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륜기로 가버렷-77화 (77/401)

다시 처음으로 (3)

"크음. 흐음."

모르는 척 잡지나 넘겨 보고 있었다.

혜정이도 어질러진 걸 줍더니 다시 식탁 맞은편에 앉아 괜히 딴청을 피웠다.

"..."

"..."

해피의 헥헥거리는 소리만 들리고 조용히 시간이 지나간다.

"며... 면접은 잘 봤어?"

"어? 어. 뭐. 응."

"동국대 합격하면 좋겠다. 그렇게 멀지도 않고."

"응. 뭐 그럼 좋지..."

"다른 데는? 어디어디 원서 넣어?"

대입으로 주제를 바꿔서야 겨우 다시 말문을 열 수 있었는데.

이상하게 혜정이가 자꾸 의식이 된다.

조곤조곤 말하는 입의 움직임이나, 가느다란 목선과 흰 피부가.

작년 이맘 쯤 둘이 나누던 시간이. 어색하고 경직됐지만 나를 남자로 만들어 주던 그 시간들이...

"동덕도 넣었고 집 근처도 하나 보고 있고"

조곤조곤한 그녀의 입술을 보는데 더는 참기가 어려울 것 같다.

나는 입으로 해 주는 걸 좋아하는데, 다빈이는 경험이 짧아 이가 닿을 때가 많았고. 빅토리아는 경험은 풍부하지만 입으로는 잘해 주려 하지 않았다.

역시, 그쪽으로는 혜정이가 최고가 아닐까 싶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혀의 움직임. 느리면서 천천히 달궈 주는 감각들. 사랑을 받고 싶다고 울고 있던 나를 달래 주듯 포근하던 그 느낌들이.

"혜정아."

"응?"

"우리 할까?"

"..."

그래서 먼저 물었다.

"너 요즘 누구 만나는 사람 있어?"

"어... 없어."

"나도 여자 친구는 없어."

"넌 그... 그 언니 있잖아..."

"누구? 빅토리아?"

혜정이가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시선을 피했다.

"왜 언니야?"

"니가 누나라며."

"흠. 음. 뭐 그래."

혜정이도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사귀는 거 아니야?"

"후후. 채였지."

"..."

"안 그래도 사랑한다고 그런 이야기도 하고, 누나도 나 좋다고는 하는데, 역시 너무 멀리 있는 게 문제라. 자주 보기 어려울 거라는 현실적인 이유로 거절하더라고."

이번에 오스트리아를 가서도 연락이 되면 볼까 했었다.

유럽과 유럽이니까. 난 당연히 볼 수 있을 줄 알았지만, 누나는 따뜻한 남쪽으로 가 훈련 중이라는 소식만 전해 들었다.

"그 말이 틀리진 않더라고."

"그렇지. 보고 싶은데 못 보면 화도 나고. 자주 못 보면 그런 문제가 있지."

"멋진 사람이야."

사진 속 빅토리아를 보면서 잡지를 덮었다.

"아무튼, 난 사귀는 사람 없어. 바람피울 놈도 아니고."

"..."

"너 기억 나? 나 작년 춘계 나가기 전에 약속 잡자고 하고 못 잡은 거?"

"응..."

그 뒤로 각종 국내 대회에 다빈이도 만나고.

끝나고는 올림픽 준비 기간과 올림픽 참가.

행사에 뭐에 어느덧 1년이 후딱 지나가 버렸다.

그날 했던 약속을 오늘 가지는 건 어떨까 묻는데.

"무슨 약속을 바로 이렇게 잡아."

"싫어?"

"..."

"싫으면 그만 얘기하고."

"......"

그 말을 꺼내는 순간 뭔가 묵직한 게 식탁 아래로 넘어와 우리 똘똘이 녀석을 건드린다.

"후후후."

"..."

혜정이의 발끝이 살며시 우리 건강한 친구를 누르는 모습에 고개를 드니, 저쪽도 시선은 피하지만 부끄러운 듯 몰래몰래 발로만 나를 자극하고 있다.

"뭐...? 니가 하자며."

"후후후. 누가 뭐라나."

"근데, 나 씻어야 하는데..."

"씻어. 나도 씻지 뭐. 너 안방 화장실 써."

"우리 집에서? 너네 집 안 가고?"

"오늘은 너네 집에서 하자. 어른들 어차피 여행 가셨다면서."

"음... 근데 뭔가 좀 부끄러운데."

부끄럽다면 부끄럽지 않게 분위기를 바꿔야지.

식탁 의자를 빼고 일어나 혜정이 쪽으로 다가갔다.

"야. 야. 왜 이래...?"

"왜 이러긴. 오랜만에 키스하고 싶어서 그러지."

"..."

"너야말로 갑자기 부끄러워 하고 있어?"

"몰라. 나도 너 마지막으로 이런 거 없어서..."

"자위도?"

"야. 난 그런 거 안 한다니까!"

조용히 입술로 고개를 꺾자, 혜정이도 알아서 눈을 감고 입을 맞춰 준다.

"으음."

혜정이는 눈을 감고 있지만 난 눈을 떠 그녀의 반응을 보았다.

나의 처음이자 욕망. 찌질한 소년을 올림픽까지 움직이게 만든 원동력. 어떻게 보면 대한민국 국민들은 내가 아닌 이 친구한테 고마워해야 돼.

혜정이는 여전히 마음을 설레게 하는 무언가가 있다. 다빈이같이 발랄하고 건강한 느낌도 좋고, 빅토리아 같이 화려하고 아름다운 것도 좋지만, 그녀는 역시 그녀만의 여성스러움과 사랑스러움이 나를 자극시킨다.

"음. 으음~."

1년 전 우리가 함께했을 때는 아무것도 모르고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쪽에 가까웠는데, 지금은 나의 키스에 그녀가 반응을 해준다.

키스도 모르고, 애무하는 법도 몰랐던 그때. 여자의 몸은 그렇게 다루는 게 아니다. 이건 야동이 아니야. 삽입 후에 그렇게 움직이면 아랫배가 아프다.

다빈이나 빅토리아가 나에게서 느낀 여자에 대한 하나하나의 배려심은 다 그녀를 통해 알게 된 것들이었다.

"하아! 마하야 잠깐만."

"음? 왜?"

"자. 잠깐만..."

키스를 나누던 혜정이가 밀쳐 내며 입을 슥 문질러 침을 닦아낸다.

갑자기 마음이 변했나? 걱정스러운 눈으로 보자, 얘도 두근거리는 표정으로 올려다보며 말했다.

"이럼 안 돼."

"여기까지 왔는데?"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일단 씻고. 응?"

"아~ 아 그런 뜻으로?"

괜찮다고 하지만, 혜정인 극구 몸을 씻어야 한단다.

"난 집에서 씻고 나왔는데."

"안 돼. 내가 몸이 꿉꿉하다고."

"킁킁? 괜찮은데?"

"야. 나 오늘 대변도 두 번이나 봤어... 냄새나는 거 싫어..."

"하하하!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혜정이가 서둘러 안방 화장실로 달려가 문을 닫는다.

똥오줌 얘기하니 나도 걸리는 게 있어 거실 화장실로 가 서둘러 아래를 씻었다.

똑같은 구조에 다른 집. 익숙하면서 낯선 공간.

남자 둘이 사는 집과 다르게, 엄청난 샤워 용품이 그득그득 꽉꽉 들어찬 혜정이네 집에서 씻는 건 색다른 경험이었다.

먼저 방으로 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침대. 그녀의 베개.

그녀가 쓰는 아기자기한 학생 화장품 냄새가 온 방 안에 가득했다.

"훗."

좋은 냄새다. 그녀의 체취가 가득하다. 향기만으로 혜정이의 안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따져 보면 어려서부터 얼마나 들어오고 싶은 공간이었던가. 아테네 올림픽보다 나에게 더 꿈과 같던 곳이 여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두리번두리번 방을 구경하고 있는데, 해피가 쫄래쫄래 들어와 헥헥거리며 올려다본다.

"해피야. 오빠가 언니랑 야한 거 좀 해도 될까?"

개도 우리 언니 기분 좋게 해 달라는 듯, 헥헥거리며 꼬리를 흔들었다.

애완견은 가족이라고 하니까. 가족의 허락도 받았고 오늘 혜정이한테 최고의 기쁨을 선사해 줘야지.

"근데 얘는 왜 이렇게 늦게 나와?"

씻는다더니 때를 미나?

침대에 앉아 기다리기도 뭐해 평상시 무슨 책을 보나 가만히 책상을 둘러보았다.

"음? 이게 뭐야?"

두꺼운 파일 첩 하나가 있는데, 거기 내 이름이 적혀 있다.

샤워 소리가 나는 안방 쪽을 둘러보며 책장에 손을 뻗었다.

내 이름이니까 봐도 되겠지? 일기장 훔쳐보는 것도 아니고.

대체 뭐지? 구마하 리포트 이런 건가? 구마하 관찰 일기? 구마하는 왜 병신인가에 대한 고찰?

첫 페이지를 넘긴 곳에 100미터 수상 때 사진이 붙어 있었다.

"오..."

하나하나 내 기사를 스크랩해 주고 있었구나.

이렇게 모아 놓고 보니까 내가 뭔가 엄청 대단한 사람 같다.

"어이고 구마하 씨. 좀만 한 게 지가 뭐라고..."

100미터 세계 신기록을 내며 기록판 앞에서 어색한 얼굴을 하던 장면이나, 메달을 2개 들고 있던 모습. 800미터 우승하며 동료 선수들과 함께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모습. 1,500 때 스테판을 부축하며 결승점을 지나던 장면 등. 올림픽의 추억을 마주하게 된다.

"뭐 해? 너 설마 내 책상 뒤졌어?"

"아니. 내 이름이 붙은 파일이 있길래. 뭔가 하고"

"아 그거. 그건 봐도 돼."

샤워를 마친 혜정이가 큰 수건으로 몸과 머리를 가리고 방으로 들어왔다.

모락모락 따뜻한 온기와 늘 은은하게 맡던 샴푸 향기가 강하게 느껴진다.

향만으로도 이미 흥분이 최고조에 달하는 기분이다.

그래서도 일부러 말을 돌렸다.

"뭐야? 이런 걸 왜 모았어?"

"엄마가 사무실에 몇 개 붙이게 스크랩 좀 해 달라고 해서"

"하하하~ 아줌마도 참."

한 장 한 장 넘겨 보고 있으니 혜정이도 젖어 있는 머릿결을 수건으로 벅벅 문지르며 다가왔다.

"바쁜 고3한테 뭐 하는 건지..."

"그러게. 이건 아줌마가 심하셨다. 공부하기도 바쁜 애한테."

"근데. 해 보니까 은근 재밌더라고. 마땅한 취미도 없는데 놀긴 뭐하고. 너 사진 오리고 있으니까 스트레스도 풀리고."

"이주영 감독님 기사도 있네."

"응. 관련된 이야기는 다 모아 둘까 싶어서 모았었어."

"훗."

"왜 웃어?"

"그냥 좋아서. 이런 거 딱히 모아서 본 적은 아직 없었거든."

"오빠는 이렇게 안 해 주지?"

"형 바빠. 요즘엔 더 바쁘고. 내 기사 모을 시간이 어딨어."

부스럭부스럭 대충 머리를 말린 혜정이가 쭈그리고 앉아 서랍을 열며 속옷을 꺼내려는데. 고개를 돌려 쳐다본다.

"뭐 해?"

"뭐 하긴... 저쪽 보고 있어."

"아니 팬티는 왜?"

"음?"

"어차피 벗을 거 아냐? 입어 주면 나야 좋지만... 굳이?"

혜정이도 곰곰이 생각하더니 끄덕끄덕 서랍을 드르륵 닫으며 조심조심 드라이기를 찾는다.

"아무튼, 그래도 딴 데 보고 있어!"

"근데 넌 잠깐 씻고 나온다는 애가 무슨 머리까지 감고 나오냐?"

"그냥 하다 보니까... 물이 따뜻하길래..."

"다리는 또 왜 그래?"

"아... 아 뭐! 보지 마!!"

이제 보니 다리털 미느라 시간이 오래 걸렸구나.

수험 생활에 딱히 남자 친구도 없고, 누구 보여 줄 사람도 없다 보니 관리가 안 되어 있었단다.

"겨드랑이는?"

"그건 어제 면접 가기 전에 밀었어..."

"푸하하! 천하의 이혜정도 엄청 노력하는구만!"

"야. 웃지 마! 내가 오늘 너 만날 줄 알았냐고!!"

혜정이가 버럭버럭거리자 해피도 좋다고 왈왈 짖어 댄다.

"쟤는 내보내야 되는 거 아냐?"

"안 돼. 문 닫으면 더 짖어."

"하다가 침대 올라오면 어떡해?"

"음... 으음. 그냥 우리가 얌전하게 하면 안 될까?"

"얌전하게 될까? 너나 나나 1년만인데."

"그렇게 신경 쓰여?"

"...넌 너 하는 모습 개한테 보여도 신경 안 쓰여?"

"음. 딱히?"

"뒤에서 똥구멍 핥고 이러면 분위기 깨지 않을까 싶은데."

"야. 똥구멍이 뭐냐..."

"너도 대변 두 번 눴다고 이미 말했거든."

샐쭉샐쭉거리더니, 혜정이가 살금살금 해피를 문밖으로 내보내며 방문을 살짝 열어 둔다.

"이럼 되겠지?"

"섹스하는데 개 눈치를 봐야 하다니. 참 어려운 세상이야..."

"그래서 그냥 편하게 니네 집으로 가자니까..."

침대에 풀썩 앉으며 말했다.

"여길 너무 와 보고 싶었거든."

"어디?"

"이 방. 이 침대. 넌 어떻게 자나. 자기 전엔 뭘 보나."

"특별할 거 없지?"

"그러게. 숨겨진 딜도라도 없나 했는데. 그런 건 없는 것 같네."

"야!!"

또 성질난다고 다가와서 주먹을 퍽퍽 때리고 있다.

크리스마스이브 때와 똑같이, 두 팔을 잡으며 안아 그대로 입을 맞췄다.

혜정이도 가만히 입을 맞추며 점점 몸이 밀착되어 온다.

젖어 있던 수건이 풀어지며 차가운 머리카락이 얼굴로 내려와 닿았다.

"잠깐만, 머리 말리고 올게."

"의지도 좋다... 너 그거 알아? 넌 꼭 하기 전에 이렇게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는 거?"

"내가 언제?"

"그때도 그랬었잖아. 가라니까 안 가고 계속 우리 집 소파에서 끙끙거리고."

"...흠."

"혜정아."

"응?"

"나 보고 싶었어?"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눈빛이 이미 그러한 감정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혜정이도 쉽게 속내를 꺼내는 애가 아닌지라 괜히 툴툴거리며 말한다.

"야. 까불지 마. 니가 아무리 성공했어도, 나한텐 그냥 찌질이 구마하랑 똑같아."

"오오~ 하하하~!"

"멋진 척 하고 있어."

좋아. 그렇다면 찌질이 구마하의 발전된 모습을 보여 드려야지.

자세를 바꿔 혜정이를 들어 눕히며 입을 맞췄다.

"음. 으음."

부드럽게 키스를 하며, 그녀의 두 손을 위로 해 잡았다.

저항하지 못하게 가볍게 힘으로 눌러 주자 곧바로 반응이 순종적으로 따라온다.

"마하야. 안 돼. 목은 하지 마..."

"왜? 너 이거 좋아했었잖아."

"적당히 해야지. 먼저도 엄마한테 들낄까 봐 조심조심하면서다녔어."

작년 겨울에도 한번 진하게 목에 키스 마크를 남겼는데, 후드티만 한 달을 입고 다니느라 고생했었단다.

좋아. 보이는 곳에 하지 말라면 보이지 않는 곳에 해야지.

그녀의 봉긋한 가슴에 입을 가져가 에너지를 빨아먹듯 쪽쪽 힘주어 빨아 당겼다.

"음. 아~♡"

하얀 도화지에 물감을 흘리듯 빨간 자국이 남는다.

난처해하면서 순종적으로 누워 있던 그녀가 눈을 떠 속상하다는 듯 쳐다보며 물었다.

"몸에다 왜 그래..."

"예쁘니까."

"하여간..."

손을 풀어 주자 혜정이도 두 손을 뻗어 목을 끌어안았다 서로를 그리워했다는 마음이 느껴지는 키스를 나눈다.

혀와 혀가 정신없이 서로를 갈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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