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화 〉 반짝반짝 작은 별 (2)
"아이고 자식들. 배도 안 부르나."
화장실을 찾아 밖으로 나온 이주영.
멀지 않은 곳 한상률이 홀로 앉아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야. 너 거기서 뭐해?"
"후우~ 그냥"
"담배는 뭐야?"
"피면 좀 어때. 고등학생들도 술 마시고 있는데."
"..."
갑자기 무거워진 분위기에 이주영이 걱정스레 그의 앞에 다가가 묻는다.
"왜? 마하네 형님이 뭐라고 해?"
"아니."
"근데 뭔 담배야?"
"원래 가끔 폈어."
"니가 담배를 폈다고?"
"내 돈 주고 사진 않고. 학교에서 압수 한 거 들어올 때만."
"...무슨 일 있어?"
"천 코치가 전화 왔다."
"천 코치가 누군데?"
대답 대신 담배 끝만 붉게 태우는 친구의 모습.
흰 연기가 허공으로 흩어져 가는 가운데 이주영이 말했다.
"혹시... 태능?"
"음."
"이야~ 빠르네... 뭐래?"
"마하 한번 보자고."
"하긴, 그만한 기량을 보여줬는데, 당연히 말이 돌지."
"후우..."
"그래서 뭐라고 했냐?"
"밥 먹고 있으니까 끊으라고 했어."
"밥이 뭐 그리 중요하다고..."
연거푸 한숨을 내쉬는 친구에게 이주영이 말했다.
"왜 한숨이야 축하 받을 일이지."
"내가 축하받을 일인가."
태릉에 얽힌 그의 감정을 이해해주는 이주영.
곁에 앉아 같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상률아. 결국 선수가 결정 할 일이잖아."
"알아. 나도 마하가 태극마크 다는 건 보고 싶어."
"근데?"
"놈들이 여전하면 어쩌나 그게 걱정되는 거야."
두 사람은 왁자지껄 소란스러운 가게 쪽을 돌아보았다.
"저 녀석이 그런 걸 견딜 수 있을까..."
"상률아. 우리는 그냥 고등학교 선생들이야."
"..."
"너무 멀리 보지 마. 다 운명대로 가겠다 생각하자고."
* * *
춘계대회 이후 일주일만에 학교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뭐지? 남방이 원래 이렇게 꼈나???"
작년에 비해 올해는 키도 달라지고 체형도 완전히 변했다.
자켓은 비싸서 그냥 전 걸 대충 껴입고 다니지만, 바지랑 와이셔츠는 새로 샀는데. 왜 이렇게 옷이 불편할까? 몸이 더 커졌나? 아 그냥 츄리닝 입고 가고싶다.
어찌됐든 오랜만에 학교.
친구들도 그렇고 괜히 여러 가지 설레임이 느껴지는 등굣길이었다.
"야! 구마하!"
"어이. 남수."
"하하! 이 새끼. 오랜만이구만. 시합은 잘 끝냈어?"
"그럼."
학교 근처에서 남수를 만났다.
보자마자 넌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냐고 지랄지랄 하고있다.
"아 그때? 자느라고."
"피곤했나. 존나 빨리 자네."
미안하다. 잤다는 게 거짓말은 아닌데, 혼자 자고(?) 있던 건 아닌지라.
"중거리도 우승했어?"
"그랬다니까."
"오~ 그럼 100미터 800미터 이렇게 다 우승한 거야?"
"200은 2등. 코너에서 출발하는데 넘어질까 봐 속도를 못 내가지고."
"와하하!! 새끼야. 그것만해도 존나 대단 한 거 아니냐?"
"그런가? 그렇게 대단한 건가?"
"대단하지. 전국대횐데."
"글쎄다. 나도 우승해서 기분은 좋지만... 어?"
"어어?"
"씨발... 저건 또 뭐야?"
"하하하! 진짜 저건 뭐냐??"
교문 위에 전에 없던 플랜카드를 보며 걸음이 멈췄다.
[춘계전국중고육상대회 단거리 우승. 3학년 구마하.]
"아 미친... 저건 또 언제 걸었어... 지난 주에도 있었냐?"
"아니. 토요일에 집에 갈 때만 해도 못 봤는데."
"하 진짜... 쪽팔리게."
"야 씨발놈아! 저거 너 아니냐??"
교문 앞에서 정석이가 소리치며 다가온다.
"조용히 하라고... 병신아..."
"어! 구마하! 니가 구마하잖아!! 너 우승 한 거 아냐??"
"아 닥치라고!!"
새벽이라 3학년들 밖에 없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지나가는 애들까지 우리를 보면서 키득키득 거리는데 쪽팔려 돌아버릴 거 같다.
아니 우승한 건 난데, 왜 지들이 난리냐고...
"남수야. 이 새끼 가방 뒤져 봐."
"아?!! 가방은 또 왜!?"
"그러게? 뭐 있어?"
"태윤이가 그랬거든, 저 새끼 분명 메달 가져와서 자랑 할 거 라고. 뒤져 봐. 있을 거야. 목에 걸고 사진 찍자."
정석이가 이런 줄 알고 오늘 카메라를 챙겨왔단다.
남수도 웃으며 돌아봤다.
"하하! 너 진짜 메달 가져왔냐?"
"..."
김태윤 이 새끼... 진짜...
"아니... 나도 가져오긴 했는데..."
"하하하하! 애도 아니고 그걸 왜 가져와?"
"크하하하!!! 딱 걸렸지 병신아!!"
아. 물론 나도 자랑하고 싶지... 하지만 꼭 뭐 자랑이라기 보다는... 그냥 담임 선생님도 한번 보여드려야 될 거 같고... 어쨌든 메달 같은 걸 딴 것도 처음이고...
"오~ 저건 또 뭐야?"
왔구나 김태윤... 이 썩을놈의 자식.
"왔냐? 사진 찍자."
"하하하! 태윤아. 너 마하 메달 챙겨올 거 어떻게 알았냐?"
"내 이 새끼 일이 년 보나. 뻔하지."
태윤이도 다가와 어깨동무를 하며 플랜카드를 올려다 본다.
"이야~ 씨발 존나 간지나는데?"
"꺼져 새끼야..."
"메달 보여줘 봐. 너 뭐 준우승도 했다며?"
"야. 마하 800미터도 우승했데."
"진짜?? 그건 또 언제 했냐?"
"마지막 날 했어..."
"에이~ 그럼 저 플랜카드 잘 못 적었네. 야 띄자! 남수야. 나 좀 잡아 줘 봐."
"지랄하지 말고. 일단 사진부터 찍자고. 좀 서봐 새끼들아. 카메라 빳데리 없어."
복잡한 심정이지만 나쁜 기분은 아니다.
물론 쪽팔림은 별 개의 이야기지만...
"됐다. 야. 나도 찍어 줘."
"그냥 애들한테 맡기고 너도 일로 와."
"그럴까? 야 누가 우리 사진 좀 찍어주라?"
지나가던 친구 하나가 카메라를 건네받아 사진을 찍었다.
등굣길에 벌어지는 작은 축하 이벤트.
정석이 남수 나. 그리고 태윤이까지 넷이서 어깨동무를 하며 사진을 남긴다.
"땡큐. 고맙다."
"우승 축하해."
"뭘 축하까지 해... 됐어."
지나가던 애한테 고맙다고 전해주고 있는데 태윤이와 정석이가 다시한번 플랜카드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야~ 살다보니 마하가 자랑스러운 때도 다 있고."
"그러게. 진짜 인생 모르는 거다."
사진은 잘 찍혔나 정석이 카메라를 보고 있는데, 남수가 다가와 물었다.
"야. 그럼 너 세 종목 메달 딴 거야?"
"그렇지."
"그럼 세 개 다 가져왔어?"
"응..."
"하하! 준비성도 철저하다."
친구들이 내가 카메라 든 김에 사진 좀 찍으라고 말하며, 자기들이 메달 하나 씩 걸어보고 찍자면서 가방을 뒤적이는데.
"아 씨발 꺼져! 왜 내가 은메달인데!!"
"그냥 받어! 난 금메달 낄 거야."
"나도. 이거 내가 먼저 잡았어."
개새끼들 그걸 니들이 땄냐...?
메달의 가치를 그렇게 폄하하지 말라고...
"아 개새끼들. 아침부터 존나 시끄럽네. 대충 찍고 들어가! 쪽팔리게 좀 하지말고!!"
* * *
시끌벅적한 하루를 보냈다.
작년 같은 반 친구들도 찾아와 우승을 축하해주고, 3학년 담임 선생님은 조례 시간에 반 애들한테 박수를 치라고 해줬다.
"부럽다. 그럼 넌 대학 수시로 갈 수 있지?"
"어. 뭐 그렇겠지."
"어디 갈 거야? 한체대? 고대?"
"글쎄... 모르겠네. 메달 여부랑 입시가 어떻게 연결 되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어서..."
쉬는 시간엔 한 감독님이 부르셔서 짧게 교무실을 다녀왔다.
"주말동안 잘 쉬었어?"
"네. 기절해서 잠만 잤어요."
"형님 그날 얼마 나왔다고 그러시디?"
"모르겠어요. 근데 100만원은 안 나왔다고 했던 거 같아요."
"고맙다고 꼭 전해드리고, 다음부턴 회식은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까, 신경쓰지 마시라고도 말씀드려."
"알겠습니다. 근데요 감독님. 교문에 그건 뭐에요...?"
"하하! 왜?"
"아 쪽팔려가지고..."
"하하하! 뭐가 쪽팔려. 난 멋있고 좋더만."
"아침부터 애들한테 그걸로 지금 장난아니게 시달리고 있어요."
"자식 좋으면서 투정은. 교감 선생님이 늘 그런 거 하나 걸어두고 싶어하셨어. 우리 학교는 특별히 어디 대회나 경시대회 같은 걸 나갈 일이 많지 않으니까."
어느 학교든 우승이니 뭐니 하는 플랜카드를 거는데. 그게 다 학생 좋으라고 하는 짓이 아니었구나. 쯧쯧 어른들이란...
"금요일날 인쇄 하시느라 800미터 우승이 빠졌더라. 새로 말씀 드려서 바꿔달라고 해볼까 싶은데."
"됐어요... 뭐 이제와서."
"그래. 다음 종별 대회 때 바꿔 걸자."
"네? 저 종별 나가요?"
"그럼. 안 가려고 했었어?"
우리는 입시를 무시할 수 없는 나이들이다. 특히나 선수들에겐 메달 획득 여부가 중요해 바로 이어지는 대회에선 보통 앞선 우승자들은 자리를 피해주거나 한다고 들었었다.
"누가 그런 소리를 해?"
"인수가요..."
"그건 그 학교 사정이지. 너가 대학 가려고 운동하는 것도 아니잖아."
"그렇죠."
"어떻게 할래? 안 나갈 거냐?"
"아니요. 무조건 나갈 겁니다. 저 시합 뛰는 거 재밌어요."
또 다시 대회에 나간다는 말에 가슴 속 아드레날린이 치솟는 기분을 느꼈다.
"감독님. 그럼 훈련일정 어떻게 되는 거에요?"
"..."
"감독님?"
"음. 내가 주영이한테 연락해보고 문자 보내줄게. 가봐."
뭐지? 잠깐 분위기가 무거워 보였는데 무슨 문제 있으시나?
* * *
"다음주라고? 그럼. 또 학교 못 나오는거네?"
"그렇지."
"5월 초에 중간고사 있는데, 괜찮겠냐?"
"야. 뭔 걱정이야. 이 새끼는 이미 체육으로 진로 잡혔어. 우리나 신경 써."
점심시간. 친구들과 운동장에 모여 노닥거리고 있었다.
대회 이야기. 그곳에서 만난 친구들 이야기. 우리와는 다른 학교 분위기 등등.
다양한 주제에 애들도 재미있게 이야기를 들었다.
"진짜 그런 학교가 있구나. 존나 무섭다..."
"체고는 역시 체고더라고. 한주 고는 널널했던 거고."
"그 한주 고 친구라는 애는 메달 땄어?"
"계주 준우승. 우승은 대한 체고. 선수층 존나 두꺼워. 단체 전은 그 학교 아무도 못 이겨."
"근데 이 새끼 대회 하나 나가놓고서 세상 다 안다는 듯이 떠드는 거 좀 어이없는데?"
"그냥 들어 줘 병신아. 뭘 따져."
"그래. 우리 아빠도 2박3일 동남아시아 갔다오면 세계일주라고 그랬어."
"하하하! 씨발 내가 진짜 뭔 말을 못 하지."
태윤이 남수와 웃고 떠들고 있는데, 갑자기 정석이가 날 가만히 지켜본다.
"왜?"
"흠. 음."
"아 뭐? 뭔데 또?"
"..."
"왜? 너무 잘난 척 했어?"
"그게 아니라. 이 새끼 뭔가 좀 분위기가 바뀐 거 같은데?"
태윤이와 남수도 정석이를 돌아본다.
"메달 땄잖아."
"그래. 오늘 하루는 잘난 척 들어주자. 마하 이런 날 또 언제 온다고."
"흠. 아니. 나도 이 새끼 우승한 건 기분 좋은데..."
정석이가 남수의 어깨를 묵직하게 잡으며 목소리를 바꿨다.
"남수야. 그때 우리끼리 마하네 형한테 갔을 때 니가 그랬었잖아."
"뭐? 내가 뭐라고 했지?"
"뭔가 좀 불길하다고..."
"어. 너 그랬어."
"맞어. 나도 기억나. 근데 왜?"
"아니. 그게 뭔지 이 새끼 보니까 알 거 같애... 뭔가 좀 분위기가 짜증나."
그 말에 남수까지 매의 눈으로 쳐다본다.
"그치? 뭐지? 뭔가 있지? 너도 느껴지지?"
"음. 뭔가 말 못 할... 쓰읍. 이 새끼랑 잘 어울리지 않는 듯한..."
"또 뭔 작당모의들을 하려고... 지랄들을 하는지."
"그래? 난 잘 모르겠는데. 마하가 너네보다 커져서 그런 거 아냐?"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맞어. 단지 키 컸다고 뭐라고 할 그런 건 아니야."
점심시간도 끝나가고, 애들도 놀려먹을 레파토리가 떨어지는데, 슬슬 교실로 가야겠다 싶은 그때. 갑자기 남수가 말했다.
"아! 알았다!!"
"뭔데? 뭐야?"
"야. 마하...?"
"하하하. 미치겠네. 아 뭐? 뭔데? 뭐가 변했는데?"
"너 했지?"
와... 진짜 소름돋는 새끼들... 그걸 분위기로 알아채???
"야. 이 새끼 했어... 진짜야. 그거야!!"
"에이 설마... 구마하가..."
"뭘 해? 마하가 뭘 하는데? 뭘 했다고 그러는 거야? 난 진짜 모르겠는데??"
"섹스! 이 새끼 했어! 한 거야!!"
살아있는 놈들이 이지랄하니 요즘 귀신들 이야기가 재미가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