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륜기로 가버렷-84화 (84/401)

< 그가 특별한 이유 (5) >

"야 한상률이. 너 진짜 아까부터 자꾸 형한테 선 넘어. 이게 어디서 한심한 소리를..."

"하하! 각오가 그렇다는 거죠."

"죽지 마라. 나이 들수록 너같이 개겨주는 동생도 필요한 법이니까."

"형님."

이현석도 한숨을 뿜으며 마음을 잡는다.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청춘을 누가 말리겠는가. 그저 묵묵히 힘을 보태주는 게 차라리 뱃속이 편하지.

"니놈도 알다시피 우리 학교는 국내 최고의 아이스하키 팀이 있지."

"네."

"한번 물어볼게. 우리보단 건너건너 설상쪽 지도자도 잘 알지 않겠냐."

"현석이 형님?"

"왜 인마?"

"사랑해요."

"닥쳐. 죽여버리기 전에."

"하하하! 방금 전에는 죽지 말라면서요?"

"그러니까. 내 손으로 모가지 꺾기 전에 죽지 말라고."

구마하도 통화를 마치고 돌아왔다.

"죄송합니다. 아까부터 애들이 전화를 해서."

"마하야. 앉아봐라."

"네."

이현석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도전을 허락해 준다.

"좋아. 가봐라. 그치만, 이 세상 그 어떤 종목도 연습 없는 대회 참가란 있을 수 없다."

"예."

한상률이 이현석의 이야기를 전해줬다.

"교수님이 사람들 통해서 스키팀이랑 연결해 주시기로 하셨다."

"아 진짜요? 교수님?"

"일단 이야기나 한번 해보고..."

"교수님! 감사합니다!"

"목소리 낮춰 이놈아. 사람들 쳐다 봐."

대회까지는 앞으로 보름. 구마하는 연습모드에 들어간다.

올림픽 육상 세 종목 금메달리스트가 국내에서 열리는 스키대회에 참가한다.

스포츠계에 불어닥친 신선한 뉴스는 시민들 사이로 발 빠르게 퍼져나갔다.

* * *

이틀 뒤. 구마하와 한상률은 강릉시청 실업팀 선수 김정준과 지도자 이영호를 만났다.

"반가워."

"처음 뵙겠습니다 선배님. 구마하라고 합니다."

"하하! 굳이 선배라고 해줄 것 까진 없는데."

"그냥 받어 이놈아. 반갑다. 나도 영웅이랑 악수 한번 해보자."

"아. 네!!"

"이야~! 아구 힘 좋네! 폴 놓칠 일은 없겠어."

김정준 이영호와 인사를 나누는 구마하를 보면서 한상률도 곁에서 고개를 숙였다.

"저희가 찾아봬야 하는데, 먼 길 와주셔서 두 분 너무 감사드립니다."

"아닙니다. 마침 서울에 볼 일이 있었거든요."

"그래 그래. 이야기는 앉아서들 나누자고."

"네. 앉자 마하야."

"예."

서로 다른 종목의 선수들이 마주하는 자리. 의자에 앉자마자 이영호 감독이 먼저 물었다.

"근데, 정말 해보려고 그러는 거야?"

"나도 궁금해. 육상 선수잖아?"

"아. 저 그게... 스키라는 운동이 재밌기도 하고... 저희도 처음 취지는 아무래도 행사 참가다 보니까... 너무 심각한 건 아니긴 한데요..."

"심각합니다. 구마하의 도전에 한계란 없으니까요."

"감독님?"

"뭐?"

"아니요..."

"하하하! 이제보니 선수보다 감독이 대책이 없구만."

"지도 방법부터 비범하시더니, 역시 남다르시네요."

구마하 대회 참가는 스키어들에게 유명한 이야기가 되어 있었다.

두 사람은 팬들의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해서라도 많은 질문을 준비했는데, 한상률도 궁금한 것이 많아 보인다.

"스키도 생각보다 시합 종류가 엄청 다양하더라고요."

"감독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우리가 너무 몰랐다는 게 되잖아요?"

"뭐든 어떤가. 우리 종목에 관심을 가져주는 게 고맙지. 안 그러냐 정준아?"

"그럼요. 구마하가 참가하는데. 궁금하신 거 있으시면 다 물어보시죠."

"하하하... 아니 그게 저는 그냥..."

스키는 크게 속도를 겨루는 알파인 스키와 기술을 연마하는 인터 스키로 나뉜다.

그중 올림픽 주종목으로 채택된 것은 알파인 스키로, 1936년 독일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에서 열린 4회 동계올림픽 이후 지금까지 쭉 겨울 대회에서 하계 올림픽의 육상과 같은 위치로 세계인의 인기를 모으고 있었다.

"그리고, 회전, 대회전, 수퍼대회전, 활강, 복합, 듀얼 레이스. 여섯 종목이 있죠."

"오~ 공부 많이 했는데?"

"야. 내가 너한테 물어봤냐?"

"감독님. 이정도는 알고 있어야죠."

"후후. 마하는 스키를 어디서 타봤어?"

"오스트리아요."

"으음~ 오스트리아."

"좋지. 멋진 곳이야. 잘츠부르크?"

"네. 가보셨어요?"

"하하! 그럼 당연하지. 작년에도 갔다 왔는데."

스키를 통해 운룡대팔식을 마스터하고 싶었던 구마하.

생각보다 일이 커짐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그래도 소중한 인연을 만나 성심성의껏 묻는 질문에 답을 하고 있었다.

"그럼. 아주 초심자는 아니라고 봐야겠고."

"선생님. 얘는 이렇게 말하는데, 저는 아직 스키라는 걸 잘 몰라서 그러거든요."

"그래요 한 코치. 말씀하세요."

"스키란 운동에 있어 가장 중요한 건 뭔가요?"

역시 몸이다.

부상을 방지하고 속도감을 낼 수 있는 피지컬.

스키도 재능이 있어야 선수라는 타이틀을 달 수 있었다.

"육상이랑 사정은 비슷하네요."

"거의 뭐 그렇지."

"근데, 제가 봐도 구마하 이 친구 몸이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이영호나 장한준의 시선에 흐릿한 안타까움이 묻어난다.

한상률이 두 사람의 시선을 읽으며 질문을 던졌다.

"겨울이라 한참 바쁘시죠?"

"음. 원래는 그래야 하는데..."

"실은 제가 조금. 오늘도 병원에 검사 받으러 가는 길입니다."

역시. 한참 시즌 중에 서울까지 볼 일이 있어 왔다더니... 부상이구나.

"몸은 좀 어때요?"

"나쁘진 않은데, 피로가 쌓인 거 같기도 하고. 그래도 일단 부상인지 아닌지 확실하게 알고 싶어서요."

"이놈도 오래 타다 보니까..."

구마하나 한상률은 김정준이 그렇게 스키 업계의 주목을 받는 선수라는 것도 이 자리에서 처음 들었다.

"아...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제가 구마하도 아니고, 세상 사람 어떻게 저를 알겠어요."

"어... 음... 죄송해요 선배님."

"아니야. 아니야 그렇게 듣지마. 진짜 괜찮아. 선생님 제가 좀 말을 이상하게 했나요?"

"듣기에 따라서 오해의 여지는 있었지."

"하하하. 육상영웅한테 실례를 범했구나."

김정준의 너스레에 무거워지던 대화 분위기가 한결 편안하게 흘렀다.

그만큼 선수들에게 있어서 부상이란 두려우면서 듣기 편안한 주제가 아니었다.

"김정준 선수.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어디에 부상이 왔는지 물어볼 수 있을까요?"

"무릎이요."

"무릎요...?"

"네. 우리는 아무래도 자세가 자세다 보니까, 무릎, 발목. 이런 곳이 부상이 잦아서."

"야. 마하야. 이거 뭔가..."

"..."

"그래서 우리도 구마하가 와주는게 좋은데, 한편으론 조심스럽기도 해."

"스키에 대한 관심도 좋지만, 역시 독보적인 존재라..."

구마하도 이현석이 기겁을 하며 소리를 지른 이유를 알 것 같다.

하지만, 운룡대팔식을 익히는데 스키만한 운동을 아직 접하지 못했다.

도전은 과감해야 한다. 세상 몸 편하고 강해지는 훈련이 어디 있단 말인가.

"저도 가벼운 마음으로 보는 건 절대 아닙니다."

"음."

"그래."

구마하는 지난 오스트리아에서 느꼈던 감상을 솔직하게 말했다.

"스키는 뭔가, 제가 아는 것과 다르게 몸을 쓰는 방법이 신기했었어요."

"어떤 식으로?"

"분명 다리가 고정되어 있는데, 움직이지 않는데. 이상하게 달릴 때 못지않은 파워가 온 몸에 요동을 치더라고요."

"흠."

모든 하계 동계 스포츠를 통들어 가장 빠른 운동이 바로 알파인 스키 활강(Down hill)이었다.

맨몸으로 160Km를 넘어서는 움직임은 인간이 체감할 수 있는 한계점을 넘어서게 만든다.

속도감을 조절하는 건 커브라고 일컫어지는 슬로프 카빙이다.

흰 눈구름을 휘날리며, 신체의 한계를 조절하여 승부를 겨루는 게임.

목숨을 담보로 하는 위험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예상외로 7~80대 노인들도 즐길 수 있는 운동.

정적이면서 동적인 스포츠.

그것이 스키다.

"진지하게 도전해보고 싶습니다. 간단한 행사 참여에 이런 거창한 말씀 드리는 것도 우습지만."

"으음. 아니야. 오히려 제대로라 마음에 들었어. 안 그러냐 정준아?"

"그러게 말입니다. 이 친구 스키의 매력에 제대로 빠져있는데요."

병원 시간 때문에라도 두 사람과는 짧은 이별을 나눈다.

"오늘 말씀 너무 고맙습니다."

"뭘. 우리도 반가웠지."

"내일 뵐게요 선배님."

"이거 참... 원래는 적에게 이런 친절을 배풀어서는 안되는데 말이야..."

"네? 적요?"

"하하하! 자네 연대생 아닌가?"

"네. 올 해 입학 합니다."

"새끼 독수리. 형 호랑이 출신이야."

"아~ 하하하! 아~ 네."

고대 스키 동아리 출신으로 실업팀 선수까지 올라간 김정준 선수. 그가 구마하에게 악수를 내밀며 호형호제를 허락했다.

"한 코치님보다 내가 동생이기도 하고, 파란 놈들한테 선배 소리 듣는 것도 좀 그러니까. 그냥 형이라고 불러."

"하하하~ 네.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그래요. 한 코치도 들어가고. 마하도. 내일 보자."

"네! 들어가세요!"

다음 날. 구마하와 한상률. 그리고 이현석이 안암동을 찾아왔다.

"이런 거 할 거면 우리 학교에서 하지... 우리가 더 시설 좋은데..."

"형님. 마하가 아직 정식 학생도 아닌데. 좀..."

"뭐? 말도 못 하냐?"

한상률 이현석이 잡담을 나누는 동안, 구마하는 김정준 이영호와 함께 신체검사를 받고 있었다.

"이런 거 해봤어?"

"네. 먼저 올림픽 가기 전에 연맹에서."

"후후. 올림픽이라..."

"형도 가보셨죠? 2회 출전 하셨던데."

"어제 부랴부랴 인터넷 찾아봤구나?"

"네? 아... 하하..."

구마하와 김정준은 선수대 선수로 편안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럼. 부상은 아니신 거네요?"

"다행이긴 한데 그래도 피로는 피로니까. 동계체전까지 몸을 맞출 수 있을까 모르겠어."

"..."

"후후. 너 방금 속으로 동계도 체전이 있어? 그런 생각했지?"

"아니요. 동계 체전 잘 알죠."

"언제 하는데?"

"그... 그게..."

"2월 말. 하하하! 불쌍해서 봐줬다."

전국체전은 하계 종목을 위한 잔치.

마찬가지로 동계 종목들을 위한 전국체전도 매년 꾸준히 열리고 있었다.

"쇼트트랙 말고는 국민들의 관심이 부족한 건 사실이라 크게 신경 쓰지도 않어."

"저희도 그랬어요. 육상도 아무도 안 보고 있었는데."

"그래도 육상은 니 덕분에 이제 메이저 장르로 올라섰잖아."

"..."

김정준이 구마하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이왕지사 도전 하는 거, 우리도 그렇게 좀 만들어 줄 수 없겠냐?"

"아우. 전 그정도까지는 아닌데..."

"한 코치님 생각은 다른 것 같던데."

"네?"

"아까 우리 선생님이랑 말씀하시는데, 동계 올림픽 포인트는 어디서 따냐고 물어보시던데?"

"아 감독님도 진짜... 이러니까 몸으로 뛰는 인간들은 생각이 짧다는 말이 나오죠."

"하하하! 야 인마!"

간호사가 툴툴대는 구마하를 검사실로 안내한다.

아무래도 육상의 기둥과도 같은 존재다보니 일단 그의 몸이 스키를 탈 수 있는지를 다들 먼저 체크해 보았다.

그리고 결과가 나왔다.

"음. 근력은 만점에 가깝고... 신체 조건도 뭐 부족함은 없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목소리 끝에 여운을 남기는 걸까.

지켜보는 모두가 긴장감을 놓지 못하고 있는데, 의사가 구마하의 검사표를 툭툭 두드린다.

"그리고. 이 부분이 참 놀라운데..."

"뭔데요?"

"선생님 뭐요?"

"허허... 허허허허... 허허허~"

"왜 웃으시지...?"

"모르겠어요."

의사는 계속 너털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선생님 마하한테 무슨 문제가 있나요?"

"문제요? 아니요. 이건 기적에 가까운 수치라..."

의사가 최근 읽은 논문을 언급하며, 구마하의 몸은 전세계 0.001%에 속하는 무산소성 파워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게 뭐에요?"

무산소성 파워는 신체에 쌓이는 젖산과 피로도를 분해해주는 힘. 즉, 강한 파워를 지속할 수 있는 인체 고유의 에너지였다.

"이정도면 스키가 아니라, 크로스 컨트리를 해도 뛰는데 아무 지장 없을 겁니다."

"역시..."

"단거리 중거리 제패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지..."

"하하하! 우리 마하가 이 정도입니다!!"

이현석의 호방한 목소리에 구마하와 한상률이 서로를 보며 웃는다.

이영호 코치가 이현석에게 다가와 허리를 숙이며 악수를 권했다.

"이거 참... 그런 인재를 우리 스키쪽으로 보내주셔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저 이 감독님? 뭔가 오해가 있으신 거 같은데요. 마하는 어디까지나 우리 육상연맹 소속 선수고요. 스키는 올겨울만 잠깐 경험해보는 걸로..."

"형님. 잠깐만."

"뭐. 안 놔? 내가 틀린 말 했어?"

피로 해소차 몸을 쉬어야 하는 김정준이 구마하의 개인지도를 담당하기로 했다.

새로운 인연이 더해지며 흐릿한 도전도 점점 윤곽이 잡혀간다.

구마하에게 있어 스포츠란 섹스와 같은 무게감과 기쁨으로 다가온다.

처음 접하는 스키. 주변의 기대와 우려. 구마하가 진지하게 운동에 전념하는 동안 졸업 여행의 멤버도 확정되었다.

베스트 프랜드 이정석을 제외한 남자 친구가 열 네명.

이혜정을 통해 여행에 참석하게 된 여자 친구가 아홉 명.

스물 세명의 친구들 중에는 구마하도 잘 모르는 사람이 포함되어 있지만, 그중 한 사람은 안다고 말하기도 꺼려지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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