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륜기로 가버렷-94화 (94/401)

< 미워도 다시한번 (5) >

"응 엄마. 다 왔어... 아니 그냥 피곤해서. 뭐어? 놀러갔다 온 사람은 피곤하면 안돼?"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졸업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이혜정. 떠날 때와 다르게 마음에 뿔딱지가 올라 더 심술스럽게 말이 흘러 나온다.

"얘. 근데 정말로 마하가 너희들 돈까지 다 쓴 거야?"

"엄마는 딸 컨디션보다 그게 궁금해...?"

"어쩜... 한 두 푼 아니었을 건데... 다음에 맛있는 거라도 해줘야겠다."

"걔 부를 거면 나한테 먼저 얘기해. 나가 있을 거니까."

"가서 둘이 싸웠어?"

"아니이!!"

모녀의 통화는 언제나 그렇듯 애견 걱정으로 끝난다.

"엄마는 내가 무슨 해피 밥주는 사람인줄 아나..."

투덜투덜 궁시렁궁시렁... 그러는 가운데서도 어느덧 아파트에 도착.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

11이란 숫자도 꼴보기 싫은 기분이라 쿵! 주먹으로 층수를 누르며 14층으로 직행.

승강기가 오르며 11층을 지날 때 또 한번 미간을 찡그리며 집에 도착했다.

"해피야 언니 왔어."

사흘 간 못 본 혜정이가 돌아오자 앙증맞은 해피가 꼬리를 흔들며 반겨준다.

여행 가방은 현관에 내팽개치고 강아지를 끌어안으며 소파에 드러누웠다.

"하아. 피곤하다..."

깊은 한숨을 뱉으며 여독을 푸는데, 해피가 할짝거리며 그녀의 볼을 핥아준다.

애완견의 사랑스런 행동에 이혜정의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번졌다.

"우웅 우리 해피. 언니 보고 싶었어요? 이리와 뽀뽀. 뽀."

쭈쭈쭈 강아지와 장난스런 키스를 하는데, 이번에도 불현 듯 구마하가 머릿속을 스쳐간다.

"..."

"헥헥?"

나쁜 놈... 그렇게 경고를 했는데도 내 친구를 건드려? 그리고 채민서 너도 뭐? 용서와 화해의 뭐라고? 이것들이 진짜...

* * *

"야아 왜 이래 얘가 진짜?"

"왜 이러긴... 이 자식을 그냥!"

"아니라니까. 아 제발 흥분 좀 가라앉히고... 힘은 또 왜 이렇게 좋아..."

채민서는 매달리다시피 붙들려 말리지만, 이미 몇 시간 전 온몸에 힘을 다 뺀(?) 상태라 혜정이를 당해낼 수 없다.

한참을 질질 끌려가다 민서도 안 되겠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야! 너 왜 이래 진짜! 둘이 아무 사이도 아니라며."

"야. 채민서."

"맞잖아. 아니야? 너가 화 낼 이유 있어? 대체 왜 이러는데?"

"...내가 지금 너 때문에 이러는 거 같애?"

"그럼...? 질투라도 하는 거야...?"

"미쳤어!!"

이혜정도 이성적으론 알고 있다. 구마하가 누구와 무슨 짓을 하든 자신이 상관할 순 없다.

알면서도 화가 난다. 그냥 마하가 한 행동이 뭐든, 민서와 함께 있던 시간들이 몸서리치게 싫었다.

아니 왜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 주변에서...

씩씩거리는 혜정이를 달래며 민서가 말했다.

"들어봐 응? 마하는 날 용서해준거야."

"용서?"

"그래. 아까 너도 그랬잖아. 착하고 좋은 애니까 잘 얘기 하면 분명 들어줄 거라고."

"그럼 이야기나 하지 굳이 왜..."

"으음. 그. 그건... 그러니까..."

채민서는 수줍게 목덜미를 문지르며 딴청을 피우고. 그녀를 지켜보는 혜정의 마음은 더더욱 복잡해진다.

"이것 봐. 걘 그냥 여자에 미친 거라니까?"

"아니야. 그것도 내가 하자고 한 거야 내가 먼저 마하한테..."

"뭐라고? 니가 뭐라고 했는데?"

"그... 그러니까 그냥... 그... 그것도..."

이번에도 민서는 말끝을 흐리며 얼굴을 발그레 상기시켰다.

이혜정도 두 사람의 모습이 상상되어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다.

"아... 아무튼! 마하한테 뭐라고 하지마. 응? 너 이러면 다 끝난 일 다시 들추는 거고."

"열녀가 뭔가 했는데... 이런 걸 열녀라 하는구나..."

"응? 가자 혜정아. 우리 가서 이야기 해. 응?"

"무슨 얘기? 여기서 너랑 더 할 얘기가 뭐가 있다고?"

"글쎄? 마하 이야기♡"

"어~어! 어어~ 어~~ 어! 소름 돋아! 저리 가! 만지지 마!"

"정말 니 말대로 다르긴 다르더라..."

"야! 그런 말도 하지 말라고!"

* * *

이혜정은 허탈한 마음을 긴 숨으로 뿜어낸다.

"내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긴 뭐가 아닌데... 결국 둘이 한 건 맞잖아..."

마하는 정말 착하고 좋은 애였어라니... 그 말을 왜 지가 나한테 들려주냐고...

"..."

지난 1년간 민혜나 선아. 그 외 다른 친구들에게 "너는 구마하 어떻게 생각해?" 라는 질문을 수도 없이 받아왔었다.

스키장에서도, "저것 봐, 쟤가 너 좋아하는 거 맞다니까! 너도 너무 거리두지마." 라는 조언도 지긋지긋하게 들어야 했다.

이럴까봐 구마하와 연애를 할 수가 없다.

정말 모르니까 하는 말이지... 이 녀석은 여자를 너무 좋아해...

나 아닌 다른 여자를 품는 건 어떤 변명을 붙여든 용납될 수 없다.

특히, 앞으로도 구마하는 훈련이나 대회같은 일들로 바쁘게 뛰어다닐 게 뻔한데, 보이지 않는 곳에서 믿음을 주지 않는 상대를 어떻게 감당하란 말인가.

지금도 마하는 친구들을 먼저 보내고 여전히 스키장에 남아 훈련중이었다.

또 모르지. 거기서도 처음 보는 여자를 만나 둘이 하고 있을지...

"그치? 해피야? 내 말이 맞지?"

"헥헥."

"해피야. 혹시 다음에 그때 그 이상한 오빠 또 우리집에 오면..."

그때는 그냥 아래를 콱 물어버려...

라고 하고 싶지만.

"후우. 나쁜 새끼..."

부담없이 만날 수 있는 친구, 착하고 또 내 맘대로 컨트롤이 되는 상대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우화를 마친 나비가 훌훌 떠나가듯, 구마하도 하루 아침에 너무 확 변해버리고 말았다.

마하를 생각하는 혜정의 마음도 그때와는 많이 달라졌다.

좋다. 서로 좋은 감정을 분명하게 느끼고 궁합도 잘 맞고 유머 코드도 좋다.

그러나 절대 진지한 관계로 나아가선 안된다.

사귄다면 상처 입는 건 자신이니까.

연인이 되지 않는다면, 둘은 언젠가 되어도 다시 만날 수 있는 사이로 남을 수 있다.

누군가는 궤변이라 하겠지만, 두 사람은 서로를 그런 관계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차라리 여자친구를 사귀든가... 왜 하필 민서랑..."

내 사람이면서 온전한 주장을 펼칠 수 없는 관계.

이혜정도 뭐라 할 수 없는 답답함에 속이 꽉꽉 막혀 오는 기분이다.

무엇보다 눈을 감으면 자꾸 두 사람의 모습이 떠오르고 있었다.

마하와 민서. 그리고 민서와 마하.

민서를 불편하게 대하던 마하가... 마하를 두렵게 느끼던 민서가... 서로를 사랑했다.

"..."

자세하게 들은 건 아니어도, 민서가 마하를 두둔하는 이야기 속에 어떤 상황이 벌어졌는지 대충 알 것 같다.

말도 없이 자꾸 들이대는 민서를 향해 불같이 화를 낸 구마하.

민서는 자존심을 벗어 던지고 바닥에 엎드려 울며 잘못했다고 빌었다.

그리고 두 사람이 서로를 안았다.

대체 어떻게? 싫어하는 애를 대체 어떻게...?

"넌 그냥 여자라면 다 좋은 거야?"

만약, 강압적인 상황이었다면 민서가 그런 반응을 보일 리 없다.

중학교 때 질 나쁜 아이들과 어울리던 친구는 섹스란 행위에 불신을 갖고 있었다.

아퍼. 하나도 좋은 걸 모르겠어. 솔직히 이런 걸 왜 자꾸 하자고 하는지 진짜 모르겠어...

혜정아 나 이제 얘네들이랑 그만 어울리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될까...?

"..."

대체 구마하 넌 민서한테 뭘 했길래...

민서가 그런 여성스런 애가 아닌데...

걔가 그렇게 남자애를 두둔하고 편 들고 할 애가 절대 아닌데...

이혜정은 구마하를 안다.

그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고 가장 많은 경험을 나눴다.

그녀의 몸엔 구마하의 기억이 존재한다.

저기 유럽의 스타 플레이어나 처음보는 동갑내기 여자친구도 아닌 바로 옆에 있는 친구.

이혜정의 머릿속에 구마하와 채민서가 서로를 안고 있다.

바람은 아니다. 그건 아니지. 마하를 비난 할 수 없어...

그냥 두 사람이 서로를...

"...해피야. 놀고 있을래? 언니 피곤해서 잠깐 잘게."

혜정은 방으로 들어와 문을 잠갔다. 아무도 없는 상황이지만 마음이 그러고 싶었다.

외출 갔다 온 옷을 허물 벗듯 벗어두고, 옷걸이에서 편한 옷을 갈아입었다.

추위를 잘 타는 모녀를 위해 집은 늘 한 겨울에도 훈훈한 기온을 유지하고 있다.

브래지어를 풀고 속옷만 걸친 채, 짧은 바지와 큰 박스티를 입고 침대에 엎드렸다.

풀썩.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은 그녀를 푹신함과 서늘함이 맞아준다.

"후우."

뒤척뒤척 이불을 덮어쓰는데 그날이 떠올랐다.

우연찮게 마하를 만나 다시금 관계의 시작을 알렸던 날.

생각지도 못한 오르가즘에 두려움이 밀려왔던 그날.

온몸에 전기가 통하며 숨이 멎을 것 같은 날. 마하의 품에 안겨 몸을 덜덜 떨던 그 순간이...

민서랑도 그랬을까? 민서도 그런 기분을 느낀 걸까?

"으음."

배신감을 느낄 이유가 없다. 우리는 그저 섹스를 즐기는 파트너일 뿐이니까. 구마하가 누구와 뭔 짓을 하든 나랑은 관계 없어.

하지만, 이 기분은 뭐지? 왜 걔네들 때문에 내가 수치심을 느껴야 하는 거지?

왜 내가 이렇게 가슴이 달아오르는 거지...?

마하를 언급하며 얼굴을 붉히던 민서.

내가 느낀 걸 쟤도 알 거라 생각하니 가슴 깊은 곳 간질간질 불편한 기운이 온 몸으로 퍼지는 것 같다.

이혜정은 간지러움을 달래주듯 잔뜩 구부린 가랑이 사이로 손을 밀어넣었다.

"음. 으음..."

나한테 한 거 같이 민서한테도 했어? 나를 만지는 거 같이 민서를 만졌어...?

그녀의 손가락이 기억을 더듬어 구마하가 앞에 있듯 굳게 닫힌 가랑이 사이를 부드럽게 어루만진다.

"으음..."

이혜정은 부정하며 또 싫다고 말하며 자꾸 두 사람을 떠올리고 있었다.

구마하가 민서의 목에 키스마크를 남기며, 서로를 끌어안은 혀와 혀가 난잡하게 뒤섞인다.

민서가 마하의 앞에 다소곳이 앉아 그를 애무해주는 장면이나, 반대로 구마하가 민서의 가슴을 만지며 살짝이 찡그리는 친구의 표정까지 모든 것이 눈앞에 있는 듯 생생하게 그려진다.

"흠. 음!"

모든 것은 자신의 경험에 맞춰진 상황이었다.

단지, 이번엔 대상이 내가 아닌 친구의 얼굴이라는 것 뿐.

어느 순간, 혜정의 머릿 속엔 내 방 침대에 누워 서로를 느끼는 사람이 나와 구마하가 아닌 민서와 마하가 되어 있었다.

"흐음... 으응!"

바지와 속옷 안에서의 작은 움직임이 불편했던 혜정은 바지도 벗고 속옷도 벗어버렸다.

애벌레같이 웅크리던 몸도 과감하게 열렸다.

침대 벽에 쿠션을 놓고 기대 앉은 혜정은 눈을 감고 스스로를 만진다.

그럼에도 입은 그 어떤 때보다 더 소리를 참기위해 굳게 다물고 있었다.

차마 소리를 참기 어려운 순간엔, 옷을 걷어 올려 입술과 입술로 꾹 강하게 눌렀다.

"읍. 으읍... 흡! 하아아. 하아~"

뭘 한 거야? 대체 애한테 뭔 짓을 했길래 그렇게 한 순간에 표정이 변하게 만든거야...?

질문에 대한 답은 두 눈 저편 어둠 속에서 연상된다.

구마하가 채민서의 위에 누워 그녀의 안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이혜정도 눈을 떠 방을 둘러 보았다.

책상과 화장대. 손거울과 여러 학용품들이 눈에 보인다.

"하아... 하아..."

그녀도 마음 한 곳에서 지금 내가 뭐하고 있는거지? 라는 걸 의식하나, 애써 외면하며 책상을 지나쳐 화장대로 손을 뻗었다.

스킨이 있지만 유리병의 차가움이 싫었다. 화장품이 보이지만 너무 얇고 또 위생적이지 못한 느낌이 거부감을 일으킨다.

적당히 두껍고 또 단단한, 그러면서도 너무 차갑게 느껴지지 않는 것.

"으음..."

그렇게 손에 쥔 것이 나무 빗.

길이도 적당하고, 끝이 둥글고 뭉특하여 아프지 않다.

혜정은 다시 침대에 누워 천천히 빗을 몸 안으로 밀어 넣었다.

"아아~♡"

마하와 함께 있는 것 같은 느낌으로.

민서와 둘이 나눈 그 이상의 감각으로.

그녀가 천천히 자신의 몸을 느낀다.

부드럽게 움직이는 나무 빗 손잡이에 발끝이 모여지고 무릎이 가볍게 들리고 있었다.

열흘 전 미처 못 다한 걸 이어가듯 그렇게 이혜정은 처음으로 자위에 빠져들었다.

"아아~ 아 마하야... 으음 응!"

또 한번 혼자의 힘으로 오르가즘에 도달한 이혜정은 모든 것이 끝난 뒤 나른해진 몸으로 침대에 엎드려 쿵쿵 발을 찍었다.

"아 진짜... 구마하 짜증나!!!"

너무 화가 나지만, 그것이 바람이 아니기에 뭐라고 할 수 없다.

나 아닌 다른 여자를 기분 좋게 만들었다는 사실이 싫지만, 그렇기에 더 발칙한 상상에 몸이 뜨거워진다.

세상에 밝힐 수 없는 스무살 아가씨의 마음은 그렇게 열병으로 물들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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