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화 〉 비너스와 에로스 (1)
"금메달이 이렇게 생겼구나. 멋있다."
"크~ 씨발 영어로 KOO MA HA. 존나 간지다."
"근데 얘는 이런 거 우리한테 맡기고 어디 갔냐?"
"아까 도핑 테스트 받으러 간다고 그러던데."
"그런 것도 해?"
"메달도 준다고 끝나는 게 아니네."
메달 수여식을 마치고 웅성웅성 금메달과 월계관을 구경하고 있는 아이들에게 한상률이 다가왔다.
"얘들아 응원하느라 고생했다. 너희도 밥 먹으러 가야지."
"네."
"저기 아저씨들 따라서 먼저들 가있어."
"선생님. 마하는요?"
"형님이랑 얘기하고 있어."
"그럼 기다렸다가 같이 갈게요."
"형제 간에 하고 싶은 이야기도 있겠지. 먼저 가. 마하랑 형님은 내가 데리고 갈 테니까."
* * *
도핑 테스트를 마치고 형과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미친 앞에서 빤하게 보는데, 오줌을 누래."
"하하하하~"
"형. 내공 썼는데, 뭐 그런 거 없겠지?"
"없어. 나와봐야 니 오줌이 전부야."
형은 메달 획득보다 부모님 이야기에 더 관심이 있는 것 같았다.
"아. 그날을 봤구나..."
"응. 형이 기혈을 뚫어줄 때 기억도 같이 넘어 온 거 같애."
곰한테 쫓기던 장면이나 어머니한테 혼나던 모습들. 아버지가 잔치 중 운룡대팔식을 전수해주던 모습 등을 세세히 말해주니 형도 끄덕끄덕 "맞어. 그런 일이 있었어" 라면서 추억에 잠겼다.
"이제는 형 말 믿어. 우리가 정말 차원을 넘어왔구나..."
"난 처음부터 진짜라고 했었어."
"두분 다 살아계실거야. 강한 분들이니까."
"그렇겠지..."
"형."
"응?"
"형은 만약에... 만약에 돌아갈 수 있다면 곤륜으로 가고싶어?"
"모르겠다. 예전엔 그랬는데, 지금은... 나도 모르겠어."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 되는 걸까?"
형이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마하야. 지금은 시합이 중요하잖아."
"음."
하긴, 나의 올림픽은 이제 막 시작됐지. 아직 경기들이 남았다.
"세계 신기록이라니. 엄청 빠르긴 하더라."
"그것도 운룡대팔식을 조금 응용해봤는데. 진짜 형이랑 아버지 보는데, 난 몸 막 쓰고 있었더만!"
"하하~ 나도 그렇게까지 운동하고 있을 줄은 몰랐어."
우리의 곤륜이 언젠지 몰라도 그때와 지금은 문화 환경적 발전이란 것이 있다.
현대의 스포츠는 무림인의 수련 못지 않은 터프함이 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한계를 넘나드는 운동을 하고 있었다.
기의 순환이란 자연스러운 것인데, 그걸 극한을 넘나드는 소모나 인내로 양 극단을 오고갔다니... 아이고 목숨이 붙어있는게 용하다.
물론, 그런 시간들이 있기에 지금의 내가 있는 거지만.
"그래도 있잖아. 그런 경험들이 있어 그런가. 이제는 내공을 어떻게 써야되는지 무공은 뭘 하는 건지 조금 알겠어."
"그렇다면, 넌 너만의 무공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거야."
"나만의 무공이라. 그렇게 되면 좋겠다."
신묘한 힘을 손에 넣어 형의 파괴된 단전을 되살리고 싶다.
스포츠란 무공의 지존이 된다면 가능하지 않을까?
"아무튼, 마하야. 우리도 가자. 선생님이랑 다들 기다리실 거 아냐."
"응. 나도 이제는 배고파. 식탁이라도 씹어 먹겠어."
"하하하! 메달을 땄는데 왜 식탁을 먹어. 좋은 거 먹어야지."
그러게 나 메달 땄지.
너무 많은 일이 있어서 아직 크게 실감이 안 난다.
"음..."
"왜?"
"아니야."
뭐가 바뀔까? 여자들이 조금 알아봐주긴 하려나?
모르겠다. 단거리 일정이라도 끝내고 생각해 보자.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은 배가 너무 고파...
하하! 허기진다는 게 이렇게 반가운 일이라니.
* * *
몇 시간 뒤. 한국은 그리스보다 이른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다.
"혜정아 혜정아!!! 빨리 일어나 봐!"
"아... 아빠 왜... 나 네시까지 공부하다 겨우 잠들었단 말야..."
"빨리 나와 보라니까 이 녀석아!"
"그리고 내 방에 막 이렇게 들어오지 말라고 했었잖아!!"
"아랫집 애가 금메달을 땄는데, 넌 잠이 오냐!"
"뭐?"
"뉴스에 그 녀석이 나오고 있다니까??"
"마하가...?"
아파트 주민들.
영군 고와 한주 고의 친구들.
그리고 다수의 국민들 모두가 놀라운 소식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아테네 소식입니다. 어젯밤 정말 깜짝 놀랄 금메달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한국 육상 대표팀의 기대주 구마하 선수가 남자 100미터 결승에서 세계신기록을 세우며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구마하 선수는 올 초부터 혜성같이 등장한 신인으로]
[단거리와 중거리 두 종목에서 뛰어난 기량을 선보였으면서, 올림픽에도 두 종목 동시 메달이라는 초유의 도전을]
구마하의 금메달 소식이 아침 뉴스를 장악했다.
각 신문사 첫 페이지마다 그의 메달 획득 장면이나 결승선 통과 모습. 세계 신기록 앞에서 찍은 기념사진. 수상 때 엄지를 든 모습이 장식된다.
인터넷 실검창엔 구마하란 특이한 이름이 사라지지 않고, 2위 3위 실시간 검색어로 구마하 미니홈피. 200미터 예선 시간, 200미터 중계 같은 단어가 들어가 있다.
"국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기는 아테네 올림픽 스타디움입니다. 오늘도 해설엔 이현석 교수님을 모셨습니다."
"네. 다들 좋은 밤 보내셨습니까."
"교수님은 좋은 꿈 꾸셨나요?"
"여기저기 전화가 빗발치느라 한숨도 못 잤습니다."
"하하. 축하드립니다. 구마하 선수와는 통화 하셨나요?"
"오늘 경기 마치고 하려고요. 무엇보다 한 감독이 연결 안 시켜줄 거에요."
"그러게 말입니다. 듣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데, 어제도 믹스트 존을 빠르게 지나갔더라고요."
"아직 시합이 남았으니까요. 한 감독이 그런 부분을 엄격하게 관리하거든요."
방송국도 빠르게 움직였다.
어디서 구했는지 몰라도 올 초 춘계 대회나 종별 대회 때 구마하의 시합장면이 자료화면으로 쓰이고 있었다.
심지어 며칠 뒤 벌어지는 800미터와 1500미터 중계는 현장중계를 잡았다.
"저희도 오늘 시합 마치고 바로 출국이지 않습니까? 생생한 현장반응을 전해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많은 분들이 지금 한국 육상에 관심을 보여주시는데 너무 감사드리고요."
"출전 명단이 나오는군요. 구마하 선수는 예선 H조에 배치됐습니다. 그럼 어젯 밤. 경기를 못 보신 분들을 위해 하이라이트 장면을 보여드리겠습니다."
* * *
"아아..."
"왜? 뭐?"
"감독님. 배고파요..."
"설마! 또 내공에 무슨 문제가 생기거나 그런 거냐?"
"아니요. 그냥 배고파요...그동안 못 먹은 게 지금 오는 거 같애요..."
"아이고 이 자식아. 보면서도 가슴이 조마조마 해."
감독님은 감독으로서의 직분보다 매니저로서의 업무가 더 많아 보인다.
"어제도 엄청 먹더만. 내공이란 건 알다가도 모르겠다."
"저도 그래요..."
"있어 봐. 가서 햄버거라도 사올테니까."
"죄송합니다."
"괜찮아. 조금만 참고있어."
세계 신기록 세우고 여자? 잔치?
아니다. 어제 밤엔 3대 욕구 중 식욕이 폭발하는 경험을 가졌다.
아직 시합이 남은 상황이라, 큰 잔치를 벌일 순 없고. 대사부님이 모두를 데리고 스타디움 근처 좋은 식당으로 건너가 밥을 샀는데, 나는 도무지 양이 안 차 선수촌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동안 채우지 못 한 영양분을 보충하려는 듯, 이 음식 저 음식 닥치는대로 들이부었다.
메달을 따서 그런가, 전에는 못 느끼던 시선이 쏟아지는 거 같지만 밥 먹느라 정신이 없었다.
오늘도 그랬는데. 아침에도 사람들 보는데 그냥 밥만 먹고 나왔는데...
흑... 여자들도 있었는데...
저 새낀 뭐 저렇게 쳐먹어? 이러는 거 아냐?
"아 언제 오시지...?"
쫄쫄 주린 배를 움켜쥐고 감독님이 돌아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옆에 앉은 자메이카 선수복을 입은 어떤 흑인 애가 가만히 보더니 가방을 뒤적거려 간식을 건네준다.
"어?"
"Take it."
"리. 리얼리?"
"Sure."
"오 땡큐. 땡큐 베리 머치."
허겁지겁 흑인 친구가 건네준 초코바를 까먹고 있으니 녀석이 흐뭇한 시선으로 쳐다본다.
"맛있다. 아니. 딜리셔스. 땡큐"
뭐라뭐라 말을 거는데, 아 젠장. 영어를 못 해서...
"어어..."
"Congratulations on winning."
"아. 유 워 웰컴."
그러자 다른 200미터 선수들도 하나 둘 말을 건다.
아무래도 100미터 200미터 선수들이 겹치다보니, 어제 같이 결승 뛴 얼굴들도 있고 은메달 딴 미국 형이나 동메달 딴 흑인 아저씨도 뭐라뭐라 다가와 웃으며 말을 하는데.
"음. 어. 음. 파이팅. 모두들 파이팅. 음..."
"마하야. 뭐 하냐?"
"감독님! 사람들이 말 거는데 뭐라는지 한 마디도 모르겠어요...!!"
감독님이 중간에 통역을 해주셔서 선수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세계 신기록이라든지 어젯 밤 메달이라든지. 신발 뭐 신는지 물어보는 사람들도 있고, 중간중간 오늘 자기네 파티 하는데 놀러오라는 말들도 있었다.
"이따가 애들한테 사전 좀 빌려달라고 해야겠어요..."
"왜? 오늘 밤부터 영어공부하려고?"
"그렇게라도 해야죠."
아버지도 말씀하셨듯 적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다가오는 법이다.
물론 외국인 선수나 영어가 나쁜 놈은 아니지만, 늘 부족하다 느낄 때 수련을 하라고 하지 않던가.
"헤이."
"Yo. Champ."
"이거 하나 먹을래? 아니. 우 우두 유 잇?"
"Hahaha. No thanks. Champ."
그나마 한국 공교육의 도움을 빌어 한 문장 물어보니.
"왓츠 유 얼 네임?"
"I'm Eugene. Eugene Bolt."
유진 볼트라. 달리는 선수 이름이 볼트? 번갠가? 쟤도 쟤네 나라에선 구마하 같은 특이한 이름이겠지?
예선전을 마치자 대기실이 또 한 차례 한산해진다.
메달을 따서 그런가 나는 큰 부담이 없지만, 선수들은 조금 달랐다.
"엄청들 긴장하고 있네요. 어제는 저도 저랬겠죠?"
"그러게 말이다. 이렇게 보면 시합 즐기라는 말도 함부로 할 게 아닌 거 같다."
다른 선수들을 생각해 밖으로 나왔다.
한 감독님과 스타디움에 위치한 맥도날드에서 밥을 먹는데 이주영 감독님한테 전화가 걸려왔다.
"어. 하하하 아 너를 왜 막어. 잠깐만 있어 봐. 마하야. 이 감독이다."
"네. 감독님!!"
"축하한다. 이놈아. 세계 신기록이라니... 알았지만 보면서도 믿기지가 않더라."
"무슨 말씀이세요. 다 감독님 덕분이죠."
"오늘 우리 학교도 방송국 찾아오고 난리 났었어. 운동장 찍고 동민이도 인터뷰 따가고 시끌시끌했다."
"하하... 죄송해요."
"200도 메달 기대하고 있을게. 힘내라."
"어우 그러지 마세요. 부담되요."
"마하야 어제만 해도 안 그러더만, 여기 지금 너 시합마다 방송 나오고 난리도 아니다."
친구들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데, 주변에서도 난리가 났단다.
"학교도 완전 뒤집어졌데."
"뭐 어떻게 뒤집혀?"
"여자애들 난리나고. 너 미니홈피 가 봤냐?"
"나 그거... 총 방문객 백 명도 안 됐는데... 올려놓은 사진도 없어."
"금메달 딴 거 올려."
"아 씨발 쪽팔리잖아... 뭔가 이제와서 생색내는 거 같고..."
"병신. 자랑을 하래도 못 하냐."
다들 우리한테 거길 왜 가냐고 지랄지랄 하더니 이쯤되면 1년 재수해도 아쉬울 건 없다는 친구들이다.
"얘들아. 아무튼, 나 이따가 사전 좀 빌려주라."
"사전은 왜?"
"그냥 영어 공부 좀 하게."
태윤이가 묻는다.
"너 혹시 여자 만났냐?"
"하하하! 미친놈아!! 시합 있어. 내가 여자 만날 시간이 어딨다고 그래."
"근데 사전을 왜 봐?"
"그냥 외국애들이랑 얘기 하고 싶은데 단어를 모르겠어."
"후우우... 야 구마하 씨발놈아."
"넌 또 왜 욕지랄인데?"
"제발... 어? 인기를 누려 병신아. 지금도 봐 봐. 사람들이 너 다 보고 지나가고 있잖아."
정석이 말에 주변을 둘러보다 어떤 외국인 관광객 같은 분과 눈이 마주쳤는데.
"HI~♡"
머리는 검지만 분명한 외국인이 먼저 웃으며 인사를 해줬다.
"..."
"봤지?"
"새끼. 존나 부럽다."
"즐겨. 너도 가서 말 걸어봐."
"그러니까 말을 하고 싶어도 영어를 모르겠다고 새끼들아..."
진짜 남의 속도 모르고.
나야말로 가뜩이나 존나 참아서 지금 터지기 일보직전인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시합 마치고 숙소 돌아가면 그때 걔 한번 찾아가 볼까?
금발의 여신. 테니스의 요정.
그래 맞다. 비너스도 금발이지.
당신은 아름다운 비너스,
사랑의 비너스라고 하지 않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