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륜기로 가버렷-51화 (51/401)

〈 51화 〉 아테네로 가는 길 (2)

"너. 지금 이게 니 몸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한 일이라면. 이건..."

"형 미안. 근데 나 실은 여자친구 있어..."

"이 자식! 그러니까 전부터 여자친구 있으면 말하라고 했었는데."

"그게... 이런 뜻인 줄을 몰랐지..."

우리 집안 사람들은 양기가 차오르지만 쉽게 생성되는 만큼 소모도 크다고 해준다.

그렇기에 정진을 통한 운기조식(運氣調息)을 배워 힘을 조절하거나 하는 수행이 동반되어야 하는데.

"너는 둘째 치고, 그 친구 한번 데려와. 이쯤되면 그 친구도 별로 좋은 상황 아닐 거야."

"왜...? 무슨 문제있어?"

"마하야 양기는 투쟁심을 불러 일으켜. 너한테 받아들인 양기로 그 친구 성격이 많이 변했을 지도 몰라."

"..."

확실히 최근 다빈이의 말투를 보아하면... 전보단 뭔가 강해진 거 같은...

"그리고 가급적이면 둘이 헤어지는 게 좋을 거 같다."

"속궁합이 안 맞아서?"

"그래. 이대로면 둘 다 파멸이 될 수도 있어."

그 정도라고? 하긴 힘이 없는데 뭔 운동을 하겠냐...

이거 정말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야 되겠다.

대화를 마치고 일어나며 형이 머리에 주먹을 날렸다.

"아! 왜 때려...?"

"그리고! 어린 놈이 적당히 할 것이지. 겁 대가리 없이 이 자식이"

"...미안."

"어이구 이놈아... 어이구 속 터져... 학생이란 놈이 속궁합은 무슨!!"

*    *    *

"다빈이?"

"어. 다빈이 요즘 어때?"

"니 여자친구를 왜 나한테 물어봐? 그리고 우리가 그런 얘기 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던가?"

수원 체고 인수를 통해 어렵게 어렵게 기연정의 연락처를 받아 전화를 걸었다.

"아니. 그냥 옆에서 보는 모습은 어떤가 싶어서 물어보는거지."

"남친은 남친이구나. 안 그래도 걔 요즘 장난 아니긴 하지..."

"왜? 어떤데?"

"애가 힘이 넘쳐. 히스테리도 엄청 부리고."

아이고야. 풀리지 않는 기운이 또 그렇게 가는구나.

키도 작은 게 어떻게 그렇게 에너지가 남아도는지 모르겠단다.

가끔은 남자애들이랑 같이 있는 기분도 들고 그렇단다.

역시나... 형이 맞구나.

나를 만나기 전의 다빈이가 음기가 쌓여 우울함이 가득했다면, 지금은 내 몸에서 뺏어간 양기로 성격이 변해가고 있다.

"처음 너랑 사귄다고 했을 때는 그래도 애가 좀 순박해지는 거 같더라니, 원래의 피곤한 성격이 이제는 더 사람 질리게 만드는 부분이 있지..."

"...파이팅 넘치는 건 다행이네."

만날 때도 보면 나보다 다빈이가 더 나를 원한다.

아니 거의 갈구한다고 봐야 될 거 같다.

의식이 느끼지 못하는 신체의 변화나 기의 흐름이 성격을 좌지우지 하다니.

하긴, 먹는 걸로도 마음이 변하는데, 내공은 말 할 것도 없겠지.

"아 씨! 왜 이렇게 되는 일이 없냐!!"

여자친구를 사귀고, 사랑을 나누고. 그럼 다 끝나는 줄만 알았다.

하긴, 이것도 어떻게 보면 내 책임이지.

다짜고짜 사람을 알기도 전에 선을 넘은 결과가 이렇게 오는구나...

책임을 져야지. 그나마 한 가지 다행이라면 임신은 없는 건가?

여자친구를 사귀고 싶었다. 보다 더 명확하게는 사랑을 받고 싶었다.

그런 조급한 마음에서 쉽고 빠른 길을 택한 것이 큰 실수를 하고 말았다.

다빈이 좋아해? 라는 질문에 늘 좋다고 답했지만.

사람 대 사람으로 그녀를 생각하는 마음을 돌이켜 보면.

솔직히 혜정이를 지켜볼 때 마음보다 덜 한 게 사실이다...

어떻게 해야되나...

그만 끝내자고 하면, 얘 성격에 가만히 있지 않을 거 같은데...

"마하야~♡"

"어. 여기."

"우후후! 나 이번에 마침내 금메달 땄다!!"

"전화로 얘기 했잖아."

"그래도 얼굴 보고 말해주고 싶었단 말야."

"그래. 축하해."

"이제는 부상도 완전히 떨쳐낸 거 같애~! 컨디션 완전 좋아!!"

그래도 아주 나쁜 것만 있는 건 아니구나.

내 몸에서 건너간 기운이 다빈이의 몸을 더 건강하게 만들어 줬다니까. 확실히 애가 전보단 활력이 넘치긴 해.

"넌 좀 어때? 피곤하다며?"

"어. 쉬니까 나아졌어."

"그래? 그럼 집으로 갈까?"

"..."

"왜? 오늘은 괜찮아. 나 친구들 만난다고 얘기하고 왔어. 진짜 10시까지만 가면 돼."

다빈이가 갈아입을 옷도 다 챙겨왔다며 가방을 팡팡 두드리며 보여준다.

"어... 그래. 집으로 가는데, 근데 그 전에."

"음?"

눈빛 바뀌는 거 봐라. 어이고야...

"아니. 햄버거 좀 먹자고. 너 배 안 고파?"

"음. 그래! 맛있는 거 먹자."

화장실로 피해 형한테 문자를 보냈다.

[형. 나 지금 얘랑 집으로 갈 건데. 빨리 와. 안 그럼 나 또 얘한테 먹혀...]

제기랄 이게 뭔 치욕이란 말이냐...

사내새끼가 먹힌다 마다 이런 걱정을 해야 하다니...

아이고 이 지긋지긋한 사랑(?)아...

*     *    *

"이거 봐. 오늘은 스타킹도 하나 더 챙겼고"

"..."

"그리고 이거! 이쁘지! 혼자 마트가서 사려는데... 사람들 막 다 쳐다보는 거 같고..."

티 팬티와 스타킹 등등. 정성도 갸륵해라. 둘이 있을 때 했던 말들을 아주 꼼꼼하게도 기억해주고 있었네.

"나 먼저 씻어? 아님 같이 씻을까?"

"저기. 다빈아..."

"응?"

"...우리 그만 헤어지자."

상처 주고 싶지 않았다. 좋아해주고 싶었다.

한편으론 지금도 나한테 이만큼 해줄 수 있는 여자친구가 또 올까 싶지만.

일단 둘 다 살고 봐야 될 거 아니겠는가...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어우야. 목소리가 너무 무서워...

어떻게 사람 목소리가 이렇게 중저음으로 한번에 떨어질 수 있지?

"아니. 그러니까..."

"왜? 뭐 때문에?"

"다빈아. 너 지금 조금 과해."

"뭐가? 내가 뭐가 과한데."

"이런 거. 야! 아무리 그래도 여자애가 먼저 막 이런 걸 준비하고."

"...너 혹시 걔 만났어?"

"누구? 내가 누굴 만나?"

"그 파트너."

"아! 아냐! 요즘엔 얼굴도 못 보고 있어."

"근데 왜 그런 이상한 소리를 하고 그래... 그리고 이게 뭐 어쨌다고? 이것도 니가 좋아하니까!!"

야! 야!! 티 팬티 그렇게 막 얼굴로 내밀지 말라고... 야한 게 무서워 지잖아...

"흐아앙! 갑자기 왜!? 왜 헤어져야 되는데!!"

"...울지말고. 이것도 다 너를 생각해서 하는 말이니까."

"안돼! 싫어!!"

"야. 다빈아. 어이 아 진짜! 야!!"

"벗어! 빨리 벗으란 말야!! 이거 내 꺼야!!"

미치겠네. 찌그만한게 뭐 이렇게 힘이 좋아서.

남수가 맞았다. 다빈이는 나를 좋아하는 게 아닌, 나와 함께 있어 할 수 있는 쾌락에 빠져 있었다.

어떻게 보면 나보다 이 똘똘이란 녀석을 더 사랑하는 거지. 단지 그것이 붙어있는 주체가 나일 뿐이고.

즐거움을 뺏기자, 귀엽던 다람쥐가 먹이 빼앗긴 짐승 마냥 달려들었다.

겨우 겨우 힘으로 진정 시키고 말해줬다.

"이 씨! 너 이거 안 놔!!"

"좀 진정하라고!!"

"그냥 이대로 할래? 난 그래도 괜찮아."

"으아아! 다빈아! 제발 정신차려!! 좀!!"

고향에 계신 아버지. 제가 잘못했어요...

우리 다빈이 좀 구해주세요...

원래는 되게 착한 애에요. 제가 나쁜 놈입니다...

다시는 쾌락을 먼저 생각하지 않을게요.

"흑 흐윽... 갑자기 말도 없이 이러는 게 어딨어... 난 오늘도 너 본다고 얼마나 설레여 하면서 준비했는데."

"정말 미안... 그렇지만, 이런 건 내가 바라던 게 아니야..."

"난 진짜 너니까 그랬던 건데 정말로 다 줬는데... 으아앙~"

진짜... 부담 장난 아니구나...

한편으론 세상 그 어떤 압박을 받더라도 견딜 수 있을 것 같다.

방에서 다빈이를 진정 시키는데, 철컥철컥 문 여는 소리가 들린다.

형이다. 형이 왔다!

혀엉~~!

"누구야? 누가 와?"

"우리 형."

"..."

"너 한번 만나게 해달라고 그래서."

"헤어지자며!!! 근데 왜 가족을 인사 시켜 주는데!!"

형. 빨리 들어와... 와서 좀 구해줘...

"마하야?"

"어. 형! 나 여기."

"친구도 같이 있어?"

"어! 방에."

어찌됐든 형 목소리가 들리자 다빈이도 울던 걸 멈추고 끄윽 끄윽 감정을 누르고 있다.

방에서 나와 형을 맞이했다.

형도 방 안쪽을 기웃기웃 걱정 어린 눈빛으로 지켜보는데, 일단 내가 옷을 입고 있는 걸 보며 안심하는 것 같다.

"저기. 나 마하 형이에요?"

"네... 잠시만요..."

"나와봐요. 뭐라고 하는 거 아니니까."

그리고 잠시 뒤. 다빈이도 어느 정도 마음이 진정됐는지 부스럭 거리고 나올 준비를 하는데.

와~ 진짜 살다살다 사람 눈빛이 그렇게 변하는 걸 내가 여기서 볼 줄 이야...

"울었어요?"

"아 아니요..."

"마하야. 너 혹시 친구한테 뭐 이상한 짓 한 거 아니지?

"아니... 나는 안 했어."

그렇게 나를 저주하던 다빈이의 눈빛이 형을 보면서 애정으로 가득 차오르고 있다.

꼭 뭔가 경이로운 것을 보는 것 같다.

잘 생기고 멋진 남자를 볼 때 사랑에 빠지는 소녀의 표정이 이런 거구나...

"정말로 너희 형이셔...?"

"젠장... 그래... 친형이다..."

"어머~! 안녕하세요~!!"

"하하. 우리 마하 여자친구라면서요?"

"아니요~ 오늘 헤어졌어요~!!"

아프다... 마음이 너무 아프다...

이별의 상처를 이런 식으로 느끼고 싶진 않았다.

젠장 잘생긴 인간들 다 좀 어디로 사라졌으면...

근데 그러면 또 형도 사라지고...

아 막막한 인생아...

*    *   *

"아아~ 네~~"

"그래서 내가 동생한테도 말했는데, 이 녀석이 행동을 잘 못 한 거 같네요."

"호호호~ 아니요.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셔도 돼요."

장난아니게 조신하네... 아까는 뭔데? 귀신이라도 쓰였던 거야?

"다빈양. 정말 미안해요. 이놈이 어릴 때 약을 잘 못 먹었는데, 그런 기운이 다빈 양한테도 악영향을 끼친 거 같아요."

"아~ 하하하~ 그랬었군요."

뭐가 그렇다는 건데? 뭘 이해하고 있는 거냐고?

형이 내공에 대해서 대충 어릴 때 약이니 뭐니 허무맹랑하게 말하고 있는데, 다빈이는 연신 고개를 끄덕끄덕 거리며 네. 오빠 말이 다 맞아요. 세상은 거짓이에요 라는 반응을 보여준다.

"너무 귀여운 친군데 이번 일로 큰 상처 받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호호호~ 말씀 놓으세요. 제가 뭐라고 이렇게 존대를 해주시고."

"..."

"어떻게 그래요. 우리 동생 친군데."

"형? 내 친구들한테는 되게 편하게 말하잖아..."

"남자랑 여자가 같냐."

대화 중간 형이 다빈이한테 손 좀 내밀어 보라고 했다.

"소... 손이요?"

"네. 여기까지 왔는데 손금 좀 봐줄게요."

오오~ 우리 형 여자들 이렇게 작업하는구나?

"마하야.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뭘? 내가 뭔 생각을 했는데."

"훗. 자식."

나와 있을 때보다 더 긴장한 모습으로 다빈이가 조심조심 손을 내밀었다.

어라? 근데?

"으음. 성격이 좋네. 재능도 뛰어나고."

"아하하~ 정말요?"

이건 뭐지? 형 몸에서 은은한 빚이 흘러나와 그게 다빈이 몸으로 이어지고 있다.

"건강도 아무 문제 없을 거고. 돈도 많이 벌고."

"일부러 듣기 좋은 말씀만 해주시는 거 아니세요?"

"아니지. 그리고 남자친구도 우리 마하보다 훨씬 멋있고 좋은 사람 만날 거고."

"우와~♡"

우와... 우와하하. 아하하하!

그래. 이렇게 안녕이다 여자친구여.

*    *    *

다빈이를 버스 정거장까지 데려다 주는 길이었다.

"뭔가 아까 너희 오빠가 손금 봐주고 마음이 차분해 졌어. 아까는 그렇게 슬펐는데, 지금은 아무렇지 않어. 왜 이러지?"

"다행이지 뭐."

"너희 오빠 보고 마음이 변했나?"

"하하하~!"

음양이 조화를 이룰 때 오는 차분함이겠지.

아마도 형은 알게 모르게 다빈이의 널뛰는 내공을 안정화 시켰던 거 같다.

그렇게 넘어가야지. 안 그러면 또 괜히 뭔가 마음만 아프다고.

"진짜로 너희 형 맞지?"

"맞다니까... 아버지랑 엄마도 똑같애... 친형제야."

"..."

"아 너는 왜 그렇게 생겼어? 같은 시선으로 보지 마!"

"음. 뭔가 좀... 에잇~!!"

다빈이도 두 손을 머리 위로 흔들흔들 상념을 날리는 것 같다.

"그래도 난 너랑 있어서 좋았어."

"나도야."

"이제서 하는 말인데... 솔직히 널 만나는 것 보다 마음 편하게 할 수 있다는 게 더 좋았던 것도 사실이긴 해."

"고맙다. 솔직하게 말해줘서."

"얘가 이래서 파트너가 있었구나 싶었어. 늘 그게 불안하기도 했고."

"후후. 나 그렇게 인기 없다니까."

"뭔가 너랑 이렇게 꼭 안고 있거나 할 때는 정말 모든 불안이나 걱정이 사라지는 기분이기도 하고. 또 뭔가 실력도 잘 나오고. 자신감도 생기고."

"그래. 사랑이 그런 힘이 있지."

"사랑이라고 해?"

"사랑이지 그럼. 빠구리. 떡. 오입질 이런 말 쓸까?"

"오~ 구마하. 생각보다 낭만적인데?"

"많이 노력하는 편이야."

"낭만적이었다라. 그러게. 그런 걸 하나도 모르고 지나왔네."

"미안."

"됐어. 그런 얘기 하지 마."

어느덧 버스 정거장이다.

일부러 집 가까이 있는 정거장을 피해 송파까지 가는 노선을 찾아왔는데도 헤어져야 하는 순간은 다가왔다.

"마하야 잠깐만 이리로 와 봐."

"응."

키스하게 고개 좀 낮추라는 말이다.

주변에 보는 눈이 있지만 아랑곳 않고 고개를 숙이니, 다빈이도 쪽 거리고 가벼운 입맞춤을 해줬다.

쪽팔린 거 뭐. 둘이 나누던 키스도 이게 마지막인데.

"있어. 갈게."

"그래. 시합 때 보면 아는 척 하자."

"..."

아련한 눈빛이구나. 그래도 나를 아주 섹스토이로 생각한 건 아니었나 봐.

혜정이도 그러더니, 다들 아무 감정 없이 그런 관계가 되는 건 아닌 걸까?

조금씩은 나를 좋아해주고 있던 걸까?

"조심해 가."

"응. 안녕..."

감정의 극과 극을 경험한 다빈이니까. 분명 다음에 그녀를 만나는 사람은 세상 더 없이 사랑스러운 여자친구를 만나게 되겠지.

"아이고. 남 좋을 일만 시키는구나... 뭐 그렇다고 해야지."

거리에 아련한 감정을 남겨두고 집으로 돌아왔다.

"친구는 갔어?"

"어."

"귀엽더라. 너 은근 얼굴 많이 따지는구나?"

"형. 아까 그건 어떻게 하는 거야?"

"뭐? 설마 그게 보였어?"

"아니. 손금 보는 거. 그것도 뭔가 배워야 돼?"

"하하~! 그냥 듣기 좋은 이야기 해주는 거지. 내가 손금을 어떻게 봐."

"나도 다음에 여자 만날 때 써먹어야지."

"어이구 이놈아. 제발 운동이나 열심히 해..."

예전에 남수가 그런 말을 해준 적이 있었다.

고민하지 말고 끝을 봐라. 적어도 미련은 남기지 않을 거 아니냐.

태릉과 여자친구를 다시 선택하라고 해도 역시 나는 후자를 택할 거 같다.

조금의 아픔을 겪었지만, 어떻게 사랑을 시작해야 하는지 배울 수 있었으니까.

훈련이 다 그런 것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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