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화 〉 태극기가 바람에 펄럭입니다 (3)
아테네 공항에서 입국 수속을 기다리는 중.
각국에서 몰려든 선수들로 공항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어이구야. 사람 미쳤네..."
"인천공항도 그랬지만, 여기 오니까 확실히 느낌이 다르네요."
"그러니까. 외국 선수들 보는데 왜 내가 떨리냐..."
"감독님. 이렇게 보면 우리나라도 선수단 규모가 제법 되는데요?"
"그럼. 한국 정도면 스포츠 강국이지."
이번 아테네 올림픽에 200여명의 선수단을 파견한 대한민국 체육회.
육상도 마라톤을 필두로 장대높이뛰기 창 던지기 경보 등등 다양한 종목에 열세명 역대 최대 규모의 팀원이 참가했다.
그런데도, 트랙 종목 출전자는 나 한 사람 밖에 없었다.
안타깝지만, 어른들이 말씀하신 대로 국제대회 포인트를 확보하지 못 한 것 같다.
그런 상황에 초청 선수로 덩그러니 단복을 입고 있으니, 괜히 눈치가 보이는데 다들 친절하게 대해주셔서 감사할 따름이다.
"저기"
"네?"
"예. 왜 그러십니까?"
"육상팀 모이라고 하십니다."
한 감독님과 두리번두리번 사람들을 따라 움직였다.
멀리 이두희 감독님과 코치님들이 선수들을 한 자리로 불러 모으고 계셨다.
"여권들 받으셨죠? 숙소 배정표 확인해 보시고 이제 이동합니다."
우리는 경보팀과 한 숙소에 머물게 됐다.
코치님들 없이 선수만으로 구성된 경보팀은 다들 20대 후반 30대 어른들이라 내가 가깝게 지내긴 어려울 거 같다.
또래 친구가 있으면 좋은데, 수영은 한두 명 고등학생 같은 애들이 보이던데 나중에 가서 인사나 해볼까?
출국장을 나오는 길. 한쪽에 커다란 오륜기와 함께 웰 컴 홈이란 문구가 눈에 띄였다.
"웰컴홈이라. 감독님. 저건 외국 갔다 돌아온 선수들한테 하는 말일까요?"
"글쎄. 내가 봤을 땐 올림픽이 고향으로 돌아왔다는 말 같은데."
"올림픽이 돌아왔다라."
"뭔가 감동적이네. 마하야 서봐라. 사진 한 장 찍자."
"감독님 같이 찍어요."
"두 사람 서보세요. 제가 찍어드릴게요."
지구인의 축제 올림픽. 여기서 나는 어떤 추억을 만들어 갈 수 있을까?
* * *
아테네 북동쪽에 위치한 선수촌.
허허벌판에 지어진 작은 건물들은 뭔가 작은 마을을 옮겨다 놓은 것 같았다.
3년 전 911테러가 벌어지고 열리는 첫 하계 올림픽이라 그런가, 입구부터 총 든 군인들이 살벌한 경계를 서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그래도 정문을 통과하고 난 다음에 펼쳐지는 분위기는 더 없이 자유로웠다.
"아이고 덥다... 누가 지중해 아니랄까봐..."
"엄청 뜨겁네요. 햇빛 장난 아닌데요?"
"그나저나 마하야 이거 진짜냐? 내가 진짜 지금 올림픽을 온 게 맞는거냐...?"
"하하! 좋으세요?"
"모르겠어. 마냥 좋아하자니 너를 보면 그러지도 못하겠고..."
"제가 왜요?"
"부담 없어?"
"부담은요. 여기야말로 제 꿈의 무대였는데."
별자리 이름은 그리스 신화에서 나왔다.
한국인 숙소가 위치한 중앙구역도 안드로메다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이름 보소. 나의 꿈을 이룰 곳이 안드로메다라는 건가? 간지나는구나.
콘돔은 어딨지? 보통 입구에 쌓아뒀다고 하던데? 어디 입구를 말하는 거지??
하지만, 꿈도 감동도 잠시. 역시나 피로에 지친 몸을 달래는 게 우선이었다.
"아. 피곤해라..."
"일어나자. 밥 먹으러 가야지. 먹고와서 쉬어."
"네."
올림픽에 앞서 태릉을 중심으로 한 대한체육회는 선수들의 모든 에너지를 소모시킨다.
이와같은 방침은 개인훈련을 하는 나에게도 똑같이 작용했는데. 큰 대회를 앞두고 체력을 탈진시키는 건 나름의 전략성이 있었다.
이렇게 기진맥진한 상태로 현지에 도착하면, 시차적응이고 뭐고 바로 골아 떨어져 현지시간에 빠르게 몸을 익힐 수 있고, 대회에 앞서 충분한 휴식과 휴가는 방전된 체력을 완충하고 멘탈리티에 있어서도 큰 효과를 본다.
특히, 레슬링이나 유도같은 격투기 종목이 예전부터 이런 방법을 써왔는데, 조폭들도 울고 갈 우락부락한 형님들이 흐느적 흐느적 식판을 들고있는 모습을 보면 나는 어디가서 운동했다는 말도 못 하겠다 싶었다.
"미쳤다 진짜. 올림픽 대단하네..."
"먹을 거 진짜 많네요..."
그리고 대망의 선수촌 식사.
식당은 24시간 운영 되는데 세상 맛있는 거 좋은 거는 다 갔다 놓은 것 같다.
한 감독님은 맨날 이렇게 지낼 수 있으면 평생 결혼 안 하고 혼자 살래도 살 수 있을 것 같다고 하셨다.
올림픽 끝날 때까지 이걸 다 먹어볼 수 있을까? 그런데도 왜 나는 밥과 김치를 퍼담고 있는 거지??
"잘 먹겠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근데, 마하야. 너 진짜 괜찮은 거 맞지?"
"네. 왜요?"
"신촌에서도 그랬지만. 운동하는 거 치고는 별로 안 먹는 거 같은데...?"
"괜찮아요. 제가 이상 있으면 바로 말씀 드렸죠."
"흠."
한 감독님도 식욕을 체크해 보시는데, 정말로 이상한 건 모르겠다.
이제는 나도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그냥 몸이 운동에 적응된 거 아닐까 싶었다.
첫날은 큰 이벤트 없이 보냈다.
뭘 하고 싶어도 배가 부르니 졸음이 쏟아져 기절해 자기 바빴다.
다음 날. 여독이 풀리지 않은 사람들도 있고, 당장 한 감독님도 기절해서 주무시는 바람에 조용히 숙소를 빠져나와 돌아다녔다.
"오 극장도 있어."
오락실이나 극장 등. 참가자들을 위한 여가시설이 꽤 잘 되어 있었는데, 무엇보다 좋은 건 다 공짜라는 것이었다.
아침은 샌드위치로 끝내고, 두리번 두리번 인터넷이나 하러갈까? 휴게실로 건너가 보았다.
그런데, 사람들이 너무 많고 줄 서기도 귀찮아 다시 밖으로 나가는 길에.
"뭐야...?"
마침내 마주하게 된 나의 꿈이자 목표 바램 소원 이상향 천국 극락 올림푸스 신전. 오륜기가 인쇄된 은빛포장의 듀렉스 콘돔을 마주하게 된다.
휴게실 입구 큰 바구니에 콘돔이 산더미 같이 쌓여있었다.
"아니 이 위대한 것을 어찌 이렇게..."
그래... 있을 줄 알았어.
씨발! 여기 있을 거라고 믿었다고!!
젠장. 그나저나 왜 이러지? 왜 이렇게 감상적이지...? 경험이 없는 것도 아닌데 한심하게시리...
너무 반가웠다. 진짜 눈물이 날 거 같았다.
메달도 메달이지만, 이놈 한번 똘똘이에 씌워주자고 그간 지나왔던 시간들이... 그 고생들이...
머릿속에서 아테네 여신이 하프를 연주해준다.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어요 선수여 이제 즐거움을 누리세요 라는 것 같다.
하지만.
"흠. 으음."
마음 같아선 한 웅큼 챙겨가고 싶은데, 뭔가 부끄러워서 쉽게 다가가질 못하겠다.
쪽팔리잖아. 사람들이 보고 있다고.
꼭 모두들 보란듯이 나 섹스해요 여러분! 이러는 거 같잖아. 하하하~!
나만 눈치를 보는 건 아니었다.
주변에 자리한 다른 사람들도 괜히 콘돔 바구니를 향해 움찔움찔 부끄러운 미소를 지어보인다.
외국 애들도 저러는구나. 역시 우리는 같은 인간이었어.
그러나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개방적인 사람도 등장하는데.
키가 2미터는 돼 보이는 어떤 흑인 하나가 다가오더니, 콘돔 바구니에 손을 쑥 집어넣어 한 웅큼 집어든다.
그러면서도 여자들을 향해 씩 미소를 보여주니, 여자들도 눈웃음을 지으며 화답해주는데.
자신감 봐라. 존나 멋있다... 진짜 남자구나. 근데 저걸 다 쓰는 건가?
한 사람이 물고를 열자, 너도나도 눈치만 보던 사람들이 낄낄 거리며 다가와 콘돔을 하나 둘 챙기기 시작했다.
나도 용기를 얻어 조심히 다가갔는데. 젠장. 그새 다 가져갔어??
"역시 올림픽 정신... 도전하는 자에게 축복이 내리는 법이지..."
씁쓸함을 달래며 다음 기회를 노려보자 돌아설 수 밖에 없었다.
그때, 어떤 금발머리 외국인 여성이 친구와 다가와 콘돔 통을 슥 쳐다보더니 깔깔 거리고 웃고 지나갔다.
와~ 눈이 엄청 파래. 예쁘다. 얼굴도 되게 예뻤어. 무슨 영화배우 같다.
저 선수는 무슨 종목일까? 설마 우크라이나 사람인가?
하루 이틀,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자, 조금씩 몸도 돌아오고 가슴도 두근 거리기 시작했다.
"마하야. 내일은 훈련장 한번 가보자."
"네."
그러나 훈련장을 가도 사람이 너무 많고, 무엇보다 다들 대회 전 체력을 아끼기 위해 운동이 될 수가 없다.
넘치는 에너지는 다들 밤이면 밤마다 숙소 밖에선 열리는 파티로 풀고 있다.
외국 애들이 클럽 같은 음악에 맞춰 춤추거나 노래를 부르고, 몇몇 선수들은 직접 기타를 들고 와 사람들 앞에서 연주하기도 했다.
"재밌겠다."
"너도 나가서 놀고 싶으면 놀고 와."
"그러고는 싶은데 영어를 못 해서..."
"하하! 그래서 내가 공부하라고 했잖냐."
"아... 진짜 영어 좀 해놓을 걸..."
아까 훈련장에서도 어떤 백인 애랑 부딪히는 바람에 잠깐 인사를 나눴는데, 소통이 되질 않으니 그냥 굿럭이란 말밖에 전해주지 못했다.
파티 중간중간 무리에서 벗어나는 커플들이 보인다.
좋겠다. 당연히 그거겠지?
아... 나도 영어 할 줄 알면 한번 말이라도 걸어보겠는데...
그러나 역시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인가. 그 와중에 여자들과 움직이는 남자들은 누가 봐도 키 크고 얼굴도 모델들같이 멋지게 각이 져 있다.
아까 봤던 흑인은 어디갔을까? 그 사람도 지금 존나 하고 있을 건데.
"에잇 젠장..."
"왜?"
"아니요. 감독님. 저 노트북 좀 써도 돼요?"
"그래라."
첫날 형한테 잘 도착했다는 연락을 보내고 답신이 왔나 메일을 열어보는데.
"어!! 감독님!"
"왜?? 뭐 문제 있어?"
"아니요! 애들 온데요?!!"
"애들? 누구? 정석이 남수?"
"네! 형이랑 같이 응원 온다고 그러는데요?"
"하하~ 진짜로? 어디 봐 봐."
남수가 보내준 메일에 자세한 내막이 담겨 있었다.
정석이가 공부 포기를 선언하고 취직을 목적으로 형한테 같이 응원하러 가자고 했다는데.
"이 새끼들... 입장권은 저한테 준비하라고..."
"하하하~ 있어봐라."
감독님도 삼학년들이 뭔 짓이냐며 툴툴 거리지만, 바로 전화기를 들어 연맹 분들에게 IOC에서 발급한 입장권을 물어보신다.
다시 메일을 읽어본다.
친구들 사정은 둘째치고 형이 온다는 문장이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래... 형이 오는구나..."
우리 형이 해외여행을 오다니... 그 일벌레가 가게를 벗어나다니...
내가 알기로 형이 어딜 놀러 간 건 나 6학년 때 졸업 축하한다고 수원 화성 갔을 때 말곤 없었는데...
"네. 고맙습니다. 됐다 마하야. 입장권 확보했어. 편하게들 오라고 전해줘라."
"하여튼 민폐 덩어리 같은 놈들..."
"잘해야겠다."
"그럼요. 진짜 잘해야죠."
이정석 미친새끼. 그때도 뭔가 투덜투덜 거리는 게 사고칠 거 같더라니...
그래도 존나 고맙다...
개새끼 우리 형 데리고 와줘서 너무 고마워...
올림픽 개막 이틀 전.
형과 친구들을 마중 하러 감독님과 공항에 나와 있었다.
"어이~! 야!!"
"하하하하~!! 지긋지긋한 놈들."
아니, 우리가 무슨 10년 20년 못 본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보자마자 끌어안고 기쁨의 재회를 나누고 있지?
그런데도 서로 욕을 욕을 하면서 웃음이 끊이질 않는다.
"아이고 자식들 시끄럽기도 하지..."
"고생이 많으십니다."
"형님도 애들 데리고 오느라 힘드셨죠?"
"힘들긴요. 재밌었는데요."
"근데 형? 가게는 어떻게 하고 왔어?"
"괜찮아. 직원들한테 잘 부탁한다고 얘기했어."
듣고 보니, 친구들 경비를 다 형이 냈다는데.
아이고 이게 돈이 얼마냐... 하여간 민폐 덩어리 같은 놈들.
"신경 쓰지 마. 내 돈 내가 쓰는데, 니가 뭔 걱정이냐."
"그래! 우리 사장님 돈이야! 넌 시합이나 신경 써!!"
"진짜 어딜가나 이쁨 받을 성격이야..."
그래도 수능이 100일도 안 남은 상태에서 해외여행이라니. 친구들도 나름 큰 각오로 움직여야 했단다.
태윤이는 부모님한테 대학 못 가면 내년부턴 혼자 살라는 말을 들었고, 정석이는 이미 내놓은 자식이나 다름없는 취급을 받고 있단다.
그나마 남수네 부모님이 이왕 가는 거 재밌게 놀고 오라고 하셨다면서 응원도 해주셨단다.
"먼저 혜정이도 봤는데, 잘하라고 전해주라더라."
"그래. 고맙네."
같은 비행기로 천병욱 대 사부님과 육상 연맹 분들도 함께 넘어와 공항에서 만났다.
가족과 친구들이라고 알려드리니, 대 사부님이 그럼 식사를 대접하겠다면서 근처 큰 식당으로 가 자리를 가졌다.
"마하야. 저 아저씨 누구냐?"
"연맹 높은 분."
"오 씨발 너 존나 이뻐한다."
"누가 보면 사귀는 줄 알겠네."
"하하하! 그거 아냐? 난 가끔 니네 이런 헛소리가 그렇게 생각나더라."
형과 친구들은 한국분이 운영하는 민박집에 자리를 잡고 다음 날 관광을 나갔다.
추억을 함께하고 싶었지만, 나는 시합도 있고 몸을 함부로 굴릴 상황이 아니라 숙소에서 명상의 시간을 가졌다.
멀리 시가지 중심 파르테논 신전을 비롯한 수천 년 문화 유산들이 영롱한 조명 빛을 받으며 위용을 뽐낸다.
선수촌은 더 없는 파티 분위기로 떠들썩거렸다.
밤이 깊어가고 에로스는 여기저기 화살을 뿌린다.
그리고 다시 뜨거운 지중해의 태양이 도시를 비췄다.
2004년 8월 13일. 마침내 올림픽 개막.
앞으로 보름 간 201개 IOC 회원국이 참가하는 지구촌의 축제가 열린다.
나는 단거리 100m, 200m 중거리 800m 세 종목과. 이현석 교수님과 연대에서 훈련한 1500m까지 총 네 종목에 출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