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화 〉 승자의 품격 (3)
"아니 뭔 놈의 학교를 새벽부터 밤까지 있어야 되냐고. 고3이 죄수도 아니고."
"이게 집 다녀오겠습니다지... 씨발 감옥도 이렇게는 안 할 거다."
"빡시다고 듣긴 했다만. 어우 피곤해라."
학교에 남아있는 김태윤 이정석 박남수 세 친구는 투덜투덜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다.
"저녁까지 급식 처먹긴 뭔가 그런데..."
"맨날 먹어도 먹은 거 같지도 않고 왜 이러냐..."
"스트레스 때문에 그래. 원래 스트레스 받으면 음식이 계속 들어가."
"야. 그냥 우리 나가서 짜장면이나 먹을래?"
"짜장면이라. 존나 땡긴다."
"나도. 일단 나가자는 건 찬성."
세 친구는 저녁은 밖에서 먹자며 학교를 벗어난다.
"보면 볼수록 마하는 운동 잘 선택했어."
"말은 바로 해야지. 선택이라기 보단 차선이 없었지."
"그럼 앞으로 이 새낀 학교 안 나와도 되는거냐?"
"그렇지. 앞으론 다른 운동하는 애들같이 대회 위주로 가겠지"
"와... 진짜 운동 잘 했네."
"어차피 성적도 별론데, 나도 마하 따라서 운동이나 해볼까?"
"모르는 소리 하지마. 그게 더 힘들어."
"맞어. 쉽게 보지 마. 우리야 가끔 보니까 재밌는 거지. 맨날 하라면 못 할 짓이야."
조잘조잘 떠들며 걷는데, 간식거리를 사들고 오는 여학생들과 마주쳤다.
혜정이와 친구들이었다.
지난 크리스마스 인연이 있어 서로들 반갑게 인사를 나눠본다.
"근데, 너네 그거 알어? 마하 2등했데."
"아니야 우승했다고 그랬어."
"맞어. 너 왜 열심히 하는 놈 왜곡하고 그래. 더 못 생겨지게."
"아니. 그건 어제고. 오늘 200미터 준우승 했다고 아까 문자 받았어."
"...진짜?"
"이 개새끼 우리한텐 어제 전화하고 말 없었는데..."
"망할놈의 자식. 이제 연락도 안 한다 이거지...?"
이혜정의 친구들도 "얘들도 모르는 걸 넌 어떻게 아냐?" 하는 식으로 추궁하지만.
여자의 얼굴은 능숙하게 거짓을 꾸며보인다.
"친구니까 그렇지."
"젠장. 우린 친구도 아니었나..."
"오케이. 이렇게 된 거 마하네 형한테 가자."
"거긴 가서 뭐하게?"
"우승 축하 겸 밥이나 얻어먹자고."
커다란 연관성은 없지만 괜찮은 생각이라며 세 사람은 번화가로 발길을 돌렸다.
"마윤이 형!"
"어! 너희 왔구나."
"마하 오늘 200미터도 2등했네요!"
"진짜? 그런 말 없었는데."
구마윤도 시계를 한번 돌아본다.
역시나. 여기도 연락이 없었다고? 신기하군 이 자식 연락을 돌리다 말은 건가? 대체 뭐지? 세 사람이 수군수군 그러고 있으니, 눈치빠른 구마윤이 먼저 자리로 안내했다.
"너네 지금 야자하고 있는 거 아냐?"
"네. 맞아요."
"밥들은 먹었어?"
"아니요."
"하하! 배고프지? 고기 먹고 가."
"아우 어떻게 그래요. 저희 그냥 인사만 드리러"
"잘 먹겠습니다."
"형님 그때 김치찌개 맛있던데요."
"하하하~ 그래. 앉아있어들. 태윤이도 앉고."
"죄송해요 형. 이 자식들이 뻔뻔해서."
"김태윤이 먼저 형한테 가자고 했어요."
"맞아요. 이 자식 지금 여기와서 말 바꾸는 거에요."
"하하하! 얼마든지 와. 내가 너희한테 밥 한 끼 못 사주겠냐."
음식을 기다리며 중얼중얼 핸드폰을 들어보는 이정석이었다.
"새끼. 뭐 하는데 전화도 안 받지?"
"훈련있나보지."
"이 시간에? 그것도 대회중에?"
"음? 박남수. 넌 왜 그러냐?"
"그냥 뭔가 불안한데..."
김태윤과 이정석이 돌아본다.
"뜬금 뭐가?"
"그래. 야자 째는 게 우리만 있는 것도 아니고."
"아니. 그게 아니라. 아까 혜정이 좀 이상하지 않았냐?"
학교 앞에서 마주친 이혜정을 떠올리며, 두 사람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별로. 모르겠던데."
"떡볶이만 잘 끌어안고 있더만."
"그게 아니라... 걔 뭔가 마하 대하는 태도가..."
그래도 짧게나마 연애를 해봤던 박남수였다.
마치, 내 남자라도 되는 듯 말하던 혜정이의 모습. 친구사이에 그런 대화가 가능하다고?
구마윤이 상차림을 들고 다가오자 박남수가 고개를 들어 묻는다.
"형님. 마하 있잖아요."
"마하 뭐?"
"혜정이랑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아세요?"
그리고, 박남수의 질문에 구마윤의 머릿속도 파르륵 빠르게 돌아간다.
"어. 뭐. 가끔 둘이 산책도 다니고 그러는 거 같던데."
"그래요? 흠..."
"형 죄송해요. 이 새끼가 이상한 걸 물어보고."
"저기. 얘들아. 혹시, 혜정이가 마하 여자친구니?"
"에이~! 아무렴요."
"맞아요. 그건 아니죠. 걔 눈이 얼마나 높은데."
"그래..."
"저희가 할까요?"
"음? 어어. 가만있어."
분명히 마하의 정기가 바뀌었다.
여자가 없고서야 그렇게 되기가 어려운데...
구마윤도 혜정이와의 관계를 생각했지만 당사자는 아니라고 했고. 친구들도 아니라고 하고있고.
"잘 먹겠습니다!"
"그래. 먹고 부족하면 또 달라고 그래."
"네!"
도덕적 책임을 묻는 게 아니다.
학생이 책임 못 질 행동을 한다고 문제 삼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내공은 원체 신비로운 성질을 가지고 있어 조심히 다루어야만 탈이 나지 않는 법.
"..."
"와 맛있다."
"형님 맛있어요!"
"그래. 천천히들 먹어. 음료수 가져다 줄게."
동침은 쾌락을 동반하는 법이다.
그렇기에 어린 나이에 자칫 절제력을 잃었다간, 색마(色魔)의 길로 갈 수가 있었다.
* * *
형과 친구들이 함께 있다는 건 생각지도 못한 가운데, 나는 최다빈한테 무슨 말을 해줘야 하는지 그것만 고민하고 있었다.
"그렇게 시합이 걱정 돼?"
"..."
"왜? 뭐?"
"근데 너 왜 갑자기 말 놔?"
"갑이라며. 서로 존댓말 쓰는 것도 이상하잖아..."
"그래도 갑자기 그러니까 어색하잖아."
"1년 꿇었으면 누나라고 해줄게. 대신 빠른이면 오빠라고 불러라."
"아쉽게도 생일이 다다음 달이라."
대충 옆에 나란히 앉아 본다.
가라던 사람 붙잡은 건 이쪽이니 뭐라고 하진 않겠지.
"권지성이랑 많이 친해?"
"어릴 때부터 대회 나오면서 누나 동생 하고. 그러고 지냈어."
"싸가지가 없던데. 누이 동생 하는 사이면 관리 좀 해주지?"
"훗~ 걔는 원래 그런 애라."
얘 씻었나? 가까이 오니 은은한 바디샴푸 냄새가 풍겨오네.
눈치 못 채게 코를 킁킁 거리고 있는데, 최다빈이 말했다.
"지성이가 3위라는 성적을 시원하게 받아들이는 건 처음 봤어."
"..."
"하루만에 달라졌나? 아니면 지난 겨울 동안 애가 바뀐 건가? 그런데 니 얘기를 하더라고. 타인의. 그것도 같은 동년배 선수의 이야기를 들을 애가 아닌데."
"......"
씻었네. 머리끝이 뭉쳐있잖아. 머리 감았다는 얘기지.
대체 왤까? 혜정이도 그런데, 확실히 여자들은 뭔가 냄새가 달라.
땀냄새가 나도 뭔가 달라. 달콤하다고 해야하나?
"저기..."
"응?"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어."
"...내가 뭐라고 했는데?"
"권지성 싸가지 없다고."
"하하! 야. 내가 언제 그렇게 말했어."
웃으니까 또 이런 얼굴이구나. 다양한 표정을 가지고 있는 애다.
할 땐 대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걔도 승부욕이 있어서 그럴 뿐이야."
어우야. 진짜 왜 이러지? 정말로 환골탈태 때 뇌세포랑 고환에 무슨 신경이라도 이어졌나? 미치겠네. 괜히 꼴리네. 빨리 마무리 짓고 들어가야지.
"선수중에 승부욕 없는 사람이 어딨어. 다 있지."
"그런가...?"
"당연하지! 개인종목인데. 지고 싶은 애들이 어딨어. 다 이기고 싶지."
최다빈이 또 한번 우수에 젖은 눈동자로 돌아본다.
제발... 다빈양... 그렇게 보지 말라고... 미치겠다고.
"흠. 흠. 아무튼, 나만 생각하는 놈들은 결국 지게 되어있어."
"왜?"
"그렇잖아. 나만 1등이어야 돼. 나만 최고여야 돼. 세상 그런 게 어디까지 통할 거 같애?"
"그만큼 노력을 하잖아."
"너 오늘 김인수 우승하는 거 안 봤냐? 걔가 그러더라. 권지성이 지 무시하는 거 참아가면서 진짜 겨울동안 죽어라고 뛰었다고."
"..."
"이기는 놈도 노력해. 근데 지는 놈들이 더 사력을 다 해서 뛰기 마련이야. 당연하지. 졌으니까."
"그럼 계속 엎치락 뒤치락 하는거네."
"그러니까 승부가 재밌는 거 아닐까? 주위를 돌아보지 않는 사람은 강해질 수 없다. 이런 말 들어봤어?"
"처음 들어봐."
"나도 운동 시작할 때 우리 형이 해준 말인데 하면 할수록 그 말이 맞는 거 같더라고."
"..."
"이기적인 놈들은 못 이겨. 아니 그런 놈들한테는 절대 지고 싶지 않어."
내가 최다빈을 진작부터 알고 지내던 것도 아니고, 빨리 여길 벗어나야겠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그래서도 좀 강하게 말했던 거 같다.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이 친구의 가슴을 찌르고 있을 줄은 몰랐다.
"성적 중요해. 우승하면 좋아. 나도 이기니까 기분 좋더라고. 근데 말이야. 스포츠는 스포츠로써 가치 있다고 생각해 나는."
"..."
"어떻게 매번 1등만 축하를 받냐. 3위도 잘 한 거잖아. 결승만 올라도 잘 한 거라고. 아니. 여기까지 온 자체가 이미 보통 애들이랑 다르게 많은 시간을 운동에 투자했다는 증건데."
"그럼 특별한 사람은 아무도 없는 거네..."
"뭔 소리를 하는 거야. 모든 사람은 다 특별해. 모든 선수는 다 특별하다고. 그런 사람들이 어우러지니까 1등이라는 것도 대우를 받지."
"..."
"운동은 자기발전이야. 누군가를 이기기 위해 운동한다면 그게 깡패새끼랑 뭐가 다르냐."
"그만."
"프로가 아님 어때? 동네 뒷산을 가면 어떤데? 운동을 왜 하는데? 내 몸을 더 건강하게 만드는 게 목적 아니었어? 왜 꼭 이겨야 되는거지? 왜 거기에 반드시 승부가 들어가서 패자가 나오고. 누군가를 꺾고. 그런 건 그냥 결과지."
"알았으니까 그만하라고!!"
갑자기 최다빈이 혼자 소리를 지르더니 얼굴을 감싸쥐었다.
뜬금 존나 쫄아서 주춤주춤 돌아보며 말했다.
"뭐야? 너 왜 그래...?"
"그만하라고. 됐으니까..."
"니가 얘기 하라며... 진짜 별 말 안 했어. 그냥 축하한다고 해줬어. 덕분에 오늘 시건방진 모습을 조금 보긴 했지만..."
어찌됐든 다행이 아닐 수 없다.
꼴릴 뻔 했는데 분위기가 바뀌는 덕에 녀석이 잠잠해질 수 있었다.
역시 분위기를 읽을 줄 아는 우리 똘똘이.
"그럼. 갈게."
"..."
"잘해. 힘내자고"
"흑. 흐윽. 흑..."
"아... 갑자기 또 왜 울어?"
"그냥. 훌쩍. 뭔가 다 아닌 거 같아서..."
주절주절 두서없이 꺼내지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제 매 맞던 아이들과 다를 바 없는 환경. 다빈이도 승부에 모든 목적이 달려있는 선수였다.
다만, 이 친구 같은 경우는 원래도 잘하던 케이스라 자신의 존재감이 흐려지는 걸 견딜 수가 없었던 것 같다.
"부상은 어디를 다친 거야...?"
"발가락. 정강이도 그렇고. 다리가 다 아팠어."
"피로가 쌓였구나."
"응..."
최다빈의 촉촉한 눈동자가 지나간 시간을 돌아본다.
지도감독이 외국에선 요즘 이렇게들 한다고. 새로운 훈련법을 가지고 왔단다.
플라이오 매트릭 훈련이었다. 우리도 많이 하는 것이다.
다만, 계속된 점프로 인해 자칫하단 근육과 인대의 부상을 유발할 수 있어 근골격이 우선이 되어야 하는데. 체구가 작다보니 힘이 부족했던 것 같다.
"지금은 좀 어때?"
"많이 괜찮아졌어. 근데 나만 멈추고 세상이 다 저만치 가버린 거 같아서..."
"..."
"이대로 버려지는 건가... 나도 흔하디 흔한 그런 애들로 묻히는 건가 그런 불안이 있었거든..."
운동이나 시합에 관해서 함부로 말할 건 아닌 거 같다. 당사자가 아니고서야 쓰린 속마음 어떻게 다 알겠는가.
"사람이 질 수도 있지. 대신 지면 지는만큼 또 노력을 하면 되는 거고."
"훗. 그렇지."
"애들이 그러더만. 너 뭐 1학년 땐 메달 많이 땄었다며. 대학은 무리없이 갈 거 아냐."
"응..."
"그럼 됐네 뭘 고민해. 마음 편하게 컨디션부터 챙기고 시합만 집중하면 되지."
이렇게 보면 어떨까 의견을 제시해본다.
"다빈아. 우리가 앞으로 얼마나 선수 생활을 할지 모르지만, 못해도 20대 중반까지는 하지 않을까?"
"그렇겠지."
"과거의 영광이면 어때. 한 때 잘 나갔으면 어떤데. 적어도 최선을 다 했다는 건 있는 거잖아."
"너 은근 말 잘한다. 책 많이 봤나봐."
"생긴 걸 봐라. 원래 나 같은 애들이 인터넷이고 뭐고 닥치는대로 섬렵하는 법이거든."
"넌 운동 왜 시작했어? 원래 운동하던 애 아니었었다며."
"여자애들한테 인기 얻고 싶어서."
"하하! 진짜?"
"오~ 울다가 웃으면 위험한데, 거기 털나면 제모도 어렵다고 하던데..."
"미쳤나 봐. 뭐라는 거야. 짜증나게..."
짜증난다면서 표정은 어이없다는 듯 웃고있는 다빈양.
"긴장 풀라고. 웃자고 하는 소리지."
"그래서? 여자애들한테 인기는 좀 얻었어?"
"그럼. 예전에 비하면 하늘과 땅이 뒤집어졌지."
내 얘기를 조금 해줬다.
난 원래 170이 될까 말까한 몸을 가지고 있던 개찐따 같은 놈이었다.
그러다 어떻게 운동을 시작하며 몸도 커지고 꿈도 가질 수 있었다고.
"그래서도 더 승부에 집착하지 않는 걸 수도 있어. 그러니까 너무 그렇게 좋게 보지 마. 그냥 나 혼자 떠든다 생각하고."
"꿈은 뭔데?"
"당연히 올림픽이지."
"..."
"꼭 갈 거야. 진짜로. 춘계, 전국체전. 그렇게 두 개 대회밖에 못 나가 봤지만. 죽기 전에 반드시 나갈 거야."
"멋있다. 멋진 꿈이네."
"음?"
저 멀리 허상같이 펄럭이는 오륜기를 지켜보다 고개를 돌린 곳에. 어떤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소녀가 초롱초롱한 눈빛을 띄면서 나를 보고 있었다.
"..."
"그래도 시합 때는 너도 긴장같은 거 하지?"
"그럼. 당연하지."
"그럴 땐 무슨 생각해?"
무슨 생각하냐니.
당연히 섹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