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화 〉 태극기가 바람에 펄럭입니다 (4)
"감독님. 그럼 이따가 북한 사람들이랑 밥 먹는 거죠?"
"그렇지."
"잡혀가는 거 아니겠죠?"
"하하하! 정부에서 추진하는 건데 우리가 보안법을 어긴 것도 아니고."
개막식 남북 단일팀 입장으로 북한팀 선수들과 점심 회식이 잡혔다.
북한이라. 형의 이야기가 있어서 그런가 괜히 좀 반가운 기분이고 그렇다.
올림픽 개막에 여기저기 분주한 가운데 혼자 선수휴계실을 찾아갔다.
다들 바쁘기까 지금이면 있겠지? 싶지만, 여전히 콘돔 바구니는 비어있고...
아니, 인간들이 운동은 안 하고 섹스만 하고 사나?
"Hm..."
어? 먼저 그 금발선수다. 얘도 허탕이구나.
그나저나 눈 진짜 파래. 얼굴도 요만해.
혜정이랑 다빈이도 예쁘고 귀엽지만, 외국애랑 비교하니 한국 사람은 한국 사람이구나.
"하... 하이."
"Hello."
인사했다. 외국 여자애랑 인사했어!
그나저나 쟤도 이런데 관심 있다는 건, 역시 그런 뜻인가? 아니면 기념품? 뭐가됐든 올림픽은 개방적이구나.
"KOREAN?"
"예! 예스!"
단복을 입고 있었는데, 금발의 외국인이 가슴에 달린 태극기를 가리키며 한국사람이냐고 물었다.
그녀는 평상복 차림이라 어디냐고 물으니 벨라루스란다.
오오~ 벨라루스라. 구 소비에트 연방의 하나로 동구권 국가가 아니던가. 미녀들이 많은 나라라고 하더니, 과연 그렇다.
무슨 종목이지? 리듬체조가 영어로 뭐였지?
"알 유 지나스틱?"
"No. I'm Tennis Player."
테니스! 어어~ 테니스 좋지. 멋있지!
"굿 럭."
"You too. Thanks."
밝은 미소로 행운을 빌어줬다.
애들 유치원은 국제유치원으로 보내면 되는 걸까?
점심엔 개방적인 올림픽 정신에 맞춰 국가 인종 종교를 차원한 만남을 가졌다.
"반갑습니다 남조선 동무들. 모두 고생한 만큼 좋은 결과 있길 바랍니다."
선수촌 식당에서 북한 사람들과 만나는 자리였다.
기자들도 있고 몇몇 외국 선수들도 남북 만남에 관심을 가지는 것 같다.
북한 사람은 시커멓고 마르고 했지만 우리와 크게 다를 건 없는 것 같다.
그럼에도 TV에서 듣던 북한 말투나 공격적인 시선. 가슴에 달린 인공기와 북한주석의 브로지는 어딘가 다른 나라는 다른 나라구나 하는 걸 느끼게 해준다.
그럼에도 눈이 마주치면 서로 웃음을 지었다.
학교에서 말했던 한민족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싶은 경험이다.
뭐? 난 한국 사람으로 자랐다니까? 곤륜에 큰 정체성이 없어.
혹시나 해서 티벳 사람들도 찾아봤는데, 따로 국가적으로 참가하지는 않은 것 같다. 기회 있을 때 한번 보고 싶었는데.
"저기. 같이 사진 한 장 찍으실래요?"
"네? 저요? 왜요?"
"북한 분 아니세요?"
"...저 한국 사람인데요."
밥 먹다 옷에 뭐 묻을까 단복을 벗고 있었는데, 지나가던 한국 누나들이 북한 사람인줄 알고 카메라를 들이밀었다.
감독님이 배가 찢어져라 웃는 바람에 근처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큰 웃음을 지어보이는 작고 소소한 이벤트였다.
"근데, 너 원래 북한 사람 맞잖아."
"아니라고. 난 태어나고 몇 달 뒤 바로 한국에서 출생신고 했다니까."
개막식은 참가해도 되고 빠져도 되는 자율에 맞겨졌있었다.
감독님과도 이야기 해봤는데, 참가자는 몇 시간을 기다리고 검문도 빠듯하게 한다고 해서, 그냥 형과 친구들이 있는 관중석을 찾아가기로 했다.
아까 낮에 있던 일로 농담을 나누고 있는데 태윤이가 물었다.
"그래서? 북한이고 나발이고 콘돔은 챙겼어?"
"없어. 가면 씨발 누가 다 가져갔어."
"와... 진짜 존나 하는구나..."
"야 그럼 한국 선수들도 해?"
"우리는 대표팀 분위기가 엄격해서 한국 선수촌은 외국인들 많이 없어."
기사에서 봤는데 이번 올림픽엔 시드니를 넘어서는 콘돔이 공수됐단다.
사랑의 올림픽이었다. 누가 그리스 아니랄까봐. 제우스 신의 가호가 내리나...
"예쁜 애들은 있냐?"
"존나 많어. 인형 같은 애들도 되게 많고."
아까 만났던 벨라루스 테니스 선수를 얘기해 주는데 남수가 관심이 많아 보인다.
"너 테니스 좋아했어?"
"아빠가 자주 보는데, 러시아 이쪽이 테니스로 꽤 유명해."
"그래? 누구 있는데?"
"샤라포바. 이번에 윔블던에서 우승했잖아. 걔도 러시아 사람이야."
어쩌면 아까 그 선수도 제법 명성이 있을 수 있겠구나.
허허~ 그런 애도 콘돔을 챙긴다라. 물론 피임은 중요하니까.
바구니가 꽉 차있을 땐 감독님이나 다른 선수들과 있어 움직이기 어렵고, 기회다 싶을 땐 물건이 없다. 어디를 가나 섹스란 어려운 것 같다.
"어이 구하. 넌 언제부터 시작이냐?"
"삼일 뒤."
육상경기는 종목도 많고 선수도 많은지라, 올림픽 기간 내내 열린다고 봐야한다.
21일 100미터부터 시작. 다음 날 22일 200. 삼일 쉬고 25,26일에는 800과 1500을 뛴다.
"1500도 해?"
"그건 또 언제 했냐?"
"이번에 연대해서 훈련 할 때. 이 교수님이 800을 그렇게 뛰는데 1500은 왜 안되냐고 같이 훈련했었어."
"네 종목 참가가 돼?"
"되던데? 초청선수라 그런가?"
"아니 내 말은 니 몸이 그렇게까지 돼냐고."
"이 새끼도 되니까 하겠지."
"하긴, 수영에도 마하 같은 인간 하나 있다고 들었어."
"누구?"
"어. 나도 알어. 마이클 펠튼. 먼저 식당에서 봤는데."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 미국 최연소 나이로 대표팀에 합류한 마이클 팰튼.
우리보다 한 살 많은 사람인데, 그때는 별 성과를 못 냈지만, 몇 달 뒤 열린 대회에서 세계신기록을 냈다고 했었다.
미국 대표팀에서도 꽤 기대받는 사람인가 주변에 코치들도 많고, 인기도 좋은 거 같다.
지난 번 식당에서 봤는데 키도 엄청 크고 팔도 무슨 원숭이 같이 길었다.
육상보다 칼로리 소모가 심하다는 수영 종목에서 단거리 중거리 닥치는대로 출전을 하다니. 내가봐도 괴물이 아닐까 싶다.
"진짜 올림픽은 다르구나... 괴물들만 모아놓은 거 같네..."
"다르지. 세계에서 몸 좋다는 인간들만 모아놨는데."
"씨발. 이 새끼도 몸 좋아. 이 새낀도 괴물같이 생겼어."
"고맙다 병신아."
떠들다보니 하늘이 어두워지며 관중석이 꽉꽉 들어찬다.
매점에 갔던 감독님과 형이 돌아왔는데, 두 분 다 물가가 미쳤다고 불만이 많아 보이셨다.
간단한 패스트 푸드로 저녁을 먹는데, 형이 물었다.
"마하야. 선생님이 그러시는데, 너 밥 안 먹어?"
"아니. 안 먹는 건 아니고. 그닥 배가 안 고파."
"음."
"왜?"
"어디 안 좋은 건 아니지?"
"그런 거 없어. 그냥 몸이 이제 운동에 익숙해진 거 같애."
그래도 혹시 모르니, 형이 잠깐 같이 화장실로 가보잔다.
"왜?"
"잠깐만 같이 가서 봐 봐. 대변 칸 들어가서 잠깐만 벗으면 되잖아."
"아 됐어! 집도 아니고!"
사람들 있는데, 남자 둘이 대변칸을 왜 들어가. 미친 것도 아니고.
"형도 먼저 봤어. 나 그때 테스트 받았던 날 물어봤잖아."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괜찮아. 나도 이제 내 몸을 알어. 문제 있으면 바로 말했어."
"..."
"진짜 괜찮다니까?"
"그래. 뭐. 알겠다."
하여튼, 형도 참... 여기까지와서 내 걱정을 하고있냐.
멀리왔으면, 그냥 재미나게 즐기다 가지 어련히 알아서 잘 할까.
시간이 지나며 운동장에 불이 꺼지고 관중석에선 함성이 터져나온다.
화려한 행사를 시작으로 길고 길었던 선수들 입장을 마치며 성화에 불이 올랐다.
"아우... 엄청 오래하네."
"선수들 입장 이렇게 다 보는 것도 처음이다..."
"원래는 딴 짓 하다가 한국 나올 때만 잠깐 보는데 그치?"
"그러게. 관중석에 있길 잘 했지... 저기 있었으면 얼마나 힘들었을까."
개막식을 끝으로 모두와 또 잠깐 이별의 시간이다.
"파이팅이다.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몸 관리 잘 해 씨발놈아. 알겠지?"
"마하야. 진짜 섹스고 나발이고... 일단은 시합이 우선이야. 정신차려."
"하하하! 미친놈들. 수능 앞두고 해외여행 나온 주제에 존나 지랄이네."
형도 꽉 안아주며 말했다.
"힘내라. 응원하고 있을게."
"어. 고마워."
* * *
취업에 목표를 세운 이정석과 다르게, 김태윤과 박남수는 아직 수험생 신분이었다.
두 친구는 여기까지 문제지를 들고와 공부를 하고, 구마윤은 학습중인 동생들을 피해 이정석과 시내를 돌아다녔다.
"사장님. 여기는 오징어 튀김에 레몬을 뿌리네요?"
"정석아. 그냥 편하게 형이라고 불러도 돼."
"어... 근데 뭔가 그럼 각오가 풀릴 거 같아서."
"그래. 편하게 해. 난 뭐든 괜찮으니까."
식당을 운영하고 있어 세계 각국의 요리에 관심이 깊은 구마윤.
동생의 응원도 응원이지만, 이번 여행은 신메뉴 개발이나 가게에 쓸만한 장식품을 찾아 돌아다니던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한상률과의 만남을 가진 뒤론, 모든 신경이 동생 구마하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봤을 땐 별 문제 없는데, 먹는 걸 보면 애가 긴장을 하고있나 싶기도 하고...)
(마하가 밥 량이 줄었다고요?)
사람의 몸이란 복잡한 구조 위에 단순한 기능으로 작동한다.
힘들면 쉬고 졸리면 자고 배고프면 먹는다.
특히 내공은 체내에 평시보다 많은 기운을 보냄으로써 그에 맞는 식사량이 따라오기 마련이다.
그가 기억하는 무림인들은 하나같이 대식가였다.
식사량이 줄었다는 건 구마윤의 상식에서 무슨 문제가 있음을 알리는 신호지만, 정작 당사자가 아무렇지 않다니 뭐라 할 말이 없다.
구마윤도 모든 걸 아는 건 아니었다.
곤륜에서의 수련은 너무 짧았고, 이른 나이에 새로운 환경과 문물에 생활을 적응시키려다보니 아는 것도 많을 것을 잃어버렸다.
동생을 믿는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래도 올 초 혼자의 힘으로 내공의 정수를 깨달은 마하가 아니던가.
당사자가 말 한 대로 자기 몸은 자기가 제일 잘 아는 법이니 기우는 접어두는 게 좋을 거 같다.
"정석아. 저녁에 애들이랑 여기 한번 더 와보자. 맛있다."
"네!"
이틀 간 여유로운 시간을 보낸 구마윤은 동생들과 함께 올림픽 스타디움을 찾았다.
오전 예선을 시작으로, 오늘 세계가 주목하는 남자 100미터 우승자가 결정된다.
"얘들아. 마하는 언제 나오는지 알어?"
"모르겠어요."
"보다보면 나오지 않을까요?"
인간 탄환이라고 불리는 남자 100미터.
예선 첫 시합부터 9초의 벽을 넘나드는 선수들로 인해 관중석은 기대감이 올라간다.
"다들 대단하구나..."
"엄청 빠르네요! 그쵸 형님!"
"그러니까..."
구마윤은 인간의 기운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평범한 사람들 가운데 뛰어난 이들이 흰 빛을 뿜어낸다면, 운동장에 나와있는 선수는 모두가 흰 빛을 띄는데, 그들 중 푸른 빛과 붉은 빛을 뿜어내는 이들이 있었다.
말 그대로 초고수의 경지였다.
그의 시선에서 올림픽은 진정한 별들의 잔치였다.
"3번. 무조건 3번이 1등."
"난 5번."
"형님은요?"
"음. 내가 봤을 땐 8번이 이길 거 같은데?"
"정말요? 전 3번이 더 강해 보이는데요."
"형님 내기하실래요?"
"하하하~ 좋지."
구마윤의 선택은 백전 백승.
동생들은 어떻게 그렇게 잘 맞추냐는데, 마윤은 혼자만의 비밀로 웃음을 지어보인다.
그리고 마침내. 구마하의 차례가 돌아왔다.
"어? 형님! 나왔어요!!"
"그래? 어디?"
"어디 어디!! 어! 저기 있다!!"
"하하하! 마하야! 어이~~!!!"
구마하가 871번이란 번호를 달고 긴장된 표정으로 예선 15번째 경기에 등장.
"마하야!! 여기 여기!!"
"안 들리나 보다."
"파이팅!!!"
"이겨라!!!!"
친구들이 목이 찢어져라 응원을 보내지만, 함성소리에 묻혀 운동장의 구마하에게는 닿지 않는다.
구마하도 출발자세를 갖췄다.
시합을 준비하자 그의 몸에서도 남다른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데.
구마윤은 심자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마하 파이팅!!"
"야. 야 김태윤!! 아까 시합 앞두곤 조용히 하랬어 병신아!"
"그래. 선수들한테 방해 된다고."
"어. 미안... 마하 보니까 흥분해서..."
동생의 몸에서 검은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구마윤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나쁜 것인지 좋은 것인지 몰라도, 흑빛의 기운을 뿜어내는 구마하는 예선전을 통과해 다음 라운드에 진출한다.
"하하하! 이겼어!!"
"와. 마하도 진짜 빠르구나..."
"이름대로 사네. 어? 형님 어디가세요?"
"잠깐만..."
구마윤이 관중석 끝까지 내려가 운동장을 지나가는 구마하를 불렀다.
"마하야!!!"
"어. 형! 다들 어디있어?"
"너 진짜 괜찮아??"
"그렇다니까. 왜?"
시합을 마친 동생은 다시 평범한 사람의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아까의 검은 기운은 대체 뭐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