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처음으로 (2)
"하하하하... 어떻게 지냈냐라..."
우연찮게 혜정이를 만나 같이 밥을 먹고 있었다.
올림픽 이후의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헛웃음이 실실 흘러 나온다.
"와... 내가 들어도 정신 없다."
"그치. 난 세상에 그렇게 정치인들이 많고 행사가 많다는 걸 처음 알았네."
"무슨 행산데?"
"몰라. 지역 주민의 날도 있고, 무슨 물 행사도 있고. 밥의 날도 있고."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행사가 있다. 아마 찾아보면 수저와 젓가락의 날도 있을 것이다.
남들은 유명세를 치른다고 하지만, 생각보단 곤욕스러운 날들이었다.
정말 여기저기 쉴 새 없이 불려 다녔다.
육상 연맹에서 주관하는 자리는 당연하고, 지역 정치인들이 부르는 자리도 있었다.
대한 체육회가 부르는 자리도 있고, 연맹을 후원하는 기업이 부르는 자리도 거절할 수 없다.
"청와대가 밥은 잘 주긴 하더라."
"우와~"
"우와 아니야. 거기 들어가려면 얼마나 깐깐한데."
대통령도 만났고, 시장 국회 의원 정말 쉴 새 없이 얼굴을 비췄다.
그런 가운데서도 방송이나 여기저기 오라는 곳이 너무 많았다.
"방송은 재밌고 돈이라도 주지... 행사 참가는... 어우..."
"넌 그런데 가면 뭐 해?"
"앉기. 사진 찍기."
"그리고?"
"그게 다야. 난 그거 하려고 가는 거야."
"이야기만 들어도 지루하겠다..."
"그래서 공부를 했어. 영어 단어장 작은 거 하나 사서 보고 있으니까, 이야~ 공부가 그렇게 재밌을 수가 없어요?"
"그거 콘셉트 사진 아니었어?"
"무슨 콘셉트야! 내가 그런 콘셉트 잡아 뭐 한다고."
언젠가 친구들도 막 놀렸던 기사 사진이 하나 있다.
[수험생의 신분을 잃지 않는 육상 영웅.]
애들은 콘셉트 잡지 말라고 죽여 버린다고 하지만, 콘셉트가 아니라 그거라도 보면서 지루한 시간 견디라고 감독님이 손에 쥐여 주셨다.
"일단은 고3이고, 수능도 얼마 안 남았던 시점이라 다들 크게 뭐라고 하진 않는데. 아니 그럴거면 애초에 부르지를 말든가!!"
"너가 안 가면 되는 거 아냐?"
"그게 말같이 쉽지 않으니까 그러지."
연맹은 홍보 자료가 필요했고, 받은 만큼 보답을 해야 하는 건 내 차례였다.
"감독님도 그렇게 하자고 하시고. 세상 어떻게 우리 좋을 대로만 하고 살겠어..."
"안 그래도 궁금했는데. 한상률 진짜 학교 관둔 거야?"
"응. 요즘엔 사무실 알아보러 다니고 계셔."
"신기하다. 불편하지 않아?"
"뭐가?"
"어떻게 학교 선생님이랑 그렇게까지 같이 할 수 있어?"
"선생님이랑 결혼하는 사람도 있는데. 동료 관계 뭐라고. 감독님 나한테 잘해 주셔."
"진짜?? 누구?? 누가 결혼했는데?"
"몰라. 드라마 보면 나오던데?"
"하하하! 야. 그건 드라마잖아."
두런두런 떠들다 보니 어느새 라면도 국물만 남았다.
혜정이가 얘는 언제 이걸 다 먹었지?? 같은 표정으로 물었다.
"난 한 번 먹었는데... 진짜 그걸 다 먹는구나..."
"야 밥 있냐?"
"여기다 밥을 말아 먹는다고...?"
"그럼. 너 내가 지금 제대로 먹으면 니네 집 냉장고 거덜 나."
"거덜 내도 돼. 엄마 좋아하실걸?"
"누가 이렇게 우리 집 냉장고를 다 먹었냐 하면 뭐라고 하려고?"
"마하가 와서 먹었다. 그래서 좋아한다는 거지."
"오오~ 흐음. 역시. 음."
"뭐가. 뭘 또 불안하게 혼자 납득하고 있는데?"
"딸이 스무 살이 지나니 아줌마도 남자가 집에 와도 아무렇지 않은..."
"..."
"야. 주먹에 힘 빼. 때리지 마. 분명히 경고한다."
"맞을 소리만 골라서 하면서..."
지난 몇 달간 혜정이보다 얘네 아주머니를 더 많이 만났던 것 같다.
혜정이네 아주머니는 물론, 형네 가게 주변 상인분들도 다 찾아가 인사도 하고 사인도 해 드리고 사진도 찍고 그러고 다녔다.
"맞다. 너 온 김에 사인 한 장 해 주고 가라."
"아줌마가 이미 받았잖아?"
"아빠가 사무실에 걸어 둔다고 하셔서."
"아이고. 이거 장인어른께서 뭘 또 굳이."
"푸하하!! 파하하하! 뭐래 니가 무슨!!"
"야. 너 방심하지 마라. 니네 아줌마 장난 아니야. 내가 말만 하면 너랑 나랑 신혼집 전세 분양 알아보실걸?"
"하하하하! 야! 웃기지 좀 마!!"
둘 사이에, 진지함이 없기 때문에 더 편하게 할 수 있는 농담이었다.
그러나, 마음은 진지하지 않아도 감정은 있다.
지금 혜정이가 내 말에 배꼽을 잡는 모습에 조금 설레임을 느끼고 말았다.
"아무튼, 그랬어. 되게 바빴어. 행사 행사. 그거 아니면 초청 경기. 그나마 수능 때 잠깐 3~4일 빼 주고 또 행사에 행사 경기."
"애들이 은근 크리스마스 때 기대하고 있던 거 알아?"
"애들? 누구? 너 친구?"
"응. 작년에 우리 모였던 애들."
"그래. 근데, 한국에 있었어도 못 모였을걸?"
"또 여기저기 불려 다니느라?"
"연말엔 자리가 많거든... 그것도 망년회니 뭐니 해 가지고..."
11월 말까지 내가 학생인지 행사 인형인지 모르게 불려 다니다 보니 숨이 막혀 왔다.
그나마 전국 체전이 가장 즐거운 기억이었는데, 오랜만에 운동장을 찾아 경기를 뛰는데, 그것도 결국 초청 경기였다.
"전국 체전 하니까, 진수라고 있거든. 수원 체고 에이스 선수.
친군데."
"응."
"진수가 작년에 나 처음 춘계 나갔을 때 100미터 2위하고 200때 나 이기고 그랬었어. 걔를 그때 만났는데, 아 막 죽겠다는 거야. 주변에서 자기도 올림픽 나가서 메달 따고 그러는 줄 안다고."
"그 친구는 너 이긴 게 평생 자랑일걸?"
"그런 게 어딨냐. 내가 진수 같은 애들을 안 게 자랑이지."
"오오~ 구마하~~ 오~ 인성~"
"야. 내가 너랑 있을 때나 이렇게 까불지. 나가면 알지? 나 되게 바른 청년인 거."
유명세를 얻은 만큼 행동을 조심히 해야 했다.
세상이 바라보는 구마하는 바르고 운동도 열심히 하는 모범적인 청년이었다.
"연말까지 그렇게 보내다간 미칠 거 같은데. 마침 반가운 연락이 들어와 가지고."
"..."
"왜? 뭐?"
"마하야. 근데, 여기 국물 있지 않았어?"
"방금 밥 말아서 먹었잖아."
"배 안 불러...?"
"하하하! 야. 사람이 말하는데. 넌 음식 사라지는 거 보고 있냐?"
"사람? 이게 사람이 먹는 양이야?"
12월 초. 1,500에서 친구가 된 오스트리아의 스테판에게서 이 메일이 왔다.
"이제는 세상 사람들 다 내가 형이랑 단둘이 자란 거 아니까.
스테판도 그걸 본 거 같더라고. 그래서 크리스마스 때 자기네 집에 오라고. 정식으로 손님으로 초대할 테니 꼭 오라고 그래서."
"좋은 사람이다. 그래서?"
"그래서 12월 들어오고, 우리 겨울 방학하고 바로 비행기 표 끊어서 날랐어. 감독님은 사람들한테 나 훈련 갔다고 말씀하시고.
휴가였지."
"와... 이제 휴가를 외국으로 가?"
"야. 안 그러면 숨을 쉴 수가 없었다니까."
"음. 좋겠다... 우리는 논술이다 뭐다 바쁘게 뛰어다니는데."
"다음에 기회 되면 같이 가자."
"내가 너랑 그런 델 왜 가냐?"
"뭐. 신혼여행으로 가도 되는 거고."
"야. 너 자꾸 까불래?"
"뭘? 아 왜 정색해서 그래. 농담도 못 하냐."
그러자 혜정이가 한숨을 훅 내쉬며 답답하다는 얼굴로 쳐다본다.
"마하야. 너 여자 친구 있어. 그런데 왜 이런 농담을 해?"
"내가 여자 친구가 누가 있어?"
"그때 걔. 귀엽게 생긴 애."
"다빈이? 야. 다빈이 올림픽 전에 끝났어. 언제 적 이야기를 하는 거야?"
"..."
혜정이의 얼굴이 답답함을 넘어 충격과 당황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어이 이혜정. 잠깐 타임. 너 지금 뭔가 오해하는 거 같은데, 난 지민이 형 같은 그런 거 아니다."
"근데 왜 그렇게 짧게 만나? 학교까지 찾아온 애를?"
"후우... 와... 진짜 이걸 참..."
"왜? 뭐 문제 있었어?"
"문제? 문제라... 문제 있었지. 정말 큰 문제였지."
혜정이도 그런 건 아니라니 표정을 바꿔 조심조심 물어본다.
"혹시 여자애가 바람피웠어?"
"바람은 아니고. 그냥 생존에 위협을 받아서."
"생존?"
"있어. 그런 거."
"...뭐 이상한 애야?"
"아니야. 그냥 내가 너무 매력적이라서 생긴 일이라"
"푸웁!!"
"..."
심각하다 충격도 받았다 걱정도 했다, 이제는 입에 있는 반찬을 뿜는 이혜정 양...
"풉. 아. 미안. 진짜 미안..."
"에이 드럽게..."
"쿡! 큭. 매력. 지 입으로..."
"진짜라니까!!"
"알아. 누가 뭐래? 컥! 크윽."
키득키득 웃음을 참으며 주섬주섬 흩어진 밥풀을 주워 담는 혜정이를 보면서 조금 짜증을 내고 있었다.
그러자 얘도 감정을 정리하며 물어본다.
"미안. 어쨌든 헤어진 건 헤어진 거니까"
"웃으려면 그냥 편하게 웃든가. 사람이 돼지 소리를 내고 있어..."
"뭐야? 뭘 어쨌길래?"
"진짜 내가 너니까 말해 주는데, 다빈이 이뻤지. 귀엽고, 근데 말이야..."
이번엔 뭘 먹지 않고 있어 다행이었다.
다빈이 이야기를 들은 혜정이가 배꼽을 잡으며 뒤집어져라 웃었다.
"꺄하하하하!! 카하하하! 무슨! 니가 뭐라고!!"
"와... 진짜라니까..."
"마하야. 나도 너랑 있을 때 기분 좋긴 했지만, 그 정도는 절대 아니야."
"안 믿네... 이걸 참..."
"야. 됐어. 너도 결국 그렇게 되냐?"
"뭐? 내가 뭘?"
"진심 짜증 나. 남자애들 허세 부리는 거 제일 싫어."
허세가 아닌데. 정말로 나는 섹스를 갈구하는 다빈이 때문에 생명의 위협을 느꼈었는데.
"진짜라니까. 운동선수들의 성욕은 니가 아는 거랑 완전 틀려."
"아이고. 우리 구마하 씨. 정말 사람 많이 변했다~"
"야. 다빈이만 그런 거 아냐. 나랑 한 여자들은 거진 다 그래!"
"..."
"왜?"
"여자'들'?"
또 또 오해하는 얼굴 한다.
"여기서 내가 말한 여자들이란, 너를 빼고. 다빈이나 어? 다른 사람들이나."
"다른 사람'들'?"
"뭐냐. 그 얼굴은? 내가 애인 놔두고 바람피운 것도 아니고. 만날 수 있는 거잖아."
"아니. 그게 아니라. 너 언제 그렇게 여자들을 만났어? 바빴다면서?"
"음... 뭐. 그냥 여기저기."
"누구? 또 누구 만났는데?"
처음 손으로 해 달라고 했을 때 역으로 자위하는 모습을 보여 달라고 했던 애였다. 밖에서 들을 수 없는 이야기에 애가 눈이 초롱초롱해져 달려든다.
"뭐 그런 걸 궁금해 하고 있어. 내가 누구든 만날 수 있지."
"얘기해 줘. 누군데? 언제?"
"근데 왜 나만 말하냐? 너도 얘기해 주면 얘기해 줄게."
"뭘? 내 전 남친 너도 아는 사람이면서."
"지민이 형이 진짜 처음이야?"
"..."
"것봐. 너도 말 못 하잖아."
"김우진."
"풉!!!"
"야. 드럽게. 니가 치워."
와 얘도 진짜... 사람 정말 생긴 거로 판단하면 안 되지...
"우리 중학교 때 전교 1등 김우진? 이민 간 애?"
"응."
"그럼 대체 설마... 중3 때??"
"아무튼, 난 말했어. 이번엔 니 차례. 넌 또 누구 만났는데?"
와 진짜 끈질기네...
"뭐. 그래. 너니까. 내가 믿으니까. 말해 주는데."
"응."
"이번에 올림픽에서 잠깐 만났던 사람이 있었는데..."
"역시 그럴 줄 알았어."
"하하~ 뭘 그럴 줄 알아."
숨 막힐 듯한 긴장감 속에서 천천히 말해 줬다.
테니스 선순데, 첫눈에 반해서, 어떻게 어떻게 하다 보니 가까워진 시간이 있었다.
"그럼... 했어?"
"했지. 했으니까 말하지."
"...어떻게?"
"숙소에서 이불 덮어쓰고."
"허어..."
"다 그렇게 해."
"한상률 옆에 있는데?"
"에이 아니지. 한국 선수촌에선 못 하지. 걔네 숙소 가든가. 파티하는 데 빈방 찾든가."
"음. 으음..."
"화장실에서 할 때도 있고... 그러다 밖에서 빨리 나오라고 막 화도 내고..."
근데, 혜정이 얘 지금 흥분하고 있는 거 알고 있나? 얼굴이 점점 상기되는 거 같은데...
물론 이런 말을 꺼내는 나도 식탁 아래 바지가 터질 듯이 꿈틀대고 있지만.
그러고 보니 정말 오랜만의 혜정이다.
똘똘이도 그녀의 체취와 익숙한 샴푸 냄새에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는 것 같다.
"그래서? 너랑 만난 사람은 유명한 사람이야?"
"유명하지. 그쪽에선 모델도 하고 그래. 인기 좋아. 이번에 메달도 땄어."
"진짜! 누구?"
자기도 아는 해외 패션모델들 많다며 하나하나 이름을 언급하는데.
"혹시, 그 사람? 그 사람도 선수에 모델 한다고. 아닌가? 거긴 테니스가 아니었나?"
"흠. 크흠."
조용조용 넘어가고 싶어도, 이미 너무 많은 정보를 말해 주고 말았다.
테니스 선수에 패션모델이고 이번 올림픽에서 메달리스트면...
인터넷 뒤져 보면 다 나오지.
결국 이름을 말해 준다.
"빅토리아 알렉산드라라고 있어..."
"빅토리아!!"
"알아?"
"..."
멍하게 쳐다보던 애가 벌떡 일어나 방에서 잡지를 들고나왔다.
파라락 페이지를 넘겨보는데. 도도하게 자세를 잡고 있는 금발의 비너스 앞에서 딱 멈춰 펼쳐 든다.
"설마, 이 사람??"
"어. 맞아."
"거짓말이지...?"
"이런 걸 거짓말해서 뭐 해. 니 말대로 내가 허세 부릴 놈도 아니고."
혜정이가 가져온 잡지를 보았다.
"누나도 오랜만이네."
"누나...?"
"어. 누나. 한국에서 학교 다녀서 누나 동생 이런 걸 알더라고."
"맞아. 이 사람 한국말 조금 한다고 예전에 봤었어..."
"잘해. 아마 지금은 더 잘할 거야. 나랑 있으면서 많이 배웠거든."
"..."
잡지에서 보는 빅토리아의 모습에 또 괜히 아련한 기억이 떠오른다.
선수촌에서의 추억이, 함께 보냈던 시간들이.
"이렇게 아는 얼굴을 보니까 신기하네."
"..."
한 장 한 장 잡지를 넘기다, 식탁에서 뭔가를 툭 밀어 떨어뜨리고 말았다.
"어. 혜정아 거기 휴지 좀."
"가만있어. 내가 치울게."
"아니. 내가..."
혜정이가 식탁 아래로 떨어진 걸 줍는데 시선이 내 골반 쪽을 보며 멈춘다.
"..."
"..."
그러니까 내가 치운다니까...
지금 숨길 수가 없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