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화 〉 아테네로 가는 길 (4)
6월 초. 한주 고등학교.
기상청은 벌써부터 올 여름 기록적인 폭염이 닥칠 거라고 겁박을 주고 있고, 여기저기 가는 곳마다 에어컨을 틀지 않으면 숨이 퍽퍽 막히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나는 뛴다.
"어우 덥다."
"이게 더워?"
"나 작년 합숙이 내 첫 훈련이나 다를 거 없어. 여름에 운동 처음이야"
"하하! 좀만한 새끼."
트랙을 돌다 잠깐 동민이와 이야기를 나눴다.
"다빈이랑 끝냈다고?"
"음. 아무래도 둘 다 운동에 집중이 안 되더라고."
"각오 보소. 넌 그런 애랑 사귀면서 운동을 신경 쓰냐?"
"여러 이유가 있어. 아무튼, 난 다시 뛴다."
"야. 설설해. 니 때문에 감독님들이 기대치만 높아지잖아!!"
"하하! 멋진 주장이라니까."
햇빛 아래 있는 게 좋았다.
태양의 기운이 부족한 양기를 채워주는 것 같다. 더우면서도 몸이 따뜻해 지는 게 느껴진다.
와 설마 그 정도로 기운이 빠져있을줄은...
내공이란 생각보다 만능은 아닌 거 같다.
"마하 형. 형은 국가대표 선발전 나갈꺼죠?"
"그렇지. 나가봐야지."
"크으! 되기만 하면 태극마크. 형 나중에 우리 모르는 척 하면 안돼요."
"너나 그러지 마."
이제는 한주 고등학교가 꼭 내가 다니는 학교 같기도 하고 그렇다.
학교 지리도 빠삭하고, 동민이 통해서 이 학교 다니는 친구들도 많이 알게 됐고, 오며가며 선생님들도 수고하라고 인사도 해주신다.
생각해보면 정말 고마운 사람들이 너무 많다.
두 분 감독님들은 물론이고, 한주 고 친구들이나 동생들.
늘 응원(?)해주는 우리 친구들. 우리 학교 선생님들.
우리 형 구마윤. 혜정이나 다빈이도 잊을 수 없지.
올림픽 선수촌을 목표로 시작한 일이 이제 진짜로 선수선발전을 목전에 두고 있다.
내가 아는 고마운 사람들 그 이상의 국민들의 기대감을 받아내야 하는 자리라.
국가대표가 된다는 무게감이 이런 것인가?
"태극마크라..."
어우 씨발 것. 그렇게 따지니까 존나 부담되는데?
장난 아니구만. 쫄려서 어디 외국 선수랑 손이라도 잡아보겠어?
이러쿵 저러쿵 주절주절 거리지만, 그것도 선수선발전을 통과했을 때 이야기다.
지금은 다른 무엇보다 컨디션을 돌려놓아야 했다.
"마하야! 감독님들이 너 잠깐 오래."
한주 고 체육실로 건너갔다.
이 감독님과 한 감독님이 앉아 계셨다.
"부르셨어요?"
"어. 몸은 좀 어떠냐?"
"괜찮아지고 있어요."
"음. 마하야. 중거리를 접고 단거리에 집중하면 어떻겠니?"
"네? 그건 이제 없던 이야기로 하시기로."
이 감독님을 보는데, 내 의견이 아니라는 듯 한 감독님을 손가락을 가리키셨다.
"갑자기 왜요...?"
"아무래도 컨디션이 지난 달보단 떨어지는 게 사실이니까."
"그래도 저 다 하고 싶은데."
"상률아. 그냥 얘기해주는 게 좋을 거 같다."
"음."
그래서 또 무슨 뭐가 있나 싶었더니.
"초청선수요?"
"어. 뭔지는 먼저 얘기해줬지?"
"네."
IOC에서 보내주는 올림픽 초대장.
아마추어 선수들이 세계무대에 설 수 있는 특별한 기회가 아니던가.
너무 뜻밖의 일이고 당황스러워 기쁘다는 느낌도 들지 않았다.
"제가 올림픽을 간다고요...?"
"일단은 그런데, 지금 경우는 상황이 조금 복잡하다 봐야지."
"어떤 식으로요?"
"저쪽이 몸이 달아오르는 거 같다. 나도 생각 없이 무턱대고 던지긴 했다지만."
감독님과 연맹 사이에 무슨 이야기가 있었다고 하신다.
원래는 우리쪽에서 먼저 연락하기로 했는데, 올림픽이 가까이 오며 육상연맹에서 확고한 대답을 기다리고 있단다.
"그래서 가까운 시일에 확인을 좀 해보고 싶다고 하는데, 너 먼저 더 빨리 달릴 수 있다고 했었지?"
"네."
"얼마까지 가능할 거 같니?"
"글쎄요. 역시 그건 뛰어보지 않고서야..."
더 빨리 뛸 수는 있다.
하지만, 그건 4월 말 종별 때회 때 이야기지. 지금 당장이라면 국내 대회는 몰라도...
"얼마를 보고 싶다고 하시는데요?"
"오오~ 마하야. 그게 니 마음대로 조절이 되는 거냐?"
"하하하! 아니죠 감독님. 그냥 연맹이 바라는 게 어느정도인지 궁금해서."
"미안하다. 9초라고 했었다."
와우... 높기도 해라...
일단 정리를 좀 해봤다.
"그러니까. 제가 9초를 뛰면?"
"초청선수 자격을 얻어 육상연맹의 조커가 되는 것이고. 아니면 정당하게 선수 선발전을 치러 대표팀에 합류한다."
"일단 어느쪽으로 가나 저한테 나쁠 건 없는 이야기네요."
"그렇지. 당장으로서는."
"그래서 상률이도 중거리를 포기하고 단거리에 집중하자는 의견을 주는거야."
"음. 근데, 딱히 중거리를 접는다고 단거리 속도가 오르는 건 아닌 거 같은데..."
"욕심부리지 말고. 잘 판단해 봐."
"그래. 대표팀에 합류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니까."
"알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어떻게든 몸을 돌려놓을게요."
정말 예상하지 못 한 이야기였다.
물론 내공이야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돌아오겠지만, 문제는 시간이 부족하다는 건데.
이래서 선수는 딴 짓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구나. 몸이 재산이니까.
그래도 다빈이를 원망하진 않는다. 사귈 땐 힘들었어도, 헤어지고 나니 그땐 그때 나름 좋았다는 추억이 가득하거든.
아무튼, 형한테 물어보았다.
단시간에 내공을 채우려면 뭘 어떻게 해야하는가?
"으음. 그런 게 어딨어?"
"진짜? 기운을 한방에 훅 되돌릴 방법은 몰라?"
"없어. 여기가 곤륜이면 천년설삼이라도 한 뿌리 달여먹겠지만."
"보양식 먹으면 안 되려나?"
"지금 몸에 보양식 먹으려면 양이 장난 아닐 건데, 너 살 쪄도 괜찮아?"
"그건 아니지."
"마하야. 몸은 서두른다고 되는 게 아니야. 천천히 잘 추슬러 봐."
형은 천천히 가라고 했지만, 어찌됐든 올림픽이고, 조건만 맞으면 확실한 티켓이 내 손에 쥐어진다.
혼자 해결을 봐야겠다.
"자. 이론적으로 보자고."
부족한 양기를 보충하기 위해 특단의 대책을 마련하고 있었다.
우리 집안 사람들은 양기가 빠르게 차오르는 특성이 있다.
간단하게 가자고. 특성을 살리면 되는 거 아냐?
"양기가 부족한 이유가 뭐겠어? 결국 소모해서 그런 거잖아. 그럼 빨리 채워놓고 소모하지 않으면."
남는 양기는 다시 몸 안에 남게 되겠지. 안 그래?
그래서 야동을 틀었다.
단, 보기만 한다. 절대 손을 대지 않는다.
금딸이다!!
"후우..."
와 씨발 이론적으론 말이 되는데. 과연 이게 될까?
내가 야동을 보면서 가만 있을 수 있다고??
휴지가 저렇게 있는데, 집에 아무도 없는데. 의자가 오랜만에 이렇게 편하게 느껴지는데???
"..."
그래도 참아야지. 올림픽이니까.
마침 정석이가 먼저 구워준 CD가 있었다.
혜정이 만나고 다빈이 만나고 이러면서 멀리하고 있던 건데 마침내 보는구나.
"아~! 야메때 구다사이~!"
오우 미친... 안돼. 이건 안 된다.
개새끼 노모를 주고있어! FBI 워닝이라고!
와 위험했다... 20초만 더 봤어도 휴지부터 뽑아놓고 봤을 것다.
그래서 다른 씨디를 넣어보니 여기는 서양물인데.
"어우야~ 남자 몸 좋다. 근육봐라."
무슨 레슬링 선수 같은 사람이 수영장에 있는 여리여리한 금발 미녀 옆에서 청소를 하고 있다.
"저런 몸으로 저런 장소에서 청소라. 실패한 운동선수의 미래도 그닥 나쁜 건 아니구나."
그리고 진짜 별 개연성 없이 마구마구 하기 시작하는데.
"아... 뭔가 서양 건 저 표정이 마음에 안 들어."
일단, 나쁘지 않다. 자극은 오지만, 즉, 존나 꼴리고는 있지만.
저 화를 내는지 뭔지 모르는 씰룩대는 여자들의 표정을 보고 있자면 딱히 녀석을 쓰다듬고 싶어지진 않는다.
"아우... 미치겠네."
그럼에도 포르노는 포르노.
야동을 이렇게 오래 본 건 처음인 거 같다.
내가 진짜 인내심이 엄청나구나. 생각보다 운동에 대한 마음이 진지했었네.
고통의 연속이었다.
똘똘이 녀석도 갑자기 누나들은 어디가고 이렇게 나를 외면하냐는 듯 구슬피 눈물을 흘리지만(쿠퍼액은 그냥 나오는구나?) 그럼에도 끝까지 건드리지 않았다.
"오케이! 한편 끝!"
몸으로 양기가 어느정도 채워지는 게 느껴진다.
대략 필요한 양이 100이라고 치자면 지금은 한 40정도?
이런 식이면 앞으로 일주일이면 얼추 다시 예전 기운을 찾을 수 있을 거 같다.
과연 내가 기록을 위해서 야동 2시간을 참고 봤다는 걸 세상이 알면 뭐라고 할까?
뭐라고 하긴 뭐라고 해. 그냥 한심한 새끼라고 하겠지.
흑흑 서글픈지고...
* * *
"컨디션은 많이 돌아왔냐?"
"네. 이제는 많이 나아졌습니다."
"미안하다. 내가 괜히 들떠서 입방정을 떨었다가."
"괜찮습니다. 오히려 저한테 큰 기회가 됐는데요."
비공식으로 열리는 기록측정을 위해 한 감독님 이 감독님과 함께 차를 타고 가고 있었다.
"근데, 감독님 어디서 하는데 굳이 서울까지 가요?"
"후후. 듣고 놀라지 마라."
"이야~ 마하 부럽다. 나도 여기서 뛴 건 대학 때 한번 밖에 없었는데."
잠실 올림픽 스타디움.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이 열린 육상인들의 성지.
"오오..."
"오랜만에 보니까 느낌이 다른 걸."
"그러게. 요즘엔 잠실에서 뛸 일이 없으니까."
이 감독님 말씀이 막상 육상인들의 성지인 잠실 주경기장은 여러 이해관계가 얽히고 섥혀 2001년을 마지막으로 대회가 열리지 않고 있단다.
"왜요? 이렇게 좋은 게 있는데."
"근처에 지방에서 올라오는 선수들 머무를 숙박시설이 없어서."
"와... 그런 것도 따지는구나."
"진짜로? 그런 이유 때문에 그래?"
"말은 그렇지만, 대관료도 있고 뭐 여러 사정 있겠지."
아무튼, 그렇게 오래동안 비워둔 운동장에서 비공식 기록측정을 가지게 됐다.
떨린다. 여기가 어딘지는 알아도, 사진이나 영상에서나 봤지 내가 뛸 줄이야.
주 경기장의 외부만 보는데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보자. 선생님도 오실 때가 됐는데."
"상률아. 저 차 아니냐?"
"어? 누가 같이 있나?"
승용차 두 대가 우리들 앞에서 멈추고, 한 차에서 먼저 뵀던 대사부님이 내리셨다.
"마하야."
"대사부님! 안녕하셨습니까!"
"그래. 잘 지냈니?"
꾸벅꾸벅 대사부님과 인사를 나누고 있는데, 운전석에서 어떤 강해보이는 아저씨가 내리셨다.
"허허. 이거 참... 또 예상 못 한 인물이..."
"어쭈 한상률이. 지금 웃어? 이제 형한테 인사도 안 한다 이거지?"
"오랜만에 뵙습니다. 두희 선배."
"그래. 오랜만이다 이놈아. 아주 그냥 죽은 줄 알았는데 살아 있었구나!"
"하하. 미안해요."
대사부님과 인사를 나누고 있어 자세히 못 봤는데, 이 감독님도 건너가 강해보이는 아저씨와 인사를 나누셨다.
"와...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선배님."
"어. 반가워. 이야기 많이 들었어. 한주 고도 요즘 실력 많이 올랐다지?"
"다 저 친구가 잘해줘서 그렇죠."
"대사부님. 저분은 누구세요?"
"선배님. 대사부님은 또 뭡니까?"
"하하하~! 인사해라. 이두희라고 마하도 들어봤지?"
이두희...? 설마?
"반갑다. 너가 구마하냐."
"..."
와 나도 이분 알어... 어렸을 때 TV에서 봤어.
아시안게임 육상 장애물 달리기 메달리스트 이두희.
대한민국 단거리 종목 첫 메달리스트가 아닌가?
"뭐야? 내 얼굴에 뭐 묻었어? 뭘 그렇게 뚫어지게 쳐다 봐?"
"......"
"야 상률아. 니네 학생"
"우와-! 우와~!! 안녕하세요!!!"
"어우 깜짝이야..."
먼저 대사부님 통해서도 태릉 분들을 만났지만, 그분들은 트레이너나 연맹 관계자들이었지, 진짜 현 국가대표를 이끄는 지도자는 처음이었다.
근데 감독이라니. 이두희라니!
한국 육상 최고 아웃풋을 이런 자리에서!!
"아 악수 한번만!! 부... 부탁드려도!!"
"뭐야? 선배님. 뭔가 생각과는 많이 다른 친군데요?"
"그래서 내가 말했잖냐. 아직 학생이라고."
* * *
구마하와 함께 다 같이 운동장으로 이동하는 육상인들.
늦은 시각 밤 9시. 날씨는 선선했고 바람은 없었다.
"비공식이라곤 하지만, 설마 대표팀 감독이 올 줄이야."
"그러게. 나도 두희 선배가 대표팀에 있을 줄 몰랐네."
"저분은 성격 어떠냐?"
"좋지. 프라이드가 너무 강한 것만 빼면."
"메달리스튼데, 자존심 강하면 어때."
한상률과 이주영이 이두희 감독의 무게감을 재고 있을 때.
구마하는 출발지에 서서 주변을 두리번 거리고 있었다.
"마하야. 어른들 때문에 긴장되니?"
"아니요."
"근데 뭘 그렇게 두리번 거리고 있어?"
두리번 거릴 수 밖에.
88년 이 자리에서 칼 루이스와 벤 존슨이 뛰었다.
시합은 벤 존슨이 이겼으나, 훗날 도핑이 걸려 칼 루이스의 우승이 확정.
100미터와 넓이뛰기의 2관왕을 올린 칼 루이스는 미국 육상의 영웅이었다.
"뭔가 엄청 멋있어요."
비공식 시합을 위해 간이 조명만 들어온 잠실 주경기장.
비어있는 넓은 객석을 돌아보며 운동장 구석구석을 살펴보는 구마하는 그곳에서 올림픽의 흔적을 찾는다.
"..."
이 순간을 넘기면 아테네라는 건가... 올림픽의 발상지에 내가 가는 건가?
구마하의 마음에 내공의 한계를 돌파하고 싶은 의욕이 불끈 솟아 오른다.
"준비됐으면 시작하지."
"네. 마하야?"
"네!!"
구마하가 출발 자세를 갖춘다.
한상률과 이주영은 마음으로 응원을 건네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상률아 될까...?"
"된다. 그렇게 믿자. 아니어도 여기까지 온 이상 우리가 해줄 건 없어."
천병욱이 스타트 건을 들어 올렸다.
이두희는 결승지점에 팔짱을 끼고 서 서 매의 눈으로 지켜본다.
정적이 내려 앉으며 구마하도 정신을 비워낸다.
야한 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어떠한 번민도 없었다.
그저 명경지수(明鏡止水).
잔잔한 물가에 몸을 띄운 듯 고요함이 가득 차오르는 그때.
탕! 허공에 사라지는 총성이 어두운 밤하늘을 가득 채우고 구마하가 트랙을 뛰쳐 나갔다.
연맹에서 준비한 스탭들이 기록을 재고 있었다.
이두희도 남몰래 준비한 스탑워치를 팔짱 안에 감추고 구마하가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빠르다...!
다른 말이 필요 없는 감상이다.
다들 농담이 아니었구나. 이 녀석은 괴물이야.
팍! 팍! 팍! 거친 발소리가 결승지점에 서있던 이두희와 육상 스탶의 앞을 지나치고.
"헉- 헉!"
구마하가 결승선을 지나 숨을 몰아쉬며, 출발 지점에 있던 천병욱과 한상률 이주영이 달려온다.
이두희와 스탭들이 먼저 서로를 보았다.
그의 시계에서 9.77 스탭들의 기록에서 9.74라는 숫자가 찍혀 있었다.
"이거 맞어? 확실해?"
"...네. 맞습니다. 오차 없습니다."
컴퓨터 앞으로 다가온 사람들도 기록을 보며 만세를 질렀다.
천병욱은 울컥이는 마음을 누르며 구마하에게 다가가 그를 와락 안아주며 말했다.
"헉 헉! 대사부님? 저 몇 초 나왔어요?"
"하하하! 마하야! 가자! 아테네로 가는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