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륜기로 가버렷-81화 (81/401)

< 그가 특별한 이유 (2) >

며칠 뒤 태윤이가 대학에 붙고, 남수는 예비 번호가 떴다.

다들 하나씩 하나씩 주변이 정리되어 가고 있었다.

"아이고 잘 먹었다 태윤아. 합격도 축하하고."

"뭘 이정도 가지고."

"새끼들. 좋겠다."

"너도 곧 발표 나겠지. 기다려 봐."

"아~ 재수를 해야하나..."

정석이도 태윤이한테 축하 인사를 건네준다.

"그래도 대가리는 진짜였네? 어떻게 성대를 가냐?"

"그냥 원서 넣고 합격하면 돼."

"하하하! 씨발놈이"

"야. 가끔 보면 이 새끼 말 존나 재수없게 하지 않냐?"

"꺼져. 넌 외국 가서 금메달 따왔잖아."

친구가 좋은 대학을 가도, 올림픽에 나가 메달을 얻어도, 늘 한결같은 우리들이라 생각했는데.

변화는 주변이 바뀌며 즉각적으로 찾아온다.

"그럼. 재미나게들 노시고. 난 내일 출근 때문에 먼저 간다."

"야. 뭐 벌써 가?"

"그래. 출근 어차피 오후잖아?"

"내일 사장님이 시장 가신다고 따라가보려고."

"시장? 형 시장 갈 땐 장난 아니게 일찍 나가는데."

"그러니까. 엄밀히 지금도 잘 시간 늦었어."

"정석아. 맥주 한 잔만 더 하고 가자."

"뭔 맥주야. 니네 아직 졸업 안 했어. 간다."

정석이를 먼저 보내고 태윤이 남수와 자리를 옮겼다.

"마하야. 넌 진짜 정석이 니네 형이랑 일해도 아무 상관 없냐?"

"누구 말대로 우리 형이 내 꺼도 아니고."

"아 진짜 속 좁아."

"육상 영웅 감동 이런 거 다 구라지."

"아무튼, 두 사람이 결정한 문제를 내가 뭐라고 해. 내 친구 취직 시키지 마. 우리 형이랑 일하지 마. 그럴수도 없고."

태윤이가 정석이의 자세한 사정을 알려줬다.

"언제 둘이 만나서 이야기 했는데, 우리가 아는 것 이상으로 정석이네 집이 조금 힘든 상황이더라고."

"진짜?"

"그래? 야. 넌 그런 걸 알면서 왜 말을 안 했냐."

"나도 몰랐어."

수능 30일, 10일. 다들 바쁘게 마지막 공부에 매진하던 때도 정석이는 형을 찾아가 틈틈이 일을 했었단다.

"이 새끼도 확신은 없었던 거 같애. 지도 몇 번 일 해보고 아닌 거 같은데 하면서 책 보고. 그러다 역시 공부도 아닌 거 같다면서 다시 가보고. 집도 힘들고 수능 점수 보면서 확실하게 결정했다 하더라고. 자긴 역시 일을 해야 된다고."

"나도 뭐 운동만 없었으면 다를 거 있나."

"그랬었구나."

"그러니까 남수 너도 괜히 정석이 걱정한다고 진짜 일 계속 할 거냐? 이런 거 물어보지 마."

"야. 그냥 물어보는 거지. 내가 걔 속 긁으려고 일부러 그랬겠냐."

"그래. 정석이도 그 정도는 알지. 니가 그렇게 말하면 남수만 이상한 놈 되는 거야."

술을 마시지만, 우리는 아직 술 맛을 잘 모르는 따끈따끈한 스무살이였다.

취기가 오른듯한 태윤이가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뭔가, 2학년 때 우리 셋 같은 반 하다가 3학년으로 갈라지던 때 생각난다."

나만 운동하면서 친구들과 멀어짐을 느낀 게 아니었다.

태윤이도 우리를 보면서 다들 조금씩 멀어지겠구나 라는 걸 느끼고 있었단다.

"뭐야? 너네 그런 거 생각하고 있었냐?"

"하지. 한다기 보단 느껴지더라고."

"맞어. 시간도 잘 안 맞고. 이놈은 계속 운동하느라 바쁘고, 너도 그렇고."

그래서도 태윤이한테 정석이가 편했던 것 같다.

같은 이과생으로 반도 옆 반이고 쉬는 시간 점심 시간 늘 함께 붙어다니던 친구.

한 놈은 머리가 좋고, 한 놈은 입답이 좋다.

생각해보면, 두 녀석은 안 어울릴 듯 굉장히 가깝게 지냈다.

"대학가고 이러면, 앞으론 더 보기 어려워 지겠지..."

"야. 그런 게 어딨어."

"그래. 고등학교 친구들 평생 간다고 하잖아."

"그것도 서로 노력할 때 이야기지. 그래서 말인데 마하야."

"어."

"앞으론 니가 좀 잘해주면 좋겠다. 그래도 너 있으면 우리 다 뭉치기 좋으니까."

"남수야. 뭐냐 이 새끼? 얘 지금 취한 거 맞지?"

"태윤아. 여기 NBA 파티장 아니야. 동네 치킨 집이지. 무게 잡지마 병신아."

"하하하! 새끼들."

한번도 인정한 적은 없지만, 우리는 키도 크고 머리도 좋은 김태윤을 중심으로 뭉친 패밀리다.

나는 중학교부터 이 녀석을 든든하게 생각했고, 남수 정석이란 좋은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은은한 리더쉽을 가진 친구 김태윤. 그랬던 녀석이 우정에 대한 소신을 밝혔다.

"안 그래도, 그때 마하 따라서 NBA 선수들 만났을 때 그 생각이 들더라고."

"뭐?"

"좀 슬프다는 생각."

"뭐가 슬퍼?"

"그러게. 누구보다 분위기에 취해서 헤롱거리던 놈이?"

"후후후. 평생 살면서 이런 순간이 있을까? 내가 과연 내 힘으로 이런 자리를 올 수 있을까?"

"..."

"..."

"잘난 친구 둔 덕분에 여기까지 와서 웃고 떠들지만, 진짜 말도 안 되잖아. NBA 선수들이랑 파티라니. 그때 아~ 마하가 이정도 인물이 됐구나... 뭔가, 얘나 지금의 정석이나. 다들 오래오래 내 곁을 지켜줄 놈들 같았는데... 앞으론 더 멀어질 거 같은"

"남수야. 이 새끼 지금 취한 거 맞지?"

"그나저나 방금 김태윤 말을 종합해보면, 구마하 김태윤 따까리 설이 드디어..."

"씨발놈 지 입으로 실토하네."

"하하하하~! 미친놈들아. 정석이 없다고 이것들이 둘이서 나를 몰아!"

아무튼, 농담도 농담이지만, 우리도 어른이 되어가는 길목에서 한번쯤 생각해 볼 문제였다.

"우리 누나도 나이들면서 친구들 보는 거 쉽지 않다고 하긴 하더라."

"야 그거야 여자니까 그러지. 우리는 남자들인데."

그러자 태윤이가 씩 웃으면서 말한다.

"오~ 구마하. 내일 신문. 육상 영웅. 사석에서 여성차별적 발언 쏟아내."

"하하하하!"

"또라이냐? 뭐라는 거야... 내가 언제 미친놈아?"

"아... 역시 이래서 니네는 안돼. 정석이가 있어야 돼..."

"왜?"

"뭐? 정석이가 뭐?"

"여기서 그 새끼는 그냥 웃고 떠드는 게 아니라, 나랑 같이 이 자식 놀렸을 거라고. 여자는 싫어하는데 섹스는 좋아해 이런 식으로."

확실히 정석이가 빠진 뒤로 태윤이가 날 놀리는 횟수가 줄어든다.

패스를 던져도 받아줄 공격수가 없는 것이다.

듣고보니 뭔가 녀석의 공간이 크게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남수도 정석이의 빈자리를 공감하며 말했다.

"그러게. 그때도 그랬는데."

"언제?"

"너 학교 안 나왔을 때. 그때도 우리끼리 마하 없으니까 뭔가 엄청 허전하다고."

"맞어. 이렇게 보면 우리도 참 개성있게 잘 모였어. 그치?"

"똘똘한 놈 하나. 재미난 놈 하나. 바른 놈 하나. 운동에 미친 놈 하나."

"야. 타임."

"그래 타임 씨발놈아. 여기서 바른 놈은 누구냐? 설마 니 입으로 너라고 하진 않겠지?"

우정 관한 큰 울림의 시작은 역시 내가 운동을 하면서부터였다.

"근데, 우정도 좋고 친구도 좋은데, 그렇다고 내가 맨날 니네 옆에서 따까리 짓이나 하고 살았어야 하는 건 아니잖아."

"하하하. 진짜 이 새끼는 야. 내가 그런 뜻으로 하는 말이냐?"

"그래. 그건 아니지."

"아 씨발 억울해서 성공하겠나. 이거."

"후후후. 그러니까. 그냥 가끔은 이게 자연스러운 건가 싶어."

애들한테 잔을 채워주며 말했다.

"개소리 좀 그만하고. 우리는 변할 거 없어. 우정은 영원히 가는 거야."

"지가 젤 변해 놓고선."

"그러니까. 지 혼자 훅 변해놓고선 변할 거 없단다. 존나 웃기네."

"아 진짜 뭔 말을 못 하겠네. 어떻게 한 마디를 그냥 흘려 듣는 법이 없냐."

태윤이가 나를 보면서 말했다.

"그래서도. 니가 잘해야 된다는 거야. 너만 우리 무시하지 않으면 우리도."

"이 새끼는 뭔... 야 내가 양아치냐? 생각해보니까 존나 빡치게 만드네?"

"뭐 병신아."

"마하야. 태윤이 취했잖아."

"아니 취하면 아무소리나 다 해도 되는 거야?"

정석이가 있었으면 좋았는데 일단 친구들에게 내 진심을 전해주고 싶다.

"너 NBA 선수 어디서 봤어? 남수 너 외국인 선수들이랑 게임 어디서 했어? 나 메달 딴 거 어디서 봤어? 아테네야. 니네가 날 보러 거기까지 왔으니까 그 자리가 있었던 거야."

갑자기 훌쩍 변해버린 내 모습이 낯설게 느껴지는 애들 마음도 이해하지만, 나도 내 입장이라는 것이 있다.

늘 응원해주고, 옆에서 같이 운동장도 달려주고. 놀고 웃고 떠들고.

놀리고 시비걸고. 이런 개새끼들!!

아무튼, 그 먼 곳까지 와서 함께 울어주고 태극기도 흔들어준 녀석들이 바로 이놈들이다.

우리의 우정은 나에게 있어서도 무엇과 바꿀 수 없는 추억과 에너지였다.

"내가 아직까진 의리를 시험받아 본 적은 없는데, 이건 확실하게 한다."

"뭐?"

"뭘?"

"너네. 정석이까지 포함해서 또라이 삼인방들. 그리고 혜정이나 우리 감독님들. 한주 고 애들. 다들 나 좆밥일 때 무시하지 않고 끝까지 응원해준 사람들은 내가 끝까지 간다. 세상을 배신하면 배신하지, 내가 이 사람들 등 돌리는 일은 절대 없어."

세상이 뭐라든, 날 어떻게 보든. 내가 아무리 사회적 영향력을 갖추고 지랄을 하더라도 이 사람들 앞에서 나는 한결같은 찌질함과 편안함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확실하게 해주고 싶었다.

"..."

"..."

"그래도 고맙다 태윤아. 생각해보면 우리도 이런 이야기가 필요했어. 나이 먹으면서 우정도 그렇게 성숙함이 따라오는"

"야. 잠깐만 타임."

"그래. 타임."

"왜? 뭐? 나한테 타임 부를 거 없잖아?"

두 녀석이 서로의 눈을 쳐다보며 의견이 모아졌다는 듯 동시에 물어본다.

"거기 혜정이가 왜 들어가냐?"

"그래. 걔가 그럴 정도의 무슨 의미가 있어?"

"..."

아뿔사. 분위기에 취하다 보니까...

"아무리 첫사랑이래도 그렇지 굳이 왜?"

"그러니까. 걔가 평생... 어? 너 이 새끼 설마?"

"..."

남수가 입을 열기 전에 태윤이가 눈빛이 바뀌어 취조하듯 고개를 들이밀었다.

"야. 방금 니 입으로 말했다. 우리를 배신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그... 근데?"

"너 걔랑도 했냐?"

"아. 미친놈아 내가 걔랑 뭘 하는데."

"아닌데, 고마운 사람들에 혜정이가 왜 나와?"

"친구니까 그러지!!"

"그 정도로 너가 걔랑 뭐가 있었어?"

"그러니까. 너 따져보면 혜정이 2학년 때 잠깐 가깝게 지낸 게 전부 아냐?"

망할놈들. 뭘 또 이렇게 꼬치꼬치...

"그냥 니네가 모르는 나와 혜정이의 이야기가 있어."

"우리가 모르는 너와 이혜정의 이야기?"

"어이 구마하. 남수보다 내가 너랑 더 빨리 친해진 놈이야."

"그... 근데?"

"개새끼야. 내가 모르는 니네 둘 만의 이야기가 있으면 그게 결국 섹스지."

대답하지 않고 묵묵히 맥주나 따르고 있으니, 두 녀석이 한숨을 후욱 쉬며 말한다.

"이 새끼 완전 섹스에 미친 새끼네...?"

"혜정이는 또 언제? 올림픽 갔다와서?"

"아. 아니라고 씨..."

"뒤진다 진짜. 또 속여라."

"하여간 여자 문제만 나오면 맨날 구라에 변명에..."

"내가 언제 니네한테 구라를 쳤다고?"

"다빈이!"

"그래. 그때도 남수가 계속 물어봤는데."

"아 진짜..."

남자는 절대 내 여자와의 이야기를 가볍게 떠들어선 안 된다.

아무리 연인이 아닌 파트너 관계라 하더라도 그건 지켜야 한다.

그것이 남자의 무게다. 난 그렇게 생각한다.

의혹의 눈길을 치우지 않는 놈들에게 차근차근 설명을 해줬다.

"아니. 그때 크리스마스 때..."

"크리스마스??"

"우리 니네 집에서 모였던 날??"

"어. 그날 내가 좀 힘든 일이 있어서... 혜정이가 많이 위로도 해주고."

"니가 뭐가 힘들어? 그날 걔 그 형이랑 완전히 끝내고 왔다고 우리들 앞에서 다 말했는데."

"그래. 힘들어도 걔가 힘들지. 니가 왜... 어? 너 설마?"

이번에도 두 녀석이 서로 눈을 마주치더니 황당한 얼굴로 쳐다본다.

"그때. 남수야 이 새끼랑 혜정이 끝까지 노래방 안 왔잖아."

"그러니까. 거기다 잠수 타서 우리 막 돌아다니고. 정석이 빡쳤던 휴지..."

"그래. 그 휴지!!"

"아. 진짜 그만좀 해 미친놈들아!! 가만히 듣자듣자 하니까 끝이 없네!"

나의 가장 소중한 '여자'친구를 지키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써야했다.

두 녀석도 나름 혜정이에 대한 마음이 있었는가 참 지독하게도 물고 뜯는다.

"차라리 채민서라면 내가 이해하겠어. 이 새낀 왜 혜정이를..."

"어이 김태윤. 갑자기 채민서가 왜 튀어 나오냐?"

"걔 왜? 너 걔랑도 뭐 있어?"

"없어!!"

중학교 동창끼리 암묵적인 눈빛이 오고간다.

적당히 하라는 시선에, 태윤이도 말을 삼켰다.

"그래. 뭐. 스키장 온다고 했으니까. 그때 둘이 하는 짓 보면 알겠지."

"뭔 짓을 해 내가 걔랑. 그리고 제발 헛소리 좀 하지 마. 니네가 내가 혜정이랑 친하고 가까워진 거 모르는 것도 아니고."

"알겠으니까. 너도 주변 애들은 건드리지 말고..."

"돌겠네 진짜..."

"후후후. 와 니네 둘이 싸우는 거 보자니, 지금은 또 정석이 없는 게 다행인가 싶기도 하고."

"그러니까. 그 새끼 알았으면 또 눈 뒤집히지."

"하여간 지랄들이야... 아니. 내가 주변 누구를 건드린다고. 혜정이도 어? 걔도. 그냥 어? 니네도 알다시피. 나한테 있어서 걔는."

"알았다고."

"그래. 니 말대로 둘 만의 뭐가 있겠지 넘어가자."

"그리고 채민서는 걔는 진짜. 쓰레기 같은 년. 아 재수 없는 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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