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워도 다시한번 (1) >
"정석이가 왔구나. 어쩐지 새벽까지 시끄럽더라니..."
"혜정아. 저기 빈 병 모아놓은 거 봐 봐... 뭔 술을..."
"근데, 넌 오늘 대회나간다는 애가 그렇게 늦게까지 있어도 돼?"
"아니야. 난 일찍 들어가서 잤어."
"흐음. 그래도 보면 시합 앞두고 몸 생각은 참 잘해."
"오~ 뭐지? 지금 나 걱정해주는 건가? 감동인데?"
"야. 까불지 말고 밥이나 먹어."
다음 날. 다들 늦잠 자거나 술에 취해 골아떨어진 아침 시간.
혼자 주섬주섬 컵라면에 물을 붙고 있는데 혜정이가 찾아와 같이 아침을 먹어준다.
"경기는 몇 시라고?"
"보자. 나는 2시쯤 하지 않을까?"
"음. 애들이랑 썰매타고 있을 거 같은데. 잘하고 와."
"뭐야? 나 응원 안 올 거야?"
"무슨 응원을 해. 이벤트라면서."
"그래도 경기는 경기지. 서운한데...? 여기까지 와서 내 시합을 안 본다고?"
"웃겨. 야 구마하. 내가 무슨 니 여자친구냐? 왜 그래야 되는 건데?"
"그게 너랑 나는 커플은 아니지만, 나름 육체적 관계를"
"으이구! 으이구! 내가 이럴 줄 알았어!!!"
둘이 투닥투닥 거리고 있는데, 민혜나 선아 그리고 다른 여자애들이 삼삼오오 모여 식당으로 들어왔다.
"응? 뭐야? 너네 왜 둘이 같이 있어?"
"잘 잤어."
"너네도 컵라면 먹을래?"
"야. 이혜. 너 솔직히 말해. 니네 둘이 사귀는 거 맞지?"
"내가 미쳤냐. 이런 애랑..."
혜정이가 친구들 말에 잔뜩 짜증을 부리며 주전자에 물을 받으러 일어난다.
목구멍 부터 밀려오는 서운한 표정으로 돌아보니, 선아가 다가와 토닥토닥 달래주며 말한다.
"마하야. 그만 봐. 고개 부러지겠어."
"와... 아니. 쟨 뭔 말을..."
"그러게. 이혜. 너도 정색해서 말할 건 없잖아."
"니네들 어제부터 얘 너무 우쭈쭈 해주는데, 그러지들 마. 지가 멋진 줄 알어."
"왜? 멋있는 건 사실이지."
"하하하! 얘가?"
"그래. 우리도 나름 우쭈쭈 해줄만 하니까 그러지."
민혜가 혜정이 보란 듯이 장난을 치는데, 아픈 가슴 부여잡으며 말했다.
"아. 마음이 너무 허전하네... 이런 애... 이런 애라..."
"마하야 너 진짜 혜정이랑 둘이 사귀는 거 아니야?"
"아쉽게도 난 정신 온전한 사람을 만나고 싶어서. 이혜정 쟤는 약간 음... 머리에 문제가..."
멀리서 혜정이가 과자 하나를 던져 머리에 맞춘다.
더 열받으라고 태연하게 과자를 들어 우적우적 씹어 먹었다.
"음 맛있다."
"아후... 저걸 그냥..."
둘이 장난 치는 모습에 주변 여자애들이 입을 가리며 웃어준다.
벌들이 왜 꽃밭을 가는지 알겠다.
좋구나. 좋으니까 가지.
"그래? 진짜 아니라는 거지? 마하야 그럼 나랑 사귈래?"
"오~ 김민혜. 실은 내가 예전부터 너를 멀리서"
"안돼!! 야! 안된다고!!"
혜정이가 민혜 옆에 엉덩이를 바짝 붙이면서 말했다.
"김민혜. 너 언니 말 잘 들어"
"뭐? 야. 얼굴 저리 치워. 그리고 나 우리 언니 있어."
"얘는 아니야. 이런 놈한테 빠지면 너만 큰일 나는 거야. 알았어?"
"농담이지 왜 이래? 얘가 무섭게..."
선아도 혜정이를 보면서 묻는다.
"근데, 너. 아무리 둘이 친구라도 해도 그렇지. 남 줄 것도 아니고, 니가 가질 것도 아니면 굳이 뭐하러 이렇게 선을 둘러?"
"내가 쟤 생각해서 그러겠어? 너네 지키려고 그러지. 그 선이 구마하를 위한 선 같애?"
"어이 혜정 씨...? 나 아직 앞에 있는데, 그만 좀 하죠?"
"..."
"뭘 노려 봐. 내가 뭘 어쨌다고!"
꽃밭도 좋지만, 밥도 다 먹었고. 슬슬 정준이 형이랑 약속한 시간도 되어가길래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튼 나중에 보자. 난 시합갑니다."
"이따가 봐."
"선아야 너 나 응원 와주려고?"
"당연하지. 제일 크게 이름 불러줄게."
"역시. 넌 누구와 다르게 사람이 의리가 있구나."
식당을 나와 방으로 돌아가는데, 혜정이가 두다다 거리는 발걸음 소리를 내며 다가온다.
"뭐? 농담이지."
"야. 구마하. 너 진짜 나랑 약속한 거 꼭 지켜. 내 친구들 건드리지마! 그땐 진짜."
"허허허... 이건 무슨... 혜정아. 내가 애들 잡아먹냐?"
"그거 아니야. 어? 쟤네들 지금 완전 너한테 헤롱헤롱 거린다고 그러면 안돼! 알겠어?!"
"아 알았어... 내가 뭘 어쨌다고 사람을 무슨..."
쳇. 분위기 봤을 땐 몇 명은 슬쩍 찔러보면 될 거 같았는데, 이혜정이 눈에 불을 켜고 있어 쉽지 않겠구만.
그래도 취향이란 것도 있고, 나도 여자라고 다 좋아하는 건 아니니까.
오스트리아도 아니고 학교 동창들 모인 자리에서 그러는 건 아닌 것 같다.
그래. 다른 놈들 눈치도 보이고, 지금은 혜정이 말 들어주자.
"음? 어! 마하야! 지금 일어난 거야?"
"아니. 아까."
쿵.
그렇다고 채민서는 아니지.
망할 것. 어제 잠깐 친한 척 해줬다고 또 선 넘는 거 봐라...
아. 진짜 피곤하다.
* * *
"뭘 그렇게 칼 같이 문을 닫냐..."
구마하의 외면에 우울한 모습으로 친구들을 찾아온 채민서.
밤과 다르게 아침엔 여자애들이 주축이 되어 식당에 모여있는데, 몇 사람이 이혜정에게 붙어 앉아, 대체 마하가 뭘 어쨌길래 그러냐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어쩌긴 친구들끼리 갑자기 어색해지까 그러지."
"말이 돼? 우리가 쟤랑 어색할 게 뭐가 있어? 앞으로 얼마나 보고 살 거라고."
"아! 암튼!!"
"야 이혜. 너 솔직하게 말 해. 둘이 사귀는 거 맞지?"
"아니라니까!!"
"얘들아. 무슨 얘기하고 있었어?"
"응. 민서야. 아까 우리 여기 왔을 때 얘랑 마하랑 둘이 뭐하고 있었는지 알어?"
"뭐 했는데? 너 뭐 했어?"
채민서도 컵라면을 챙겨와 친구들 사이에 자리를 잡는다.
"아무 일도 없었어. 얘네들 지금 괜히 오버해서 이러는 거야..."
김민혜가 채민서를 보면서 묻는다.
"그러고 보니까, 너 어제부터 마하한테 엄청 들이대던데. 그거 일부러 그러는 거야?"
"응."
"이혜정. 얘한테는 뭐라고 할 거냐?"
"후우. 뭐라 할 거 없고, 아무 상관 없고, 난 그냥 너네를 생각해서 그러는 거니까..."
"왜 민서한테는 뭐라고 안 해? 얘는 허락해 주는 거야?"
"그래. 구마하는 뭐 이쁜 애들만 다가갈 수 있는 거냐? 은근 짜증나는데?"
"너넨 무슨 말을..."
"후후후. 그런 거야? 혜정아 나 진짜 허락해 주는거야?"
"..."
채민서의 장난스런 모습에 이혜정도 부드러운 웃음을 지어보인다.
마하도 감정이 있지. 모든 여자 다 건드려도 민서는 안심이다.
"아무튼, 우리도 빨리 먹고 나가자. 오늘 우리 썰매타러 가기로 했잖아."
빨리 먹고 나가자는 말은 순차적으로 찾아오는 친구들과 끊이지 않는 수다로 정오까지 이어진다.
해가 중천에 떠올라서야 몇 사람이 연수원을 벗어나 스키장으로 향했다.
"남자애들 안 깨워도 되겠지?"
"남아있는 여자애들도 있는데, 자기들이 알아서 하겠지. 우리끼리 가자."
전날 스키나 보드에 흥미를 느낀 사람들은 스키장으로.
운동신경은 없고 설상의 재미를 느끼고 싶은 사람들은 썰매장으로.
그리고 나머지 몇 사람은 구마하를 응원하기 위해 대회장으로 향했다.
"..."
채민서도 일단 대회장에 와서 지켜보고 있다.
어제 행사 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구마하에 대한 높은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나 스키 대회에 사람 이렇게 많이 모인 거 처음 봐..."
"구마하 보려고 그러는 거잖아."
"몇 번이랬지?"
"아까 보니까 128번인가 그런 거 같던데."
주변에서 들려오는 이야기에 채민서의 속마음이 욱신욱신 저려오는 것 같다.
그렇게 놀려먹던 애가 이렇게 성장을 하다니...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좀 잘해줄 걸...
"민서야."
"응? 어 혜정아."
"여기서 뭐해?"
"그냥... 마하 스키타는 거 보려고."
"가자. 알아서 잘 하겠지."
"..."
"응? 가자."
"......"
이혜정의 손에 이끌리던 채민서가 걸음을 멈춘다.
"혜정아. 나 실은... 마하랑 둘이 친한 거 아니야..."
"알어. 들었어."
"들었다고...? 누구한테? 최익현?"
"아니."
"...그럼 김태윤?"
순차적으로 불려지는 이름에 이혜정은 고개를 가로 젖는다.
채민서의 마음에 설마설마 하는 의혹이 확신이 된다.
"그럼... 구... 구마하가 그랬어?"
"응."
"...넌 알면서 날 여기까지 데리고 온 거야?"
"아니. 나도 어제 들었어."
"..."
채민서가 파르륵 기억의 태잎을 돌려본다.
어제 막 구마하를 만나고 다 같이 점심 먹으러 갔을 때 잠깐 혜정이가 나갔다 들어온 모습에서 그녀가 입을 열었다.
"구... 구마하가 뭐래?"
"그냥 둘이 그렇게 친한 건 아니었다고."
"..."
"가자. 나가서 얘기해. 사람들 있으니까"
계속 거리를 두길래 어색해서 그러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부정하고 싶던 현실이 가장 명확한 진실이 된다.
구마하는 자신을 기억하고, 또 미워하고 있다...
채민서가 덜덜 몸을 떨었다.
이혜정은 사람들을 피해 친구의 손을 붙들고 군중들 밖으로 걸어나왔다.
조용한 곳에 도착해서야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아니... 나도 늘 미안해 하고 있었는데..."
"미안해 하고 있었다고?"
"그... 그래서... 나도 꼭 마하 만나면 사과하고 싶었는데..."
"민서야."
"근데, 그땐 진짜로 내가 애들을 잘못 사겼던 거야. 너 나 않잖아. 내가 초등학교 때 그랬던 애야? 아닌 거 너는 알잖아. 그치?"
"..."
"진짜 그때 잠깐인데... 그랬던 건데..."
이혜정은 그동안 느꼈던 당찬 친구와는 또 다른, 자기변명과 합리화에 빠진 모습을 마주하게 되었다.
"미안하다고 했어?"
"했어. 했는데... 안 받아 줘..."
"..."
"그냥 어렸을 때 장난이었단 말이야. 그거를 이해 못 해주고."
"채민서."
혜정이의 단호한 목소리에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정신차려. 지금 잘못했다고 빌어야 하는 사람은 너야. 마하가 아니라. 쟤가 왜 너를 이해해 줘야 돼?"
"야...?"
"쟤가 피해자라고. 그리고 넌!"
"..."
어려서 가까이 지냈던 친구. 중학교에 가서는 방황도 했지만 큰 일탈을 하진 않았기에 고등학교 올라와 다가와도 거리감을 두지 않았다.
그렇다고, 유쾌하고 즐거운 줄 알던 마하가 엉엉 울며 무너져 내리던 모습을 잊은 건 아니다.
그래. 자기가 아는 척 하면 너도 애들한테 놀림 받을까 무서웠다는 말도 했었지.
그게 이런 뜻이었구나. 그게 민서 였어...
사람을 벼랑 끝으로 몰았던 당사자를 눈앞에 두고도 태연하게 감정을 누르는 마하가 기특하고 대견하고 또 미안하게 느껴지는 이혜정이었다.
"가서 사과해."
"...했다니까?"
"진심으로?"
"진심... 으로..."
"..."
그리고 마하도 마하지만, 민서도 어찌됐든 그녀의 친구였다.
자신의 잘못된 과거를 떨쳐내고 싶어 안달하는 채민서의 모습을 이해해줄 수 있는 건, 구마하가 아닌 바로 자신이었다.
"마하 착해. 되게 좋은 애야."
"..."
"재밌고, 그리고 감정에 솔직하고. 진심 어린 마음을 보여주면 그때는 쟤도 받아줄 거야."
"정말로 그럴까...?"
"이따가 둘이 같이 이야기 해볼래? 내가 자리 만들어 줄게. 그럴까?"
"...싫어하면 어쩌지? 걔 아침에도 나 보면서 그냥 휙 돌아서던데."
그때 군중들의 큰 함성소리가 터져 나온다.
128번 번호를 달고있는 구마하가 슬로프를 가로 지르며 내려오고 있었다.
흰 설원을 거침없이 내달리는 구마하를 보면서 혜정이가 말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피해 있을 순 없잖아."
"..."
"괜찮을 거야. 나를 믿어 봐."
"...정말로?"
* * *
"구마하 선수! 생각보다 스키를 너무 잘 타시는데요? 지금 기분이 어떠십니까?"
"우선 넘어지지 않았다는 것에 정말 큰 만족을 느끼고 있고요. 그리고. 역시 재밌네요! 스킹에 달리 더 할 말은 없는 것 같습니다. 후우~!"
"네. 최선을 다 한 우리 구마하 선수에게 큰 박수 보내주십시오!!"
경기를 마친 구마하에게 사람들이 함성을 질러주며 여기저기 사인 부탁과 사진을 찍어달라는 요청이 들어온다.
한참이 지난 뒤에야 구마하는 한상률 김정준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잘했어. 진짜 넘어지지 않고 그 정도만 탄 것도 대단하다."
"형. 와 진짜 혼자 타니까 바람이... 어우 차원이 다르네요."
"후후후. 다르지. 그래도 멋있었다."
"마하야. 리조트 측에서 오늘 하루 쉴 공간을 마련해 줬는데. 어떡할래? 가서 탕에 몸 좀 녹이다 갈래? 아니면 바로 애들끼리 휴가로 갈 거냐?"
"감독님. 그럼 잠깐 몸 좀 담그고 갈게요. 몸이 얼어서 지금 바로 놀다간 부상 올 거 같아서."
"그래. 움직이자."
구마하는 코치들과 함께 리조트로 발걸음을 옮긴다.
채민서가 먼 발치에서 그들을 지켜보며 조용히 따라 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