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화 〉 태극기가 바람에 펄럭입니다 (7)
"형님! 빨리요 빨리!"
"그래. 얘들아... 근데 형이 지금 힘이 없어서..."
겨우겨우 구마하를 회복시킨 구마윤이 동생들의 손에 이끌려 관중석으로 돌아가고 있다.
형. 부모님을 봤어.
동생의 입에서 나온 말이 그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김태윤이 이대로는 도저히 자리로는 못 갈 거 같다며, 그냥 스탠드 끝에서 보자고 말했다.
다들 겨우겨우 사람 없는 관중석 어딘가로 자리를 잡자 선수들이 눈앞에 있었다.
"어휴 살았다. 야! 이쪽으로 와!!"
"아직 시작 안 했어?!"
"어!"
"마하는?"
"여기 바로 앞에!!"
7번 레일에 구마하가 자리하고 있었다.
다시 본래의 컨디션을 되찾은 모습이다.
준결승이 끝나고 쓰러진 장면을 관중들이 본 터라 그의 이름이 호명되자 스타디움에 큰 박수가 쏟아진다.
"와 씨발 존나 떨려...!"
"그러게... 개새끼 제발 이겨라..."
"마하야 쓰러지지 말고..."
친구들과 달리, 구마윤은 편안한 마음으로 동생을 지켜본다.
검은 빛은 사라졌다.
오히려 전에는 없던 은은한 붉은 빛이 보인다.
"힘내라 동생."
잘 하겠지. 이기고 지는 건 문제가 아니야.
그토록 바라던 올림픽에서 최선을 다하면 그만이라는 구마윤이었다.
* * *
몇 시간 전. 아테네 올림픽 남자 100미터 준결승을 앞둔 시각. 한국 K 방송국.
시차에 따라 한국은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올림픽 중계로 많은 이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메달이 유력하고 국민의 관심이 높은 경기는 현지에 해설진을 파견하거나 스튜디오 동시 생중계를 해줄 정도로 신경을 쓰지만. 아무래도 육상 같은 종목은 늘 그들만의 잔치였던 터라 많은 시합이 녹화로 준비되고, 나중에 하이라이트만 방송되는 편이다.
연대 이현석 교수도 그런 의미에서 예선과 준결승까지 스튜디오 한쪽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구마하 선수. 옆에서 지켜봐도 정말 대단한 기량을 가진 선수죠!"
"한국에서 10초의 벽을 뚫어내다니. 어떻게 이런 선수가 그동안 무명에 가까웠을까요?"
"운동 시작한지 이제 1년 조금 넘었습니다."
"1년요...?"
"네. 더군다나 아직 학생인지라, 연맹에서도 애지중지 아끼고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준결승 통과와 함께 쓰러지는 모습.
이 교수도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것 같았다.
"아... 구마하 선수 들것에 실려나가는데요."
"크... 큰일이 아니기를 빌 수 밖에 없겠습니다."
결승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지만, 선수의 출전 여부가 불투명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
"아직 연맹에서 다른 소식은 안 들어오고 있어요..."
"병원으로 옮겼다는 말도 있고, 결승은 기권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제기랄 기껏 편성도 받았는데..."
모두가 기대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국인 최초 100미터 결승전에 출전하게 됐다.
비공식 세계신기록을 달성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다들 깜작메달이 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교수님도 안타까우시겠어요."
"어쩔 수 없죠. 전 애나 무사하면 다행입니다."
"아무튼, 결승전 중계도 잘 부탁드립니다."
"네. 그래야죠..."
기쁨도 잠시. 방송국은 다른 시합을 보여주기 바쁘다.
이현석 교수도 김 빠진 탄산음료를 마신 듯 멍하니 탁구 시합을 지켜보고 있었다.
한국인 선수가 4강에서 중국이란 강대국을 만나 치열한 공방이 오고가는 중이다.
그때 방송국 직원이 헐레벌떡 달려와 소리쳤다.
"헉 헉!! 나온데요!"
"뭐가?"
"구하마요! 선배님! 결승전 나온다고 방금 연맹에서 연락 들어왔어요!!"
"진짜로? 이 교수님 어디 계셔?"
다시 부랴부랴 중계석에 자리하는 이현석과 캐스터.
"진짜 나온다고 그래요?"
"교수님은 연락 못 받으셨어요?"
"선생님이나 한 감독이 있지만, 다들 통화가 어려워서..."
TV엔 탁구 경기가 방송되고 있다.
이현석이 결승전인데 안 바꿔주냐 물으니 방송국 편성팀에선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단다.
"그래도 처음하는 결승인데..."
"일단 녹화 들어가죠. 아무래도 방송국 사정도 있으니까요."
"네. 알겠습니다."
마이크를 착용하고, 스튜디오 화면엔 올림픽 육상 결승전이 비친다.
FD가 손짓하며 녹화의 시작을 알렸다.
"네. 여기는 다시 아테네 올림픽 스튜디오입니다. 구마하 선수가 컨디션을 찾았나 봅니다."
"아무쪼록 큰 이상이 아니었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겠네요."
"여러 종목에 출전하는만큼, 체력에 부담이 온 건 아닐까요?"
"모르겠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저도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써 책임을 지겠습니다."
무슨 상황인지는 알기 어렵다.
그저 결승전이 힘든 경기라는 것만 이해할 뿐.
이제는 승패를 떠나 응원하는 마음밖에 없는 이현석이었다.
"말씀드리는 순간, 선수들이 입장합니다."
1번부터 6번까지. 미국 영국 자메이카 등등. 베스트 러너들의 이름과 경력 등이 호명되고.
"그리고 드디어 7번 레인. 구마하 선수가 등장합니다!"
"아... 어딘가 구마하 선수를 보는데 가슴이 울컥울컥 합니다..."
"혈색은 많이 좋아보이는데요."
"네! 우리 구마하 선수. 그동안 최선을 다한 만큼 끝까지 멋진 결과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스 시각 밤 8시. 한국 시각 새벽 2시. 남자 육상 100미터 결승전.
"긴장되는 순간입니다. 아무래도 스타트가 중요하겠죠?"
"그럼요. 세계적인 선수들의 반응속도는 우리의 상식을 넘어서니까요."
"아까도 육상은 0.01초 싸움이라는 말씀을 해주셨는데. 구마하 선수 반응속도는 어떤가요?"
"빠릅니다. 생각보다 가속도도 빨리 붙고요. 재능이 뛰어난 친구입니다."
선수들이 자세를 갖추자 운동장도 조용해진다.
중계석도 목소리를 낮췄다.
경기장에 울리는 ON YOUR MARK 기계음이 스튜디오까지 전해졌다.
"보고있는 저도 이런데, 선수는 얼마나 긴장되겠습니까..."
"그래도 우리 구마하 선수 잘 뛸 겁니다."
두 사람의 목소리에 지켜보고 있던 FD까지 침을 꿀꺽 삼켰다.
곧이어 탕! 거친 총소리와 함께 선수들이 출발했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들의 경기. 인간 탄환의 드라마가 시작됩니다!!"
"구마하 선수 빨라요! 빠릅니다!!"
30미터 지점까지는 8명의 선수들이 대동소이한 결과로 진행됐다.
"3번. 로버트 선수가 치고 나갑니다!"
"구마하 선수도 가속도가 붙는 것 같은데요!"
50미터가 지나자 이현석의 말대로 구마하의 속도가 오르기 시작했다.
"7번 구마하! 구마하!!"
"힘내길 바랍니다! 끝까지 최선을!!"
카메라에 정면이 잡히던 선수들의 모습이 우측면을 비춘다.
100미터를 9초로 뛰는 인간 탄환들답게 중계석이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승부의 윤곽이 잡힌다.
"구마하 선수도 속도를 올립니다! 선두로 나서고 있습니다!!"
"제발! 제발!!!"
"선두입니다! 구마하 선수가 1위로 올라섭니다!!!"
하도 시끄럽게 떠드는지라, 방송국 직원들 모두, "뭐야? 저긴 뭐 하는데 저래?" 하는 식으로 관심을 기울일 때.
"으아아!!"
"으아아아!!"
함성소리가 뭔 일이 났음을 짐작하게 해주고.
"금메달!!!"
"금메달!!! 한국 금메달!!!!"
육상에서 금메달이라는 말이 나왔다고??
다들 하던 일을 멈추고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내팽개치며 육상 중계가 벌어지는 스튜디오로 달려갔다.
캐스터와 이현석 교수가 울면서 서로를 끌어안고 들썩들썩 춤을 추고 있었다.
* * *
운룡대팔식이라. 무공이 그런 거구나.
보고나니까 조금 알 것 같다.
요리도 같은 재료로 조리법을 달리하면 맛이 변하듯, 나는 내공을 가지고 있으면서 완전 다른 방법을 쓰고 있었다.
형과 아버지의 모습에서 조금이지만 답을 찾았다.
경공이 뭔지 초식이 뭔지 이제 알 것 같다.
짧은 고향 여행에서 본 것을 떠올리며 시합을 준비했다.
사람들한테는 괜찮다고 했지만, 아직 몸은 완벽한 상태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길 자신이 있었다.
나는 이제 무공을 아니까.
준비, 출발.
힘차게 달려나간다.
호흡을 더해줌에 따라 몸에 힘이 솟아나고 있었다.
아버지가 형에게 알려준 초식을 내 몸에 응용하자 기운이 살아난다.
"훅! 훅!!"
30미터 50미터까지는 비슷한 경기를 펼쳤지만, 70부터 확실하게 치고 나갔다.
그럼에도 나는 속도를 더 낼 수 있었다.
가슴을 들이밀며 결승점을 통과.
9.73이라는 잠실에서의 비공식 테스트를 0.01초 넘어서는 기록을 거두며.
"후우우~ 후우~"
전광판에 NEW WORLD RECORD라는 문장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하하... 세계 신기록이라..."
세계 신기록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는데, 정말 내공 무서운 거구나...
심장이 터질 것 같다. 온 몸에 땀이 비오듯 쏟아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꺼지던 기력이 다시금 생명력을 얻은 듯, 손끝까지 펄떡펄떡 피가 통하는 것 같았다.
카메라가 다가와 얼굴을 비추는데, 땀을 쓱 닦아내면서 전광판만 보고 있으니, 이번엔 어떻게들 알고 미친 듯이 열광하고 있는 친구들의 모습을 비춰줬다.
그래. 맞다. 이번엔 응원하러 온 사람들이 있지.
어디지? 아까 경기장 출발 지점에 있던 거 같았는데?
형과 친구들한테 돌아가는데, 같이 뛰었던 외국인 선수들이 다가와 손을 들었다.
악수인지 하이파이브인지 모를 인사를 나누자 다들 굵직한 목소리로 말해준다.
"Champ."
"Congratulations."
아무리 영어를 못해도 이정도는 이해하지.
축하한다는 인사에 꾸벅꾸벅 고개를 숙인 뒤 모두에게 다가갔다.
그때까지도 카메라는 나를 따라 다니며 모습을 비춰주고 있었다.
"야 이 미친놈아!! 너 씨발 세계신기록이야!!"
"하하하... 태윤아... 조심해. 이거 카메라 찍히고 있어..."
"아 씨발 찍으면 어때!!"
"그래! 내 친구가 챔피언인데 욕 좀 하면 어떠냐고!!"
또라이들 나중에 뒷감당 어떻게 하려고 저러는지...
태윤이 정석이 그리고 남수까지 다들 왜 우는지 모르게 울고 있었다.
오히려 나는 친구들을 볼 때는 덤덤했는데, 형을 보는데 왈칵 감정이 올라왔다.
"형..."
"이 자식."
경비요원들이 길을 열어줘 관중석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형과 끌어안을 때. 난 그때 울었다.
"고마워. 형..."
"야 인마. 뭐가 고마워."
"그냥 다... 지금까지 해준 거 다."
"축하한다. 잘했어."
친구들과도 와락 끌어안으며 기쁨을 나누고.
다시 운동장으로 내려가는데, 형이 준비했던 태극기를 건네줬다.
"뭐야? 집에서 가져온 거야?"
"그럼. 보통 이렇게들 하더라고."
"헤헤... 준비성도 철저해라."
"새끼야! 뭘 웃고 지랄이야. 빨리가서 한 바퀴 돌아!"
"야. 야! 잠깐! 구마. 사진 한 장만 찍자."
"아 나중에 하라고!! 마하 운동장으로 가야 된다고!!"
싸우는 놈들을 피해서라도 일단 운동장으로 내려왔다.
한상률 감독님과 이두희 코치님. 그리고 천병욱 대사부님도 한쪽 끝에 모습이 보여 찾아갔다.
대사부님도 울고계셨고, 이두희 코치님은 그저 훈훈한 미소를 지어보이셨다.
한 감독님도 봤을 땐 울었던 거 같은데,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 얼굴을 제대로 보기가 어려웠다.
"흐어엉 마하야! 아이고 이놈아 잘했다 잘했어!!"
"고맙습니다."
"그건 형이 줬어?"
"네. 들고 한바퀴 뛰라는데, 그래도 될까요?"
"당연하지. 금메달인데."
헌 감독님과도 잠깐 서로를 끌어안은 뒤 운동장으로 돌아갔다.
메달을 땄다는 사실보다 태극기를 들고 뛸 수 있음이 더 좋았던 것 같다.
여러분 이걸 보세요.우리 형이 좋아하는 태극기에요.
천천히 트랙을 달리니 관중들도 박수를 쳐주고, 2위 3위 한 선수들도 각자의 국기를 들고와 셋이서 인사도 나누고 기자들 앞에서 사진도 찍었다.
그런데, 갑자기 헤드셋을 끼운 올림픽 요원들이 뭐라뭐라 하면서 날 어딘가로 데리고 가는데.
"아 맞다. 기록 세웠지."
스위스 메이커 이름이 크게 박힌 기록판 앞에서 어색한 자세로 사진을 남기고. 다시 세리모니를 돌았다.
근데, 어디까지 가야되는 거냐? 그냥 운동장 한바퀴 돌까?
* * *
"구마하 선수 기쁨의 세리모니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세계 신기록이라니요... 정말 눈물이 앞을 가려 무슨 말을 꺼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모두가 바라던 육상의 메달 아닙니까? 좀 울면 어떻습니까."
"그러니까요 기쁜 순간에 왜 이렇게 눈물이 나는지... 하하하!"
"아무래도, 직접 지도하신 만큼 이현석 교수님의 기쁨도 남다를 거 같은데요?"
"저는 잠깐 도와준 거죠. 저보다 아까 카메라에 비췄던 한 감독의 기쁨이 더 클 거 같습니다."
"구마하 선수의 훈련 과정을 다시 한번 더 말씀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한국 방송국들은 뒤늦게 육상 100미터 경기를 송출하기 바빴고. 늦은 잠을 청하며 올림픽을 즐기던 국민들은 충격적인 소식에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며 구마하의 미니홈피를 찾느라 정신이 없다.
그나마 방송국들이 녹화중계를 하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하는 건, 친구들로 보이는 아이들의 욕성을 편집할 시간이 주어졌다는 것이었다.
이현석과 캐스터는 느긋한 마음으로 구마하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들었다.
"그럼. 구마하 선수는 학교를 벗어나 훈련을 해 온 상황이군요."
"그렇죠. 자리를 빌어 한주 고등학교 이주영 지도자에게도 축하의 인사를 보내고 싶습니다."
"모두가 기뻐 할 일이네요. 다시 한번 하이라이트 경기를 보내드리겠습니다!"
30여분 뒤 메달 수여식이 열렸다.
이제는 방송국들도 생중계로 현장을 비춰준다.
선수 하나하나 명성있는 올림픽 영웅들이 다가와 메달을 건네주고 월계관을 씌워준다.
구마하도 단상 제일 높은 곳에 올라 메달과 월계관을 수여받았다.
"애국가가 울리겠습니다."
월계관을 쓴 구마하가 태극기를 올려다 보고 다시 관중석의 친근한 얼굴들을 찾았다.
구마윤과 친구들. 한상률과 천병욱 대사부. 이두희 코치와 육상연맹 관계자들이 다들 한 곳에 모여 있었다.
구마하는 사람들을 보며 오른손 엄지를 척 들어보인다.
캐스터와 이현석 교수도 칭찬의 말을 아끼지 않는다.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지 않습니까? 내일 200미터 경기도 있고. 또 중거리 경기도 있고."
"하하하! 그렇죠."
중계를 마치는 캐스터가 인사말을 남긴다.
"늦은 밤 시청해주신 국민 여러분. 정말 믿을 수 없는 결과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대한민국의 국기. 태극기가. 올림픽의 성지 아테네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하늘 높이 올라 펄럭였습니다. 응원해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내일도 많은 시청 부탁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