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륜기로 가버렷-80화 (80/401)

< 그가 특별한 이유 (1) >

"그래서 혜정이도 온대?"

"어. 아까 그 얘기 좀 하고 오느라 늦었다."

"오~ 그런 거라면 뭐."

혜정이네서 나와 친구들을 만났다.

이제는 스무살 됐다고 다들 편안하게 소주 정도는 눈치 없이 시킨다.

뭐. 따져보면 우리도 진작부터 술을 조금씩은 했지만.

아무튼.

스키 이야기를 꺼냈다.

여자애들도 온다니 당연히 친구들은 좋아하는데. 정석이가 씩 웃으며 말했다.

"재밌게들 갔다 와. 난 못 간다."

"왜?"

"왜가 어딨어. 일하는데 사장님이 허락을 해줘야 가지."

한 달간 나갔다 돌아오니 다들 스무살이 되어 있었다.

태윤이는 성대 입학이 거의 확정이었고, 남수는 아직 발표가 나야 알지만 여차하면 재수를 할 것 같다는 분위기였다.

저마다의 스무살을 준비하는 가운데, 정석이는 완전히 사회인으로 마인드가 잡혀 있었다.

태윤이와 남수가 정석이를 보며 물었다.

"하루도 어렵냐?"

"당일치기로 갈 거야? 아니잖아. 하루면 더 안 가지. 피곤하게."

"정석아. 근데 너 진짜 마하네 형이랑 계속 일하려고?"

"저 병신은 이제와서 뭐라는 거냐?"

"아니. 먼저도 마윤이 형이 지금이라도 공부할 생각 있으면 그쪽으로 가도 된다고 했는데."

"형이랑 그런 얘긴 언제 했냐?"

"너 없을 때. 우리끼리 형이랑 술 마시면서."

"니네는 나 없어도 우리 형 되게 잘 찾아간다..."

"우리가 니네 형 보는데 니가 뭔 상관이냐?"

"그래. 형이 니꺼야?"

"하하하... 미친놈들... 또라이들이랑 뭔 소리를 하는지..."

태윤이는 외동아들에 남수는 누나만 있어 그런가 형이 애들한테 인기가 좋네.

"구마. 걱정마. 이 새끼들 나 매니저 달면 다시는 공짜 밥 못 먹게 할 테니까."

형도 형이지만 역시 공짜 밥의 매리트가 컸나? 정석이 말에 두 녀석이 "니가 뭔데 난린데!" 하면서 툴툴 거렸다.

"이 씨발놈들이 사장님이 오냐오냐 해주니까. 니네가 먹는 건 사장님의 친절이 아니야! 자영업자의 고혈이라고!!"

"지도 먹었으면서 이제와서..."

"뭐! 그때는 그때고!!"

아무튼, 정석이는 확실하게 취업으로 마음을 굳혔다며 자신의 뜻을 말했다.

"운동할 놈은 운동하고. 공부 할 놈은 공부해. 일 할 놈은 일하면 되는 거야. 뭔 말들이 많어."

"재수는?"

"그래. 재수생은? 재수생은 뭐하고?"

"재수생은 일단 포경부터 먼저 하고 그 다음에"

"아 이 개새끼가 아직까지!"

"카하하하!"

포경으로 놀리는 것도 좋지만. 음. 역시 경험에 의해 여기선 남수의 오해를 풀어주는 게 맞는 것 같다.

"근데 이건 남수가 맞어."

"응?"

"뭐가?"

"포경. 하는 게 억울한 거 맞다고."

다른 친구들은 시간 맞으면 다 같이 목욕탕도 가고 등도 밀고 그런다지만, 아직까지 우리는 한 번도 그랬던 적이 없다.

남자끼리 옷을 벗고 있다니 징그럽다고.

무엇보다 사람들한테 목욕탕이 편한 이유는 역시 어릴 때부터 가족과 함께 몸을 씻는다는 개념이 잡혔기 때문일 것이다.

나도 어릴 땐 형이랑 몇 번 간 적이 있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형이 너무 바빠지면서 씻는 건 늘 집에서 혼자.

환골탈태 때 포경수술로 친구들을 속였던 나도 실은 노포였다.

포경수술이라는 것도 초등학교 고학년 때 알게 된 문화였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일찌감치 몸과 노는 법을 깨우쳐 그런가 나는 진성이 아닌 자연포경으로 아름답고 건강한 두 개의 심장을 가지고 있었다.

이번 오스트리아 여행에서 만난 상대들도 내 몸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혜정이도 그렇고, 다빈이도 그렇고. 빅토리아 누나. 다들 좋아라 했었지.

"이번에 들었는데 외국은 다 안 한대."

"왜?"

"다? 남자들 전부 다?"

"어. 원래 안 하는 거래."

남수가 식탁이 부러져라 벌떡 일어나 두 팔을 벌렸다.

"역시 너 이 새끼 한번만 안아보자. 내가 진짜..."

"그래. 그래. 많이 속상했지."

"이 씨발... 정말 누군가는 알아줄 거라 믿었는데..."

남수와 둘이 끌어안고 있으니 정석이와 태윤이가 불안하게 눈을 돌린다.

"왜... 왜 안해?"

"하는 거 아냐?"

"그게 위생문제가 있다고는 하는데. 옛날 얘기고. 무엇보다 그걸 하면."

남자의 성감대가 날아간다.

입으로 하든 여자 몸에 넣듯 쾌감이 반절 된다는데. 상상만해도 끔찍한 이야기였다.

"할례랑 똑같은 거지. 따져보면 인간의 쾌락을 눌러버리는"

"저 새끼. 할례는 또 뭐야?"

"..."

"정석이는 아는 거 같네. 쟤한테 물어봐."

"뭔데? 정석아 그게 뭐야?"

"아프리카에서 여자들한테 하는 거... 클리스토리스를 잘라내는"

아무리 서서 오줌누는 놈이여도 여자의 가장 큰 성감대를 모를 순 없지.

태윤이의 얼굴이 굳어버린다. 농담이 아니라 애가 진심으로 놀란 듯 눈을 파르르 떨고 있었다.

"그... 그래? 포... 포경이 그 정도라고?"

"야. 근데 우리 뭔 얘기 하다 포경까지 왔지?"

다시 주제로 돌아와 정석이의 취업 문제를 논의했다.

"존나 쓸데없는 얘기 하고 있었네."

"그러니까. 그깟 꼬추 까면 어떻고 안 까면 어떻다고."

"이 개새끼들! 지들 불리하니까 말 돌리는 거 봐!!"

"너도 그냥 지나가. 억울함 풀었으면 됐지."

"아 꺼져! 하루 이틀 지랄이었냐고!!"

"그래서! 니가 메달 땄어? 너 여자랑 해봤어? 니가 구마하야!"

"앉어 아다새끼야!! 건방지게 일어서지 말고!!"

"와 진짜 이것들을 다 죽여버릴 수도 없고..."

남수를 달래줬다. 그냥 세상 나쁜 놈들은 다 김씨 이씨라고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살살 앉히며 대화를 이어갔다.

"아무튼, 난 좋아. 일 할래. 오히려 할 게 있어서 요즘엔 마음 든든해."

"너네 부모님은 뭐라고 하시냐?"

"남들 다 대학가서 즐길 때 나만 일하면 답답하지 않냐고 그러는데. 근데 애초에 대학이 즐기러 가는 곳이 아니잖아? 공부하러 가는 곳이지. 안 그래?"

"후후. 그래 그 말도 맞다."

"맞어. 그게 맞지."

"새끼. 하여간 주둥이만 살아가지고..."

"뭐 씨발."

커다란 단점을 가지고 있지만, 그래도 정석이는 남자는 능력이라는 지 나름 확고한 기준을 가지고 있는 놈이었다.

중심이 있는 친구. 잘 하리라 믿어보는 수 밖에 없지.

"사장님 밑에서 7~8년 일하고 내 가게 열어서 구마하 못지않게 떵떵거리고 살 거야."

정석이가 술잔을 들며 검지 끝으로 나를 가리켰다.

고개를 끄덕여주며 잔을 든다.

"당연하지. 나중엔 니가 우리중에 젤 잘 살 거다."

"그래. 남자가 한번 시작했으면 포기란 없는거지."

"정석이가 빨리 사장님이 되는 그날까지."

"하하! 지랄들하네."

건배.

* * *

"여기에요?"

"어. 어떠냐? 건물 깔끔하지?"

"네. 분위기 좋네요."

"임대료도 싸고. 니네 학교랑도 가깝고. 그냥 여기로 했어."

다음 날 한 감독님을 만나러 서울 연남동으로 올라왔다.

지난 아테네에서 이야기한대로 선생직을 그만두고 회사를 설립하셨다.

연남동에 위치한 작은 사무실에서 발동하는 한구 스포츠.

감독님과 내 이름의 성을 따서 만든 스포츠 앤터테인먼트 겸 매니지먼트 회사였다.

구한 스포츠로 하는 게 어떠냐는 의견도 주셨었는데, 구한말도 아니고. 무엇보다 한구면 숫자로 19가 아닌가. 열 아홉에 첫 메달을 땄다는 의미도 있으니까.

사무실을 둘러보고 자리에 앉아, 2005년 올 한 해의 목표를 잡았다.

"역시 세계 선수권이지."

"네."

2년마다 돌아오는 육상인의 축제. 세계 육상 선수권 대회.

올림픽이 국가와 민족을 대표하여 승부를 겨루는 자리라면, 세계선수권은 선수 개인의 명예를 위해 존재한다.

"8월 헬싱키. 그때까지 현재 랭킹 잘 지키면서, 이번에도 큰 일 한번 내보자."

"좋죠."

2005년 세계 선수권. 2006년 아시안게임. 그리고 다시 2007년 세계 선수권. 2008년 베이징까지.

선수로서의 목표는 그렇게 잡았지만, 세상 어떻게 흘러갈진 모르는 일이니까. 당장은 눈 앞의 단기적인 목표만 보기로 했다.

"몸은 좀 어떠냐?"

"근질근질하죠 뭐."

"어쩔 수 없지. 겨울이니까 쉰다고 생각하자고."

"근데 감독님. 저 서류는 다 뭐에요?"

"이거? 일이지 뭐."

"아직도 행사 섭외가 들어와요?"

"그럼. 저것도 거르고 거른 거야. 그래. 너 말 잘했다. 온 김에 같이 좀 보자."

혜정이한테도 말했듯 세상 모든 것에 행사가 있다. 그리고 모든 행사엔 다 나름의 초대손님을 부른다. 참가해서 사진 몇 장만 찍어도 돈을 주는 정말 신기한 시스템이 아닐까 싶다.

"이것도 지금 한 철이겠죠?"

"그렇지. 그러니까 일 있을 때 바짝 벌어야지."

"감독님. 저 친구들이랑 여행가기로 했는데, 그 날짜는 빠질 수 있을까요?"

"어디? 무슨 여행?"

"스키여행이요."

"보자. 스키 행사도 하나 있던 거 같은데."

"스키 행사요? 오. 보여주세요."

"음. 그게 어딨더라. 어 그래. 여기."

우리나라 강원도도 겨울은 눈의 왕국이 된다.

스키어들의 축제도 있고, 행사나 대회. 여러 자리가 있었다.

"오~ 대회가 있네요."

"그럼. 이런 걸 해야 스키 선수들도 살지."

"일반인 참가도 있는데, 저도 해도 될까요?"

"너가 스키 대회를 나가겠다고?"

"네. 이번에 저 오스트리아 갔을 때 배웠잖아요. 재밌더라고요."

"하하! 구마하가 스키대회에 참가한다라, 주최측에선 만만세를 부르겠구나."

대회도 나갈 겸 스키 여행도 이쪽으로 가면 겸사겸사 좋겠다 싶어 숙소를 찾고자 컴퓨터 앞에 자리를 잡았다.

"아. 자리가 없네..."

"몇명이나 가는데?"

"모르겠어요. 열명은 되지 않을까 싶은데... 은근 큰 방이 없더라고요."

"오케이. 그건 내가 연맹에 말해볼게."

"어디 연맹요?"

"육상연맹이지. 여기 가까운 데 연수원이 있어. 좀 낡긴 했지만 그쪽으로 가면 돼."

"아우. 그런 걸 제가 사적으로 어떻게 써요..."

"뭐 어떠냐. 연맹도 지들 기분 따라 오라가라 하는데. 말이나 한번 해보자고."

대 사부님께 연락드리면 알아서 다 준비해주실 거라며 그쪽으로의 소통은 맡겨두시라고 하신다.

"세상이 참... 뭔가 많이 너그러워진 느낌이네요."

"후후. 주변에서 너무 띄워주지?"

"네. 그래서 어제 친구들 만났는데. 애들이 막 아무렇지 않게 욕하고 이러는데 되게 편했어요."

"마하야. 내가 예전에 스포츠는 엔터테인먼트라고 말해던 거 기억하냐?"

"그럼요. 그래서 인성을 가져야 한다고."

"넌 스타고. 세상은 지금 널 보고 싶어하고 있다. 그냥 순리라고 생각해라."

"순리라. 흐음."

"승자가 대우 받는 것도 어쩔 수 없는 흐름인 거야."

남자아이들의 꿈 인기순위 1위는 언제나 축구나 야구선수가 되는 것이었다.

그랬던 게 지금 육상선수가 되겠다는 아이들이 나오고 있다.

실제로 전 학년 통틀어 스무명이 안 되던 한주 고 육상부는 내년 신입생 모집 원서만 전국에서 삼백장이 넘게 도착했다.

추천과 인맥까지 따지면 근 삼백 오십여명이 넘는 인원들이, 내가 달렸던 한주 고 운동장을 밟기 위해 시험과 선별 과정을 거치는 중이다.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개인을 넘어선 어떤 아이콘이 되어가고 있었다.

한 사람의 운동선수를 넘어 사회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무섭네요 책임감도 느끼고..."

"미리 겁내지 말고. 에이스는 뭐다? 주영이가 얘기했던 거 기억해?"

"에이스는 에이스의 숙명이 있다."

"그래. 처음은 몰랐으니까 너도 나도 정신없이 휘둘렸지만, 앞으론 점점 이렇게 우리 잇속 챙겨 먹으면서 성장하자고."

"네."

쇠뿔은 당김에 빼라고, 스키 대회 주최측과 통화를 가졌다.

혹시, 행사 기념 사진을 넘어서 대회에 참가 가능하냐는 의견을 조심히 비춰보니, 감독님 말씀대로 저쪽은 만만세를 부른다.

"네. 잠시만요. 마하야. 이분들이 너 스키 잘 타냐고 물어보시는데?"

"감독님. 잘츠부르크 스키어들이 저한테 뭐라고 불렀는지 아세요?"

"뭔데?"

"알프스의 독수리요."

"크하하하! 아. 들으셨다고요. 하하하! 네. 네 알겠습니다. 그래도 일반인으로. 예 행사 참가라는 의미로 신청 부탁드립니다."

통화를 마치며 감독님이 돌아보신다.

"됐다. 저쪽도 좋다고 하시네."

"앗싸! 나이스 스키!"

"스키 재밌냐? 날 잘 모르겠던데."

"뛰지 않아도 속도감을 느낀다는 게. 와~ 그게 진짜. 감독님. 예?"

"하여간, 넌 천상 스포츠 맨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