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륜기로 가버렷-36화 (36/401)

〈 36화 〉 승자의 품격 (2)

"연정 언니. 물이요. 수건도."

"응~ 땡큐."

"다연 선배... 여기."

"어."

여자 계주 예선전을 끝낸 성운여고 선수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있었다.

누군가는 언니고 누군가는 선배라 불린다.

대우도 호칭따라 달랐으니 언니는 친밀하고 선배는 거리감이 있다. 전학생과 현역의 차이였다.

중간에 들어온 선수들은 아무래도 위계를 따질 수 없는 만큼 서로를 편히 대하지만, 1학년부터 쭉 학교에서 생활해 온 3학년 최다빈은 1,2학년 후배들에겐 까칠하고 무서운 인물로 통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남자 200미터 결승이 시작되려 한다.

선수들이 호명되어 나오는 가운데 구마하의 차례가 다가왔다.

"언니. 저 사람 알아요? 아까 보니까 이야기 하고 있던데."

"누구? 쟤?"

4번레인. 기록 순위에 따라 4-5-3-6-2-7-1-8레인으로 순서가 배정되는 만큼 구마하는 예선전도 압도적인 실력을 보여주며 결승 진출을 확정지었다.

"처음 보는 사람인데. 외국에서 왔나?"

"아니야. 운동 시작한지 1년 됐다고 들었어. 육상천재래."

"와... 진짜 천재구나... 역시 재능은 못 이기지..."

"얼굴 봐라. 누가봐도 운동 잘하게 생겼잖아."

"음. 하긴. 저렇게 생긴 사람들이 보통"

"야."

"네?! 다빈 선배."

"너 시합 끝났어? 수다 떨 시간 있으면 가서 몸이나 풀어."

"알겠습니다..."

기연정은 최다빈의 까칠함을 웃어 넘긴다.

이 학교에 들어와 이런 모습 하루 이틀 본 것도 아니고. 얘도 복귀전인데 여러모로 민감하긴 하겠지.

그냥 시합이 어떻게 진행될까 편안한 마음으로 운동장으로 시선을 돌려버리는 기연정.

그런데.

"연정아. 영군 고가 어디 있는 거야?"

"어? 어어~ 쟤?"

"처음 보는 학굔데..."

"아~ 영군이 아니라 훈련은 한주에서 받는다고 들었어."

"..."

"쟤네는 따로 훈련할 운동장이 없데."

얘가 남자한테 관심을? 잘 하는 애라 그런가?

"1년됐다고."

"응. 저런 애야 말로 진짜 엘리트 선수지."

"..."

뼈가 있는 말에 최다빈이 흘깃 시선을 돌리지만. 그 순간 탕! 커다란 총성이 모든 이목을 집중시킨다.

남자 200미터 결승전이 시작됐다.

4번 레인 구마하와 3번 레인 김인수가 빠르게 치고 나온다.

"오~ 김인수. 새끼 훈련 많이 했는데."

"..."

옛 동료를 응원하는 기연장과 달리, 최다빈은 5번레인 권지성과 승부를 겨루는 구마하를 보고 있었다.

작년 1학년 권지성의 데뷔는 여러 육상 관계자들에게 커다란 인상을 남겼다.

그리고 그보다 더 1년 전엔 최다빈의 입지가 그러했다.

뛰어난 기량을 가진 신인의 등장은 보는 이들의 기대감을 모은다.

시합을 나가도 다들 알아보고, 언론에서도 취재를 온다. 선수의 프라이드가 생기는 것이다.

"하하! 김인수! 멋진데?"

"지성이가 3위라고..."

경험 많은 김인수가 우승을 확정 지었다.

코너에서 출발한 구마하가 아무래도 시합 운용이 어려웠던지 0.03초 차이로 2위가 됐다.

마지막으로 권지성이 3위. 남자 200미터 시합이 마무리 되었다.

최다빈은 숨을 고르며 다른 선수들과 이야기를 건네는 권지성을 가만히 지켜본다.

지성이보다 빠른 선수가 있구나... 그것도 둘이나...

한 단계 밑이라 여겼던 김인수도 올해는 뭔가 다르다.

그녀에겐 부상으로 멈춰있던 시간이 있었다.

마치 세상이 나만 놓고 저 멀리 훌쩍 떠나가 버린 것 같다.

*     *     *

"와 씨 좆될뻔 했네! 바로 뒤에 있던 거잖아!!"

"아. 진짜 간발의 차였는데..."

"헉~ 헉. 난 마하 형 코너 돌 때 넘어질 줄 알았는데. 아쉽네요."

"뭐가?"

"형 없으면 내가 2위잖아요."

인수가 우승. 나는 준우승으로 200미터 시합이 끝났다.

권지성도 어제와 달리 오늘은 3위라는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다.

"축하 안 해줘요?"

"하하. 너는 나 축하 안 해주냐?"

"뭐. 앞으로 대회는 많으니까. 그때 이겨드릴게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준 게 나름 멘탈 안정화에 도움이 된 건가?

거드름까지 피우는구나. 역시 잘난 놈들은 좋은 말을 해주면 안 돼.

"저런 성격이구나."

"그래도 너한테 한번 까이고 많이 겸손해진거야. 원래는 더 했어."

"씹고 그러냐?"

"대회 때마다 불러다 줘 팰까 하는 생각을 진짜 안 한 날이 없다..."

"하하! 축하한다 챔피언."

"고맙다. 챔피언."

감독님도 경험이 승패를 갈랐다고 하셨다.

시즌 첫 대회, 100미터 우승. 200미터 준우승. 충분히 만족하는 결과였다.

"아... 800만 안 나가면 남은 시간 그냥 노는 건데."

"그럼 포기하든가."

"무슨 소리세요. 나가야죠! 우승 할 겁니다."

"하여간, 이제와서 딴소리 하지말어 이놈아. 우리는 말렸다. 니가 한다고 했으니 결과를 보이라고."

"네!"

"가자. 어쨌든 끝난 만큼 오늘은 일찌감치 좀 쉬자."

"그러기 어려우실 거 같은데요?"

"왜?"

400미터 한주 고 시합이 바로 이어졌다.

2학년 두 선수가 나란히 결승 1,2위를 확정 지었다.

"젠장... 술 먹기 싫은데..."

"어쩔 수 없잖아요. 기쁜 일인데."

아무튼 단거리는 끝났다.

나는 같이 뛸 계주 선수도 없는지라 모레 있을 800에 모든 것을 건다.

*    *    *

운동장 뒤편. 시합을 마친 선수들이 이동하는 가운데, 홀로 걷고 있는 권지성에게 최다빈이 찾아왔다.

"지성아."

"어. 누나. 언제 왔어?"

"오늘. 너 근데... 왜 혼자 있어?"

"후훗. 왜 겠냐? 다른 선수들 시합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난 끝났고. 까인 거지."

"...괜찮아?"

"그럼. 우울해하고 있을 줄 알았어?"

어려서 늘 인정받아온 두 선수는 자연스레 친분 관계가 형성되어 있다.

최다빈은 권지성의 표정을 살펴본다.

언제나 1위라는 자부심이 강했던 동생이라 패배를 받아들이지 못하면 어쩌나 했는데. 생각보단 표정이 담담해 보였다.

"오히려 좋아. 혼자 있으니까 부담도 없고. 조용하고."

"정말 괜찮은 거 맞지?"

"그렇다니까. 나중에 학교 가서 조영욱 개지랄은 좀 받겠지만..."

"..."

"누나. 기록을 봐. 내가 못 한 건 절대 아니야. 안 그래?"

"그렇지. 더 빨라졌더라."

멀리 수원 체고 선수들이 지나가고, 뒤이어 구마하와 한상률도 경기장을 나서고 있었다.

권지성과 함께 최다빈이 그들을 지켜보며 말했다.

"인수 형도 놀고만 있던 사람 아니잖아. 그리고 저 인간 구마하. 나보다 잘 하는 존재가 나타났을 뿐이야. 그런 선수들과 당당히 겨뤄서 3위를 했어. 난 좋아."

"그럼 다행이고."

최다빈이 한 감독과 장난스레 웃고 지나가는 구마하를 살펴본다.

큰 키. 강해 보이는 몸. 탄탄한 근육과 넓은 가슴. 그리고 누가봐도 운동만 집중하게 생긴 얼굴.

최다빈의 시선에 부러움이 여린다.

저런 몸이면 부상도 쉽게 이겨내겠지... 난 왜 이렇게 연약한 건지...

"누나도 힘내."

"응. 수고했어."

권지성에게 가벼운 인사를 남긴 뒤. 최다빈은 멀어지는 구마하의 뒷 모습을 한참동안 지켜보았다.

*    *    *

"한주! 한주! 파이팅!!"

"우와아!!"

다시 어제의 중국집.

후배들의 승리 소식과 계주 결승을 확정지은 동민이가 흥분한 목소리로 선창하자 후배들이 따라 소리를 질렀다.

나도 소심하게 영군 영군 아자~ 속으로 외쳐본다.

사장님은 연이은 운동부 단체에 신명나고, 감독님들도 술잔이 돌며 싱글벙글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럼 너네는 계속 한주 고에서 뛴 거야?"

"그랬다니까."

"말도 마라... 더부살이도 이런 더부살이가 없다."

"이 자식. 갑자기 왜 이상한 소리를"

수원 체고 감독님이 그럴 거면 차라리 우리 학교를 찾아오지 그랬냐면서 뒤늦게 손을 뻗는데. 목적은 역시 선수들의 긴장감 조성에 있는 것 같다. 여러모로 나라는 존재감이 도움이 되는가 보구나.

"안돼! 마하 못 보내줘."

"니가 뭔 상관이야. 상률이가 가자면 가는 거지."

"야! 구마하!"

"네! 감독님."

"너 이 자식. 갈 거면 지금까지 쓴 운동장 사용료 주고 가."

신기하다. 어른들도 저렇게 유치하게 노는구나. 우리도 나이 먹으면 저럴까?

감독님들은 연이은 우승 소식에 2차 3차를 이어가시고, 선수들은 일찌감치 숙소로 자리를 옮긴다.

"동민아. 저렇게 술 먹고 그러면 문제 되는 거 아니냐?"

"매번 저러진 않어. 아마 이번엔 한 감독님도 계셔서 더 그럴 거야."

"어찌됐든,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들이라 이건가? 기분이 이해 안 되는 것도 아니고."

"근데, 마하야. 한 감독님은 왜 은퇴하신 거냐?"

"몰라. 부상 아니었을까?"

자세한 건 알려주시지 않았다.

선수가 중도에 그만 둔다는 건 그만큼 아픔이 있는 이야기라 나도 깊게 파고들고 싶지는 않다.

"아~ 피곤하다. 마하 가라."

"마하 형 가세요!"

"어. 낼 보자."

한상률 감독님이 함께 계시는 만큼, 이번엔 한주 고 선수들과 다른 숙소에서 머물고 있었다.

느긋느긋 돌아가는 길. 영주 시내 곳곳 치킨집이나 분식집 같은 곳에 운동복 입은 애들이 간간히 보인다.

그리고 그런 가운데 몇몇은 역시나 연애를 하고 있는 듯 보인다.

"역시 시합과 연애는 따로 놓고 봐야지."

이렇게 만나는구나. 이렇게 데이트 하는 거구나.

하긴 선수들은 학교보다 시합장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니까.

인물 있고 재주 있는 놈들은 다 그러고 사는 거겠지.

"좋겠다. 아이고 부럽구만..."

승부에 전념하느라 제대로 딸 칠 시간도 없어 테스토스테론만 쌓이는 중이다.

무엇보다 운동을 하다보니 성욕이 더 왕성해 진 건 말도 못 한다.

올라가면 혜정이가 만날 시간이 될까? 걔도 요즘 학원이니 뭐니 바쁘던데.

사귀는 사람 나오면 파트너 관계는 끝낸다고 했는데. 제발 학원에서 아무도 혜정이 관심을 끌 놈들이 없기를... 걔도 은근 남자를 밝히는 애라.

"라는 건 너무 내 생각만 하는 건가?"

아무튼, 오늘도 분명 감독님 늦으실테고. 단거리 시합도 마쳤는데. 좀 여유있게 해피타임(?)을 가져도 괜찮을 거 같은데? 어쨌든 지방 호텔인데 성인채널 하나 둘 있지 않겠어?

룰루랄라 빨리 가서 씻고 딸 쳐야지. 하는 마음으로 단숨에 숙소로 돌아왔는데.

"음?"

동급ㅅ. 아니, 최다빈이 숙소 앞에 혼자 앉아 하늘을 보고 있었다.

"흠."

왜 저러고 있지? 같은 학교 애들이랑 있을 땐 뭔가 까칠하더니. 저러고 있으니 쟤도 그냥 보통 여고생들 같구나.

"음?"

"아. 어."

"..."

"왜 혼자 있어요?"

"......"

씨발. 방금 그 대사 뭐냐? 내가 말하고도 존나 좆같은데?

"그냥. 여럿이 있기 답답해서 나와있어요..."

"숙소 여기에요?"

"네."

"아~ 나도 여긴데."

"..."

"그럼."

그건 왜 물어봐. 여기면 어쩌고 저기면 어쩔겨?

그냥 혼자 있고 싶을 때 있나보지. 나도 지금 그러니까.

혼자니까 할 수 있는 자기 위로의 시간이랄까?

"..."

자기위로의 시간이라...

그러고 보니 저 친구 부상 입었다고 했었지.

이번이 복귀전이라고...

"가요."

"네? 아..."

"...뭘 보고 있어요."

어이고 까칠해라. 씨발 누가 잡아먹나...

"그냥. 머리가 길길래. 좀 봤어요."

"그게 왜요?"

"그렇잖아요. 여중생들도 그렇고, 다른 애들은 막 호섭이 같은 애들도 있고 그런데."

"우리 학교는 머리 가지고 뭐라고 안 해요."

"어어~"

하긴 기연정도 포니테일이지.

"성적으로 뭐라고 하지..."

'성적'으로 뭐라고 해? 여고에서?

이런 젠장 대가리에 고환이 이어졌나. 농담으로 들을 이야기가 아닌데...

"잘하실 거예요. 원래 잘했었다면서요."

"..."

"그럼."

"저기요."

"네?"

"지성이한테는 뭐라고 했었어요?"

"네???"

보자. 이쯤되면 굳이 이렇게 멀리 떨어져서 이야기 할 건 아닌 거 같은데. 가까이 가도 되지 않겠냐?

앞으로 걸어오자 최다빈이 고개를 들어 올려다 본다.

"..."

"지성이한테 뭐라고 했길래. 걔가 그렇게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냐고요."

와. 가까이서 보니까 더 귀엽네.

화장하면 장난 아니겠는데? 눈 큰 거 봐라. 입 오밀조밀하고.

"그냥. 3위 축하한다고..."

"3위가 왜 축하받을 일이에요?"

"..."

"1등이 아니잖아요."

거기다 뭔가 확실히 성격이 까칠해.

귀여운데 성격이 까칠하다?

포니테일인데 부상을 입었다?

동급생에 진짜로 그런 캐릭터 하나 있지 않았나??

맨날 CG만 골라봤더니 스토리를 모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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