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가 특별한 이유 (10) >
"이야~ 아니 내가 이렇게 유명한 사람을 태울줄이야. 반가워요. 악수 한번만 더 하자고? 어?"
"하하하... 기사님. 근데 운전중이신데... 이렇게 손 뒤로 하셔도 되는 건지...?"
"걱정 말라고! 내가 20년 무사곤데 나라의 보물을 태우고 아무렴 사고 내겠어!"
"으아아! 앞에 보세요!!"
20년 무사고면 오늘 사고가 나도 이상할 건 없겠구나.
일단 차 좀 세워달라고 부탁드린 뒤 앞좌석으로 넘어갔다.
"이게 낫겠죠?"
"덩치가 엄청나구만! TV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큰데?"
"하하... 근데 의자 이렇게 뒤로 빼도 되는 거죠?"
"그럼 물론이지! 앞으로 여기는 아무도 못 앉는 자리야!!"
호탕한 기사님이셨다.
덕분에 성남까지 가는 길이 심심하진 않을 것 같다.
"봐. 나도 여간해선 장거리 안 뛰는데, 그래도 영동 이 구간이 절대 뚫리는 길이 아닌 건 잘 알거든? 근데 봐 봐. 구마하가 타니까 길도 쭉쭉 열리잖아!"
"원래 이 시간이면 고속도로 다 뻥뻥 뚫리는 거 아니에요...?"
"겸손한 친구로구만. 그거 알어? 난 자네 시합 100미터부터 쭉 지켜본 사람이야. 처음부터 봤어! 남들같이 하이라이트로 본 게 아니야. 100미터 중계 그날부터 내가 구마하 진성 팬이 됐는데 자. 그런 의미로 악수 한번 더!"
"하하하! 네."
기사님을 통해 주변에서 듣던 것과 또 다른 지난 여름의 뜨거운 열정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다.
"그 정도였다고요?"
"그럼! 술집이고 어디고 사람들 꽉 꽉 들어차서. 다들 꼭 2002년이 돌아온 거 같다고 그러는데."
"..."
"그런 의미로 악수 한번만 더 하자고. 어?"
"하하하! 아. 네. 고맙습니다."
왜 그렇게 나를 응원해주셨는지 여쭤보았다.
"이 사람아 그런 질문이 어딨나? 한국 사람이 한국 사람 응원하는 건 당연하지."
"그래도 제가 유명 스타도 아니고. 육상이 축구같이 재밌는 운동도 아닌데."
"세계 신기록을 냈잖아."
"..."
"그냥 금메달이 아닌, 한국인이 세계에 우뚝 섰는데. 자네 단상 올라가는 모습에 울컥해지더라니까?"
승리의 맛이 달게 느껴지셨단다.
지난여름 육상을 지켜본 모든 국민이 내가 차근차근 예선을 통과해 결승에 오르던 그 모습을 잊을 수 없다고 하셨다.
"결승도 어찌나 조마조마하던지. 이기면 좋겠는데, 지면 어쩌나 하고. 보는 우리도 그런데, 저 사람은 오죽 떨릴까 싶고. 근데 또 이겨. 다음날도 이기고. 마지막이 뭐였지? 그 넘어진 선수랑 같이 들어왔던 거."
"1500요."
"그래. 그날은 우리도 시합까지는 그냥 차 세워두고 한쪽에 모여서 경기 보고 그랬었었어."
시합 때 긴장되지 않으셨냐고 물어보신다.
"긴장요? 음..."
"하하! 하긴, 긴장되지 않으니까 그렇게 할 수 있는 거겠지?"
"아니요. 저도 긴장하죠. 제가 그렇게 생각같이 대범한 놈이 아니에요. 미친 듯이 뛰고 보는 거죠."
솔직히 몇 시간 전, 태윤이가 지랄지랄 한 말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그냥 혜정이가 내 눈치를 보고 있다니 애를 봐서 참아 넘겼을 뿐.
사람이 어떻게 변하겠나. 메달 땄다고 마음도 금메달을 걸은 건 아니잖아.
남들 시선에 꼭 나를 맞춰야 돼?
내 기분. 내 감정도 분명히 존재하는 건데.
애들이 다가오는 게 걔들 마음이라면 멀리 하고 싶은 나도 있는 거지.
하지만, 이렇게 사람 구마하가 아닌 선수 구마하를 좋아해주시는 분을 만나니 조금은 태윤이 말이 이해가 된다.
몸만 키우지 말고 속도 같이 키워라 마하야.
너는 이미 메달리스트다.
사람들이 너를 보고 있다.
마지막 고교 추억으로 만든 졸업여행도 공적인 자리로 만들어 버리는 어떤 영향력.
오래오래 풀어야 하는 숙제를 부여받는 것 같다.
"그래. 홍천은 무슨 일로 왔어?"
"스키타러요."
"놀러왔구나. 그렇지. 선수가 쉴 땐 또 쉴 줄도 알아야 돼."
"쉬는 것도 있는데, 베르디파크에서 행사차 대회 참가해요."
"대회?"
"네. 내일 스키대회요."
"구마하가 스키를 탄다고?! 언제? 내일 몇 시?? 중계도 하는거야?"
"중계까지는 안 할 걸요? 그냥 일반인이랑 선수들 시합하는 거라."
"내가 우리 동료들 다 데리고 갈게. 아니 그냥 우리 마을 사람들 전부 다!!"
"하하... 하하하... 굳이 뭐 그렇게까지..."
"근데, 내일 대회라면서 이 시간에 성남은 왜 가는거야? 중요한 약속 있나?"
"아니요. 아주 중요한 걸 놓고 와서요."
태윤아. 세상이 보는 나도 나지만, 역시 내가 지키고 싶은 나도 있는 것 같다.
아무리 큰 사람이 되더라도, 변하지 않고 간직하고 싶은 모습이 있다고.
그리고 거기엔 반드시 너희 세 사람이 들어간다.
정석이. 좆같이 소중한 나의 친구.
기억을 되돌려보면 정석이는 꽤 오래부터 미래에 관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실제로 운동 재밌냐면서 남한산성도 따라오고 산 할아버지도 만나고 했었던 녀석이다.
할 일 없어 아무 때나 부르면 튀어나오던 놈이 진지하게 자리를 잡길래 그러려니 넘겼는데.
우리는 정석이를 두고 왔으면 안됐다. 우리가 정석이를 보고 싶어하는 만큼, 녀석도 똑같은 마음일 것이다.
실제로 내가 그랬다. 친구들이 곁에 있어 아테네고 어디고 정말 큰 힘을 얻을 수 있었다.
싫다고 해도 끌고 왔어야 했는데. 태윤이가 나를 보면서 멀어질까 걱정을 했다면 정석이도 마찬가지겠지.
심지어 우리는 다들 대학생이 되는데, 녀석은 성남에 남는다.
자존심에 말을 못 했을 뿐일 거야.
얘는 지금 얼마나 우리한테 서운함을 느끼고 있겠는가.
"그렇게 친구랑 좀 어긋나기 시작했는데, 역시 좋은 시간 같이 보내고 싶어서요."
"친구라. 그렇지. 정말 소중한 거야..."
"100미터 중계 보셨으면 제 친구들 응원하는 것도 보셨죠?"
"암. 울고불고 난리가 났더만. 하하하!"
"맞아요. 그놈들 중 하나예요."
"그래. 그래도 당사자 마음을 누가 알겠어. 정말 귀찮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거니까."
기사님이 말씀해주신다.
"구 선수. 내가 나이 먹으면서 깨달은 게 있는데, 한번 들어보겠어?"
"네. 말씀하세요."
"결국 사람은 사람을 통해 배우는 법이더라고."
잘 하려고 해도, 작은 실수 큰 실수 다 하게 되어있고 억울한 일도 당하고 싸움도 하게 된다.
사람이 완벽할 순 없다. 모든 게 다 그렇게 배우면서 성장하는 것이니.
"보기보다 착한 친구 같아서 그래. 너무 그렇게 남들에 맞추려고 고민하지 말어. 알겠지?"
"네. 좋은 말씀 감사드립니다."
저마다의 이야기와 중심이 있다.
아무튼, 믿는 바를 따른다.
있어봐라 친구야. 내가 데리러 가니까.
무엇보다 우린 너가 있어야 돼.
셋만 있으니까 균형이 깨진다고...
빌어먹을 김태윤 개새끼가 내 멱살을 잡았어. 박남수가 내 편을 안 들어줬다니까?
제기랄 놈들...
* * *
"맛있게 드셨어요. 네 고맙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이정석이 마지막 손님에게 꾸벅 인사를 남기며 고개를 들었다.
노란 머리의 식당 매니저가 다가와 한 마디 건네준다.
"정석아. 친절도 좋은데, 저런 손님들은 다음부턴 그냥 일어나시라고 해. 알겠지?"
"그래도 음식이 남아 있는데... 어떻게 뭐라고 해요..."
"야 인마. 우리는 퇴근 안 하냐? 우리도 마감시간이 있어. 저런 손님은 끝을 모르고 계속 죽치고 있는다니까?"
"네. 알겠습니다."
"그래. 오늘 고생했다. 마무리 좀 부탁해도 될까? 형도 약속이 있어서."
"네. 제가 문 잠그고 들어갈게요."
"오케이. 다음에 형이 맛있는 거 사줄게. 내일 보자!"
"들어가세요. 매니저 님."
이정석은 하나 하나 의자를 뒤집어 올리며 바닥을 쓸고 닦는다.
담배꽁초와 먼지들. 휴지와 잡다한 쓰레기를 한쪽으로 모으고 고개를 들어보니 어느덧 밤 10시.
"후우..."
부모님이 해준 이야기가 떠오른다.
친구들 다 대학가서 즐기는데 너만 혼자 세상에 던져지는 걸 견딜 수 있겠어?
그 말이 이런 뜻이구나...
애들은 지금 뭐하고 있을까...?
여자애들도 많이 왔다든데 새끼들 갱뱅찍고 지랄하진 않겠지?
드르륵.
"저희 끝났는데. 어 뭐야?"
"마쳤냐?"
구마하가 성큼성큼 걸어와 냉장고에서 사이다를 꺼내든다.
이정석은 눈앞에 있는 친구를 뭔가 이질적인 생명체라도 되는 듯 멍하게 쳐다보며 물었다.
"너 지금 뭐하냐? 니가 왜 여깄어?"
"니 새끼 데리러 왔지."
"..."
철컥. 병따개로 사이다를 딴 뒤 꿀꺽꿀꺽 마시는 구마하.
"크아~ 어 시원하다. 히터를 너무 틀었어."
"야. 너 뭐해?"
"뭐? 데리러 왔다고 했잖아. 빨리 끝내고 가자."
"그게 아니라 씨발년아. 누가 니 맘대로 냉장고에서 음료수 꺼내 마시래?"
"뭐? 나 원래 가게 오면 하나씩 이렇게 음료수 꺼내먹어."
"존나 이 새끼가 범인이구만... 맨날 음료수 발주랑 재고 안 맞는다고 다들 뭐라고 하는데."
"하하하! 형도 뭐라고 하는데, 그래서 몰래몰래 마시고 있지."
"꺼져! 그리고 내가 어딜 가. 안 간다고 했잖아."
"정석아."
"왜..."
별 일도 아닌데, 그러나 별 일도 아닌 상황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다가와주는 친구의 모습에 이정석의 마음이 뭉글뭉글 해진다.
"이번에 태윤이랑 남수랑 이야기 했었는데."
친구들과 나눈 우정어린 이야기를 전해주는 구마하.
이정석은 그들이 마치 자신의 속에 들어왔다 나가는 느낌을 받는다.
표현을 못 했을 뿐. 그도 김태윤과 똑같은 마음이었다.
다들 언제나 옆에 있을 것 같았는데, 갑자기 자기 미래를 위해 멀리 걸어가는 친구들.
근데 어쩌겠는가... 자신은 진짜 공부고 운동이고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는데...
묵묵하게 자신이 할 일을 해야만 그나마 친구들과 멀어지지 않을 것 아닌가.
"개새끼들... 맨날 지들 심심하고 필요할 때만 부르고..."
"알아 새끼야. 안다고."
예전에 구마하가 솔직한 고민을 털어놓으며 친구들 앞에서 울었던 것 같이. 이정석도 마하와 단 둘이 마주앉아 깊은 속을 마주보며 눈물을 흘렸다.
"와 이정석 우는 거 보기 어려운데, 이 좋은 걸 나만 보고 있다니."
"미친새끼... 죽여버릴 수도 있고..."
"어이구. 그래도 주둥이는 끝까지 살아있구만."
"하하 아 진짜 쪽팔리네... 그러게 왜 우냐. 병신도 아니고."
"야. 우리 형이 그랬어. 너가 일 시켜달라고 왔을 때 확실한 의지가 보였다고."
"그래...? 사장님이?"
"장사가 어때서? 취직이 뭐 어떤데? 우리 형은 먼저 여기 사장님한테 취직하고 열 입곱에 집 샀어."
"진짜? 대단하다..."
"정석아. 세상 누구도 너한테 뭐라고 못 해. 하기만 해 씨발! 그 새끼 내가 죽여버릴 테니까."
"후후. 미친놈아. 니가 그러면 바로 뉴스 나오지!!"
받은 만큼 돌려주고 싶은 마음.
구마하가 이정석을 보면서 말했다.
"정석아. 니가 하는 게 맞어. 니가 가는 길도 맞어. 그러니까. 니가 바라는 꿈도 반드시 옳은 길이야."
"미친놈..."
"오히려 너 여기 남아서 나중에 멋진 가게 하나 열어 봐라. 애들 다 너한테 모이지. 안 그러겠어? 명절이고 어디고 성남 왔을 때 친구가 가게 하나 하고 있어 봐. 든든하지."
"아 진짜 밥 달라고 달려들 놈들 생각하니 벌써부터 지긋지긋하다."
"그러니까. 가자. 가서 즐기자. 이건 우리 마지막 졸업여행이잖아."
"하하! 야 근데, 우리 매번 그런 식 아니었냐?"
"뭐 어때. 그게 우리 스타일이지."
이정석도 마음을 풀며 깊은 숨을 몰아쉬었다.
"근데, 나 진짜 사장님한테 말 안 했는데..."
"형 걱정마. 형도 다 방법이 있으니까."
"뭐? 너가 부탁하려고?"
"아니. 뭔 부탁을 해 새끼야. 우리 형이 내가 그런다고 들어주는 사람인 줄 아냐?"
구마하가 차근차근 계획을 말해준다.
"우리 형은 어른, 부모님. 이런 거에 완전 쥐약이거든?"
"...그래서?"
"넌 지금 할아버지가 아프신 거야. 근데, 아무도 병간호를 할 수 없는거지. 딱 삼일만. 니가 할아버지 옆에서 지켜봐드려야 한다 그러면. 우리 형 아무 소리 못해."
"후우우... 마하야. 너 사장님한테 많이 맞고 컸다고 그랬지?"
"어."
"야. 맞고 자란 놈이 이지랄이면, 대체 안 맞으면 어떻게 될려고 그랬냐?"
* * *
정석이를 데리고 다시 홍천으로 돌아왔다.
"그럼. 즐거운 시간들 되라고."
"고맙습니다."
"내가 고맙지. 돈도 벌어 줘. 유명한 사람도 만나. 다음에도 이쪽 오면 연락해."
"아저씨. 사진은 제가 이메일로 보내드릴게요."
"그래. 자. 그럼 마지막으로."
"하하하! 기사님. 오늘 저랑 악수 한 100번은 하신 거 아시죠?"
"응원할게. 힘내자고."
"네."
연수원 앞에서 멀어지는 택시를 보면서 정석이가 물어본다.
"사교성도 좋다. 모르는 사람이랑 뭘 그렇게 친하게 떠드냐?"
"다 누구한테 배운 거지."
"...미친새끼."
"야. 너는 왜 칭찬을 칭찬으로 못 받아들이냐?"
"꺼져. 아 춥다. 애들 누구누구 왔다고?"
"많이들 왔어. 근데 지금은 11시 넘었으니까 다들 가서 자고있지 않을까?"
아직도 식당쪽에서 소곤소곤 말소리와 웃음 소리가 들리고 있길래 들어가보니,
아까의 반도 안 되는 친구들이 남아서 빨개진 얼굴로 돌아본다.
"어? 정석아!"
"뭐? 정석이?"
"어이고. 이 씨발놈들. 고등학교 졸업장도 안 받은 새끼들이 뭔놈의 술을..."
"하하하! 야! 너 뭐야? 너 어떻게 여기 왔어?"
"뭐긴 뭐야! 새끼들아 졸업여행 왔다!!"
역시, 주인공은 마지막에 등장하는 법이구나.
정석이가 나타나자 비로서야 이번 여행이 구마하 팬미팅에서 졸업여행의 분위기가 잡힌다.
"크하하! 야. 니네 구마하 존나 띄워주고 있었다며? 저 새끼 좆밥이야!"
"후우... 아 저 개새끼 진짜..."
"뭐? 한숨쉬지 말고 가서 물이나 따라와 씨발놈아. 카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