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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륜기로 가버렷-73화 (73/401)

〈 73화 〉 THE REAL WORLD CHAMPION (5)

어느덧 외국인들의 체취나 땀 냄새도 익숙해진 올림픽 경기장과 선수촌 생활.

남은 대회 일정은 이제 5일.

나에게도 오늘은 마지막 대회였다.

"흐음."

"뭐하냐?"

"감독님. 혹시 카메라 가지고 계세요?"

"지금은 없는데 왜?"

"그냥. 사진 좀 찍고 싶어서요."

올림픽까지 와서 메달도 따고 기사도 나고 그랬다고들 하는데. 내가 추억을 담아가는 건 없는 것 같다.

감독님이 연맹 분들한테 연락해 디지털 카메라를 가져다 주셨다.

"애들이랑 그때 많이 찍지 않았나?"

"그냥 좀 제가 찍고 싶은 게 있어서요."

운동을 시작한 뒤로 정말 많은 추억을 만들었다. 그런데 단 한번도 그런 순간을 내가 기록한 건 없는 것 같다.

어제 태주가 계속 육상을 할 거냐고 물어봤다.

그 질문은 언젠가 내가 육상을 그만 둘 날이 온다는 뜻도 됐다.

은퇴하면 기억을 더듬어서만 살 순 없으니 기회가 있을 때 많이많이 찍어둬야지.

그나저나 육상 외 다른 것이라...

다른 걸 할 게 있을까?

운동 말고 다른 거? 아니면. 다른 종목?

7월 연대에서 훈련 받던 일이 생각난다.

*    *    *

"마하야. 잠깐 스톱."

"네. 교수님. 후우. 후우."

"좋아. 아주 좋아. 근데 말이야. 넌 단거리 선수가 뛸 거면 400을 뛰어야지? 왜 800을 시작한 거냐?"

"아 처음에 육상 할 때 감독님들이 그것도 잘 맞을 거 같다고 하셔서."

"그래. 그건 내가 봐도 그런데, 상률이나 이 선생이 400으로 계속 하라고 안 했어?"

400미터를 몇 번을 도전해 봤었다.

그런데, 최고 속도로 운동장 한 바퀴를 달리는 400미터 경기는 정말이지 너무 어려워서, 차라리 주법이 다른 800을 뛰면서 체력을 맞췄다는 말씀을 드렸다.

"그럼 1500을 같이 해보는 건 어때?"

"1500m요? 제가 할 수 있을까요?"

"못 할 건 뭐냐? 이미 니 몸이 중거리를 소화하고 있는데."

"아니. 그래도 그건 좀 뭔가 다른 느낌인 거 같아서."

"뛰어봤어?"

"아직요. 이주영 감독님도 800m 선수셨고."

"근육이 많으니까 피로도가 있겠지만. 내가 볼 땐 충분히 될 거 같거든? 너 이미 800m도 너만의 리듬을 찾아 잘 뛰는데, 두 바퀴만 더 뛴다 생각하고 한번 달려 봐."

"네."

*     *    *

모든 대표팀은 올림픽 출국 전에 체력을 완전히 비워야 했었다.

그때는 금딸에 뭐에 양기가 넘쳐 흐르던 때라, 급하게 1500을 뛰며 새로운 종목을 하나 더 익혔다.

내가 몸 관리만 잘 한다면 이론적으론 새로운 종목을 익히는 것도 가능하다.

육상이 전부가 아니다.

다른 종목에 도전이라...

"어이고."

뭔 생각을 하는 거냐. 운동 한 종목 익히는 게 쉬운 것도 아니고.

나도 몰랐으니까 단거리 중거리를 동시에 시작했지. 알면 그렇게 못 해.

이렇게 보면 나도 진짜 운동에 미친 놈이구나.

에잇 사진도 다 찍었고 대기실이나 들어가야지.

네 번 째 찾아온 올림픽 스타디움 선수 대기실.

이제는 외국인 코치나 선수들까지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나누는 게 어색하지가 않다.

언어도 계속 듣다 보니, 대충 무슨 말들을 하는지 알 거 같다.

특히, 아프리카나 유럽 선수들이 쓰는 영어는 미국이나 영국 애들과 달라서, 각자의 악센트와 발음을 쓰는지라 한편으론 더 말하기 편하고 언어에 대한 장벽을 낮춰줬다.

"노 드럭스. 저스트 트레인 하드. 아이 해브 도핑 테스트. 쓰리 타임!"

"Ahahah. just kidding. calm down."

"유 드럭스. 유."

"Relax. KOO. OK?"

"나도 키딩이다 새끼야. 하하!"

"Ahahaha!"

"뭘 웃어. 내가 뭐라고 했는지도 못 알아 들으면서."

문법 몰라. 이게 맞는 말인지도 잘 몰라. 그래도 뭔 상관이야 일단 떠들고 보는거지. 우리가 언어학잔가. 스포츠 선수지.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아도 몸이 알고 시합을 안다. 그렇게 세계의 선수들과 점점 친밀도를 높여가고 있었다.

"외국어 울렁증은 치료 됐냐? 보니까 사람들이랑 잘 떠들더만."

"왔다 갔다 본 얼굴 또 보고 그러다보니 익숙하기도 하고 그러네요."

"그래. 언어도 자신감이다. 완벽한 발음 같은 건 없어. 결국은 조선놈들 아니냐. 안 그래?"

"어? 감독님 조선이요? 혹시 북에서 오신?"

"하하하! 이 자식이."

한 감독님도 마지막 시합에 앞서 긴장감을 많이 내려놓으신 모습이었다.

"그나저나 어제만 해도 몸 좋은 선수들 보이더니. 역시 1500은 1500이네."

"저만 혼자 무식하게 큰 거 같아요."

달리기는 장거리로 갈수록 몸이 가늘고 근육이 얇아진다. 파워보단 지구력 위주로 선수의 신체가 발달하기 때문이다.

나만 혼자 무식하게 크고 어깨도 우락부락한 모습이 어딘가 있을 곳이 아닌 곳에 있는 기분이 들었다.

"보자. 지금이면 기사가 나왔으려나...? 그거라도 떴으면 우리가 전략을 짜기가 쉽겠는데."

"감독님. 외국애들이 신경이나 쓸까요?"

"당연하지. 넌 어제도 메달을 땄는데. 당연히 신경을 쓰지."

어제 800미터 시합 전 한 감독님과 육상연맹 전력분석팀이 이야기를 나눴다.

단거리는 각자의 트랙에서 각자의 승부를 겨루지만, 800미터부터는 다 함께 인 코스로 달리기 때문에 팀 전략이라는 게 있다.

한 국가에서 두 사람 정도가 출전했을 때 할 수 있는 작전인데, 메달이 확고한 선수를 위해 다른 선수가 실드를 쳐주기도 하고, 일찌감치 앞서서 밸런스를 무너뜨리기도 하는 방식이다.

딱히 비겁하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는다. 발 건 것도 아닌데 뭐.

그런 가운데 우리는 나 한 사람만 출전을 했으니 체력이 된다는 전제 하에 여러 작전을 세웠었다.

예선은 천천히. 그러나 결승은 빠르게. 반전으로 최고 속도로 선두를 잡고 빠져나가는 것이었다.

"근데, 감독님이 기자 아저씨한테 절대 기사 내면 안된다고 하셨다면서요?"

"마하야. 잘 알아둬라. 기자란 놈들은 원래 반대로 말을 해야 알아듣는 인간들이야."

제발 진실을 알려달라면 숨기고, 절대 기사로 내지 말라고 해야 대서특필을 한다. 정말 모를 사람들이다.

아무튼, 감독님은 기자님을 알게 된 거, 어제의 시합까지 통으로 묶어 오늘 작전까지 밀고 가자고 하시는데.

오전 11시. 슬슬 1500미터 예선전이 시작되려 할 때 육상연맹 전략팀에서 찾아오셨다.

"한 코치! 방금 기사 떴어요!"

"정말요?"

"네! 해외 신문사도 지금 기사 퍼나르고, 오후 되면 다들 우리 컨디션 체크하느라 정신 없을 겁니다."

감독님이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며 말씀하셨다.

"됐다. 마하야! 일단 예선을 어떻게든 통과하고 와라. 나머진 우리가 알아서 할게."

"감독님. 근데 승패에 연연하지 마시라면서요?"

"나도 위에서 시키니까 하는 거야. 일단 해냈잖아?"

"흠."

"아무튼, 예선만 잘 뛰고 와. 져도 된다. 편하게 해."

이제와서? 어떻게든 이기려고 정보전까지 쓰면서 편하게 하라고?

아무튼, 시합은 시합이니까.

예선을 통과하는 게 내 임무다. 할 수 있는 걸 해보자.

*     *     *

[구마하 선수 손을 번쩍 들어보이네요. 얼굴이 환하고 좋아 보입니다.]

[한국의 자랑이죠!! 오늘도 구마하 선수가 금메달을 목에 걸었으면 좋겠습니다.]

[구마하 선수에게 1500미터를 알려주신 게 이현석 교수님이시라고 하던데. 맞나요?]

[그렇습니다. 재능이 보이길래 800 경기를 연습할 때 같이 해보라고 했습니다.]

[1500미터는 어떤 경기입니까?]

[트랙 3과 3/4바퀴를 도는 경기로, 빠르게 뛰어서도 안 되고 다양한 전략과 작전에 따라 순위가 바뀌는 시합입니다. 육상 경기 중에서도 보는 재미가 아주 높은 종목입니다.]

[교수님은 모든 육상 경기는 다 즐겁고 재밌다고 하시는군요.]

[아 그럼요. 요즘 육상이 대세 아닙니까!!]

1500미터 예선전이 시작.

육상에 기본 실력이 있는 구마하와 선수들의 차이가 크게 벌어지지 않는다.

[두 바퀴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구마하 선수 현재 순위는 5위.]

[차근차근히 가면 됩니다.]

[현재 구마하 선수 피로는 어떻습니까?]

[나쁘지 않습니다! 보십시오. 마지막 바퀴를 앞두고 역시 치고 나오지 않습니까?]

구마하가 역전을 노리며 트랙 밖으로 빠져 나오자 관중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구마하 선수! 조 2위로 다음 라운드에 진출하겠습니다.]

[오늘 밤도 전국이 육상의 열기에 빠져들겠네요!]

*    *    *

"후우-! 후우-!"

"힘드냐?"

"후우. 감독님. 어우... 이건..."

진짜 다르다... 선수들의 클래스가 너무 달라.

내가 1500에 경험이 부족한 것도 있지만, 혼자 뛰며 기록 재고 훈련 할 때와 여럿이 함께 뛸 때의 에너지 소비량은 차원이 다르다.

"감독님. 그리고 코치님. 저. 결승은 도저히 안 될 거 같은데요?"

"하하하. 그래 알겠다."

"에이 막상 그러면서 또 하면 잘 할 거면서."

"진짜요! 다음 라운드도 저... 어우..."

그러나 또 승부욕이 있다보니 준결승에 와서도 죽을 똥 힘을 쥐어 짜내며 어떻게든 결승에 진출.

"헉. 헉... 기권... 기권요... 더 못 뛰어요..."

"아이고. 마하야.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아니. 언제는 승패에 연연하지 마시라면서요??"

"일단 진정하고. 자 앉아 봐."

역시, 감독님도 사람이었어. 막상 여기까지 오니 또 메달 생각이 나시는가 보다.

그렇다면 나도 사람으로써 인간의 기본적인 것들을 챙겨야지.

"일단, 예선 아주 잘 해줬다."

"후우우..."

"너 정말로 기권하고 싶어?"

"그냥 우는 소리 한번 해봤어요. 근데 진짜 빡세요!! 장난 아니라니까요?"

"알어. 힘든 거. 고생이 많다."

"아 진짜 자유시간도 없고... 이게 뭔지..."

"이 자식이... 그래 오케이. 오늘 시합 마치고 폐막 때까지 원껏 놀아라."

"흠. 감독님. 제가 뭘 하면 되겠습니까?"

"야 이 씨. 이놈 자식이..."

예선 두 시합을 밸런스 조절하며 뛰기 버거워 그냥 냅다 최고 속도로 처음부터 끝까지 고정하고 달렸다.

물론 죽을만큼 힘들었지만 덕분에 상대팀은 내가 결승에서도 똑같은 전략을 쓸 거라 생각하고 있을 거란다.

"넌 어제도 선두로 치고 나가 시합을 마쳤으니까."

"음. 그래서요?"

"인 앤 아웃이다."

"인 앤 아웃요?"

처음 한 바퀴는 선두를 잡고 그리고 중위 그룹으로 빠진다.

선두를 따라가며 바람 저항을 빼고 마지막에 힘을 모아 스퍼트.

"어려운 건 아는데. 할 수 있겠어?"

"음. 한번 해보겠습니다."

"좋아. 일단 쉬면서 몸 준비하자."

*    *    *

[네. 여기는 아테네 올림픽 스타디움입니다. 전국에 계신 시청자 여러분 반갑습니다. 이제 곧 남자 800m 결승전을 중계해드리겠습니다.]

[태권도도 정말 열심히 싸워주고 있네요.]

[그렇죠. 이번 아테네 올림픽에서 우리 대표팀 정말 너무 잘해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네. 특히, 우리 육상의 구마하 선수가!!]

[하하하 교수님... 지금 편파 중계라는 시청자 항의가 들어오고 있어서요... 조금만 자제를...]

[아. 죄송합니다. 이게 선수를 아끼는 마음이 너무 크다 보니까.]

[심정은 이해합니다.]

캐스터와 해설자가 경기 전 대기 시간의 즐거움을 채워준다.

국민들은 늦은 밤 땀 흘리는 선수들을 보며 치킨과 맥주를 들고 있고, 자영업자들은 일년 열 두 달 올림픽만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선수들 입장하고 있습니다. 구마하 선수의 네 번째 도전이 시작되겠습니다.]

[우리 구마하 선수. 정말 끝까지. 아주 멋진 모습 보여주기를 바라겠습니다!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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