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워도 다시한번 (4) >
구마하가 한 단계 성숙되어가는 시각. 한상률과 김정준의 술자리도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애들이랑 같이 안 있으셔도 되겠어요?"
"선생 출신이 이런 말 하면 어떨지 모르지만, 솔직히 학생들한테 큰 정이 없어."
"하하! 그런 분이 마하랑 회사를 차리십니까?"
"구마하는 다르지."
"왜요? 마하는 어떤데요?"
"이놈이 날 믿고 따라주거든. 메달을 떠나서 같이 있다 보면 보람이라는 걸 느낄 때가 많어."
김정준이 한상률의 이야기에 잔을 들었다.
"짠하지."
"네."
청명한 소리가 울리며 술병이 비워간다.
"저도 이번에 같이 하는데, 확실히 가르칠 보람이 있는 녀석이더라고요."
"맞어. 백지장에 그림을 그리듯, 스폰지에 물을 채우듯 몸을 쓰는 일이라면 마하는 쭉쭉 빨아들여."
"보람이라... 정말 큰 힘이 되는 말이죠."
"서로 믿고 믿어주고. 학교에 있는 것 보다 그게 나을 것 같았어."
"마하랑은 사적으로도 가까우세요?"
"동생같기도 하고 잘 되는 걸 지켜보고 싶기도 하고. 어디까지 가나 궁금하기도 하고 그래."
"훌륭한 팬의 자세네요."
"하하하! 건배 하자고!"
"좋습니다."
차오르는 술기운을 조절하기 위해 두 사람이 마른 안주를 하나씩 집어든다.
"형님은 앞으론 어떻게 하실 계획이세요?"
"뭐? 마하?"
"아니요. 회사요."
"잘 되길 바래야지. 그리고 우리는 컴퍼니라기보단 구마하 매니지먼트에 가까워서. 녀석 스캐줄 따라 움직일 수 밖에 없어. 그정도만 해도 전보단 훨씬 나은 사정이고."
"돈 앞에서 중심 잡기 어렵지 않으십니까?"
"마하한테 형님이 계시잖아. 그분이 큰 강물같은 분이라 내가 뭐 그런 마음을 품기도 어려워."
"진짜 TV에서 봤는데. 무슨 연예인 같은 사람이더라고요. 둘이 친형제 맞죠?"
"하하하! 정준 씨. 이놈 앞에서 그 말 절대 하지마. 이 자식 상처 입어"
김정준은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한다.
"뭔가, 형님이나 마하나..."
"응?"
"아니요. 역시 사람은 안정적인 뭐가 있어야 도전도 할 수 있는 것 같다고요."
"정준 씨도 안정적인 생활을 찾으면 되잖아."
"에이~ 형님."
"음."
불쑥 던져진 이야기에 김정준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지어진다.
"안정된 생활이 어디 쉽나요."
"우리랑 같이 가는 건 어때?"
"하하... 아무리 그래도 너무 훅 찌르고 들어오신다..."
"나 안 그래도 언제 이 말을 꺼내야 하나 싶었는데, 먼저 말 꺼내줘서 고마워."
한상률이 김정준의 잔을 채워주며 말한다.
"정준 씨 우리 좀 도와 줄 수 없을까?"
"..."
"이번에 보니까 마하도 정준 씨 잘 따르고, 우리도 실력있는 코치가 필요한데. 내가 정준 씨라면."
"형님. 그만하세요..."
김정준의 얼굴에 미소가 지어지지 않는다.
한상률도 물러서지 않았다.
"이영호 코치님이랑도 이야기 해봤어. 몸 이미 한계라며?"
"..."
"우리랑 같이 하자."
"아 요즘 간이 피로한가. 왜 이렇게 어지럽지..."
"한구 스포츠로 와. 코치도 몸이 있어야 할 수 있어."
김정준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형님. 저 담배 하나만 필게요."
"음."
"후우~ 그리고. 저 아직 현역이에요."
"언젠가는 다음을 생각해야지."
"저 지금 모든 목표 토리노에 맞춰져 있고... 제가 잠깐 멈춰있는 거지."
"우리랑 같이 가."
"..."
"어떻게 생각해?"
"어디를요?"
"어디긴 토리노지."
김정준의 손 끝에 물린 담배가 하염없이 타들어 간다.
"저기요. 상률이 형님."
"정준 씨. 나 지금 술기운에 하는 이야기 아니야."
"아니까, 저도 화가 나는 겁니다."
그가 손을 들어 멀리 새하얀 슬로프를 가리켰다.
"겨우 두달 스키 타놓고 뭐라고요? 어디를 간다고요?"
한상률도 자세를 바꿔 앉았다.
"내가 정준 씨의 도전정신을 폄하하는 건 아니야. 그냥 우리한테 당신이란 사람이 너무 필요해서 이러는 거야."
"후우..."
"같이 하자. 부탁할게."
"정말로 마하가 토리노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음."
단호한 응답에 또 한번 담배 연기를 들이마쉬며 한숨을 뿜었다.
"그래요. 확실히 마하 재능 있죠. 봤으니까 인정할 수 밖에 없고. 근데요..."
한상률은 조용히 기다렸다. 김정준은 고개를 강하게 흔들며 부정한다.
"에이... 말도 안 돼요. 동계 하계라니..."
"그래도 해낸다면?"
"상률이 형님. 지금 스키를 너무 우습게 보시는 거 아닙니까? 마하 정도 실력은요. 우리나라 동계체전도 넘기 어려워요."
"오해하지 말고, 나는 스키를 가볍게 보는 게 아니라."
"지금 이런 제안이 동계 스포츠를 업신 여기는 거 아니면 뭔데요!"
김정준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럼에도 한상률은 물러서지 않는다.
"정준 씨. 나는 그렇게 생각해. 구마하는 선수. 자네와 나는 코치이자 팀 감독."
"그래서요? 셋이서 메달이라도 따오자 이 말씀이세요?"
"물론이지."
"아 진짜..."
한상률의 강한 의지에 김정준의 한숨만 늘어난다.
"허우. 와 진짜 답답하네..."
"정준 씨. 나는 팀 감독으로서, 내 선수에게 최고의 상황을 만들어 줄 책임이 있어. 그리고 거기서 당신이란 든든한 친구를 만났고."
"..."
"난 김정준이란 선수가 우리와 함께 인생의 다음을. 토리노에 가서 메달리스트 지도자가 되는 모습을 보고싶어."
"형님..."
나른하던 술기운이 사라지며 김정준의 목소리도 점점 힘이 실린다.
"지금 진심이시죠? 정말 여기서 끝이 아니라 그 이상을 보겠다고요?"
"물론, 난 구마하의 도전에 한계가 없다고 믿는 사람이니까."
"...동계 올림픽입니다. 차원이 다른 선수들이 모이는 자리에요."
"알어. 우리도 아테네 다녀왔어. 그리고 마하는 거기서 보란듯이 해냈지."
"..."
"이 놈은 해낸다. 육상 1년만에 세계신기록을 낸 놈이야.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놈이라고. 구마하는 괴물이야."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 올림픽에 참가했던 김정준은 나름 스키어들 가운데 위상이 있는 선수였다.
중학교부터 운동을 시작. 스물 일곱이 되는 올 해까지 십이년을 눈밭에서 구른 인생.
부상도 있었고 수술도 세 번이나 받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유의미한 성과를 남겼다.
하지만, 월드클래스로 나가면 그 역시 아직 한 사람의 도전자 취급을 받는다.
그랬는데. 나도 넘을 수 없는 산을 그들이 넘겠다고?
아직 개인 장비도 없는 스키 부츠 두 달 신은 햇병아리도 안 되는 그들이?
"상률이 형님."
"음."
"형님...?"
"정준 씨가 아니라면 난 다른 사람을 섭외할 거야."
세계 신기록을 낸 자부심이 헛소리를 진실로 믿게 만드는 걸까?
정말 자신들은 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건가?
그들의 말이 나의 노력과 기나긴 세월을 폄하하는 것 같다.
참을 수 없는 화가 치밀어 오르는 기분에 술자리고 뭐고 당장 눈밭에서 꺼지라고 하고 싶지만.
"정준 씨."
"네..."
"김정준의 도전과 우리의 도전. 과연 어디가 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일까?"
"당연히 그쪽이죠."
"그럼. 무엇이 더 큰 도전이라고 생각해?"
"..."
"이 세상은 리스크가 클수록 큰 보상이 따라온다. 그리고 모든 책임은 내가 지는거야."
"저도 선수를 그만두는 이야기가 되잖아요."
"합리적으로 생각해. 스프츠에서 코치 후 다시 현역으로 복귀하는 사례가 없다고는 할 수 없잖아?"
"..."
"몸을 생각하자고. 딱 1년이야. 그것도 어려워?"
원래는 오스트리아로 갈 예정이었단다.
마하한테 스키를 알려줬다는 스테판네 가족을 초대할까 했는데, 그를 만나며 생각이 바뀌었단다.
김정준의 눈빛이 현실적인 선택과 도전의 무게추 앞에 떨려온다.
확실히 한상률은 이번 구마하 개인코칭에 말도 안 되는 금액을 주긴 했었다.
"하하하. 형님. 진짜 터무니 없는 소린 거 아시죠?"
"알지. 아니까 해보고 싶은 거야."
"이렇게까지 큰 도전을 하는 이유가 뭡니까?"
"구마하의 발전을 위해. 그리고 나는 꿈을 이루기 위해."
"형님의 꿈은 뭔데요?"
"별 거 아냐."
"얘기해요. 다 말씀하시고 마지막을 아끼십니까?"
"진짜 별 거 아냐. 그냥 우리나라 체육계가 잘 됐으면 하는 마음이야."
한국 체육계의 암울한 현실.
그도 기나긴 터널을 지나 여기까지 도착한 사람이었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다.
"마하 처음 만났을 때. 그때 애한테 그런 말을 해줬어. 운동을 하려면 공부를 같이 하라고."
"후후. 누구나 그러죠. 공부해서 대학가라. 운동은 취미로 해라."
"아니. 나는 선수로 성장하기 위한 공부를 하라고 한 거야."
"왜요? 선수가 훈련을 해야지."
"인성을 잃지 않기 위해서."
그 결과 지금도 구마하는 메달이 목적이 아닌 선수가 됐다.
그저 최선을 다 한 결과 그의 목에 메달이 걸려있을 뿐이다.
"마하 마지막 1500때 경기 봤어?"
"안 본 사람 있습니까."
"녀석도 자기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하는데, 난 그 모습을 보면서 확신이 들었어."
이놈은 뭔가 다르다.
이 녀석은 승부와 결과 그 이상의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놈이다.
구마하라면 병 든 체육계도 바뀔 수 있다.
"순간의 변덕이 스키라는 다음을 만들어 준 것처럼. 스포츠의 신이 있다면 녀석의 도전도 마냥 의미가 없진 않을 거야."
"..."
"이만하면 내 의견은 전달 된 거 같은데, 다음은 정준 씨 대답을 기다릴게."
마침 한상률에게 전화가 걸려온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보이는 정준을 위해서라도 상률은 자리를 비켜준다.
"어. 남수야 왜?"
* * *
"선생님. 마하 어딨는지 아세요?"
다시 스키장.
박남수가 한상률과 통화를 하고, 김태윤은 근심가득한 얼굴의 혜정이를 달래주고 있다.
"잠깐 어디 갔겠지. 민서가 무슨 어린 애도 아니고."
"두 시간이 넘었어... 아 얘는 왜 전화를 안 받고..."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오겠다고 자리를 비켜선 사이 채민서가 사라졌다.
혜정이는 모든 게 자기 책임인 것 같아 마음이 불안했다.
"네. 알겠습니다 선생님. 이따가 뵐 게요. 야 태윤아."
"어. 뭐라셔?"
남수가 한상률과 나눈 이야기를 친구들에게 전해준다.
"마하는 지금 방에서 쉬고 있다고 그러시는데. 리조트에서 뭐 방 하나 내줬다고."
"그래? 어디래? 몇호? 민서도 같이 있다고 그러셔?"
"야. 이혜정. 너 지금 너무 혼자 민감하게 그런다니까? 마하가 왜 걔랑 같이 있어."
"아니. 그치만... 아 진짜. 구마하 짜증나!"
그 순간, 김태윤의 시선에 저 멀리 혼자 걸어가는 채민서가 보인다.
"어? 야. 쟤 민서 아니냐?"
"어 맞네. 혜정아?"
"어디? 야! 채민서. 저게 진짜!"
이혜정이 다급한 표정으로 다가가 소리쳤다.
"야!!"
"어 깜짝이야...! 왜?"
"너 어디 갔었어!! 전화도 안 받고!!"
"그냥. 여기저기 좀 돌아다녔는데 왜..?."
김태윤과 박남수도 한숨을 쉬며 다가와 말했다.
"야. 너 왜 혼자 돌아다녀?"
"뭐. 그냥 안에 뭐 구경할 것도 있고. 오락실도 있길래."
"아무튼 다행이네."
"그러게. 야 혜정이가 너 없어졌다고 한참 걱정했잖아."
이혜정도 채민서를 붙잡으며 물었다.
"너 혹시 구마하랑 같이 있었어?"
"아니이~! 그냥 혼자 있었다니까 왜 자꾸 마하를..."
"그래. 혜정아 마하 쉬고 있다잖아."
"아무튼, 왔으니 다행이네. 이따가 보자. 남수야. 이 새끼 어딨다고?"
김태윤과 박남수가 구마하를 찾아 가는데, 채민서가 슬쩍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마하 여기 있데?"
"..."
"으음. 그렇구나."
뭐지? 얘 지금 뭔가 이상한데?
구마하를 언급하며 아까와는 분위기가 달라진 채민서.
그녀를 지켜보는 이혜정의 직감이 꿈틀 거린다.
"너 세수했어?"
"어? 왜?"
"...화장이 지워진 거 같은데?"
"아. 립스틱이 다 지워졌나..."
"..."
무엇보다 민서 얘 아까 머리 올리고 있지 않았나...?
"머리도 풀었네...?"
"응? 어... 춥길래..."
"..."
"아 나올때 목도리를 갖고 나올 걸..."
자꾸 딴청을 피우며 당황하는 모습에 혜정이의 의심은 확신이 된다.
"애... 애들 다 어딨어? 아직도 썰매 타?"
이혜정이 돌아서는 채민서의 뒷목으로 손을 찔러 넣어 머리카락을 들췄다.
"야!?"
그럼 그렇지. 오락실은 뭔 놈의 오락실...
어디 흡혈귀라도 만나고 온 듯 민서의 가녀린 목선에 붉은 키스마크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채민서도 당황하며 황급히 머리를 감추지만, 이혜정은 이미 활활 눈에 불을 켜고 있었다.
"구마하 어딨어..."
"혜 혜정아 그게 아니라..."
"어딨냐고? 몇 호야?"
"아니야! 혜정아 잠깐만 잠깐!!"
씩씩 거리고 돌아서는 혜정이를 붙잡으며 채민서가 사정사정 한다.
"아니라니까. 마하한테 뭐라고 하지마 응?!"
"야...?"
아는 사람이 더 두려움을 느끼는 법이다.
혜정이는 누구보다 구마하의 매력(?)을 걱정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역시나 민서가 이미 마하한테 푹 빠져 있었다.
"정말이야. 진짜라니까! 내가 갔어. 오히려 마하는 나한테 잘 해줬고"
"야! 걘 그냥 섹스에 미친 놈일 뿐이야!!"
"아니야. 그렇게 말하지마. 마하가 얼마나 다정하고 또 멋있고..."
"으아아! 제발 정신 좀 차려! 민서야!!"
채민서는 부끄러운 표정으로 입술을 꾹 다물며 혜정이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미안. 너한테 먼저 허락을 받았어야 됐는데..."
"아니야! 나랑 그 자식이랑 아무 사이 아니라니까!! 자꾸 나랑 걔랑 엮지 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