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가 특별한 이유 (7) >
코스 정상에서 저 아래 친구들로 보이는 무리들을 찾고 있었다.
여러 사람들 가운데, 누가 내 이름을 말하나? 누구 목소리가 익숙한가?
내공이 커지면서 먼 곳의 소리를 듣는 힘도 늘어난 덕분에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구석구석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듯 기웃기웃 둘러보다 우르르 몰려있는 한 팀을 보게 됐다.
인솔자 같아 보이는 사람도 감독님의 실루엣 같았다.
"후후후. 왔구나."
나도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하나 싶지만 바람을 가르며 슬로프를 내려갔다.
싸아악~ 스악~ 시원한 스킹을 하며, 넓고 크게 눈구름을 일으키며 달린다.
스키어들을 피할 땐 피하고, 속도를 높일 땐 높여가며 점점 도착지점에 닿아가니, 멀리 있던 친구들도 알아보는 듯 하나 둘 이쪽을 돌아보며 손가락을 들어보였다.
하하하. 이 무슨 개뻘짓인지.
그래도 혜정이한테 못난 모습 보인 것도 있고. 점수 회복 차 멋지게 보여서 나쁠 건 없지.
아무튼, 거진 다 왔다.
이제는 아는 얼굴도 보이며, 대충 누가 누군지 이목구비가 분간이 된다.
태윤이나 남수 혜정이. 운동회때 같이 달렸던 익현이도 보이고.
2학년 때 크리스마스 멤버들. 누추한 우리집을 찾아준 나름 인기쟁이 민혜와 선아.
그 외에도 다른 반가운 친구들이 카메라를 들고 나를 찍어주거나, 웃으면서 지들끼리 반겨주고 있었다.
한 감독님과 정준이 형 앞에서 촤아악~~ 턴을 하며 스톱.
두 분이 깔깔깔 웃으며 태윤이와 남수가 모두를 대표해 다가와 욕을 날린다.
고글을 슥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하하하! 야! 너 뭐하냐? 그 헬멧은 뭔데?"
"뭐. 스킹하려면 안전장비는 필수야."
"야 마하야. 너 지금 일부러 거기서 내려왔지?"
"아니야. 연습 중이었어."
"하하하!! 이것도 정준 씨가 시킨 거야?"
"슬로프 좀 가로지르면 좋겠다 했는데, 턴 까지는 주문하지 않았습니다."
감독님은 정준이 형한테 들으신 이야기가 있는가 껄껄 웃으시고, 형도 다가와서 멋있었다면서 엄지를 들어 주신다.
"하하하! 마하야? 너 생각보다 잘 타는데?"
"감독님. 제가 스키 좋아한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정준 씨 고생 많이 했겠어."
"아니요. 마하 운동센스가 남달라가지고 그렇게 오래 걸리지도 않았어요."
알프스의 독수리라는 게 거짓말은 아니었구나 라며 말씀하시는 감독님.
태윤이와 남수가 그건 또 뭐냐고 놀리고 있는데, 멀리 스키장을 보며 사진도 찍고 주변을 구경하고 있는 친구들을 둘러보았다.
"생각보다 많이 왔다. 누구누구 왔어? 여자애들은 처음 보는 애도 있는 거 같은데?"
"어... 어. 그럼. 많이 왔지."
"야. 야 구마하! 애들은 나중에 보고"
"숙소는? 짐은 풀고?"
처걱처걱 바인딩에서 부츠를 빼며 이야기를 나눴다.
친구들이 연수원에 짐을 풀고 점심 먹으러 가는 길에 나를 데리러 왔단다.
"점심? 감독님? 우리 애들 밥까지 제공해줘요? 잠자리 교통 해줬으면 끝난 거 아니에요?"
"한심한 소리 그만하고. 밥 먹으러 가자. 정준 씨도 같이 가."
"오~ 저도 밥 줍니까?"
"당연하지. 한구 스포츠가 사람들 밥은 잘 줘."
스키를 세워들고 로봇 같은 걸음으로 저벅저벅 애들 앞으로 다가가는데, 자꾸 김태윤과 박남수가 앞을 막는다.
"마. 마하야! 저긴 상급자코스냐?"
"야. 야! 이건 빌린 거야? 아니면 이것도 니 꺼야? 샀어?"
"아 좀 비켜봐. 가뜩이나 걷기 힘든데."
뭐 그런 얘기를 하는데 앞을 막어? 두 녀석이 이상한 행동을 하고 있다.
혜정이랑도 인사 하고, 다른 친구들도 보고 싶은데, 대체 왜 이러는...
"남수야!! 너 배고프냐? 우리도 그냥 마하랑 같이 빨리 스키나 탈까?"
"그. 그래! 밥 나중에 먹어도 되는 거지! 애들만 보내고 우리는 빨리!!"
"야... 나와 봐."
뭐야? 씨발?? 내가 잘못 본 게 아니잖아?
쟤가 여기 왜 있어...?
채민서가 여기 왜 있냐고...??
"마하야."
"어... 혜정아."
"야. 구마하~!"
미친 년 진짜 뭐지? 뭔데 친한 척 손을 흔들지?
* * *
"우리도 버스 타서 알았어..."
"너한테 계속 문자 보내고 연락 했는데... 전화를 안 받으니까."
"..."
운동에 집중하느라, 누가 오는지 제대로 살펴보진 못했다.
식당에 들어와 핸드폰을 꺼내보니 부제중 전화가 수십통 와 있다.
"혜정이랑 둘이 친구라고 그래?"
"어. 물어보니까 어렸을 때부터 친했었대..."
"후우우... 걔도 진짜..."
"우리도 오면서 계속 생각했는데, 아니 뭐 우리가 뭐라고 다 모여있는데 쟤보고 마하가 싫어하니까 넌 오지마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
내가 이혜정을 안다해서, 혜정이의 모든 교우관계를 비롯 친인척을 다 아는 건 아니다.
그렇겠지. 뭐 그럴 수도 있겠지. 채민서도 따져보면 초중고, 같은 라인을 타고 왔으니... 둘이 친구할 순 있는데...
정말 친하고 가깝다고 생각했던 애들만 시간내서 찾아왔다고 말할 정도로 불러모은 자리. 거기 얘가 들어가는 건 좀...
혜정이에 대한 애정마저 흔들릴 정도로 채민서에 대한 싫은 감정이 너무 크게 다가오고 있었다.
"야! 니네 뭐해. 쌤이 빨리 들어오래. 밥 나왔다고."
그리고 지금도 왜 지가 나서서 우리를 불러들이는지 정말 모르겠다...
"어... 그래. 알았어. 먼저 들어가."
"빨리 와!"
태윤이와 남수도 일단 나를 달래본다.
"가자 마하야. 가서 밥부터 먹자."
"그래. 신경쓰지 마. 우리가 너한테 못 다가가게 할 게."
"..."
"가자고. 나도 배고파."
"언제는 배 안 고프다며? 그냥 계속 스키나 타고 있자며?"
"아 진짜. 옹졸한 새끼."
채민서. 소위 말하는 일진들의 얼굴마담.
중1 때부터 지 혼자만 교복을 나이롱 재질로 만들었는지 옷을 몸에 붙이고 다니던 여자애.
그때도 화장한다고 맨날 학생부 불려 다녀도 끝까지 고집을 꺾지 않던 아주 그냥 싹수없는 년.
그랬던 채민서도 고등학교 올라와 언제 그랬냐는 듯, 요조숙녀인 척하고 다니며, 지 나름 애들한테 인기몰이도 하고 그러고 살았지만.
아니. 나는 사람의 천성은 바뀌지 않는다고 생각해.
내가 아무리 메달을 따고 뭘 해도, 뼛속 깊이 박힌 찌질함을 벗어낼 수 없듯이, 쟤도 똑같다.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린다.
"마하야. 스키는 언제부터 탄 거야? 아까 너무 멋있더라~!"
"..."
김태윤 박남수. 뭐 하냐? 나한테 못 다가오게 한다며?
밥 먹고 있는데, 왜 얘가 내 옆에 있는데?
"어. 이번에 해보려고. 배웠어."
"진짜? 그럼 원래 타던 게 아니야? 근데도 이렇게 잘 타?"
"..."
"너 진짜 멋있다. 야. 나도 가르쳐 주라~ 응?"
"......"
이 새끼들 밥이 넘어가지? 맛있지? 그래. 맛은 있다. 추운 날씨엔 역시 돼지 김치찌개지.
"아니 내가 누구 가르칠 정도는 안 되고..."
"나 스키 어렸을 때 타보고, 처음인데. 응? A자 이런 거 하면 되나?"
"야. 근데 다들 와줘서 너무 고맙다. 솔직히 몇 명 안 올 줄 알았는데..."
주제를 바꿔 친구들을 보면서 물었다.
애들도 뭐가 고맙냐고 우리가 불러줘서 고맙지 라면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
"익혁이도 와 진짜 오랜만인 거 같다..."
"그러니까. 야 우리도 너 되게 보고 싶었어."
다른 2학년 때 친구들도 갑자기 사람이 변해버렸다고, 자기들도 친한 척해도 되는지 어리둥절 하단다.
"하하하 그런 게 어딨어. 나 그냥 똑같애."
"그래! 야. 구마하 얘 그런 애 아니야."
"..."
허허. 허허허허...
야. 김태윤! 새끼야 공깃밥 추가하지 말고, 아 얘 좀!!
다른 친구들이 대신 나서서 채민서한테 웃으면서 막 뭐라고 했다.
뭐하는 거냐. 왜 그렇게 찰싹 달라붙어서 그러냐. 심지어 혜정이도 한 마디 한다.
"민서야. 그냥 일로 와 얌전하게 좀 있어."
"뭐? 야. 얘가 니꺼야?"
"참 진짜 쟤도..."
그나저자 진심으로 돌겠네. 난 얘라는 인간 그 자체가 싫은데...
슬쩍 고개를 돌려 혜정이와 눈이 마주쳤다.
다른 친구들은 옆에서 설쳐대는 채민서 때문에 내가 불편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줄 알지만, 혜정이는 내가 그와는 다른 마음을 가지고 있음을 눈치챈 것 같다. 얼굴이 심각하게 굳는다.
"민서야! 이리로 오라니까?"
"야. 잠깐만. 나 화장실 좀."
"응! 갔다 와."
친구들을 피해 주섬주섬 식당 밖으로 나왔다.
혼자 씩씩거리며 차가운 바깥 공기에 분노를 내쉬고 있으니, 혜정이도 따라 나온다.
"야. 너 왜 그래?"
"이혜정... 쟤 니 친구냐?"
"어. 몰랐어?"
"..."
"왜? 니가 오고싶은 애들 다 부르라고 했잖아..."
"아니... 잘 했는데..."
혜정이와도 먼저 싸운 뒤로 일주일만에 만난 자리였다.
애한테 이런 감정 비추고 싶지 않지만...
"야. 넌 친구 좀 가려 사귀어."
"..."
"쟤 뭐야. 쟤가 여길 왜 와."
"왜 그래 대체...?"
아 진짜. 이걸 내 입으로 말하기도 그렇고...
"민서가 너랑 친하다고 예전부터 말했고, 너희 뭐 같은 반도 두 번이나 하고 그랬었다며?"
"..."
"야? 뭔 말을 해보든가."
"혜정아. 내가 니 앞에서 채민서 이야기한 적 있어? 쟤가 그래? 나랑 지랑 친하대?"
"..."
"왜 내 말은 안 듣고, 쟤 말만 들으면서, 내가 쟤랑 가까울 거로 생각한 거야?"
"아니. 둘이 장난도 많이 치고 그랬었다고..."
"후후후. 장난? 어어~ 장난."
"너 설마, 민서 중학교 때 일진이었다고 그러는 거야?"
"후우우..."
"야. 쟤 놀던 것도 옛날얘기고, 그리고 쟤가 그렇게 애들한테 나쁜 애면, 여자애들이 먼저 거리를 뒀어. 니가 아는 거랑 조금 다르고."
"내가 아는 거랑 다르다."
"..."
혜정이도 점점 미간에 주름을 잡아가며 목소리가 변한다.
"그리고. 너 지금 뭐야. 니가 친구들 불러놓고 이러는 건."
"니 남편 구마하."
"뭐?"
"니 애인 구마하. 너 구마하랑 결혼."
"뭔 소리야 갑자기..."
"채민서가 지랑 친한 애들이랑 교실에서 그러면 애들이 뭐라고 그러는지 알어?"
"..."
"존나 싫어. 아가리 닥쳐 씨발년아. 죽여버려. 그게 내가 쟤랑 같은 반 했던 2년 동안 들었던 이야기야."
"..."
혜정이도 놀란 듯 눈이 동그래져서 쳐다본다.
"마... 마하야."
"쟨 못 생긴 게 왜 저렇게 나대? 쟨 할 줄 아는 게 뭐야? 그런 말 들으면서. 참 나... 아아~ 장난. 그게 장난... 존나 재밌네."
"..."
가까운 친구들 아니고서야 욕을 쓰진 않는다.
특히 여자들 앞에선 싸 보이지 않기 위해서라도 말을 조심하는 편이다.
아니, 애당초 내가 처음부터 이렇게 입이 거친 게 아니었다.
우리 형은 예절을 중하게 여긴다. 어려서부터 엄하게 혼나며 인성교육을 받았다.
내 모든 욕도 다 한때 어떤 썩을 것과 한 공간에 묶여있다가 보니, 붙고 만 것.
그래. 따져보면 그래도 좋은 거 하나는 있네.
"너. 내가 몸도 작고 생긴 것도 형편없고 부모도 없는 완전 개 찌질 왕따 새끼. 자살 안 하고 버틴 게 용한 내가 어떻게 일진들 타겟이 안 됐는 줄 알어?"
"...야. 너 멋있어. 무슨 니가"
"여자애들도 업신여기는 게 불쌍해서. 같은 남자 대 남자로 우리 반 놀던 놈들이 나 챙겨주고 그러고 다녔다."
"마하야. 일단 화 풀고."
"그래놓고, 쟤 지금 와서 나한테 이러는데, 이게 내가 너무하는 거 같냐?"
"그러니까... 그게..."
태윤이와 남수가 찾아왔다.
"야 구마하! 너 뭐하냐 새끼야?"
"..."
"야. 혜정이한테 왜 그래."
친구들이 다가오자, 혜정이도 일단 자리를 피한다.
태윤이가 강한 어조로 말했다.
"야. 니가 애들 불러 모았잖아. 분위기 이상하게 만들지 마. 뭐하는 거야."
"후우우. 듣고 있었냐...?"
"그래. 마하야. 쟤네도 더 오고 싶어하는 애들 매몰차게 끊어내면서 여기까지 왔는데, 눈치 보게는 하지말자."
"..."
"니 마음 알어. 이제 혜정이도 둘이 무슨 사인지 알겠지. 진정하고. 대스타가 씨발."
"그래. 마하야. 채민서만 있는 거 아닌데, 우리도 있고, 무시하고 지나가자."
"아 씨발... 진짜 모르겠다."
태윤이가 등을 두드려주며 말했다.
"아 씨. 이럴 때야말로 정석이가 있어야 되는데..."
정석이. 우리는 정석이를 생각하며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정석이 있으면 지랄지랄해서 마하 화 풀어 줄 건데."
"후후후. 미친 놈. 그 새끼 있었으면 뭐라고 했을까?"
"글쎄? 병신아. 좆같으면 꺼지라고 하든가! 이러지 않았을까?"
"음. 난 다른 말 했을 거 같애."
"남수는 뭐?"
"병신아 까지는 인정. 그 말은 분명 했고. 그래. 좆같으면 까지도 인정."
"하하하! 그래 거기까진 나도 인정."
"하하! 그리고? 정석이가 뭐라고 했을 거 같냐?"
남수의 입에서 보고싶은 친구의 말이 들리는 거 같다.
"역시 정석이라면, 좆같으면 따먹든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