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화 〉 반짝반짝 작은 별 (7)
33회 전국종별육상대회가 열리는 충주 시민운동장.
군중들이 웅성웅성 지켜보는 가운데, 남자 100미터 예선전이 시작됐다.
"나왔다."
"누구? 저 친군가?"
"어. 8번."
지난 춘계 대회를 찾지 않은 각 대학 관계자들 그리고 실업팀 감독들까지 모두가 한 사람을 보고 있었다.
[6번 레인. 성남 영군 고등학교]
구마하.
단거리와 중거리 800미터 고교 신기록을 작성한 인재.
사람들의 관심이 그에게 집중된다.
탕!
경기 시작.
예선 첫 시합인 만큼 구마하도 본 실력이 발휘되진 않았지만, 10.70 안정적인 성적으로 준준결승에 진출한다.
시합을 마친 구마하도 전광판을 돌아보며 가볍게 숨을 몰아 쉬었다.
"후우~"
"역시. 형은 숨도 안 차요?"
"여. 지성이. 보고 있었냐?"
"오늘은 내가 이겨요."
"하하! 2등도 잘하는 거라니까."
"이 새끼들. 둘이 드라마 찍냐?"
"인수. 너 안 나온다더만. 나왔네?"
"뭔가 지난 대회가 좀 분한 게 있어서. 그나저나 10.70 뭐야? 예선이잖아. 살살해."
"하하하!!"
구마하에게 권지성이 다가와 슬쩍 귓말을 건넸다.
"형. 다빈이 누나랑 사귄다면서요?"
"어떻게 알았냐? 다빈이가 얘기했어?"
"에이. 말이 돌죠. 축하해요."
"그래. 잘해라. 처남. 고맙다."
"하하! 왜 날 거기다 엮어요!"
부상에서 돌아온 최다빈도 컨디션을 회복함과 동시에, 다시 단거리 개인종목에 출전하고 있었다.
여자부 예선 전을 지켜보는 이주영과 한상률이 이야기를 나눴다.
"상률아."
"응?"
"동민이가 그러는데, 쟤가 마하 여자친구란다."
"누구? 작은 애?"
"어. 자식. 어떻게 또 그렇게 만났는지."
"왜? 유명한 애야?"
"다빈이? 장난 아니었지. 중학생 때 대한에서 데려가려고 엄청 공들였는데, 집안이 엄해서 여고로 갔어."
"흠. 귀엽게 생겼네."
"근데 넌 시합 안 보고 어딜 그렇게 보고있냐?"
한상률은 운동장 한쪽에 모여있는 기자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왜? 뭘 그렇게 무섭게 노려 봐?"
"주영아. 원래 종별 대회에 저렇게 기자들이 오냐?"
"올 때도 있지."
"..."
"마하 때문에 그래?"
"아 뭔가 계속 신경 쓰이네."
"놔 둬. 뭐 어때. 억울하면 이기지를 말든가."
차라리 선수가 연애를 하고 있다는 게 다행이다 느낄 정도로 한상률은 기자나 주변의 관심이 두렵게 느껴진다.
"아. 그냥 졌으면 좋겠다..."
"이 자식이 뭔 소리를 하는거야? 잘하는 애한테 왜 그래?"
"있어. 신경쓰지 마..."
그러나 한상률의 걱정과 다르게, 예쁜 여자친구까지 사귀게 된 구마하의 정기는 매우 안정적으로 흐르고 있었고.
"헉 헉!!"
"허억 허억. 와우... 제기랄..."
"후우~ 후우우~~"
구마하의 100미터 결승 기록은 또 다시 10초 50. 지난 번 고교 신기록이 그의 운이 아니었음을 실력으로 증명해주고 있었다.
"진짜 괴물이네 마하 자식. 이거 이러다 진짜 한국 기록 넘는 거 아니야?"
"후우..."
"왜 자꾸 한숨이야? 너 진짜 무슨 일 있지."
"아니야. 없어..."
* * *
"좋겠다 금메달... 흐응~"
"욕심부리지 말고. 너도 퍼포먼스 올라오고 있는데. 다음에 이기면 되지."
"그래도... 히잉~ 나도 메달 따고 싶었는데..."
시상을 마치고 팀으로 돌아가는 길. 다빈이와 동민이가 같이 있었다.
"야. 뭐해! 다빈이 지금 우는 소리 내고 있잖아!"
"아 뭐! 얘 맨날 이래!!"
"뭐? 맨날!! 둘이 맨날 봐?"
"마하야. 나 갈게. 부르는 거 같다."
"어. 밥 먹고 전화해."
"응."
"하하! 잘 가 다빈아~"
최다빈. 내 여자친구긴 하지만 정말 모를 애다. 이렇게까지 하면 보통 인사 정도는 받아주지 않나?
"미안... 쟤가 은근 낯을 가려서... 싸가지가 없는 건 아닌데."
"하하! 뭐 어때. 괜찮아."
"아무튼, 아으 오늘은 끝났구나. 빨리 가서 밥이나 먹고 쉬자."
"야. 근데 마하야"
"응?"
"너 혹시, 다빈이랑..."
"아! 안 했어. 아무짓도 안 했어."
"진짜? 뽀뽀도?"
정말 운동하는 애들은 순수해. 너무 순수해...
내가 타락한 거야... 내가 미친 거지... 다빈이도 원래 이랬던 앤데...
"아 됐어! 뭐 그런 걸 물어봐."
"야 그러지 말고. 응? 마하야. 나도 한 사람만 소개시켜주라."
"아는 게 다빈이 하난데 누굴 소개시켜 줘?"
"물어 보라고. 성운여고 선수들 많잖아."
"흠. 그런가?"
"난 걔 이쁘더라. 1학년에 단발 머리 하고 있는 애."
"어?"
"왜? 걔 있잖아. 멀리뛰기 하는 애. 그때 우리도 봤었던"
"야. 동민아 잠깐만..."
"왜?"
"저건 뭐냐?"
동민이와 경기장을 지나가다 너댓명 카메라를 든 사람들을 보았다.
"기자들 왔나보네."
"오~ 저런 것도 해?"
"하지. 내 생각엔 아마. 너 찍으러 온 거 같은데?"
나? 나를 왜? 라고 답하기도 전에, 정말로 기자들이 우리를 발견하며 빠른 걸음으로 다가온다.
뭐야. 진짜 난가? 싶은 기분으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보고 있으니, 어떤 아저씨가 마이크와 카메라를 다짜고짜 들이밀며 물었다.
"영군 고 구마하 선수 맞죠?"
"네..."
"우승 축하해요. 한국 신기록까지 0.02초 남았는데, 각오가 어때요?"
와 이건 뭐지? 진짜 인터뷰야? 나를?
"어. 저 뭐... 각오라고 할 것 까지야..."
"옆에는 친군가? 잠깐만 나와줄래."
"네? 아 네."
기자들은 동민이를 귀찮다는 듯 저리 밀며 카메라를 막 들어보였다.
조명이 너무 강해 눈이 찡그려진다.
아 젠장. 가뜩이나 좆같이 생겼는데 이러면 더 못 생겨 보이는데.
"구마하 선수 이쪽 봐 줘요."
"죄송해요. 근데 눈이 너무 부셔요..."
"그럼 시선 조금만 내리고."
이래서 선수들이 인터뷰 할 때 다들 고개를 내리고 있구나. 겸손이 아니라 자연스런 자세였군.
"몇 가지만 물어볼게요. 운동 시작한 지 1년 밖에 안 됐다는데 뭐가 제일 어려워요?"
"단거리 중거리. 두 종목을 같이 훈련하고 있는데 보통 하루 연습 시간이 얼마나 되나요?"
"혹시 꿈이 뭔가요?"
"목표는요?"
"어... 저기 그러니까 그게..."
질문이 하나가 아니잖아? 누구를 먼저 답해줘야 하는 거지?
일단 정리를 해보자. 운동하면서 뭐가 제일 어려웠고? 연습시간이 얼마고? 꿈이 뭐고? 목표?
"그게요 그러니까."
그때였다.
"야 이 새끼야! 구마하!!"
한 감독님이 기자들 저 뒤쪽에서 큰 소리로 불러주시는 바람에 어질어질하던 정신이 번뜩 돌아왔다.
"네. 감독님?"
"거기서 뭐하는 거야. 빨리 안 와!"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감독님이 부르셔서... 잠깐만 네. 비켜주세요."
후다닥 겁먹은 강아지같은 모습으로 쪼르륵 한 감독님 앞으로 가는데 기자들이 따라온다. 여전히 무거운 카메라와 거추장스러운 마이크를 들고서.
"혹시, 구마하 선수 지도감독 되십니까?"
"그렇습니다."
"그러지 마시고 질문 몇 가지만 답해주세요."
"가세요. 아직 시합 안 끝났습니다. 선수한테 방해 됩니다."
"그래도 고교 신기록인데..."
"이봐요. 매번 기록 세울 때마다 인터뷰 쫓아올 거 아니잖아요?"
단호하게 쏘아붙이곤 돌아서 가버리는 감독님.
"뭐야?"
"뭐 저런 사람이 다 있어...? 학생 가르친다는 인간이"
"어. 저기. 그러니까... 안녕히 계세요..."
그나마 나라도 예의를 차려야 할 거 같아 꾸벅꾸벅 인사를 하고 나왔다.
* * *
"야 이 새끼야."
"..."
"너 내가 아까 오면서 뭐라고 했어? 누가와서 뭐라든 신경쓰지 말라고 했지."
"...죄송합니다."
"상률아. 좋은 날 왜 그러냐. 그쪽이 먼저 애한테 다짜고짜 쫓아와서 그랬다는데."
"감독님. 저 말씀 중에 정말 죄송한데, 진짜 마하 그냥 저랑 가만히 지나가고 있었어요..."
"알았다... 밥 먹자."
와 존나 억울하네... 내가 뭘 어쨌다고...
짜장면까지 우울하게 느껴진다... 씨부럴 울면이나 먹을 것을...
젠장. 기분이 떨어지니 농담도 그지같이 나오는구만.
"마하야."
"네."
"밥상에서 잔소리 하는 거 미안한데"
감독님은 선수가 운동 외 다른 것에 자꾸 관심을 두다보면 마음이 들떠 실력이 저하된다고 하셨다.
"그럼요. 저도 알아요..."
"그래... 잘하니까. 아니다 됐다. 밥이나 먹자..."
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가기 전, 이 감독님이 따로 부르셨다.
"괜찮지?"
"그럼요. 괜찮아요."
"저 자식. 우승까지 한 애를 그렇게 쥐 잡듯이 잡냐. 메달 못 딴 애들 밥 맛 떨어지게. 그치?"
"하하..."
"마하야. 상률이도 너 걱정돼서 해주는 이야기니까. 걸러듣고 가면 좋겠다."
"네. 들어가세요."
"그래. 푹 쉬고 내일 보자."
그래도 우승한 날 혼나는 건 기운이 빠진다.
무엇보다.
"..."
"저. 감독님?"
"왜?"
숙소에 들어왔는데, 한 감독님이 나갈 생각이 없어 보이셨다.
다빈이랑 보기로 했는데... 오늘은 술 안 드시나?
"오늘은 회식 안 가세요?"
"지난 주 봤던 인간들 이번 주 까지 만날 일 있냐."
"..."
"왜? 너 뭐 보고싶은 TV 있어?"
"아니요..."
다빈이가 우승 기념 하고 싶은 거 다 해준다고 했는데...
젠장... 심심하구만...
"여자친구 보고 싶어서?"
"..."
"다 알어 이놈아. 긴장하지 마."
"어... 저기 그게... 그러니까..."
"마하야. 연애는 괜찮아."
"...정말요?"
"그래. 젊은 애들이 서로 좋다는데 그걸 뭐라고 할 이유는 없다."
와~ 우리 감독님 엄청 깨어있는 어른이시구나.
"물론, 이건 내 입장이지, 성운 쪽에서 뭐라고 하면 나도 할 말 없다."
"거기 다른 애들도 남자친구 있는 애들 있어요."
"하하! 물귀신 작전이다 이거냐?"
이렇게 보면 평상시 소통 잘 되는 감독님 같은데. 아까는 왜 그렇게 무섭게 그러셨을까.
감독님 사정이야 들어서 안 다지만, 언론이 그렇게 무서운 존잰가?
* * *
다음 날 200미터 예선 전.
코너에서의 실수를 보완한 구마하는 같은 조에 배치된 김인수에게 복수전을 성공.
준결승에선 컨디션 저조로 기권을 선언한 권지성을 넘어 조 1위로 결승진출을 확정지었다.
"실제로 보니 생각보다 강해보이는 애구나. 결승도 무난하게 이기겠어."
"..."
그리고 한상률은 종별 대회를 찾아온 천병욱을 맞이해주고 있었다.
"어제 기자들한테 전화 왔다 이 녀석아."
"..."
"학교 선생이란 놈이 카메라 무서운 줄 모르고 성질은."
"무슨 말씀이세요. 이 세상 카메라 무서운 거 저보다 잘 아는 사람이 어딨다고."
"후후후. 그래도 정말 장하다. 역시 상률이구나 싶다. 열악한 환경에서 저런 선수를 키워내다니."
"지가 알아서 컸습니다. 전 그냥 체육선생일 뿐이에요."
"결승 마치고 보자.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인사 정도는 시켜주겠지?"
"나중에 뵐게요."
"그래."
경기장에 있는 모두가 죽는시늉까지 해 보이는 연맹의 간부였다. 한상률도 혼자만의 고집을 부릴 순 없었다.
그리고 200미터 결승. 또 다시 구마하의 우승.
시상식을 지켜보는 한상률에게 이주영이 다가와 말한다.
"오우~ 우리 상률이. 간부도 알고 지내고 잘 나가네?"
"시끄러."
"뭐야. 빨리 다 말해. 안 그럼 앞으로 운동장 못 들어오게 할 거야."
"연맹에서 마하 유학 보내자고 그랬어..."
"나쁘지 않은 이야기네."
"그래. 누가봐도 나쁜 이야기는 아니지..."
좋은 기회인 건 맞다. 한상률도 그 점은 인정한다. 다만, 연맹이 선수를 오롯이 선수의 가치로 봐줄 때 이야기지만.
"상률아. 내가 말했지. 당사자가 결정하는 거라고."
"알어. 그만해."
"너나 그만해. 감정이입 하지 마. 너는 너고 마하는 마하야. 똑같은 일이 벌어진다는 보장은 없어."
"알겠다고..."
수상을 마친 구마하가 상장과 메달을 손에 쥐고 찾아온다.
한상률의 옆에는 푸근해 보이는 아저씨가 한 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