요!"

축배를 들긴 아직 이르다.

하지만, 뭐라도 해주지 않고는 못 버틸 정도로 한상률의 기분이 업 되고 있었다.

마하가 잘 한 것도 있지만, 다름아닌 조영욱의 자존심을 꺾었다는 게 너무 좋았다.

"어떻게 넌 뛸 때마다 빨라지냐. 그것도 신기하다."

"..."

"왜? 뭐 더 시켜 줘?"

"아니요. 그건 아니고요."

"권지성이 걱정하냐? 아까 그 코치한테 깨지기라도 할까 봐?"

"감독님. 2위도 잘한 거죠?"

"당연하지."

"근데, 아까는 뭘 그렇게..."

"마하야. 승부의 세계에서 누군가는 1위가 아니면 아무 의미가 없다는 사람들이 있어."

"..."

"먹자. 일단."

"네! 잘 먹겠습니다.

후루룩 후루룩 점심을 들면서 생각했다.

지난 여름 합숙 때 이주영 감독이 그런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었다.

시합에 나가면 혼나는 선수들이 있다.

즐겁게만 생각하던 운동에 처음으로 불편한 감정이 끼어드는 순간. 구마하의 속이 쓰라리고 있었다.

"다 먹었냐."

"결승때문에 그런가... 잘 안 들어가네요."

"농담이냐? 국밥 곱빼기 두 그릇을 다 먹은 녀석이...? 고기 안 먹었다고 지금 그러는 거야?"

"..."

"먹어. 괜찮으니까. 잘 먹어야 또 뛸 거 아냐."

"저 감독님."

"왜?"

"그게 저기... 그러니까..."

"뭐? 말해 봐?"

구마하는 무언가 굉장히 심사숙고 한 뒤 물었다.

"감독님. 보통 사람들도 내공이 있을까요?"

"내공?"

"네."

"보통 사람은 뭐야? 사람 중에 특별한 사람도 있어?"

"아니요 그게..."

"왜? 넌 뭐 내공으로 달리냐?"

"...실은 그렇거든요. 그래서 밥도 이렇게 많이 먹는거고."

"하하하! 하여튼 엉뚱한 녀석!!"

감독 데뷔 날에 결승 진출을 이뤄낸 제자였다.

무슨 질문이든 답해주고, 무슨 이야기든 해주고 싶다.

엉뚱하면 어떻고 황당하면 어떤가. 애가 이쁜데.

한상률은 휴지 두 장을 뽑아 입가를 훔치며 말했다.

"내공이라, 글쎄 모르겠는데. 근데 나도 한참 선수로 뛸 때 가끔 그런 날은 있었어."

선수라면 이상하게 가진 실력보다 더 좋은 퍼포먼스가 발휘되는 순간이 있다.

컨디션이 좋나? 승리의 여신이 날개짓이라도 해주나?

하지만 그 모든 결과를 단지 컨디션과 행운이라고 치부할 수 없는 것이.

"정말 간절하게 이기고 싶었던 날이었지. 그래서 시합만 집중하고 더 막 내 안에 있는 잠재력이라도 끌어내려고 안간힘을 썼는데."

"..."

구마하는 자신이 내공을 쓰는 것과 비슷한 과정을 다른 이들도 겪는다는 말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내공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모두가 가지고 있다.

단지 잘 모르고 있을 뿐.

"그런 게 있으면 써. 열심히 써서 이겨."

"반칙 아닐까요?"

"이놈아. 내공이면 어떻고 초능력이면 어떠냐. 결국 그것도 힘의 다른 말 아냐?"

"그렇죠."

"남을 방해하고 발을 밟아 부러뜨리는 걸 반칙이라고 하는 거다. 내 안의 잠재력을 깨우는 건 노력이라고 하는 거고."

"네."

"명심해라. 이겼다고 동정하지 말고 자만하지 않는다. 졌다고 원망하거나 시기하지 않는다. 모든 운동은 자기와의 싸움이야. 자기와의 승부다. 알겠냐?"

그렇다. 내공이 있다고 전부가 아니다. 계속 훈련을 해야한다.

하니까 강해지지, 안 하면 내공이고 외공이고 다 의미 없는 허상에 불과했다.

"잘 먹었습니다. 감독님."

"아 배부르다. 어디. 그늘진 곳에서 낮잠 한숨 자고 결승전이나 나가볼까?"

"네!"

스승과 제자는 시원한 운동장 구석을 찾았다.

그때 저 멀리 퍽퍽! 매 때리는 소리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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