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처음으로 (1)
[우리 비행기는 이제 곧 인천 공항에 도착하겠습니다. 승객 여러분은 안전벨트를 착용해 주시고.]
다시 한국. 한 달 만에 마주하는 검은 머리 사람들과 고국의 풍경에 반가움을 느낌과 동시에 어딘가 어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독님."
"음? 왜?"
"사람들이 외국 갔다 오면 왜 말이 많은지 조금 알 거 같아요."
"하하하! 왜 그러는데?"
"왜 이렇게 한글이 낯설죠?"
"촌티 좀 그만 내고 입국 카드나 써 이놈아."
올림픽 선수단이 귀국했다.
몇몇 일찌감치 돌아온 팀들도 있지만, 우리 육상 팀은 올림픽폐막식까지 다 보고 나라에서 보내 준 비행기를 탔다.
출국장에서 짐을 챙기며 주변을 둘러보니, 다들 올림픽도 끝났다는 아쉬움과 정들었던 사람들과 멀어진다는 서운함에 여기저기 눈물을 보이는 누나들도 있고, 마지막 사진을 찍으며 약속을 잡는 형들도 있었다.
나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4년 뒤 베이징을 봐야 하나? 그것만 생각하고 있는데, 이두희 대표팀 감독님이 다가오셨다.
"상률아. 방금 기자들이랑 얘기했는데, 나갈 때 마하가 처음으로 나간다."
"아 형님. 그런 거 좀 하지 말라니까."
"야 인마 하라면 하라는 대로 좀 해."
이두희 감독님이 어깨를 꾹 잡으시며 말씀하셨다.
"그리고 너도 메달 목에 걸고 있고."
"아. 감독님. 저도 그건 조금... 좀..."
"좀 뭐?"
"생색내는 거 같아서 부끄러운데요..."
"아이고. 누가 그 스승에 그 제자 아니랄까 봐. 영광을 떠먹여 줘도 거부를 하냐."
금의환향이 어떻게 내 덕이라고 할 수 있을까. 모두가 열심히한 결과라고 본다.
그래도 진짜 감독님 말씀대로 시키니까 한다는 마음으로 가방을 주섬주섬 열어 메달들을 꺼내 들었다.
"마하야. 월계관도 쓸래?"
"아니요! 아우... 그렇게까지는..."
"그러지 마라. 나도 지금 얼얼하니까."
"아 진짜... 쪽팔리는데... 자랑하는 것도 아니고..."
"하하! 그냥 춘계 끝나고 학교에 메달 들고 왔다 생각하자."
"감독님. 그때 애들이 장난 아니게 놀렸어요."
"그냥. 눈 질끈 감고 가 보자. 어쩌면 이 순간이 가장 편할 수도 있으니까."
감독님 말씀대로 나가기 전과 돌아온 뒤 세상이 바뀌어 있었다.
"오오..."
"엄청들 몰려왔구나..."
출국장이 열리고 캐리어를 끌고 나오는데, 올림픽 스타디움 못지않은 인파가 공항을 가득 메우며 환영해 주고 있었다.
카메라 셔터 소리가 박수 소리 못지않게 시끄럽고, 여기저기 번쩍이는 플래시에 눈이 빙빙 돌아가는 거 같다.
먼저 귀국하신 천병욱 대사부님과 육상 연맹 어른들이 중앙에서 큰 플래카드를 들고 환영해 주셨다.
"어서 와라! 잘했다 마하야!"
아마. 작년 이맘쯤 여름 합숙을 마치고 친구들을 만났던 거 같다.
그때는 몸만 커지고 세상은 아무것도 바뀐 게 없었는데. 이제는 내가 봐도 뭔가 좀 변한 것 같다.
하긴, 섹스도 많이 했고, 메달도 땄고. 많이 변했지.
바뀐 세상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가게 될까?
미지의 땅으로 몸을 던지는 기분이다.
* * *
올림픽의 뜨거운 열기도 가을 햇살이 찾아오며 잦아들었다.
가을이라는 계절이 언제나 그렇듯, 왔는지도 모르게 또 추위가 찾아온다.
10월이 가고 11월 고3 수학 능력 시험이 지나갔다.
환경미화원이 낙엽을 쓸어모으며 가로수의 지독한 은행 냄새도 추억이 된다.
누군가는 평범한 일상을 걷는 시간이 누군가에겐 정신없는 반년이 되어 지나갔다.
그렇게 2005년 1월. 해가 바뀌었다.
"응. 잘했어. 옷 깔끔하게 입고 갔지. 괜찮아. 엄마 여기 눈 온다. 거기는?"
이혜정은 대학 면접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멀리 동창 여행을 떠난 모친과 통화를 하는데, 그녀의 발걸음에 소복소복 눈이 밟힌다.
"당연히 해피 밥 주고 나왔지. 응. 먹고 있을게. 여행 잘하세요.
아빠도."
해가 변해 스무 살 성인이 된 청년들.
하나둘 대입 합격 소식이 들려오며, 서로가 인생의 다음 시즌을 나아가기 위해 준비 중이다.
"으으 발 시려. 그냥 바지 입고 나갈걸."
이혜정도 서울에 면접을 보고 오는 길이었다.
전공에 확고한 자신은 없지만 일단 점수에 맞춰 현실적인 선택을 내렸다.
아직은 하고 싶은 공부도 미래도 잘 보이지 않는다. 그냥 오늘의 노력이 내일로 이어지기를 바랄 뿐이다.
"마하는 좋겠다..."
지난 1년. 누구보다 많은 상황 변화를 겪은 건 구마하였다.
한국을 빚낸 스포츠 스타. 아테네를 빛낸 육상 영웅.
명문 대학 연세대를 특례로 입학하지만, 그에게 대학이 의미가 있나 싶을 정도로 구마하는 화려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올림픽에서 얻은 성과로 벌은 상금만 삼십억에 달한다는 말을 들었다.
이어지는 TV 출연과 광고 인터뷰까지.
잡지 화보도 나오고, 지난 9월 한 달은 말 그대로 구마하의 시간이었다.
이혜정은 재작년 크리스마스이브를 시작으로 그와 나눈 시간과 추억을 돌이켜 본다.
많은 것들이 너무 멀게만 느껴지고 있었다.
"..."
1년도 아닌 작년 4월. 야간 자율 학습 중 운동장에서 혼자 달리던 친구를 찾아가 이야기를 나눴다.
조만간 한번 보자고 했는데, 그리고 단둘이 시간을 보내지 못했었다.
그럴 수밖에. 대회로 바쁘고, 그 와중에 여자 친구도 사귀고.
끝나자마자 바로 올림픽에 뭐에.
학교에 돌아온 모습도 멀리서나마 잠깐 봤을 뿐이다.
그마저도 남자애들이 그를 행가래로 띄워 주어 창밖에서 훈훈한 미소만 지어 보였다.
여러 가지 생각과 함께 걷다 보니 어느덧 아파트 근처에 도착한다. 이혜정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구마하 선수가 운동이 끝나면 꼭 우리 슈퍼를 들렸다며 자랑하던 슈퍼 아주머니.
아파트 단지에서 늘 밤마다 운동하던 모습을 봤다고 자랑하는 이웃 주민들.
TV에 나오는 모습을 보며 언젠가 큰일 할 줄 알았다고 말하는 가족들까지.
사랑받고 싶다고 서글프게 울던 친구는 이제 마음의 안정을 찾았을까?
"어디 갔다 오냐?"
"아 뭐야! 깜짝이야!"
"어이 씨. 뭘 그렇게 놀라?"
"아 진짜... 뭐야 너...! 갑자기 뒤에서 말을 걸면 어떡해!!"
"그럼. 뭐 막 뛰어가서 앞에서 말 걸 걸 그랬나?"
"아... 아 진짜 놀랐네."
혼자 아련하게 그를 추억하고 있었는데, 당사자가 갑자기 튀어 나왔다.
생각 속에 화려하고 멀게만 펼쳐지던 구마하는 다섯 개들이 라면 봉투 2개를 들고 슬리퍼 차림으로 눈만 껌벅거리고 있었다.
"라면 사고 오는데 너 가고 있길래."
"그리고. 옷이 그게 뭐냐! 좀 깔끔하게 입고 다니든가!!"
"아 왜 화를 내! 그리고 집 앞에 라면 사러 오는데 턱시도라도 입고 다녀야 되냐?"
"어후..."
마하를 보면서 입을 툴툴거리지만, 마음은 반가움에 두근두근거린다.
"어디 갔다 와?"
"면접. 동국대."
"오~ 동국대. 동국대도 운동 잘하지."
"예비 연대생 앞에서 말하긴 조금 부끄러운가?"
"무슨 상관이라고. 야 나야말로 지금 대학 때문에 머리 아파."
"왜?"
"연대잖아. 나 그렇게 머리 좋은 편 아니고. 거기는 죄 똘똘한 애들만 몰려올 건데."
"그래서?"
"가야 되나 말아야 되나..."
"얘가 이상한 소리를 하고 있어. 마하야. 너 메달리스트 구마하야."
"하하하... 대학이 맨날 뜀박질만 하는 곳도 아니고. 의미가 있을까?"
"그리고. 왜 라면을 먹어? 몸이 곧 재산인 사람이?"
"아. 한 달 만에 오니까, 형도 먹을 걸 안 챙겨 놨더라고."
"어디 갔었어?"
"몰랐냐? 하긴... 말을 안 했구나."
"내가 무슨 니 팬도 아니고. 일정 다 알고 있는 게 이상하지 않나?"
그러자 구마하가 세상 무너지는 듯한 얼굴로 돌아본다.
"너 뭐냐. 사람 서운하게 그렇게까지 말할 건 없잖아."
"삐지긴. 육상 영웅이."
"뭐야. 육상 영웅은 감정도 없어?"
티격태격 떠들다 보니 어느덧 아파트 입구.
이혜정도 오랜만에 만난 마하와 헤어지기가 아쉽다.
그래서 슬쩍 떠보았다.
"집에 진짜 먹을 거 없어?"
"음. 뭐. 사 왔으니까. 이거나 끓여 먹고."
"그럼 우리 집 가서 밥 먹자. 나 부모님 여행 가서 반찬 많아."
"..."
"이상한 얼굴 하지 마라.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워서 그러는 거니까."
"그래! 나야 좋지."
엘리베이터에 들어온 두 사람.
1년 만에 단둘이 있는 시간이었다.
이혜정은 헛소리를 주절주절 떠드는 마하의 목소리에 귀를 막고 고개를 들었다.
예전엔 슬쩍 눈만 들어도 됐는데, 이제는 얼굴 보려면 제법 고개를 들어야 하는구나.
구마하는 두근두근 14층을 누르며 앞에서 장난스레 말했다.
"우리 집 위로 처음 가 보는데. 여기도 사람이 사는구나. 하하하!"
"야. 난 뭐 귀신이냐?"
"아 뭐지? 방금 우리 집을 지나친 듯한, 뭔가 금지된 구역을 가는 이 기분은?"
띵. 14층에서 내려 이혜정이 먼저 현관문으로 다가간다.
"금단의 구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오오~ 여기가 바로!!"
똑같은 구조에 가구만 다른 집.
구마하는 실망하는 표정으로 혜정이네 집을 둘러보며 말했다.
"뭐야. 우리 집이랑 똑같이 생겼잖아?"
"하하하~ 야. 당연한 거 아니냐?"
"여기가 방이고. 저긴 화장실. 근데 왜 싱크대는 우리 집이랑 다르게 생겼어?"
"그만하고 얌전히 앉아 있어."
혜정이네 애완견 해피가 구마하를 보며 꼬리를 막 흔들어 반겨 준다.
구마하가 해피를 들어 보이는데 개가 한참을 올라간다.
이혜정은 해피를 보는 듯 구마하를 보면서 생각했다.
흠. 어떻게 보면 엄마 말이 맞는 거 같기도 하고...
"오오~ 해피. 오랜만이다. 이 똥강아지."
"근데 너 키 더 컸어?"
"아니. 189에서 멈췄어."
"더 컸네. 그때는 83인가 그랬는데."
"뭐. 1년 전에 비하면 컸다고 봐야지."
"몸무게는?"
"90."
제법 나가는 몸무게 같지만 봤을 땐 튼튼하게 잘 마른 거 같다.
선수라 그런가?
얼굴도 예전이랑 똑같이 생겼는데, 전보다는 좀 나아진 거 같기도 하고.
몸이 커지면서 얼굴이 작게 느껴지나? 아니면 애가 유명해지면서 여기저기 얼굴을 비춰서 그런가. 뭔가 같이 있으면서도 이상하게 어색함을 느끼는 이혜정이었다.
"해피랑 놀고 있어. 나 옷 좀 갈아입고 올게."
자꾸 보다 보면 이상한 마음이 들 거 같아 방으로 자리를 옮기 는데. 해피를 끌어안은 구마하가 따라와 침대에 털썩 앉는다.
"...너 뭐 해?"
"뭐? 옷 갈아입는다며?"
"그래. 그런데 왜 따라와..."
"어. 갈아입어."
"...그러니까 나가라고?"
"야. 모르는 집에 와서 어떻게 혼자 있냐. 주인 따라다녀야지. 그치 해피야?"
"허! 얘 웃기네?"
"아. 뭐? 이제 와서 왜 그래?"
"뭘 왜 그래야? 너야말로 왜 이래. 나가 있어."
"참 나 이제 와서 부끄럼은... 무슨."
"야."
"해피야. 니네 언니 왜 저러냐? 이미 해도 몇 번을 했으면서 그치?"
"죽을래!! 안 나가!!"
결국 화를 내야 말을 듣는다.
구마하가 툴툴거리면서 방에서 나갔다.
눈에 젖은 스타킹 때문에 발은 찝찝하고 몸은 괜히 두근두근거리고 마음은 짜증이 올라오는 이혜정이었다.
"왜 저래. 미쳤나 봐..."
정작 미친 건 자신이 아닐까? 쟤 보는데 왜 이렇게 설레는 거지?
이혜정은 감정을 숨기려는 듯 짜증 난 얼굴로 방에서 나왔다.
구마하도 괜히 심술 난 표정으로 소파에 앉아 멍하니 개만 끌어 안고 있었다.
"해피 내려놔."
"아 진짜 텃세 장난 아니네..."
"아하하하. 야. 이게 텃세냐?"
"지는 우리 집 와서 아무렇지 않게 씻고 똥 싸고 다 했으면서..."
"야. 너. 가. 내려가. 가서 라면이나 끓여 먹든가 말든가."
"싫어 밥 줘. 나 배고파."
"으이구... 이걸 진짜..."
화장실에 들어와 축축해진 발을 닦는데, 이상하게 지난 수험 내 관리하지 못한 다리털이 신경 쓰이는 이혜정이었다.
"아니야. 절대 아니야."
정신 차려. 파트너 관계는 진작에 끝났어. 무엇보다 마하는 여자 친구가 있어.
학교에서 제발 마하랑 연결해 달라는 친구들도 본인이 다 거절했는데, 왜 정작 내가 이러는지.
몸이 원해도 사람이 정도를 알아야 된다.
그래서는 안 돼 이혜정. 지금은 정말 친구끼리 밥만 먹는 시간이야.
굳은 다짐을 하면서 두 사람은 식사를 준비했다.
구마하는 라면을 끓이고, 이혜정은 냉장고에서 반찬을 꺼내 식탁을 준비한다.
"혜정아. 너 라면 몇 개 먹을 거야?"
"당연히 한 개지."
"그럼. 6개 끓여야겠다."
"음?"
이혜정도 방송에서 말했던 구마하의 식욕을 눈앞에서 본다.
커다란 냄비 가득 윤기가 흐르는 면발이 좔좔 흐르고 있다.
"..."
"후루룩~ 왜? 안 먹어?"
"너 진짜 이걸 다 먹을 수 있어...?"
"야. 이거야 애피타이저지. 짜파게티면 10개도 먹는데."
"어떻게 그렇게 먹는데 살이 안 쪄?"
"하하하! 혜정아. 내 운동량을 봐라. 살이 찔 수 있나."
"진짜 너랑 결혼할 사람은 손 엄청 커야 되겠다..."
"라면 붇는다. 일단 먹어."
친구라고 해도, TV에서 보던 사람이 눈앞에서 후루룩 젓가락을 쉬지 않는 모습에 이혜정도 자연스레 미소가 지어진다.
구마하도 접시 가득 라면을 덜다 웃고 있는 그녀를 보았다.
"왜?"
"그냥. 이렇게 있으니까 역시 마하는 마하구나 싶어서."
"..."
"왜? 아니야? 내가 틀린 말 했어?"
"아니.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게 신기해서."
"같은 생각?"
"그냥. 나도 뭔가 오랜만에 너 보는데, 혜정이는 혜정이구나 싶었거든."
구마하가 천천히 젓가락을 들며 말했다.
"실은 아까 너 보고 그러는데, 뭔가 괜히 어색하더라고."
"...왜?"
"글쎄다. 나도 오랜만에 봐서 그런가? 그래서도 옷 갈아입는 데 따라가고 그랬던 건데..."
이혜정은 가만히 앉아 있다 손을 들어 꿀밤을 때렸다.
"아? 왜 때리지?"
"이게 어디서 슬금슬금... 하여간 틈만 주면..."
"됐어. 밥 먹는데 사람을 건드려? 나 갈 거야."
"야! 이거 누가 먹으라고?"
"알 게 뭐야? 가자 해피야!"
"그리고 우리 집 개를 왜 니가 데려가!!!"
장난스레 오고 가는 이야기에 두 사람이 느낀 어색함은 사라진다.
"그러고 보니까. 너랑 이렇게 얘기하는 게 되게 오랜만인 거 같다."
"김치 더 꺼내 줄까?"
"어. 야. 어머니 김치 맛있게 하신다."
"산 거야. 우리 엄마 요즘 요리 안 해."
"암. 그렇지. 한식도 세계로 나가려면 자동화 설비란 어쩔 수 없는 과정이야."
"하하하~~"
아무리 주변에서 띄워 줘도, 역시 마하는 마하구나 싶은 이혜정이었다.
"어떻게 지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