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륜기로 가버렷-96화 (96/401)

< 미워도 다시한번 (7) >

[다음 소식입니다. 오늘 한국 육상 국가대표 구마하 선수가 스키연맹에 선수 등록을 마쳤습니다. 취재에 박한민 기자입니다.]

[박한민 기자: 지난 여름 깜짝 메달쇼로 온 국민을 들뜨게 만든 구마하 선수. 새로운 도전을 찾아 오늘 서울 스키연맹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구마하 : 체력 관리나 기타 여러 부분에 두 종목이 겹치는 부분도 많고요. 부상의 위험성도 있지만, 일단은 도전에 의미를 두고 열심히 해볼 생각입니다.]

[한국 스키 연맹의 도주환 총재는 구마하 선수를 직접 환영하며]

"우와~ 마하는 결국 스키까지 하는구나."

"..."

친구들과 외출을 나온 이혜정.

식당에서 점심을 먹는 가운데 마하가 TV에 나오고 있었다.

애써 외면하지만, 친구들은 그녀를 가만히 두지 않는다.

"혜정아. 넌 알았어?"

"몰라. 내가 구마하 뭐하고 다니는지 알 게 뭐야..."

"둘이 싸웠어? 왜 그렇게 민감하게 받아들여?"

"너네는 왜 자꾸 나랑 쟤가 무슨 관계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

"흠 그냥."

"뭐 그냥이지."

"쟤가 스키를 타든 말든 나랑 뭔 상관이라고..."

괜히 툴툴 거리는 혜정이를 보며 친구 민혜와 선아가 조심히 물어본다.

"혜정아. 근데, 민서가..."

"뭐? 걔 뭐?"

"아니. 그때 스키장 갔다와서 마하랑 둘이 사귄다는 말이 있던데..."

"야. 그런 얘길 나한테 왜 하는데?"

"아니. 너도 알고는 있어야 할 거 아냐..."

"그만해 하나도 재미 없어."

"너희 진짜 둘이 아무런 관계 아니야?"

"응. 아냐."

"아니라는 애가 지금 이렇게 민감하게 반응해?"

"짜증나. 나 갈래..."

"야. 혜정아?"

"야! 어디가!"

이제와 어쩌라는 말인가.

내가 마하를 남자로 좋아하는지 그냥 파트너를 잃기 싫은지 그것도 분간이 안 가는데.

갑자기 구마하를 내 옆에 붙여놓을 수도 없고, 그런다고 저 놈이 내 말을 들을 거란 기대도 들지 않는다.

그저 단추를 잘 못 끼웠을 뿐이다.

하지만 이건 간단히 입고 벗을 수 있는 옷이 아닌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관한 이야기였다.

처음부터 그렇게 맞춰졌고, 이제와 다시 시작하기란 너무 먼 길을 와버렸다.

분명한 건 오직 하나.

마하는 위험하다.

그를 품었다간 안지민 때와는 비교도 될 수 없는 상처를 입을 것이다.

"하아. 아아... 으음!"

그럼에도 몸은 뜨겁게 갈망한다.

한번 눈을 뜨자 자위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오늘도 이혜정은 침대에 웅크리고 누워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었다.

"하아...후우... 후... 하...."

그리고 쾌락과 함께 찾아오는 허탈감.

허전함. 공허함. 무슨 단어를 쓰든 빈 자리는 채워지지 않는다.

이혜정은 핸드폰을 들어 문자를 찍었다.

[너 어디야? 집에 언제 와?]

샌드 버튼을 앞에 놓고 한참을 고민한 끝에 결국 문자를 전송하지 않고 지워버렸다.

"아니야... 이제 이 짓도 그만해야 돼..."

늘 착하고 예쁜 딸이자 즐겁고 자기 할 일 잘하는 아이로 성장한 그녀.

두근거리는 첫사랑을 시작으로 미지의 세계에 눈을 뜬 이혜정.

밖에서 얌전한 아이로 지내는 만큼 허락되지 않은 행동은 큰 기쁨이 되어 돌아왔다.

어색하고 순진한 첫사랑이 떠나면서 만나게 된 두번째 인연.

스타일도 외모도 모든 여학생의 우상과도 같은 그와의 만남은 아픔이 되어 돌아왔지만,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에서 현재의 구마하를 알게 되었다.

남자로 느껴지진 않았다. 하지만, 진심어린 따뜻한 마음과 사랑 받길 원했다는 뜨거운 눈물이 여자의 가슴을 울렸다.

딱 그 정도에서 멈췄으면 좋았는데...

쾌락이 감정에 대한 컨트롤을 잃게 만드는 건 아닐까?

속정이 무섭다더니... 앞으로 마하 아닌 또 그런 느낌을 주는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아니. 애초에 남자를 보는 기준이 섹스가 되어버리면. 그때도 나는 나라는 정체성을 지킬 수 있을까?

"그래 끝내. 이제는 이 짓도 그만둘 때가 왔어..."

이혜정은 다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속옷을 챙겨 입었다.

마침 오늘은 아파트 주민들이 다 함께 등산 여행을 떠난 날.

어른들도 없으니 싸운 친구들과 화해도 할 겸. 애들 불러 맛있는 것 사 먹고 새벽까지 수다를 떨며 앞으로 대학 생활에 관한 기대감 있는 대화를 나누자.

그렇게 생각하며 이혜정은 방 청소를 시작했다.

"다 끝내. 그만해. 구마하고 뭐고, 난 나야. 평생 섹스만 하고 살 것도 아니고."

마치 몸에 남은 느낌을 털어 내듯 서둘 서둘 이것저것 정리를 하면서 창문을 활짝 열었다.

뜨거웠던 그녀의 공기가 바람을 타고 흩어진다.

"아. 시원하..."

그런데, 창밖 저 멀리 아파트 정문에 구마하가 서성이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를 보자 다시금 마음이 두근거렸다.

"..."

마윤이 오빠도 분명 등산 모임에 참가했다고 들었는데...

마하네 집도 아무도 없을 건데...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한번만 더 만나고 올까?

그런 마음에 전화기를 들어본다.

"어. 혜정아 왜?"

"아까 뉴스 봤어."

"아. 그거. 하하하~ 며칠 전에 찍은 건데 오늘 나왔나 보네."

"어디야?"

창문을 열어둔 채 통화를 이어가는데, 구마하가 저 멀리 고개를 기웃거리며 말했다.

"어. 나 친구들 만나러 가려고."

"..."

"왜? 너 어딘데?"

"그냥. 나도 친구들 만나려고."

"으음. 그래? 친구 누구? 민혜?"

"아니. 다른 애들."

돌아봐. 보면 알 수 있어. 나 여기 있잖아.

그러나 구마하는 여전히 운동가방을 들쳐 맨 채 무미건조한 통화를 이어가며 아파트 앞 버스 정류장에서 눈을 때지 않는다.

"뭐 다른 일은 없고?"

"어. 없어."

"그래. 혜정아. 다음에 내가 통화 할 게."

버스가 도착하며 전화를 끊는 구마하.

대체 누구를 그렇게 애타게 기다리나 눈에 쌍심지를 켜며 집중하니.

민서가 버스에서 내려 그에게 다가간다.

"허... 허허..."

멀리 봐도 꾸민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화려한 모습이었다.

민서는 마하를 보며 활짝 웃으며 가볍게 손 터치를 하는 등 애교를 부리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하! 하하. 하하하... 어이가 없어서..."

싫어할 땐 언제고 뭐 하는 짓인데? 걔는 왜 불렀는데?

채민서 너도. 지금 뭐 하는 거야?

이혜정은 핸드폰을 들어 민서에게도 전화를 걸어본다.

"..."

저 멀리 핸드폰을 들어 본 민서가 통화를 거부한다.

구마하가 누구냐는 듯 묻지만 고개를 도리도리 가로 젖는 모습에 아무도 아니야 라는 말을 하는 것 같다.

"어쭈... 이것들이..."

그래서 다시금 전화를 걸어보니 이번엔 받지만, 친구의 목소리가 조금 퉁명스레 나오는 것 같다.

"어. 혜정아..."

"너 어디야?"

"나? 음... 나 지금 가족들이랑 외식 나왔어."

"아~ 그래?"

혜정이도 창문을 닫고 옷장으로 가 삭삭 옷들을 챙겨본다.

"가족들이랑 뭐 맛있는 거 먹으러 가나 봐? 뭐 먹어?"

"몰라. 왜?"

"아니야. 맛있게 먹으라고."

"응. 고마워...?"

그래. 얘들아. 애써 누르고 있었는데, 막상 남 주려니 아까워 미치겠다.

모르는 사람이면 그러려니 하겠어. 근데, 민서는 아니지. 쟤는 아니야...

아직 쇼핑을 안 해서 가진 옷들이 죄 학생 티가 난다.

그나마 대학 면접 때 입었던 투피스가 눈에 띄였다.

통화를 마치며 눈앞에 잡힌 치마와 블라우스를 꺼내들은 이혜정은 서둘러 화장대에 앉았다.

* * *

"가족과 외식이라. 하하하~ 나를 누구와 나눠 잡수시려고?"

"으음. 그냥... 어쩌다 보니까..."

민서가 꾸물꾸물 핸드폰을 가방에 넣는 모습을 보며 물었다.

"혜정이?"

"어... 왜 전화 했지?"

"아까 나한테도 전화하던데. 심심한가?"

"그럼 같이 보자고 할까?"

"허허허... 허허허허... 야. 민서야?"

"뭐 어때. 난 혜정이라면 셋이 해도 좋아."

"허허~ 오오~ 이야~ 너...?"

"물론, 너랑 단 둘이 있는 게 제일 좋긴 하지만."

인간만사새옹지마라고. 따지면 할 말은 많은데, 그냥 좋게 좋게 생각하며 민서와 약속을 잡았다.

"근데 너 오늘 엄청 꾸몄다?"

"그래? 예... 예뻐?"

"어. 화장 한 거지?"

"응... 어. 어때? 예쁘게 된 거 같애?"

"이야~ 그 일진 채민서가 이렇게 꾸미고 나를 만나러 올 줄이야."

"아아~ 야. 그... 그런 말 안 하기로 했잖아..."

"하하하!"

미움과 증오를 넘어선 화해의 섹스를 나누고. 민서가 한번만 더 만나자고 그때와 다르게 다음엔 반드시 자기가 날 어떻게든 만족시켜 주겠다는데. 마침 형이 아파트 주민들이랑 등산 여행을 가서, 오늘이 딱이겠거니 했지만.

"저기야."

"응. 알어."

태윤아. 이 새끼. 고맙다. 내가 니 말을 듣길 잘 했네. 민서도 이렇게 보니까 예쁘구나.

"마하야?"

"응?"

"..."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는데 애가 조마조마 두근두근 거리면서 귓속말을 건넨다.

"너... 너 저... 저기 있잖아."

"어 뭐?"

"그... 그러니까..."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얼굴이 빨개지나 했는데.

"나... 제... 제모하고 왔는데..."

"..."

"이... 인터넷 보니까... 남자들 그런 거 좋아한다고..."

와 씨발. 이런 미친...

"진짜? 제모? 거기 밀었다고?"

민서가 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어떻게? 너 혼자?"

"응..."

"왜?"

"그 그냥... 호 혹시 너도... 조... 좋아할까 싶어서."

사귀자고 할까? 과거가 뭔 상관이야. 이미 다 털었는데.

아무리 그래도 날 위해서 제모를 하다니.

평생 이런 애를 만날 수 있을까?

띵.

두근두근 엘리베이터에 타면서 고개를 들어 CCTV를 확인했다.

아 씨 궁금한데,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제모? 제모라고? 털을 밀었어?

아니야. 참자. 곧 있으면 집이야.

집에 가면 들어가자마자 바로 코트를 벗기고.

"안에 뭐 입었어?"

"치마."

"오오~ 치마... 오오~"

"너 치마 입는 거 좋아한다며?"

"어~어. 그렇지."

그래. 치마를 들추는 거다.

그럼 그곳엔 순백의 새하얀 세상이.

띵~! 스르륵.

"민서야. 이쪽."

"..."

"왜?"

"어서 와."

"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혜정이가 팔짱을 끼고서 우리를 보고 있었다.

"..."

"혜... 혜정아?"

"어어~ 가족들과 외식. 으음. 친구들?"

"야... 너 여기서 뭐해?"

"그냥. 와 봤는데?"

엘리베이터 문이 스르륵 닫히는 걸, 혜정이가 버튼을 눌러 막는다.

"뭐해? 너네 집이잖아. 안 내려?"

"저기... 그러니까."

"으음... 흠. 크흠."

뭐지? 내가 바람 피우는 것도 아니고 왜 이렇게 혜정이 눈빛에 주눅이 드는 거지...?

그렇다고 반대로 떳떳하게 뭐라고 하기도 애매해.

아 씨... 이 기분은 대체 뭐지?

"너... 근데 옷 입은 게 어디 가는 거 아냐?"

"응. 맞어."

"...그럼 갈 길 가."

"마하야 어서 와. 나 너희 집 오려고 왔어."

혜정이가 슥 다가와 팔짱을 낀다.

"야. 야... 왜 이래...?"

"왜? 안 그래도 나 오늘 너 보고 싶어서. 이렇게 옷도 바꿔 입고 왔는데."

"저기... 혜정아."

"민서야 고마워. 그럼 먼저 가."

혜정이가 날 끌고 엘리베이터에서 나온다.

"마하야~ 나 엄청 하고 싶었어. 너 그거 알어?"

"야. 너 왜 이래... 얘가 왜 안 하던 짓을..."

애교스런 목소리에 일단 질질 끌려나오는데, 민서도 엘리베이터를 따라 내린다.

그러자 혜정이가.

"안 가니?"

"..."

"저기 혜정아 얘는..."

"뭐? 민서는 뭐? 니 여자친구라도 돼?"

그러자 민서가 당당하게 나서서 말한다.

"아니. 우리 사귀는 거 아닌데?"

"그럼?"

"나도 너랑 똑같은 거야."

"..."

"......"

그러고서 둘이 눈싸움을 시작했다.

예쁜 애들 둘이서 나를 놓고 서로 사납게 노려본다.

꿈도 못 꿀 광경이지만, 분위기로 봐서는 이런 꿈은 꿔선 안 될 것 같다.

"저기. 얘들아 일단 들어가자. 어? 집 앞에서 이러지 말고..."

철컥 문을 열고 들어갔다.

검은 스타킹과 검정 치마. 그리고 흰 블라우스를 입은 혜정이와 검은 코트를 벗자 은은한 흰 빛이 나는 원피스와 흰 스타킹을 걸친 민서가 각각 소파 끝과 끝에 앉아 있었다.

둘 다 시선을 피하며 팔짱을 끼우고 다리를 꼬고 있다.

사진 한 장 찍어두면 세계신기록 기념 사진을 찢어 버릴 위대한 광경이긴 하지만...

"후우..."

아 미치겠네...

그냥 미친 척 둘 다 가만히 있으라고 하고 앞에서 딸이나 칠까...?

나더러 어쩌라는 거야 대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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