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워도 다시한번 (6) >
"안전바 내려주시고요. 내리실 때까지 움직이시면 안됩니다."
졸업여행을 마치고 감독님과 친구들 모두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지만, 나는 여전히 홍천에 남아 리프트를 타고 산을 올랐다.
어둠 속에 펼쳐진 밝은 세상.
반짝이는 조명과 리조트의 야경이 더해진 하얀 슬로프를 보고 있으면, 세상 그 어떤 화려함을 비벼도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을 이겨내지 못할 것 같다.
"조심해서 내리세요. 안전 스킹 해주세요."
양손으로 폴을 찍으며 서서히 속도를 높였다.
밑에서 볼 땐 얼마 안 되는 각도라도 정상에서 보면 벼랑 끝에 서 있는 기분이다.
이제는 상급자 코스를 탄다.
몸 속에 내공도 충만하여 오늘이야말로 운룡대팔식을 완성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후우우웅--!!
마치 거대한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오는 듯, 스키의 속도감은 인간의 상식을 넘어선다.
칼날 바람이 외투를 뚫고, 고글과 마스크로 얼굴을 가려도 냉기가 피부를 관통한다.
아무리 타도 적응 안 되는 미친 속도감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 미친 속도감이 있기에 우리는 또 다시 리프트를 타고 오른다.
촤아악~~!
눈 밭에 커다란 반원을 그려내며 감속.
두려움에 속도를 줄였지만, 역으로 스피드가 아쉬워 재차 폴을 찍으며 다시금 비탈길에 몸을 던졌다.
오늘도 스키를 타다 보니 몸 속에 주전자를 담은 듯 입에서 흰 김이 폴폴 새어 나온다.
"하아. 하아."
재밌었다. 하지만, 운룡대팔식을 익히기엔 역시 무언가가 부족하다.
안전한 환경에선 그만한 각오가 안 서는 걸까? 역시 알프스 같은 위험천만한 환경이 아니면 극강의 무공을 익히기란 어려운 걸까...
"마하야."
"어? 네 형."
"뭘 그렇게 아련하게 쳐다보냐? 산 위에 뭐 두고 왔어?"
"아. 그냥. 마칠 시간이 되다보니까요..."
"누가 너를 육상 선수라고 믿겠냐."
"하하하..."
멍하니 산을 보고 있었는데 정준이 형이 찾아왔다.
"마하야."
"네. 형."
"흠."
"저한테 하실 말씀 있으세요?"
"상률이 형님이 그러는데, 너 정말 토리노 갈 거냐?"
"하하하... 저도 감독님한테 대충 이야기는 들었어요."
"형님이 뭐라고 하시디?"
"그냥. 두 분이 섭외 문제로 약간의 논쟁이 오가셨다고..."
"약간의 논쟁이라. 후후."
"설마 싸우셨어요?"
"싸운 건 아니고. 그래. 약간의 논쟁이라고 하는 게 맞긴 하지."
감독님이 떠나기 전, 만약 정준 씨가 물어보면 솔직하게 내 의견을 답하라고 하셨다.
동계 올림픽으로의 도전. 나의 마음은.
"어때? 너한테 형이 필요한 거 같애?"
"저야. 함께 해주시면 너무 감사하죠. 아직 배울 것도 많고."
"그래서. 반드시 내년 토리노를 가고야 말겠다?"
"모르겠어요. 솔직히 올림픽이 가고 싶다고 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일단 시작한 거, 열심히 하고 싶을 뿐입니다."
"실패를 두려워 하지 않는 도전이라. 훌륭해 과연 세계챔피언이다."
늘 그렇듯, 포기란 없다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할 뿐.
올림픽도 메달도 나중의 이야기라고 전해드렸다.
"육상은 뛸 때 무슨 생각하고 뛰냐?"
"육상요? 글쎄요. 이 악물고 뛰는 게 전부긴 한데..."
"그래도 이거다 하는 뭐 하나는 있을 거 아냐."
"음. 단거리는 생각할 시간 자체가 없는 종목이고. 그나마 중거리로 따지면. 역시 포기하지 말자? 네. 그거 같아요. 포기하지 않는다. 훈련도 승부도. 포기하지 않고 일단 끝까지 달려야 경기가 끝나니까요."
"포기하지 않는다라. 멋지네."
"결승점을 지나야 끝나는 경기잖아요."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지."
"네. 그럼요."
가만히 형님을 지켜보고 있었다.
"스키. 그냥 취미로 하라면 뭐라고 할래?"
"정준이 형. 저 그냥"
"알어. 너나 상률이 형님의 도전 정신을 꺾고 싶은 건 아니야."
"..."
"이건 너의 문제가 아니야. 넌 훌륭해. 어떻게 보면 스키어의 한 사람으로 우리 종목을 그렇게 봐주는 게 고맙지."
정준이 형님이 주머니에서 담배를 하나 꺼내 무셨다.
"단지, 너와 형님의 도전을 바라보는 내 마음이 쉽게 납득이 되질 않는다."
조용히 장비를 정리하며 정준이 형을 바라보며 섰다.
형도 스키를 들어주시며 휴계공간으로 저벅저벅 걸어가신다.
"마하야. 우리나라 동계 스포츠가 절대 약한 게 아니야."
"그럼요. 한국 대단하죠. 이만한 인프라와 환경에서 이만한 성적이 나오는데. 심지어 겨울도 몇 달 안되는 짧은 시간에."
"솔직히 말하면, 상률이 형이 코치 제안 했을 때 거두절미하고 고맙다고 하고 싶었다."
"..."
"만약 너가 아니라면 정말 감사하게 그 자리를 받아들였을 거야."
"형 저 싫어하세요?"
"좋아. 넌 내가 본 최고의 재능을 가진 스키어야."
"근데 왜...?"
"정말 만약의 이야긴데. 구마하가 스키에 도전해 메달이라도 딴다면 그땐 어떻게 될까 생각해 봤어?"
"모르겠어요. 저 아테네 갈 때도 그런 걸 크게 고민해보지 않아서."
"난리가 나겠지. 육상이 그랬듯이, 스키도 엄청난 관심과 기대가 몰리게 될 거야."
"그럼 좋은 거 아닌가요?"
"그 좋은 걸 왜 우리들은 못 하고 있을까..."
"..."
"평생을 눈밭에서 구른 우리가 아닌, 밖에서 온 천재적인 선수가 대한민국 스키의 위상을 높였다... 그때 나는 너를 보면서 코치로서 보람을 느껴야 할까? 선수로서 박탈감을 느껴야 될까?"
"정준이 형..."
"모르겠다. 내가 지금 망설이는 이유가 내가 가지 못 한 길을 남이 갈까 봐 인지. 아니면 너까지 그냥 나 같은 코치를 만나 그 정도에서 멈추고 말 것인지... 그냥 아무것도 모르겠어."
진솔한 마음에 조금 숙연한 기분이 들었다.
"아테네에 갈 때. 육상은 연맹부터 저까지 모두가 한 마음이었어요."
"그래."
"다른 종목으로의 도전이 이런 갈등도 생길 수 있다는 걸 생각하진 못 했어요. 죄송합니다..."
"아니야. 니가 죄송할 건 없어."
사람들이 빠진 슬로프에 인공 눈이 뿌려지고 있다.
정준이 형과 둘이 한쪽에 앉아 하염없이 하얀 세상이 반짝거리는 걸 보았다.
"마하야. 형은 엄밀히 말하면 실패한 선수야."
"그런 게 어딨어요? 운동이 꼭 뭐 결과를 내야지만 성공인가요!?"
"그건 인마. 너니까 할 수 있는 말이지..."
"아니요. 전 형은 충분히 성공하신 선수라고 생각해요."
"왜?"
"대한민국 스키라는 불모지에서 올림픽을 나가셨잖아요."
"..."
"우리 감독님도 그렇고, 제가 운이 좋은 거죠. 선구자 없이 저 같은 선수가 어떻게 나오겠습니까. 저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형은 절대 실패한 선수가 아니세요."
정준이 형이 씩 웃으며 말씀하신다.
"중학교 2학년 때. 그때 처음 스키 캠프를 왔었어. 그게 나와 이 지긋지긋한 놈과의 첫 만남이지."
"낮에도 배우는 애들 많이 보이더라고요."
"그래. 그때의 나는 어쩌면 지금의 너보다 더 눈의 매력에 빠져있었는지 몰라."
진짜 열심히 했었다고 하신다.
장난도 스키와 관련된 장난을 쳤고, 공부를 하는 이유도 겨울에 스키장을 가기 위해서였다.
언젠가 반드시 올림픽에 나가 김정준이란 이름을 메달에 새겨넣겠다는 각오를 리프트에 오를때마다 하셨단다.
"형은 대학 오면서 부모님이랑도 인연 끊었어."
"...스키 때문에요?"
"음. 그까짓 운동 재미로나 하지, 뭐 인생을 거느냐고. 아버지가 그러시는데 굽히고 싶지 않더라고."
"..."
"그래도 참. 쉽지 않더라. 그래서도 더 포기하지 못했는지도 몰라."
꿈과 의지를 배신하고 싶지 않았다.
사람들에게 외면 받는 스키의 매력을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
봄 여름 가을에 일을 해 번 돈으로 겨울을 보내고, 해외를 자주 나가다보니 안정적인 생활을 꾸리기도 어려웠다.
그나마 실업팀에 들어와 조금 나아지는 것 같았지만, 동년배 친구들이 취업을 하거나 자리를 잡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힘들었던 순간이 많았다.
"그러던 때 부상이 왔지."
"..."
"그래도 몸을 이겨내고 부상을 이겨가며 빚을 지면서까지 해외로 전지훈련을 떠나고, 그렇게 형은 올림픽의 문을 두드려 왔었어."
"멋있으세요. 정말 선수의 한 사람으로써 존경합니다."
"후후후. 마지막 올림픽 때 어머니한테 연락이 왔었다."
"뭐라고 하세요...?"
"잠깐 내 모습이 TV에서 나왔는데, 잘했다고 위로해주시는데. 기쁘기보단 뭔가 서글픈 마음이 강하더라."
"계속 응원하고 계셨겠죠..."
"후후후. 그랬겠지. 어머니니까."
그랬던 2002 솔트레이크 스키 대회전 성과는 종합순위 27위.
메달과는 너무나도 먼 곳에서 멈추고 말으셨단다.
정준이 형은 한참을 산을 올려다 보셨다.
"마하야. 아찔한 위험 그 앞까지 자신을 몰아붙여야 속도를 지배할 수 있어."
"선을 넘으면요?"
"그때는 부상이다. 명심해라."
"어우야... 네. 알겠습니다."
"우리는 다치면 재활 이런 문제가 아니야. 일단 뼈부터 붙이고 이야기를 다시 꺼내."
"네."
"그래도 할 거냐?"
"..."
"너의 육상 커리어까지 다 망칠 수 있어. 그래도 할 마음이야?"
고개를 끄덕였다.
"형 전 시작한 이상, 이제와서 포기하는 마음 같은 건 없어요."
"자식. 이리와."
정준이 형이 가까이 오라며 손짓을 하신다.
슬금슬금 다가가니 도망치지 못하게 어깨를 굳세게 잡으며 말씀하셨다.
"너 먼저 육상 때는 언론이 몰랐었다며?"
"꼭꼭 숨어 있었죠. 감독님도 숨겨 주시고. 연맹이 많이 신경 써 주셨어요."
"이제는 언론이 알 거야. 육상 영웅 구마하가 스키에 도전한다. 세상 모든 관심이 몰리겠지. 해외에서도 취재를 올 것이고. 스키 연맹은 더 신나서 보도자료 배포 할 지도 몰라."
"그럴 수도 있겠죠."
"사람들은 성적과 기대를 걸 거다. 과연 구마하의 다음 도전은 어떤 진기록을 낼 것인가? 그리고 육상에서는 어떤 커리어를 이어 갈 것인가? 전과 다른 시선으로 너를 지켜 볼 거다."
"응원 받으면 좋죠."
"잘 들어. 응원도 응원이지만, 이 세상은 남 잘 되는 모습을 보기 어려운 사람들이 있어."
"..."
"단 한번이라도 실패한다면 그때 쏟아질 비난의 화살을 어떻게 감수할 생각이냐?"
대답 여하에 따라 정준이 형이 우리 한구스포츠와 함께 하느냐 마느냐가 걸려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도 깊게 고민하거나 계산하지 않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소리를 들려드렸다.
"세상의 비난요..."
"그래. 보란 듯이 깔 걸? 너의 사기나 컨디션 따위는 고려하지 않고 비난을 날릴 거야."
"한 가지나 잘 할 것이지, 괜히 설치고 다니다 저 꼴 날 줄 알았다. 그런 말도 있겠네요."
"그것도 최대한 순화했을 때 이야기지. 실상은 더 지독할거야."
"형. 어떤 애가 저를 진짜 심하게 괴롭힌 적이 있었어요."
"음."
"전 걔한테 아무짓도 하지 않았어요. 그냥 제가 할 수 있는 것만 열심히 하고 절 발전시켰어요."
"그래서?"
"남들이 뭐라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믿는 바를 가겠습니다. 누굴 괴롭히거나 방해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후후후. 자식."
"지금은 스키에 도전해보고 싶습니다. 가볍게 시작한 건 부정할 수 없지만, 이 길에서 제가 배우고 싶고, 얻어가고 싶은 것들도 있어요."
"흠."
"가르쳐 주세요. 감독님도 저도 형이 같이 해주시면 너무 감사할 거 같습니다."
"후우~ 당사자까지 그런다라..."
정준이 형이 자리에서 일어나 긴 숨을 내쉬며 손가락으로 내가 달려온 코스를 가리켰다.
"아까 보니까 너 저기서 턴 할 때."
"네."
"무릎 먼저 꺾는 거 같던데, 선수 생명 끝내고 싶으면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타. 알겠지?"
"아. 죄송합니다."
"시선 먼저 가라고 했지? 시선과 허리 발 끝은 늘 일자로 움직이라고 했어 안 했어?"
"네. 하셨어요."
"근데 왜 안 지켜? 그리고 폴. 이건 브레이크가 아니라고 했잖아. 이걸로 무슨 속도를 줄인다고 눈길에 찌르고 있어. 튀어 나가고 싶어?"
"아니요..."
"근데 왜 시키는 대로 안 해?"
이쯤이면 승낙 하신 걸로 이해해도 되는 거 아닐까?
열정적으로 단점을 지적해주시는 모습에 웃음이 지어지자, 정준이 형도 미소를 보이시며 말씀하셨다.
"웃어? 웃음이 나오지 이 새끼."
"아... 죄송합니다."
"구마하. 고개 들어."
"네!"
"그동안은 널 선수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널 선수로 보겠다."
"네! 고맙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한 달 뒤 동계체전이다. 올림픽이고 그랑프리고 그 다음 이야기야. 알겠지?"
"네!!"
정준이 형이 고개를 돌려 하얀 설상을 바라보신다.
"그래. 메달이고 뭐고 나중 문제다. 산이 있고 눈이 있다. 일단 미끄러지고 봐야지."
"저 형. 아니 코치님."
"형이라고 해. 뭔데?"
"스키의 마음가짐은 뭔가요?"
정준이 형이 다시 한번 피식 웃음을 지으시며 말씀하신다.
"육상은 포기하지 않는 정신이라고 했지?"
"네."
"스키는 도전이다."
불가능에 대한 도전.
두려움에 대한 도전.
세계를 향한 도전.
스키란 도전이다.
"다치지만 마라. 그럼 도전은 얼마든지 계속할 수 있다."
"네!"
"좋아. 그럼 오늘은 스키장도 문 닫았고. 사제지간이 된 기념으로 술이나 한 잔 하러 갈까?"
"하하하! 좋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