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화 〉 비너스와 에로스 (5)
운동선수는 종목에 따라 몸이 변한다.
구마하도 세르게이의 발달 된 상체나 굵직한 팔 근육을 보며 그가 레슬러라는 것을 알았다.
역도 투포환을 제외하면 아마도 같은 체중에서 가장 힘이 뛰어난 선수 중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물러설 순 없는 법.
구마하는 시합과는 또 다른 집중력과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그래야만 했다.
이것은 섹스로 가는 관문에서 만난 시련이니까.
"우오!!"
"Говно!!"
세르게이는 단순하게 이겨보이겠단 생각으로 힘을 넘겼다.
그러나, 구마하가 버티자 그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진다.
쉽게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당연하지 그는 레슬러니까.
욕설을 뱉으며 눈을 희번덕 치켜뜨는 세르게이.
이 자식 육상선수 아니었나...? 무엇보다 레슬러도 아닌데 동양인이 내 힘을 버틴다고...?
물러서지 않는 힘과 힘의 대결에 사람들은 함성을 질렀다.
분위기가 고조되며 관중들이 한 입으로 KOO! KOO! KOO!! 그의 이름을 리듬감 있게 불렀다.
생명에겐 짝짓기는 과업(課業)이다.
사자도 수십마리의 암컷을 거느리기 위해 전쟁을 벌이고, 17년만에 땅에서 나온 메미는 암컷 메미를 찾느라 목숨을 걸고 울어댄다.
구마하도 똑같았다.
특히나 그는 음양조화로 몸의 에너지가 달라지는 존재.
호르몬과 테스토스테론이 보통 성인남성의 몇 배나 분출되는 그에게 아름다운 빅토리아가 지켜보는 시합은, 아무리 술자리에서 벌어지는 단순한 힘겨루기라 하여도 남다른 승부욕을 불러 일으킨다.
"으아아!!"
"Ебучий!!"
구마하의 내공이 주인의 의지에 화답해 그의 몸을 강철같이 변화시킨다.
세르게이는 당황하다 못해 울상을 지었다.
젠장, 후배들도 있는데...
외국 유명한 선수들도 우르르 몰려 있는데...
어떻게 자기는 아무도 응원해주는 사람 없고...
지면 러시아 남자의 가오가 살지 않고...
쪽팔리긴 싫고 그렇다고 이길 수도 없는 세르게이 카르노브.
아니 이 자식은 뭘 쳐먹고 운동하길래 이렇게 힘이 쌔지??
"Говно! Говно..."
"..."
욕설을 중얼중얼 거리는 세르게이를 보며 구마하의 머릿속에 이성이 말을 걸었다.
진정해. 진짜로 이길거야?
저 형 아직 시합 안 했을지도 몰라.
여기서 꺾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그래. 이건 스포츠가 아니다.
섹스도 섹스지만, 상대방을 다치게 하는 건 옳지 않다.
언제나 바른 길을 가야한다. 그것이 나에게 힘을 준 곤륜의 정신이니까.
구마하는 일부러 손을 뺐다.
땀을 뻘뻘 흘리던 세르게이가 당황한 듯 쳐다보는데, 그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말한다.
"안돼 안돼. 아이 캔트! 유 윈!!"
구경하던 모든 이들이 그가 일부러 승부를 양보했음을 알았다.
사람들은 또 그걸 구실 삼아서 환호성을 지르고 시끌벅적한 리액션을 보여준다.
세르게이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구마하를 올려다보는데 그가 손을 내밀며 말했다.
"유. 존나 스트롱."
"Спасибо."
스바시바? 욕인가?
어쨌든 구마하는 자리를 피한다.
알게 모르게 급격하게 내공이 소모되는 바람에 허기가 밀려오고 있었다.
"아. 배고파..."
딱히 쓸모는 없지만 우리의 지적호기심을 채워주는 영국인지 호주인지 모를 연구기관에서 인간의 3대 욕구를 분석한 적이 있다.
성욕 식욕 수면욕 가운데 무엇이 우선인가?
수면이 채워줘야 식욕을 느끼고 식욕이 있어야 성욕을 느낀다.
인간의 기본 매커니즘을 따라 구마하는 일단 허기를 채우려 한다.
파티에 마련된 과자나 안주로는 도저히 안 되겠고, 친구들을 불러 식당이라도 가려는데.
"Hey. where're you going?"
빅토리아 알렉산드라가 인파를 해치고 다가와 슬쩍 팔짱을 끼며 말을 걸었다.
구마하의 반팔 끝에 부드럽고 뭉특한 촉감이 닿는다.
영국인지 호주인지 모를 연구기관은 틀렸다.
구마하의 마음에 다른 무엇보다 성욕이 살아난다.
"What?"
그리고 그의 입에서 나온 한 마디.
"두... 두유 원트..."
"I want? what?"
섹스! 섹스라고 해!! 라는 본능이 목구멍에서 소리치지만, 이번에도 이성이 침착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피... 피자?"
"Ahahah! yes!"
* * *
"야!!"
"아 깜짝이야! 왜?"
"아 왜. 우리 지금 바뻐."
태윤이는 어딜 갔는지 보이질 않고. 게임중인 친구들을 찾아오니 멤버가 더 늘어난 상황에서 두 녀석이 시합을 주도하고 있었다.
"뭐야? 여기도 사람이 더 늘었네..."
"지금 도전자 줄 섰어."
"야 빨리 말해. 우리 정신없어."
"얘들아. 나 잠깐 식당에 밥 좀 먹고 올게. 너네 모르는 사람들 따라가지 말고 여기 있어."
"다 모르는 사람들인데 누굴 따라가."
"아무튼, 빨리 갔다올게."
"야. 구마."
"왜?"
"먹는 게 여자냐?"
미친 소리는 무시하고 밖으로 나왔다.
빅토리아가 야외에서 춤추던 사람들을 구경하다 눈을 돌린다.
은은하게 지어지는 그녀의 미소.
컴퓨터 배경화면으로 놔두고 싶을 정도로 남자의 마음을 아찔하게 만드는 표정이었다.
"가... 가시죠? 아니. 피자. 잇 피자. 렛츠 고."
데이트를 하는 기분이다.
파티에서 예쁜 애를 데리고 나와 맛있는 것을 먹으러 간다니.
그것도 피자다. 나 뭔가 좀 멋있는 듯.
"유... 유 노 미?"
혹시나 싶어서 물어봤는데, 빅토리아는 당연하게 알고 있다는 듯 이름과 시합을 이야기 해준다.
그리고.
"나. little bit 한국 말 할 수 있어."
"오오!! 오오오!!! 어떻게?!"
외교부에서 근무하는 아버지 덕분에 과거 한국에서 살았던 적이 있었단다.
"나. 국민학교 2~ 3학년 다녔어."
"지금은 초등학교로 바뀌었어. 어 그러니까 엘리멘탈 스쿨. 쌔임 쌔임."
"Yes. yes."
24시간 운영되는 선수촌 식당에 들어와 피자 두 판을 챙겨오니 이 시간에 뭘 그렇게 많이 먹냐고 깜짝 놀라 묻는다.
그녀의 짧은 한국말과 나의 개미새끼 같은 영어 실력으로 대화를 나눴다.
아까 팔씨름해서 몸에 기운이 다 빠졌다. 난 먹어야 힘이 나는 놈이다.
자기는 테니스 선수라 늘 다이어트를 끼고 산다 그래서 잘 먹는 사람을 보면 늘 부럽다.
"나는 먹는 데 있어 그런 제약은 없어."
"Oh, that's great!"
그레이트. 그래. 그레이트하지.
이야길 나눠보니 생각보다 언어의 어려움은 크지 않다.
한국에 대한 그리움도 있고 여러 가지 은근히 말이 잘 통한다.
"마하는 나 알어?"
"알지! 아이 노 유!"
"How?"
패션 모델 아니냐고. 한국에도 니 팬 많다고 해주니 좋아하는 빅토리아.
환한 웃음과 미소에 점수를 따는 거 같아 자신감이 샘솟는 기분이다.
"진짜? 거짓말 아냐?"
"아니야. 너 인기 좋아."
뭐 그러지 않을까? 어쨌든 듣기 좋은 소리 해주는 건 매너니까. 나쁠 건 없는 것 같다.
"MA-HA. Why did you lose on purpose?"
"뭐... 뭐라는 거야? 왜 갑자기 영어를...?"
"아까 왜 일부러 졌냐고?"
그녀가 팔씨름 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이유를 궁금해 하는데.
"아. 그쪽은 아직 시합이 있는데, 몸 상하면 어떡해."
이러저러 손 발 다 써가면서 이유를 설명해주니, 빅토리아도 이해하며 턱을 괴고 흐뭇하게 바라본다.
"So~ sweet~."
그레이트에 스위트라. 괜찮은 거 맞지 지금?
그나저나 진짜 반하겠다. 그녀의 미소가 저 눈빛이 사람을 미친듯이 홀린다.
물론, 그럴 생각으로 여기까지 왔지만 정말 뭐라 하기 어려운 감정이 목구멍부터 단전까지 타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우리는 피자를 먹으며 다양한 이야기를 나눴고 식당을 나와 선수촌을 걸었다.
"한국에선 널 누나라고 해."
"Right, I remember! 누나. you 동생."
"하하. 맞어 동생이지."
"Call me."
"에이 뭔 누나야. 남녀 사이에 그런 게 어딨어."
"Say it. come on!"
"..."
"Come on!!"
"누... 누나..."
"Ahahah!!"
누나라. 흠. 그건 그거대로 나쁘지 않은 거 같고. 벨라루스 누나. 흠.
그러고보니까. 여기서 어떻게 해야 침대까지 가는거지?
"빅토리아. 이제 어디 갈 거야?"
"What? 아~ 어디 가냐고?"
"다시 파티?"
"으음. No."
빅토리아는 낼 모레 첫 시합이 잡혀있어 파티는 그만하고 숙소로 돌아가 잘거란다.
잘됐다. 일단 침대가 있는 공간과 가까이 가면 다음은 또 그 다음이 있겠지.
"데려다 줄게."
"Thank you."
"너 러시아어도 하지? 아까 스바시바가 뭐야?"
"No. not 너. 누나. I'm older than you. don't forget. okay?"
"벨라루스에서 오신 존경하는 빅토리아 누님. 소인이 간곡히 하나만 여쭤보건데."
"Ahahah! shut up!!"
스바시가가 무슨 뜻이냐니 Thank you. 고맙다라는 뜻이란다.
"오~ 그렇구나."
"Спасибо."
"스바시바."
Good! 하는 칭찬을 듣다보니 어느덧 벨라루스 숙소.
여기도 여기 나름 유럽 애들의 파티 문화로 북적북적 하는데, 아까 미국애들보단 얌전하고 조용한 분위기의 음악이 나오고 있었다.
"음. 그럼."
"Спасибо, что взял меня."
"데려다 줘서 고맙다는 뜻이지?"
"맞어."
"좋겠다. 언어 많이 알아서."
벨라루스 사람인 빅토리아는 러시아어 영어 불어는 네이티브 스피커로 다룰 수 있고, 한국어와 일본어도 조금씩 알고 있단다.
"한국 일본은 거기 살아서겠지?"
"That's right."
"아 진짜 좋겠다. 어려서 외국 살면 언어 쉽게 빨리 익힌다고 그러던데."
"마하도 세계로 다니다보면, 자연스레 알게 될 거야."
"세계라. 아직은 잘 모르겠는데."
자 그럼. 쓸데없는 이야기로 시간도 끌만큼 끌었는데. 더 뭐 레파토리도 떨어지고, 여기서 그냥 굿바이 하는 걸로 끝인가?
들어가서 커피 한 잔만 주면 안돼? 뭐라고 물어보지?
진짜 앞으로 운동도 운동인데 언어 공부 존나 한다. 러시아어까지 삼 개 국어는 익혀놓는다.
"MA HA."
"응?"
"동생. 나 누나."
"하하하! 그래. 앞으론 누나라고 불러줄게."
빅토리아가 뭘 말하려고 하는지 모르겠지만, 뭔가 머뭇머뭇 거린다.
그러더니 부끄러운 표정으로 손을 슬쩍 잡아 당기며 말했다.
"Would you come in?"
오오~ 역시 누님! 미숙한 동생의 속사정을 연상의 성숙함으로 이끌어 주시는.
그렇다면 저도 거기에 보답을.
"인 하우스? 올?"
"or?"
"인 유?"
빅토리아가 깔깔깔 웃으며 퍽퍽 때리는데, 다행히 개드립이 먹힌 것 같다.
그리곤 한국어와 영어가 뒤섞인 말로 자기는 막 그런 사람 아니고 릴레이션쉽에 있어 뭐라뭐라 하는데.
"But. if you want..."
"아이 원트. 릴리 원트!!"
"Okay."
몰래몰래 들어간 숙소. 빅토리아의 룸메이트가 잠들어 있어 그녀가 먼저 살금살금 침대 쪽으로 걸어가며 손으로 입 끝을 가리킨다.
"어. 쉿."
밖에서 들려오는 소음에 맞춰 조심조심 신발을 벗고 둘이 같이 이불을 덮어쓰고 누웠다.
"어우 깜깜해라."
"Wait. 마하? do you have protection?"
"프... 프로텍션이 뭐야?"
"Condom."
있지! 당연히 있지!!
주머니를 부시럭부시럭 은빛 봉투를 꺼내드니 빅토리아도 안심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옷을 주섬주섬 벗는다.
현직 모델답게 그녀는 올림픽 선수촌이라 하더라도 대충 츄리닝만 입고 있지 않았다.
간단하지만, 멋지게 꾸며입은 블라우스의 단추를 하나씩 풀어 해치니, 부드러운 속옷이 나오고 있다.
"후우. 후우."
"What's wrong?"
"아니야. 그냥 흥분해서."
어두워도 가슴골을 외면할 순 없어 가볍게 얼굴을 가져가니 빅토리아가 간지럽다는 듯 꺄르륵 거리는데.
그때 갑자기 벌떡 하는 인기척과 함께 룸메가 일어나 방에서 나가버렸다.
"아이고... 미안해서 어떡하지..."
"Okay. It's the Olympics, so she'll understand."
"아 그렇구나."
올림픽이라 이해를 해줄 것이란다.
그럼. 그렇지. 올림픽인데.
그렇다면 이제는 숨길 것 없이 이불을 걷어차고 나와야지.
"와우."
"What?"
"유 아 소 뷰리풀... 릴리. 뷰리풀..."
이미 충분히 예쁘고 아름다운 아이들과 좋은 추억을 만들었었다.
그래도 지금 이 순간은 말 그대로 상상속에 벌어지던 그 장면을 눈앞에 목격하는 순간이라 감탄이 끊이질 않는다.
금발의 여인 빅토리아.
그녀는 정말이지 비너스의 환생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몸을 가지고 있었다.
"누나. 빅토리아 누나..."
"Yes?"
"너무 좋아요."
사랑에 빠지는 것 같다.
실제로 사랑을 나누고 있지만, 그걸 넘어서는 내가 원하던 사랑의 형태가 바로 그녀같다.
"빅토리아. 아이 러브 유."
"Ahahah. No."
"진짜로 누나 사랑해요."
그러자. 빅토리아가 느끼던 표정을 살짝 바꾸며 정색하는 얼굴로 말한다.
"MA- HA. Just do it. foc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