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화 〉 반짝반짝 작은 별 (1)
[다음으로 남자 800미터 시상식이 있겠습니다. 선수들은 단상 앞으로 나와주십시오.]
사람들의 박수소리를 들으며 구마하와 김진운 유승태가 준비되어 있는 포디움으로 나갔다.
한상률과 이주영도 큰 박수를 쳐주며 이야기한다.
"남아일언중천금이지. 새삼 대단해 한상률이."
"뭔 소리야?"
"마하 저 녀석 전학 보내라니까, 니가 최고의 선수로 키워낸다고 그랬던 거 기억 안나?"
"지랄... 내가 키웠냐. 지가 알아서 컸지."
"겸손떨지 마라. 보석도 세공사에 따라서 가격이 바뀌는데."
칭찬을 머쓱하게 넘겨버리는 한상률을 보며 이주영이 말했다.
"저 녀석 재능을 알아보고 여기까지 이끈 건 누가 뭐래도 너야."
"...됐어. 집어치워. 답잖은 짓거리 하지말고."
"새끼. 쪽팔리냐? 니가 상 받을 때 보다 더 좋지?"
"아 저리 떨어지라니까."
[금메달. 성남 영군 고등학교 구마하!]
"좋아해라. 더 기뻐하고. 니네 학교 이름이 제일 마지막에 불리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냐."
"지가 노력했지. 뭘..."
한상률은 낯간지러운 칭찬을 거부하지만, 그럼에도 제자가 고개 숙여 메달을 받아서는 모습에서 가슴 속 응어리진 어떤 아픔이 지워지는 걸 느꼈다.
그나저나, 큰 박수를 쳐주고는 있지만, 어딘가 현실감이 없는 듯한 느낌이다.
대체 어디서 그런 힘이 솓는 것일까.
"..."
내공이라...
만약, 진짜로 그런 게 존재한다면. 그리고 마하가 그 초월적인 힘을 쓸 수 있다면.
저 녀석은 이런 국내 대회나 전국체전에서 뛰고 있을 게 아니다.
세계다. 세계로 가야한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곳으로.
진짜 별들의 무대로.
"주영아."
"음? 왜?"
"아니다... 대회도 끝나는데, 애들 잘 챙겨서 올라갈 준비하자고."
국가대표 선발전을 상의하려던 한상률이지만, 올림픽은 8월 말. 선발전은 6월 언저리에 열릴 것이다.
아직은 조금 시간이 남아있는 이야기였다.
* * *
대한 체고 진영. 조영욱 감독 앞에 선수들이 모여있었다.
큰 성과를 이뤄낸 여자부는 당당하지만, 남자부는 대부분 고개를 들지 못 한 모습이다.
오직 김진운만이 떳떳하게 그를 보고 있었다.
부끄러움을 느끼는 건 조영욱이었다. 그가 힘 없이 말했다.
"수고들 했다... 가방 챙기고 올라가서 연습하자."
남녀 선수 각자 짐을 챙기거나 버스를 향해 이동할 때.
김진운은 홀로 운동장으로 걸어가 필드를 바라보았다. 고등학교 처음 받은 상장과 은메달을 손에 들고서.
"..."
"혼자 뭐하냐?"
"네? 어... 네."
"이름이 진운이라고 했지?"
"네. 맞습니다."
"준우승 축하한다."
"고... 고맙습니다."
이주영이 그를 따라와 어깨를 다독여 주며 말했다.
"메이저 대회 수상은 처음이라면서?"
"네. 근데도 참 지지리 운이 없네요..."
"왜? 모든 스포트라이트를 저 녀석이 가져가서?"
이주영이 멀리 새로사귄 친구들과 인사를 나누거나 사진을 찍고있는 구마하를 가리키자, 김진운도 편안한 미소를 지어보인다.
"뭐 어때. 이 바닥에 이런 일 하루이틀인가 안 그래?"
"하하. 맞아요."
"재능있는 애들은 늘 있어. 그냥 경쟁자 하나 늘었구나 생각하고 내 운동하는게 마음 편해."
"고맙습니다."
"진운아. 우리 한주 고는 외부에서 넘어오는 체육특기자를 위해 기숙사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
"장학금은 몰라도. 기숙사 정도는 학교에서 신경 써 주마. 편히 운동하고 싶다면 넘어와라."
3학년 선수가 혹여나 이번 일로 불이익이라도 받지 않을까 걱정되어 스카웃을 제시해보는 이주영. 하지만 김진운은 또 한번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괜찮습니다. 학교에 남을래요."
"조 감독 성질을 이겨내겠다고?"
"이 바닥에 그런 게 하루 이틀인가요."
"하하! 크하하! 그렇지!"
이주영은 악수를 건넨다. 김진우도 예의있게 두 손으로 맞잡으며 허리를 숙였다.
"고맙다. 신경 써 준 덕분에 마하도 잘 뛸 수 있었어."
"아... 알고 계셨어요?"
"대충은. 나도 너희 선생님이랑 인연이 있거든. 성질이라면 잘 알지."
"제가 고맙죠... 말도 안 되는 부탁이었는데..."
"왜 조 감독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았는지 물어봐도 될까?"
부끄러운 사정 드러내고 싶지 않다는 듯, 김진운의 표정이 난처하게 변하지만.
이내 모든 결과와 감정을 받아들이겠다는 식으로 그의 얼굴에 밝은 미소가 떠올랐다.
"뭐가 됐든 필드에서 뛰는 건 저니까요. 그냥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맞다. 모든 건 선수가 결정하는 거지."
"제의는 고맙습니다 선생님. 이러니 저러니 해도 전 우리 학교에 자부심이 있어요."
"역시 대한 체고다 이건가?"
"당연하죠!"
소속된 팀에 애정을 갖는 것 그것도 어찌보면 선수의 자세일 것이다. 이주영은 그렇게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은 멀리 볼 줄 알아야 돼. 고등학교 시절은 길고 긴 경력의 스타트도 되질 않는다."
"네."
"지금의 인내가 반드시 널 강하게 만들어 줄 거야. 힘내라."
"고맙습니다."
지도자가 아무리 편애를 해도, 선수가 중심을 잡고있으면 발전은 따라오는 법.
묵묵히 자기 길을 걷겠다는 김진운에게 마음 깊이 응원하는 마음을 건네주는 이주영이었다.
"어? 감독님. 여기 계셨어요."
"음. 마하 왜?"
"쟤랑 무슨 말씀 하셨어요?"
"별 거 아니야. 왜?"
"아. 형이랑 통화 했는데, 한주 고 사람들 다들 데리고 오라고 그래서요."
"하하! 밥이라도 사신다고 그러냐?"
"네!! 도착시간 맞춰서 가게 비워 놓는다고 했어요."
"어이고... 감당하실 수 있으실까?"
"금은금인데, 그 정도는 해야죠!!"
"하하하! 그래. 가자."
춘계대회는 끝났다. 그래도 선수들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 * *
"형님이 우리보다 한 살 많다고 그랬지?"
"우적우적. 저랑 띠동갑이요. 올해 서른 하나."
"이야 그런데 벌써 집도 있고 가게도 있어? 대단하시네."
"우리 형 장사 잘해요. 손님도 많고."
대회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
차 안에서 우적우적 햄버거 7개를 뜯어먹는 구마하를 보면서 한상률이 물었다.
"근데... 너는 그렇게 먹으면 배 안 부르냐?"
"허허! 오늘따라 힘을 썼더니 엄청 들어가네요."
"아까 중거리 마지막 그거 말하는 거지?"
"네. 우걱우걱."
"마하야. 진짜 내공이란 게 있는거냐?"
"감독님도 있다고 하셨잖아요."
"흠... 그래도 뭔가 신기해서."
"저도 잘 몰라요. 형한테 한번 물어보세요."
떠들다보니 어느새 익숙한 거리가 눈에 들어온다.
한주 고 버스가 먼저 도착했는지, 한상률에게 전화가 들어왔다.
"어. 거기 맞다고 했는데."
"...그럼 진짜로 여기 사장님이 마하네 형님이시라고?"
조수석에 앉아있는 구마하는 피로에 지쳤는가 쿨쿨 잠이 들어 있었다.
내공이라는 신비한 힘을 쓰는 녀석.
늘 침착한 주영이가 이런 반응을 보인다는 건 역시 이놈한테 뭔가 있단 말인가?
한상률도 조심조심 물었다.
"왜? 뭐 있어?"
"너도 와보면 알 거다..."
반쯤 우려스러운 시각을 가지고 도착한 마하네 가게.
시끌벅적 분위기가 마치 잔치집에 온 듯한 풍경이었다.
그때 조금 경박하다 싶은 청년이 다가와 구마하를 반갑게 맞이해준다.
"야! 마하야!"
"어? 형!"
"너 이 새끼 우승했다며!! 크하하! 잘했다!!"
"아 왜 이래요. 내가 누군데. 그정도는 해줘야지."
"하하 이 새끼 까불기는!"
상호가 적힌 앞치마를 둘러 맨 청년과 구마하가 정답게 인사하는 모습을 보면서, 한상률은 한 살 많다더니 제법 어려보이는데? 싶은 눈빛으로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마하네 학교 선생님 한상률이라고 합니다."
"아. 잠시만요. 사장님 모셔올게요."
"사장님...?"
"저 형 알바생이에요."
"어 그래?"
어쩐지. 서른 하나가 너무 어려보이더라니...
어휴 피부과 예약해야 하나 싶었는데 다행이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아 네. 처음 뵙겠, 어어!?"
"왜 그러십니까?"
"어어~! 어어?!! 어??"
"아 우리 형 맞아요... 그만 좀 하세요..."
"하하하~ 자주 오해받고 합니다."
학부형을 많이 접해본 건 아니지만 그래도 보통 학생네 가족은 그 학생의 얼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혈육이란 느낌을 전해준다.
그러나 여기는 다르다.
누가봐도 훤칠한 미남이란 느낌을 준다.
누구와 다르게...
잘 생겼다.
"아. 네... 처음 뵙겠습니다. 한상률이라고 합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동생이 많은 신세지고 있습니다."
"아니요... 열심히 해줘서 제가 고맙죠."
"이쪽으로 오시죠. 한 선생님도 방으로 안내해 드렸습니다."
구마하는 친구들과 홀 안에 자리하고, 한상률은 이주영과 함께 작은 방으로 안내받는다.
"왔냐."
"봤어??"
"하하. 너도 놀랬지?"
"와 뭐지...? 너무 다른데."
"무슨 말 못 할 가정사가 있나 엄청 말 조심하고 있는 중이다."
"허허... 장사 잘한다고 하더니, 저렇게 생겼으면 돈 벌만 하지."
소란스런 분위기가 얼추 진정되자 구마윤이 두 사람을 찾아왔다.
"선생님들 제가 술 한 잔 올려드리겠습니다."
"아우 왜 이러세요. 저희보다 형님이시라고 들었는데. 편하게 대해주세요."
"어떻게 그럽니까. 사부님들이신데."
"아니 굳이 뭐 사부라고 하실 것 까지야..."
"마하 형님. 선생 학부형 관계에서 잘못하면 문제가 되니까요. 저는 몰라도 이 친구는 마하네 학교 선생님이잖아요. 편하게 대해주시는게 서로 좋을 것 같습니다."
"아. 그렇군요. 제가 거기까지는 생각이..."
"그럼 두 분 이야기들 나누시고. 전 잠시."
"야. 어디가?"
"동민이 새끼 소주 챙기는 걸 봤어. 잔소리 하러 간다."
구마윤이 돌아보며 역시 선생님은 선생님이라며 웃어 보인다.
한상률도 좀 봐주지 하는 식으로 가벼운 농담을 건넸다.
"마하 형님. 오늘 이렇게 큰 자리 마련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가 더 감사하죠. 저 녀석 밝아진 것만 봐도 얼마나 고마운 줄 모르겠는데요."
"동생 사랑이 지극하시네요."
"아무래도 하나 있는 가족이라서요."
"저... 이런 질문 정말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친형제 맞습니다. 필요하면 신장도 이식해줄 수 있어요."
"하하! 죄송합니다. 아니 너무 달라서..."
"동생이 어려서 고생이 많았죠."
구마윤은 늘 동생을 이끌어주는 스승님을 만나보고 싶었다.
한상률과의 만남은 그의 작은 소원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우리 동생은 어떤가요?"
"잘합니다. 열심히 하고요. 가르칠 보람이 있는 녀석이죠."
"...다행이네요."
"저도 늦게라도 재능이 꽃을 피워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먹고 사느라 정신 없어서, 제가 애를 잘 못 챙겨 줬거든요..."
"안 그런 집들이 어딨겠습니까. 다 그런 식이죠."
두 사람은 사회인 대 사회인으로 가볍게 술잔을 나눴다.
"저 마하 형님? 안 그래도 궁금한 게 하나 있습니다."
"하하. 부모님 사진이라면 따로 없어서..."
"아. 그게 아니라, 저기. 내공이란 게 대체 뭡니까?"
"...마하가 그런 이야기도 하나요?"
"아무래도 시합에 따라 녀석 실력이 너무 달라지니까요. 저도 이상하게 보는 건 아닌데, 그래도 좀 신기하다랄까..."
"알고 계시다면 저도 말씀드리기가 편하겠네요."
구마윤이 홀 안. 이주영과 친구들에게 축하를 받는 동생 구마하를 보며 고개를 돌렸다.
"부탁드리겠습니다 감독님."
"...뭘 말씀이십니까?"
"가급적 마하 저 녀석이 힘 쓰는 일이 없도록 해주십시오."
이건 또 무슨 소린가. 한상률의 표정도 무겁게 변해간다.
"혹시 뭔가 말 못할 그런 게 있는 건가요...?"
"그렇진 않습니다. 내공이란 건 저도 가지고 있고, 선생님도 가지고 계시고, 저기 밖에 있는 아이들도 다들 지니고 있습니다."
"제가요...?"
"그럼요. 얼마나 강건한 기운을 보여주고 계시는데요."
잘생긴 얼굴로 저러니 혹하게 되는구만.
한상률은 머리를 도리도리 정신을 깨우치며 물었다.
"정확하게 내공이란 게 뭔가요?"
"아기들 위험할 때 부모님들 몸 빨라지는 거 보신 적 없으십니까? 혹은 위기의 순간에 나도 모르던 힘이 솟는다랄지."
"예. 조카 녀석이 한번. 매형이 몸을 날리더라고요."
"그런 겁니다. 무의식의 저편에 자리한 본능이자 에너지. 그것이 내공입니다."
"딱히 나쁜 건 아닌 것 같은데 굳이 사용하지 말라고 하심은?"
"아무래도 힘은 힘이니까요."
구마윤이 식탁에 놓여있는 식당가위를 돌아본다.
"무릇 강한 건 늘 위험을 동반하는 법 아니겠습니까."
"..."
"전 그냥 마하 저 녀석이 평범하게 운동하고 밝아지는 모습만 보더라도 충분합니다."
"마하 꿈이 올림픽이라는 걸 아십니까? 저 녀석은 평범함 그 이상을 보는 것 같던데요."
"네. 그래서 선생님께 잘 이끌어 주십사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알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한상률은 굳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지키기 어려운 이야기가 될 것 같다.
"아 죄송하지만, 전화가..."
"네. 편하게 드세요. 고기 더 가져다 드릴까요?"
"괜찮습니다. 나가서 애들이랑 먹죠 뭐."
모르는 번호로 들어온 전화번호. 혹시 차 빼달라는 이야기일지 모르니 조심조심 받아보는데.
"상률아."
"누구십니까?"
"나다. 천병욱."
"선생님..."
천병욱. 과거 한상률의 국가대표 육상코치이자, 현 대한민국 육상연맹 전무이사.
"구마하란 친구. 우리가 한번 볼 수 있을까?"
한번 전화가 오지 않을까 생각은 했지만, 너무 빠르다.
이미 육상연맹 관계자들까지 마하의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