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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륜기로 가버렷-47화 (47/401)

〈 47화 〉 반짝반짝 작은 별 (6)

누군가가 사랑(?)을 나누고 있을 시각.

구마하의 지도자 한상률은 버스에서 내리며 전화를 걸고 있었다.

"네. 지금 도착했어요. 아 왜 또 난린데. 이 정도면 빨리 왔지. 선배가 분당에서 강남 와보든가. 이 시간에 도착할 수 있나!"

오랜만에 친했던 선배에게 연락이 들어와 저녁 약속을 잡았다.

대학 교수로 있는 사람이라 마하 입시 관련 상담이나 조언도 받을 겸 기꺼이 나섰다.

"다 왔어. 알았다고. 진짜 다 왔다니까."

"네. 어서 오십시오."

"들었죠? 끊어요. 네. 저 이현석 씨 일행인데요."

"이쪽으로 오십시오."

약속된 식당에 들러 직원을 따라간다.

고급스러운 일식당이었다. 대학 교수 되더니 이 형 돈 잘 버네? 한상률은 태연한 마음으로 다가가는데.

"편한 시간 되십시오."

"..."

물러서는 직원의 발 아래 구두 두 켤레가 놓여 있었다.

혼자 있는 게 아닌가?

한상률은 조심히 문을 열었다.

"어. 왔냐."

"..."

"상률아. 어서 들어와라."

대학교수 이현석과. 상석에 앉은 육상연맹 전무 이사 천병욱이 그를 반겨준다.

"안녕하셨어요..."

"그래. 들어와. 저녁 아직이지?"

표정이 굳은 한상률을 이현석이란 사람이 일어나 끌어당겼다.

"뭐해. 빨리 들어와."

"형. 아 진짜..."

"뭐? 그럼 평생 선생님 안 보고 살 거였어?"

"..."

"현석이한테 뭐라고 하지 마라. 내가 부르라고 했으니까."

"후우..."

한상률도 다시 한번 정중하게 꾸벅 인사를 건네며 물었다.

"잘 지내셨어요...?"

"그래. 오는 데 차 많이 막혔지? 앉아라. 일단 들자."

"너 선생님한테 밥 먹고 있으니 전화 끊으라고 그랬다며. 건방진 자식."

"하하! 그래서 아예 못 도망가게 이런 자리를 만들었지."

천병욱을 바라보는 한상률의 마음이 복잡해진다.

반갑기도 하면서 화도 나고. 원망하다가도 한 번씩 그립고...

정말이지 애증의 관계가 아닐 수 없다.

"자. 건배."

"선생님. 건배사 한번 하시죠."

"음. 그럼 뭐로 할까?"

"상률이의 복귀를 축하한다 어떠십니까."

"됐어 누가 복귀를 했다고..."

"하하하! 그래. 다들 건강하게 만났다는 데 의의가 있으니까."

적당히 술잔이 돌고 접시가 비워질 즈음 이현석이 오늘의 주제를 꺼내들었다.

"구마하란 친구 시합 봤다."

"비디오는 또 어디서 구했어...?"

"대단하더만. 넌 그런 친구를 어디서 발견했어?"

"지가 찾아왔어요."

천병욱도 관심있게 묻는다.

"선수 경력이 없던데. 정말 신인인가? 어디 외국에서 운동하다 돌아온 친구 아니고?"

"한국 사람 맞아요."

역시 목적은 마하구나. 한상률은 서둘러 주제를 바꿔본다.

"형은 요즘 어딨어요? 아직도 경희대?"

"나 이번에 신촌으로 옮겼어."

"신촌? 연대? 아이고 출세하셨네."

"하하! 출세까지야."

"상률아. 구마하란 친구 아직 대학은 안 정했지?"

"...선생님. 저한테 너무 마하 이야기 물어보지 마세요."

"왜?"

"저 그냥 지루해서 애 데리고 잠깐 운동시켜보는 것뿐이에요."

"야. 그런 게 어딨어. 니가 그 녀석 지도자지."

"그래도. 그 녀석 가는 길에 내가 관여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냉혹하게 선을 그어버리는 한상률을 보며 천병욱이 시선을 큰 제자에게 돌린다.

"현석아? 다음 대회가 언제 열리니?"

"네. 선생님. 학생들 다음 주 종별 대회 있습니다. 저희도 슬슬 나가 볼까 합니다."

"그래."

"..."

"상률아. 나도 다음에 가서 볼까 하는데. 괜찮겠지."

"그러시든가요."

"야. 이 자식 선생님 말씀하시는데."

"이놈아. 아직도 나한테 서운한 게 남아있냐."

"제가 앱니까... 그런 걸 따지게."

"행동은 완전 애새끼같이 굴고 있으면서."

"아 형!"

이현석 교수도 무게감 있게 돌아본다.

"야. 안 그래도 나도 너 보면 한마디 해주고 싶었어."

"뭐요. 뭐가? 아 왜 보자마자 잔소린데."

"너 진짜 선수 키우고 싶은 놈 맞냐?"

"...뭔 소리야 그건 또?"

"그런 인재를 데리고 있으면서. 당장 너희 학교도 아니고. 옆 학교 운동장 가서 뜀박질시키는 게 그게 선수를 키우겠다는 놈이 할 짓이냐고."

"후우. 이 선배. 그건..."

"선생님이 괜히 이러시는 게 아니잖아. 선생님도 재능있는 선수를 도와드리고 싶으셔서."

"현석아. 그만해라."

"네."

무거워진 분위기 속에서 한상률이 조용히 잔을 들었다.

서른 살. 그렇다 하더라도 역시 선배나 웃어른은 쉽지 않다.

"상률아."

"네. 말씀하세요."

"과거의 일은 내가 정중하게 사과하마. 미안했다."

"..."

"널 그렇게 버려둬서도 안 됐고, 영욱이가 그렇게 하게 둬서도 안 됐다. 실수를 인정하마."

아. 진짜. 이딴 사과를 듣고 싶은 게 아닌데...

답답한 속내를 달래고자, 한상률이 다시금 술병에 손을 뻗는데 이현석이 막아세운다.

"따라줄게. 자식아."

"에이 씨... 괜히 나왔어..."

이어지는 분위기 속에서 천병욱이 육상계 소식을 알려주었다.

"아직 기사는 나지 않았지만, 연맹 내부에서 결정된 사항이다. 현석이도 잘 들어라."

"뭡니까?"

"새로 부임하신 회장님이 한국 육상의 발전을 위해서 파격적 포상금을 내걸으셨다."

올림픽 및 세계 선수권에서 메달을 따오면 연맹 차원에서 10억. 한국 신기록을 세우면 1억이란 포상금을 제시한다.

"9초대 기록이 나오면 그건 또 다른 이야기로 포상금을 내거신다 하셨다."

"통 크게 쏘네요. 돈도 많다."

"그러니까 이사회에서, 대기업 출신을 회장직으로 앉혔겠지."

"하하! 그래 현석이가 맞다!"

S전자와 H자동차는 한국을 대표하는 올림픽 공식 후원기업이면서, 대한민국 체육발전에 많은 힘을 쏟고 있다. 특히나 육상연맹은 S전자의 후원으로 운영된다.

"연맹도 투자하는 만큼 성과를 보고 싶어 하고 있어."

"그래서요?"

"구마하란 선수에게 우리가 투자해볼까 하는데."

"그건 그쪽들 사정이죠."

"상률아. 너 설마. 선수가 연맹을 벗어나서 활동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아니. 그러니까. 그런 사정들이 당장 우리 마하랑 무슨 관계냐고."

"선수가 원한다면 우리는 미국 유학도 생각해주고 있다."

"..."

"그것도 있고, 선생님 말씀은 당장 5월에 열리는 해외대회도 참가시켜 보고 싶다고 하시는 중이야."

"저기. 두 분 잠시만."

한상률이 가득 채워진 술잔을 들어 원샷 강하게 목구멍으로 털어 넣는다.

"말씀들은 고마운데, 우리 애요. 이번이 제대로 된 첫 대회고. 처음 메달 땄어요."

"그러니까."

"야. 그런 친구가 이정도 기량을 보여주니까"

"그래서. 또 설레발쳐서. 사람 하나 인생 망치려고 합니까?"

"..."

"..."

관심과 기대는 분명 무관심보단 낫지만, 가끔은 그 과도한 에너지가 누군가의 일상을 망쳐버릴 수 있다.

한상률은 누구보다 그러한 위험성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마하가 저 찾아온 게 작년 5월이에요. 엄밀히 아직 1년도 안 된 애라고요. 뭘 벌써부터 포상금이니 유학이니. 투자니..."

"상률아. 대중은 스타를 기다리는 법이다."

"그럼 스타가 될 때까지 좀 기다리라고 하세요!"

"야. 상률아! 너 이자식 지금."

"선생님. 스타라는 게 누가 만든다고 만들어 집니까? 지가 잘해야죠!!"

벌떡 일어나며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한상률.

"야. 야 인마! 저 새끼... 선생님. 제가 가보겠습니다."

천병욱은 조용히 술잔이나 채우며 한숨을 내쉰다.

*    *    *

"야! 새끼야! 너 거기 안 서!! 너 진짜 평생 나 안 보고 살 거야!"

으이그 이 지긋지긋한 학연 지연.

"아 형. 뭐야 이게!!"

"그럼. 넌 뭐냐 지금. 뭐하는 짓이야 내 앞에서. 선생님도 계시는데. 다 큰 자식이 진짜."

"후우..."

"영욱이 박살 냈다며. 그 자식도 지금 대한 체고에서 입지 완전 망해가기 일보직전이라더만. 그럼 됐잖아."

"그건 그 인간이 자초한 거고..."

"상률아. 당장 올림픽이 넉 달 앞이다. 그런데, 지금 한국 육상에 메달 가능성이 없어. 실업팀. 대학팀. 어디를 봐도 보이질 않어. 깜깜하다고."

"..."

"너 선수 아니었냐? 너 육상 좋아했던 놈 아냐? 어떻게 니 기분만 생각해? 저분들도 대회 생각하면 몸이 달아오르지 않겠냐고? 안 그래?"

"그래서? 연맹 모가지 생각해서 이제 막 싹 틔우는 애를 유학 보내자? 올림픽 끝나고, 우리가 이렇게 미리미리 투자를 하고 선수 육성하고 있었다 그런 변명거리라도 만들자?"

"너 이 새끼 진짜..."

"그럼 차라리 내년에 이야기하든가. 하다못해 수능 끝날 때까지는 기다리든가. 아님. 올림픽이 끝나고 진짜 절박한 심정으로 말을 하든가."

"그만해라. 어?"

"현석이 형. 이 제안에 진짜 선수를 생각해주는 사람이 있긴 한 거야?"

"..."

"마하. 걔. 아직 자기 실력 절반도 못 키웠어. 그런 애 데려다 이리저리 흔들면 그게 더 망치는 거 아닐까?"

이현석도 씨익 거리며 숨을 몰아쉬며 말한다.

"상률아. 너 정말로 그 나머지 절반을 니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냐?"

"적어도 난 선수를 우선으로 생각하고 있지."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답해라. 그동안 쭉 육상 떠나있던 너랑 한주 고 이 감독이 정말로 뭔가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해?"

"..."

"도와주겠다잖아. 근데 왜 이렇게 감정적으로"

"현석이 형. 난 마하를 최고의 선수로 키워내겠다고 약속했어."

"누구랑?"

"신념이랑."

한상률의 마음속에서, 지금. 열아홉의 구마하와 그때 스무 살 한상률은 큰 차이가 없다.

내가 걸었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는 것.

그것이 제자를 가리키는 스승의 자세가 아니겠는가.

"야. 가기 전에 말해 봐. 최고의 선수가 뭔데? 뭔지는 알고 말하는 거야?"

"당연하지."

한상률이 이 교수를 돌아보며 답한다.

"인성과 실력을 겸비한 선수. 마하는 그렇게 될 가능성이 있어."

"..."

"갈게 형. 아무튼. 미안해."

"저 새끼... 진짜."

묵묵히 돌아서는 한상률을 보내고 이현석은 식당으로 돌아왔다.

"녀석은 갔냐?"

"죄송합니다. 선생님... 제가 대신 사과드릴게요."

"됐다. 성질 버럭버럭 내는 모습보니 오히려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다."

"참... 이 놈도 진짜..."

"가기 전에 다른 말은 없고?"

"몰라요. 최고의 선수니 뭐니... 꿈 같은 소리만 지껄이더라고요."

"후후후 자식. 낭만도 어지간해야지."

이 교수가 고개를 돌리며 말한다.

"선생님. 우리 학교가 또 신방과가 유명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기자라도 보내주려고?"

"아무래도. 주변에서 압박하면 상률이도 버티기 어렵지 않을까요."

"그래. 것도 좋은 방법이지. 부탁하마."

올림픽은 국제행사지만 국민의 관심과 성원이 없다면 그냥 그들만의 이벤트에 불과하다.

스타가 필요했다.

그것도 잠깐 반짝하고 말 그런 관심이 아닌, 국민의 지속된 관심을 이끌어 줄 수 있는 그런 대스타가.

그래야 연맹이 살아있을 수 있으니까.

*    *    *

[다빈아. 어디쯤 왔어?]

[우리 지금 톨게이트 지나고 있어.]

[이번엔 충북이라. 이렇게 내가 팔도강산을 다 돌아다니는구나.]

[ㅋㅋ 도착해서 문자 할게.]

4월 말. 한 감독님 차를 타고 종별 대회를 가는 길이었다.

"누구랑 그렇게 문자를 하냐?"

"아. 친구요."

"쓸데없는 이야기 하지 말고 잠이나 한숨 자라. 도착하면 바로 예선 전 뛰어야 하니까."

"네."

며칠 전부터 감독님 분위기가 무겁다. 무슨 일이 있으신가?

"감독님 오늘 대한 체고도 나와요?"

"그럼 나오겠지."

"아. 네."

어우 살벌해라. 조용히 있어야지.

"남 신경 쓰지 말고 너 운동만 잘하면 돼."

"네."

"자. 배고프면 말하고."

그래도 참 언제봐도 고마운 분이 아닐 수 없다.

어떤 애들은 가족들이 대회 데리고 다니거나, 그마저도 여의치 않음 혼자 와서 시합 치르고 가는 애들도 있는데, 먼저 춘계도 그렇고 종별도 그렇고 매번 이렇게 신경 써주시는 게 어디냐.

"아. 그리고 마하야. 이걸 얘기 안 해줬는데. 난 너 시합 단거리만 보고 올라올 거야. 혹시 문제 있으면 주영이랑 잘 얘기하고."

앗싸! 거기다 감독님도 없고!! 숙소는 개인실!!!

그러나 너무 좋아하는 내색도 할 순 없지.

최대한 침착하게 대처하자.

"흠. 흠. 왜요? 뭐 일 있으세요?"

"중간고사 시험문제 만들어야 해서. 애들 평가도 있고."

"하하! 감독님 근데 체육 시험 되게 쉽잖아요."

"야 인마 무시하지 마. 그래도 다들 나름 머리 써서 만드는데."

"하하하! 야구공은 어떤 것이냐가 머리 쓰는 거라고요?"

"원래 그런 거야 이 녀석아. 따지기는"

부르릉 충주라고 적힌 톨게이트를 지나는데 감독님이 말씀하셨다.

"아무튼, 그리고. 이게 중요한데."

"네."

아직도 뭔가 당부하실 게 있으시나?

"누가 찾아와서 말 걸어도 신경 쓰지 말고 운동에만 집중해. 알겠지?"

"누가 절 찾아와요?"

"누구든지 간에."

"알겠습니다."

"그래. 믿는다."

믿음까지 말씀하신다고? 정말 뭐가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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