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화 〉 THE REAL WORLD CHAMPION (4)
세 번째 메달 시상식이다.
처음 100미터 땐 몸이 너무 힘들어 정신이 없었고, 200때도 어리버리 가라는 대로 가고, 서라는 곳에 서고, 받으라는 대로 상 받고 애국가 듣고 태극기 보고 그러고 내려왔다.
어떻게 보면 이번 800미터 중거리 시상식이 처음으로 온전한 마음과 정신으로 수상의 기쁨을 누리고 있었다.
"Hey. KOO?"
"음?"
시상 전 단상 준비나 기타등등으로 잠깐 대기하는 시간이 있다.
각자 단복으로 갈아입은 선수들과 악수도 나누고 잡담도 하고 그러고 있었다.
다들 어떻게 그렇게까지 뛸 수 있냐고 물어보는데, 아 진짜 영어 공부 빡세게 해야지.
"KOREA. KOO MA HA!!"
2위 3위 선수들의 뒤를 이어 단상 가운데 칸에 올랐다.
관중석의 함성과 박수소리를 들으며 두 팔을 들어줬다.
뭔가 스스로도 조금 여유가 있어보여서 그냥 내가 나 자신이 기특하고 뿌듯한 순간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단순히 메달을 받아 좋다기 보단, 뭔가 좀 더 깊은 울림이 느껴진다.
옆에서 지켜보는 동료 선수들.
세 번째 메달 획득 소식에 기절해 호텔로 먼저 돌아가신 천병욱 대사부님.
힘써주시는 연맹 관계자들과 기자님들이 들려주시는 한국 국민들의 반응들.
여기까지 온 건 난데, 내 욕심과 욕망이 나를 움직였는데. 왜 주변에서 더 기뻐하는지 여전히 잘 이해가 되진 않지만.
그럼에도 응원해주시는 게 감사한 마음이 들어, 메달과 국가대표라는 무게감을 실감하는 경험이었다.
"마하야. 다녀와라."
"네. 이제는 사람들 앞에서 팬티 내리는 것도 별로 어색하지도 않고 그러네요."
"하하하! 이 녀석."
모든 일정을 마치고 여기저기서 걸려오는 전화를 받았다.
일면식 없는 축하 전화는 그냥 감사합니다 하고 끊지만, 이주영 감독님과의 통화는 너무 즐거운 시간이었다.
"아이고 이놈아..."
"감독님 보셨어요?"
"봤냐고? 야 우리 지금 학교야."
"네?"
한국 시간으로 새벽 1~2시 됐을 건데 다들 모여서 경기를 보셨다고 한다.
핸드폰 너머로 한주 고 친구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동민이도 잠깐 목소리를 들려준다.
"어. 동민아!"
"그래! 마하야 우승한 거 너무 축하해."
"뭐야 이 새끼? 갑자기 왜 이렇게 반듯한 청소년이 됐어?
"야... 지금 여기 방송국 와서 같이 찍고있어..."
"크하하하! PD아저씨! 동민이 원래 욕 되게 잘해요!!!"
"미친ㄴ! 아니. 하하하... 마하야 왜 그래."
다시 이주영 감독님이 전화를 바꿔 통화를 이어갔다.
"감독님. 지금 방송국이랑 같이 계세요?"
"몰라. 우리야 시키는 대로 하는 거지. 그나저나 너 메달 또 따면 우린 내일 어떻게 학교 오라는 거냐..."
"하하하~ 죄송합니다."
"대단하다. 진짜 대단해. 멋있따."
"메달 가져 갈게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그래 끝까지 힘내라. 상률이도 잠깐 바꿔 줘."
한 감독님도 웃으며 통화를 마치셨다.
"진짜 한국은 난리도 아닌가 보네."
"대사부님은 괜찮으시겠죠?"
"차라리 이렇게 돌아가시는 것도 호상이 아닐까 싶다."
"네? 아 감독님. 그런 말씀이 어딨어요..."
"메달 세 개라... 하하하..."
"아. 오늘 끝내면 딱 좋은데. 내일 1500은 그냥 기권할까요?"
"큰일 날 소리 한다. 주영이 말 못 들었어? 너 내일 경기에 맞춰서 방송국 특집으로 중계 준비한다고 그러는데, 그냥 기권하면 그건 그거대로 난리지."
"아이고... 쉬지도 못하고 참..."
한국에 도착한 친구들과도 통화를 했는데, 어른들이 고 3이란 것도 잊은 채, 거기까지 간 거 경기 끝날 때까지 같이 있지 뭐 하러 일찍 들 왔냐고 혼을 내시더란다.
진짜 모르겠다.
살면서 이정도 관심과 응원을 받아본 적이 없어서도 더 실감이 안난다.
사람들이 해주는 이야기가 내 이야기 같으면서도 나 아닌 거 같고. 아직은 정말 모르겠다.
경기장을 나와 선수촌에 돌아오니, 만나는 사람들마나 박수를 쳐주거나 다가와 악수를 요청했다.
"감독님. 뭔가 참 오묘하네요."
"뭐가?"
"그냥 사람들이 저러니까. 들뜨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하고. 좋은 건지 아닌 건지 모르겠어요."
"다 그러는 거지. 아무튼, 짐 다 풀었으면 밥이나 먹으러 가자."
"네!"
같은 숙소를 쓰고있는 경보팀 형님들도 마침 훈련을 마치고 들어오셨는데, 엄청 반가워 해주시며 말씀하셨다.
"야! 너 또 메달 땄다며??"
"아. 네."
"이야... 마하야. 형이 너 발에 뽀뽀 한번만 하면 안되냐?"
"아우! 무슨 소리세요. 싫어요!!"
"야. 아니면 형 여기 발 한번만 잡아주라. 어?"
"아 제가 남자 다리를 왜 만져요."
"뭐 어때? 야 한버만. 어? 아이 진짜 그러지 말고 빨리 여기!!"
경보팀도 식사를 안 하셨다고 하셔서 같이 밥 먹으러 가기로 했다.
숙소 앞에서 감독님과 기다리고 있는데, 건너편 건물을 쓰고있는 수영 팀을 만났다.
"어? 구마하다!"
"어디어디! 오오! 구마하!!"
와~ 대체 구마하가 뭐라고 저렇게들 반가워 하시는지.
감독님도 나도 한국 다른 팀 선수와는 사적으로 처음 만나는 자리였다.
"대회 하고 오시는 거세요?"
"네. 아우 육상팀 대단합니다. 축하드립니다."
"별 말씀을요. 제가 한 거 있나요. 이 녀석이 다 했지."
"시드니에선 펜싱이 일을 내더니. 이번엔 육상이 사건을 저지르네요. 구마하 선수도 축하해."
"아 네. 고맙습니다."
"거 참 보면 볼수록 탐나는 몸이네. 그런 피지컬로 수영을 했어야지. 왜 달리기를 했어?"
"하하하... 집 주변에 수영장이 없어서요..."
공항에서 봤던 또래 같아 보이던 친구도 인사를 나눴다.
"형 축하드려요."
"형?"
"네. 제가 한 살 동생이에요."
"어어. 그렇구나."
김태주는 87년생으로 한 살 동생.
나와 똑같이 초청 선수 자격으로 이번 올림픽을 찾아온 수영팀의 막내였다.
"우리 태주도 4년 뒤엔 해낼거야. 그치?"
"네."
그래. 얘도 기대주구나. 아이고 고생하겠다.
"수영 힘들죠?"
"형 제가 동생인데 말 편하게 하셔도 돼요."
"수영 빡세지?"
"하하... 너무 편해지시는 거 아니세요?"
"처음인데, 수영 좆같지 라고 물어보긴 조금 그렇잖아."
"하하하!! 진짜 좆같애요."
코치님들은 코치님들끼리 자리를 잡고 나는 우리 경보팀 형님들이나, 태주. 수영팀 선수들과 앉았다.
"설마 그걸 다 먹어??"
"네. 전 먹고 더 먹어요."
"우와... 우리도 식욕이라면 누구 못지 않은데."
경보팀 형님들이 마하는 식욕이 곧 스태미너인 놈이라고 대신 설명해주셨다.
"인터넷 기사 보니까 마하 씨는 태릉에서 훈련 안 했다고 하던데. 맞아요?"
"저 '씨'는 빼주셔도 되는데..."
"아이고. 그래도 한국을 빛낸 스포츠 스타를 함부로 대할 수 있나."
"저도 태릉 가보고 싶었는데, 그냥 어른들이 하라는 대로 했어요. 육상은 원래 그렇게들 한다고 그러시고. 운동장을 다른 팀들이 써서 자리도 없다 하시고. 맞죠?"
경보팀 형님들께 물으니, 내 말에 동의하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시며 수영 선수단 쪽을 보셨다.
"뭐 다들 잘 아시잖아요."
"하긴... 태릉이 은근 좁죠."
"그래도 이 정도 성적을 냈는데. 다음엔 육상 팀도 더 신경 써 주겠죠. 펜싱도 먼저 그러더니 이번에 엄청 지원해주던데."
"우리도 열심히 해야죠."
"좋겠다. 어쨌든 이제 메달이 있으니까."
"수영도 잘 될 거에요."
"우리는 태주만 보고 있어요."
"..."
흠. 이것저것 짊어진 게 많구나.
식사를 마치고 다들 쉬러 가거나 아니면 식당에 앉아 이야기를 나눌 때. 나는 태주와 둘이 오락실을 찾았다.
"저도요. 어른들만 있으니까 숨 막혔어요."
"그니까. 애들은 놀 땐 놀아줘야 하는데."
"근데 형 아까 그렇게 먹었는데 바로 이렇게 움직이셔도 돼요?"
"음. 난 먹는데 크게 제약이 없어."
"와. 좋겠다."
"수영도 엄청 먹잖아? 먼저 마이클 펠튼 먹는 거 보니까 무시무시 하더만."
"그분은... 뭐... 원체 힘이 좋으니까."
육상에서 내가 기적을 연출하고 있다면, 수영은 마이클 펠튼이 연일 메달레이스를 펼치며 미국의 종합 순위를 끌어 올리고 있었다.
"괴물이야... 벌써 메달이 다섯 갠가 그렇지?"
"형도 세 개 받으셨잖아요."
"그래도. 메달 갯수로 따지면 비교가 안 되지."
"저 마하 형... 부탁이 있는데요."
"응? 뭐?"
"저 금메달 한번만 보여주시면 안 돼요?"
"안 될 거 뭐 있어. 이 판만 하고 가자."
빅토리아한테 했던 거 같이 태주를 데려와 메달을 보여줬다.
"자."
"우와... 고맙습니다."
"가지고 있어도 돼."
"에이 어떻게 그래요."
"시합 끝나고 돌려줘. 부적 같은 의미로."
"저 이미 시합 끝났어요..."
태주도 올림픽의 경험을 얻기 위해 대회에 나왔는데 너무 긴장한 나머지 부정출발로 실격패를 당했단다.
"이기는 건 기대도 안 했고, 완주라도 해보고 싶었는데..."
"뭐 어때. 나도 100미터 할 때 쓰러졌는데."
"형은 쓰러지고 일어나서 세계 신기록 냈잖아요."
"흠. 그렇게 듣고 보니까 엄청 잘한 거 같은 걸?"
"으음~ 마하 형 이런 성격이셨구나."
우리는 육상과 수영의 차이점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마이클 펠튼이 형 같은 선수죠. 단거리도 잘하고 장거리도 잘하고."
"글쎄다. 난 역시 그쪽이 더 대단한 거 같은데. 수영은 거리도 있지만, 영법이란 것도 있잖아."
"..."
"왜?"
"그냥요. 한 종목도 진짜 힘든데, 다들 어떻게 그렇게 하는지... 괴물들만 본 거 같애요."
"너도 잘하니까 연맹에서 신경 써 줬겠지."
"모르겠어요. 괜히 여기와서 자신감만 더 떨어지는 거 같애요."
"태주야. 나 한국에서 훈련 시킨 이주영 감독님이 그러셨는데, 운동은 절대 남들이랑 비교하면 안 된다고 그러셨어."
처음 중거리가 잘 몸에 익질 않아서 고민하고 있을 때 들었던 말이다.
"남의 전성기와 나의 슬럼프를 비교하지 마라..."
"그렇지. 그 선수도 전성기가 오기까지 무수히 많은 슬럼프를 겪었는데 그걸 어떻게 동일 선상에 놓고 보냐 이거지."
"...근데 형은 운동 1년하고 지금 메달 막 따고 있는데."
"하하하! 그러니까 비교하지 말라는 거잖아. 내가 선수생활 1년만에 메달을 땄어도 앞으로 어떻게 될지 누가 알어?"
"형은 계속 육상 하실 거에요?"
"일단은. 다른 걸 하자니 뭘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둘이 앉아 노닥노닥 거리고 있는데, 한 감독님이 돌아오셨다.
"음? 너 아까 놀러간다더니. 일찍 들어왔다?"
"아. 태주가 메달 보여달라고 그래서요."
"안녕하세요."
"그래. 너 몸 좋던데. 육상 할 생각 없어?"
"하하하..."
"야. 수영은 물이 있어야 뛰지만, 우리는 그냥 땅만 있으면 어디든 훈련 가능하다. 고민해 봐."
"그래. 육상 해. 내 후배로 들어와라."
"그만 가봐야겠네요. 어른들이 모르는 사람들이랑 오래 있지 말라고 했었는데."
태주를 보내고 감독님과 각자의 침대에 누워 쉬었다.
"오늘도 고생했다. 마하야."
"괜찮아요."
"피곤하냐?"
"조금요. 근데 진짜 괜찮아요."
"컨디션 안 좋으면 내일 방송이고 뭐고 그냥 1500 기권해도 돼. 어차피 하던 것도 아닌데."
"에이 안 돼요. 우리 감독님이 포기하면 운동 그만두신다고 그러셔서."
"하하하! 야 인마. 그건 그때 이야기고."
"예선이라도 뛰어보고 싶어요. 그리고 안 되면 그때 그만두죠 뭐."
"마하야. 너가 그렇게 까지 할 수 있는 것도 다 내공의 힘이라고 봐야 되는 건가?"
"내공은 단거리 때 더 쓰는 거 같고. 중거리는 내공보다는 피지컬? 훈련이 있어서 견디는 거 같아요. 힘이 있어야 내공도 쓸 수 있거든요."
"그래도 대단하다. 난 이렇게 너 보면서도 믿기지가 않는다."
감독님이 숙소 책상에 놓인 세 번 째 월계관과 메달 박스를 올려다 보셨다.
"고맙다."
"뭐가요?"
"너 인마."
"저요? 갑자기요? 왜요?"
"생각해보니까, 내가 아직 너한테 이 말을 안 해준 거 같더라고."
"감독님 갑자기 왜 그러세요 무섭게?"
"무섭긴. 사람 마음이 그렇다는 거지."
"에이. 제가 감독님한테 고맙죠."
"선수가 활약을 하니 나도 대우를 받는다. 아까 수영 코치들도 그렇고. 저기 옆 방에 경보 팀도 그렇고. 너 아니면 나도 지금 한국에 있었겠지. 선수촌 검문이라도 받아봤겠냐."
감동은 좋지만, 갑자기 이러시니 간지럽구만.
"감독님. 아까 태주 걔 있잖아요."
"음."
"그 친구도 수영 첫 메달이라는 부담감을 가지고 있는 거 같더라고요."
"그래. 니 금메달 보는데 애 눈빛에 깊이가 있더라."
"그 친구 보면서도 느꼈는데, 기대를 안고 운동하는 건 어려운 일인 거 같아요."
"쉽지 않지..."
"저 감독님 없었으면 여기까지 절대 못 왔어요. 연맹도 그렇고, 언론도 그렇고. 감독님이 커버 칠 거 쳐주시면서 지켜주신 거잖아요. 육상도 알려주셨고."
"후후. 이 자식."
"제가 내일도 멋진 모습 보여드릴게요."
"말했지. 넌 이미 세계 신기록 보유자라고. 승패에 연연하지 마라."
"에이 그래도 나왔으면 일단 끝까지는 가봐야죠."
"그래. 일단은 자자. 오늘도 고생했다."
"네. 주무세요."
"좋은 꿈 꿔라."
부스럭 부스럭 감독님이 침대에 돌아누우시며 창 밖 멀리 외국인 선수들의 파티소리만 들려온다.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조심히 여쭤보았다.
"저 감독님?"
"음."
"저 내일 대회 끝나면 자유시간 좀..."
"안돼. 그건"
"아... 감독님."
"야 인마. 너 내일 여자 테니스 경기 끝나니까 그러는 거 아냐?"
"네?"
"자. 빨리."
"...제가 여자 테니스랑 무슨 관계가 있는데요?"
"하하하! 글쎄다?"
"보... 보셨어요?"
"먼저 식당에서 어떤 금발의 테니스 선수가 우리 쪽 보면서 인상 구기는 건 봤지. 넌 밥 먹느라 정신 없어 몰랐겠지만."
"아. 뭐 그냥..."
"자라. 좋은 꿈 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