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륜기로 가버렷-38화 (38/401)

〈 38화 〉 승자의 품격 (4)

(사정은 알겠는데... 어린 친구들 일 시켜보면 죄다 처음만 잘 하겠다 그러지...)

(사장님. 남자는 중언부언하지 않는다고 배웠습니다. 저는 다릅니다. 말에 책임을 집니다.)

(음.)

(제 동생입니다. 이 녀석 봐서도 정말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한번만 기회를 주세요.)

(그래 좋다. 까짓 거. 나도 니 나이 때 고향 떠나서 일 시작했어. 한번 해봐라!!)

(네! 고맙습니다.)

다섯 살 언저리의 기억이다.

형은 그때 취직한 식당에서 2년을 지나 집을 구했고, 5년이 지났을 땐 가게를 인수해 사장이 되었다. 그리고 8년이 지나 모든 대출금을 다 갚았다.

남자는 중언부언(重言復言)하지 않는다.

정말 멋진 말이다. 나도 언젠가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나이가 되고 싶었다.

신념을 표현 할 수 있는 남자가 되겠다는 다짐을 가지고 살아왔다.

그런데.

"응? 어떻게 멘탈 관리하냐니까? 가르쳐주면 안돼?"

같은 질문을 동민이한테 해줬는데 여기서 말 바꾼다고 중언부언(重言復言) 일구이언(一口二言)같은 취급을 받는 건 아니겠지?

"뭐 그냥... 훈련도 생각하고..."

"훈련은 보통 얼마나 해?"

"여섯? 짧으면 네시간 정도?"

"진짜?!"

"왜? 많은 건가?"

"장난 아니지... 그렇게 매일 한다고?"

새벽 남한산성 왕복이 대략 한 시간에서 컨디션 따라 한 시간 반 정도 소요된다.

그럼 오전 수업 때 눈 좀 붙이고 점심 먹고 오후 수업 마치고 바로 한주 고로 출발.

두어시간 바짝 육상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면 밤 일곱 시.

"그때 형이랑 저녁 먹고, 먹은 김에 또 땀 빼자 하는 식으로 동네 헬스장 가고. 그러면 대략 뭐."

"엄청 노력하는구나..."

"에이 뭘 노력이야. 나도 풀로는 못 해. 적당적당 중간중간 쉬는 시간이 있으니까 할 수 있지."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아직 중거리 시합이 남았다는 말도 해주게 되었다.

"중거리까지..."

"난 감독님이 두 분이니까. 처음부터 그렇게 훈련을 해서 괜찮아. 그리고 이제는 그렇게 하는 게 서로서로 시너지가 돼주고 있고."

다빈이가 고개를 내려 몸을 보는데, 혹시 모르니 다리를 꼬고 있어봐야 될 거 같다.

"그래서 그렇게 몸이 좋았구나..."

"어우야. 어딜 건드려."

"어...? 어 미안..."

"하하. 아니야. 장난이야. 만져봐도 돼."

어깨나 가슴 그리고 복근까지. 다빈이는 조각상이라도 만져보듯, 작고 아담한 손으로 몸 여기저기 꾹꾹 눌러보고 쓰다듬으며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진짜 단단하다."

근섬유로 이뤄진 곳과 달리, 혈액만 모이는 곳은 더 단단해지고 있지.

진짜 다리 꼬길 잘했네. 휴우...

"남자애들은 좋겠다. 난 근육 잘 안 붙는데."

"고기를 먹어."

"나름 많이 먹는 편이긴 해. 근데 잘 안 들어가."

"설마 다이어트 해?"

"아니. 그래도 체중관리는 해야지. 살찌면 뛰는데 무리가 오니까..."

"충분히 말랐잖아. 잘 먹고 증량하면 파워가 다른데."

"그게 어려워."

후천적인 일로 몸이 바뀐 나와 다르게 원래 타고난 신체를 바꾸는 건 쉽지 않겠지.

"근육은 부상방지나 체력 회복에도 중요하니까 포기 말고 계속 해 봐."

"역시 노력을 해야할까...?"

"노력이라고 생각하니까 어려운 거야. 그냥 맛있는 거 먹고. 먹은 김에 운동하자. 이렇게 편하게 생각하라고. 난 다 먹어. 떡볶이도 막 먹고 튀김도 그렇고."

"..."

"왜?"

"그냥."

그냥이라고 하지만 뭔가 엄청 존경스런 눈동자로 보고 있는 다빈이였다.

상처 입은 소녀의 아련한 눈동자가 부담스러워 시선을 돌리니, 이번엔 가녀린 목선과 포니테일이 눈에 들어온다.

그래서 또 고개를 내리는데, 츄리닝으로 가려지지 않는 넓은 골반과 낮에 보았던 작은 몸이 겹쳐진다.

가느다란 허리와 넓은 골반은 후배위에서 가장 이상적인 조합이 아니던가.

무엇보다 포니테일...

이런 애랑 뒤로 하면...

머리가... 저 포니테일이...

저 목선이...

젠장! 그만! 위험해!!

"흠! 아 흠. 뭐... 흠. 흐흠."

"갑자기 왜?"

"크흠. 흠! 아냐. 음."

하긴, 원래 지금이면 티슈 쑥쑥 뽑으면서 화장실로 가고 있을 시간이지...

워 워 진정해. 아니야. 혜정이 누나 아니라고.

무엇보다 밖이야 이 녀석아. 제발 가만있어.

"어디 불편해?"

"흠! 크음. 흠. 아니. 근데 저기 다빈아. 조금 떨어져 줄래?"

"...왜?"

"그냥. 혹시 누가 보면 오해할 수도 있잖아..."

"하하! 너 진짜 재밌는 애다."

남녀칠세부동석이라 했거늘. 이런 좁은 벤치에 열 아홉 남녀가 가까이 있으면 안 된다고...

"멘탈 관리는 왜 말 안 해줘?"

"..."

"그렇게 비밀이야?"

"뭐 특별한 거 없다니까..."

"그래도. 뭔가 다른 게 있을 거 같은데?"

"너 아까는 세상 고독이란 고독은 혼자 다 씹을 거 같이 하고 있지 않았냐?"

"으음. 아무래도. 남자애들이랑 이렇게 말 해본 적이 없다 보니까..."

맞다. 여고라고 했었지?

여고. 백합...

씨발 진짜 왜 이러냐!!

왜 모든 생각이 다 그쪽으로 가는데!?

나라는 놈이 싫다. 인간이 혐오스럽다...

"왜? 너라면 인기 좋을 건데"

"...어?"

"인수도 그러더만. 니가 육상계의 아이돌이었다며. 남자애들이랑 말 안 해봤어?"

"아... 어. 뭐..."

"뭐야? 그 부끄러워 하는 반응은? 쑥스럽긴 해도 인정한다 이거야?"

"아! 아니야! 내가 무슨!!"

권지성은 동생이고. 무엇보다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내던 애니까 가끔 인사나 나누지. 이렇게 운동과 관련해 심도있게 대화를 나눈 남자는 내가 처음이란다.

"중학교는?"

"여중."

"으음. 뭔가 정석적이네."

"여중 여고를 떠나서도. 진짜 어릴 때부터 운동만 했어. 운동 말고는 아무것도 몰라. 사람들이랑 이야기 해본 적도 별로 없고..."

"친구들 있었다면서? 뭐 먹으러 가고 그럴 거 아냐."

"같이 훈련했던 애들인데, 처음부터 같이한 애들은 지금은 많이들 그만뒀어..."

그래. 선수층이 얇아지면서 전학생을 대거 받아들였다 그랬지.

쓸쓸한 상황이구나. 그러니까 지금도 방에서 나와 혼자 이러고 있었겠지.

한 감독님이 말씀하신 게 이런 건가 싶다.

운동을 떠나면 아무것도 모르는 애들. 엘리트 선수란 보기와는 많이 다르구나.

"시합... 근데 나는 좀 엉뚱한 생각을 하는 편인데..."

"하하! 역시 그럴 줄 알았어. 뭔데? 뭐야?"

"이상하게 생각하기 없기다."

"안 그래. 절대!"

절대라고 하니 뭐... 이건 개인의 특성이니까...

"야... 야한 거."

"어? 뭐라고?"

"흠. 크흠! 야한 걸 주로. 뭐. 그런 걸... 생각하면서..."

"..."

역시. 분위기 이렇게 될 줄 알았어... 그러니까 내가 말 안 한다니까.

"아니! 저기! 그러니까! 이건 뭔가 나만의. 어. 나만의 비법이랄까."

"어. 뭐. 응. 그... 그럴 수 있지. 개인적인 건데."

"모 모든 선수가 다 나 같진 않을 거야! 그래! 이건 특별한 루틴 같은 거라서!!"

적어도 남자가 한 입으로 두 말은 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도 동민이한테 알려준 것과 다르게, 최대한 뭔가 말이 되게 논리적으로 설명을 해주려고 애쓰는 중이다.

"시합 때 그렇잖아. 뭔가 막 아드레날린 치솟고. 심장도 벌렁벌렁 거리면서 위도 쪼여오고."

"으... 응."

"그래서 막 그 흥분을 최대로 눌러 담다가, 머릿속으로 엄청 야한 걸 생각하면 파워가 꾹 응집이 되는 기분이거든."

"그 그래서?"

"그리고 출발하면 냅다 막 뛰면서 터트리는 거지."

이 정도면 적당히 잘 설명한 거 같은데? 천박하게 섹스, 허리 흔들흔들, 어지럽혀진 이불, 발목양말, 이런 단어를 쓴 것도 아니고.

그런데도 얘는 왜 이렇게 침을 꼴깍꼴깍 삼키면서 막 시선 여기저기 불안하게 쳐다보고 그러고 있을까...

어색한 상황 속에서 그래도 양심은 있는가, 본인이 물었으니 본인이 책임을 지고 싶다는 듯 조심조심 입을 여는 다빈 양.

"아. 그... 근데 나도 그 그 얘기는 들었어..."

"뭐...?"

"오... 올림픽 나가는 선수들도 시합 앞두고 많이들 한다고..."

세상에나. 이 말을 여기서 듣게 될 줄이야... 이럼 진짜...

어허! 가만 있으라고 했지. 너한테 한 말 아니라니까! 일일이 반응하지 말라고!!

발기가 되다 못해 발사가 될 거 같다.

다시 한번 더 다리를 꽈악 움켜쥐며 허리를 살짝 돌렸다.

그러면 그럴수록 똘똘이는 대체 왜 이렇게 나를 억압하냐는 듯 미쳐 날뛴다.

"뭐... 그렇지. 그런 거랑 비슷하지."

"그렇구나. 하긴... 땀 흘리는 건 같잖아. 그치? 하하..."

"하하. 하하하..."

아퍼. 이제는 서다 못 해 너무 아프다...

"저기 다빈아... 조금 기분 풀렸어?"

"응. 아까보다는."

"그래 그럼. 난 저기... 바람이 시원해서 그러는데, 조금만 더 있다가 갈게. 먼저 들어가라."

"...어? 어 그래."

아쉬운 얼굴 하지 마. 나도 너 보내기 싫어. 더 재미나게 이야기 하고 싶다고. 근데 이대로 있다간 모든 의지가 놈에게 잡아 먹힐 거 같아서 그래...

"오늘 고마워. 이야기 들어줘서."

"들어가."

"응. 안녕."

가볍게 손을 흔들며 돌아서는 다빈 양에게 끄덕끄덕 턱 인사로 미소를 보내줬다.

"후우..."

그리고 다리를 품과 동시에 모든 긴장과 고통이 전신으로 퍼져 나온다.

"아우. 어우 씨발... 죽는 줄 알았네."

아니 대체 왜 이러냐고.

딱히 뭘 한 것도 아니잖아.

여자가 아무리 좋아도 그렇지.

그냥 앉아서 이야기만 한 걸 가지고 왜 이렇게까지 되는데??

"어? 씨발놈아. 니가 나한테 개겨? 개새끼가 사람 난감하게."

저 혼자 벌떡 서있는 녀석에게 좌 우 주먹을 툭툭 날려주었다.

마치 샌드백이라도 된 듯 하반신이 흔들흔들 거리며 다시 중심을 바로 잡는데.

"저기..."

"어!?"

"..."

"......"

아직 다빈이가 안 가고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    *    *

"미안..."

"..."

"시합 잘 하라고. 그 얘기를 해주고 싶어서 돌아봤는데. 하필..."

"후우~ 아... 진짜 쪽팔려 미치겠네..."

"그 그래서 아까도 그렇게 혼자 불편해 하고 있었구나..."

"어쩔 수 없어. 이건 그냥 호르몬 작용 같은 거라..."

"다... 다리 풀어도 돼. 아프다며..."

"아아... 진짜. 으아아..."

그래. 일단 다리는 풀자. 진짜 이대로 있다간 피 몰려서 썩겠다...

"저기. 오해하지 말고. 진짜 요즘 운동 때문에 스트레스가 많아서 그런 거니까..."

"그래... 너도 스트레스가 있겠지."

"가. 난 이놈 좀 진정되면 움직일 테니까."

"그  근데. 야... 야한 건 뭘 생각하는 거야?"

진짜 얘는 또 왜 이러냐...

"..."

"미 미안! 그냥 궁금해서."

"......"

"우... 운동하는 사람들이잖아. 그냥 몸이 궁금하기도 하고..."

여자애들도 우리만큼 남자에 대해 호기심이 있는 건 이해하겠는데.

이게 뭔 탐구생활도 아니고, 지식 교환의 장이 이딴 식으로...

"아무래도 폭발적인 에너지를 끌어올려야 하니까 최대한 야한 걸 생각하는 편이야."

"가... 가슴 이런 거?"

"후후후. 가슴이라. 뭐. 가슴이 될 수도 있지만, 그 정도는 안돼."

"그 그럼...?"

"역시 섹스지."

움찔움찔 조심하며 이것저것 물어보는 다빈이와 모든 걸 포기하고 있는 나.

혈기순환을 위해서 다리를 쩍 벌리고 있다보니 녀석만 지 혼자 좋아 춤 추고 지랄났다.

"진짜야. 난 섹스 하는 걸 생각하며 뛰어."

"..."

"그래서도 아까 최대한 말을 아끼려고 했었고... 진심이야."

돌이켜보면 괜찮은 인생이었다.

우승도 해봤고, 지역 대회지만 나름 포디엄도 서봤으니까.

그래 맞어. 첫사랑과 섹스도 했지. 그것도 엄청 많이 했었다.

슬슬 들어가서 목이나 매달아 볼까...

"해봤어?"

"......"

"하면 느낌이 어때?"

얼빠진 표정으로 다빈이를 돌아보는데, 의식의 저편 무언가가 다가온다.

뚜렷하진 않지만 녀석은 남미 마피아 같은 표정으로 진한 시거를 문 채 흰 연기를 내뿜으며 비릿한 미소를 지어보이는 것 같았다.

똘똘이였다. 소중이라고도 하고 열정이라고도 하는 나의 생리기관.

아무튼, 녀석이 묻는다.

'이봐이봐. 잠깐만. 어차피 여기까지 온 거 말이야. 밑져야 본전이다치고 이 말 한번 건네 보자고.'

"다빈아."

"응?"

"한번 해볼래?"

"어...?"

제기랄. 마침내 니 놈이 주인의 의지를 뺏고야 마는 것이냐?

고맙다.

덕분에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내! 내가 너랑 그런 걸 왜 해..."

"하도 이것저것 물어보니까 그러지."

"그... 그래도..."

"백번 듣는 것보다 한번 보는 것이 낫고."

"..."

"보는 것보단 경험하는 게 낫다는 말도 있잖아."

아직 밤은 길고 감독님들은 술 마시러 갔다.

적어도 새벽까진 오지 않는다.

무엇보다 여기는 '침대'가 있지 않던가.

자. 질문 많은 다빈 양. 어떻게 하실 건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