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륜기로 가버렷-97화 (97/401)

< 미워도 다시한번 (8) >

혜정이와 민서. 내가 좋아했던 아이와 싫어했던 아이.

그리고 둘 모두 일단 나와 사랑(?)을 나눈 상대들.

흠. 이렇게 생각하면 너무 어렵나?

그냥 검스와 흰스? 긴 머리와 단발머리? 투피스와 원피스??

금메달 세 개와 비교하는 게 이상하지만, 만약 바꾼다면...

그래도 역시 메달이 낫네. 살스가 더해지지 않는 한 3:2니까.

세명? 빅토리아 누나는 외국인이니 한 사람을 더하자면 역시 다빈인가?

어이구야... 근데 여기 다빈이까지 같이 있으면, 그건 그거대로 뭔가 끔찍하구나...

소파에 앉아있는 혜정이와 민서를 보면서 그런 머저리같은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정말 뭔가 믿기지 않으면서도? 그렇다고 또 아주 말이 안 되는 상황은 아니고...?

아니 그보다 대체 어쩌다가 이런 상황이 된 거지?

우리 셋은 이렇게 모여서 뭘 어쩌자고들 분위기를 잡고 있지?

아마 애들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혜정이나 민서. 두 사람 각각 이쪽 저쪽 시선을 따로 두고서 한참을 고민하고 있었다.

먼저 입을 연 건 혜정이였다.

"뭐? 가족들이랑 외식 간다고?"

"..."

"니네 가족은 사람도 먹니?"

"그러는 넌? 마하한테 친구들 만나러 간다고 했었다며?"

"응. 그래서 친구들 만나러 왔잖아."

혜정이가 팔 다리 잔뜩 웅켜쥔 자세로 사납게 고개를 돌려 나를 본다.

"너희 내 친구 아니었어?"

"..."

"..."

근데 그렇게 따지면, 나도 친구들 보러 간다고 했으니까... 나도 할 말은 있는...

에잇 젠장. 병신같은 생각은 그만하고.

"자. 자. 얘들아. 일단 너무 그렇게 무섭게 있지 말고"

"맞어. 나 너한테 거짓말 했어."

민서가 말을 싹둑 자르면서 혜정이에게 말한다.

"나 오늘 마하랑 섹스하러 왔어."

"야... 채민서?"

"왜? 내가 마하랑 뭘 하든, 너가 문제 삼을 이유 없잖아?"

"..."

"아아~ 그래. 파트너~? 으음. 맞어. 둘이 그런 관계였지?"

혜정이가 미간을 찡그리며 노려봐도, 민서는 여유롭게 시선을 피하며 나를 향해 물었다.

"그럼. 마하야 우리는 섹스 프렌드 할까? 파트너보단 친구가 낫지? 그치? 더 정감있고."

"허허... 허허허..."

말도 못 할 상황에 너털웃음이나 짓고 있으니 이혜정이 또 사납게 쏘아붙인다.

"야. 구마하..."

"응?"

"너 왜 웃어? 그게 웃겨? 그렇게 좋아?"

"아니..."

"애가 어디 모자란 것도 아니고..."

야 왜 나한테 그래... 내가 웃겨서 웃냐? 나도 황당해서 웃지...

혜정이의 굳어가는 표정을 보면서 민서가 또 한번 여유로운 미소와 함께 말을 던졌다.

"어머. 혜정아 너 오늘 화장했어?"

"..."

두 사람이 다시 서로를 쳐다본다.

"왜?"

"그냥. 꾸민 거 같길래."

"..."

여자들 싸움은 이런 식이구나.

뭔가 존나 예의 바르고 싸가지 없는? 말 그대로 물과 기름이 뒤섞이는 그런 양상이랄까?

"하하하~! 아아~ 그렇게 보여? 나 그냥 스킨만 발랐는데?"

"후후후. 너가 스킨만 발랐는데 입술이 빨갛다고?"

"응. 난 예쁘게 생겼거든. 속눈썹도 길고."

"..."

오오 이혜정... 얘도 전투력 장난 아니구나.

혜정이가 두 눈을 앙증맞게 깜빡이며 민서를 노려본다.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오히려 쏘아대던 민서가 입이 굳어버렸다.

그러자 이번엔 역으로 혜정이가 따져 묻는다.

"그러는 넌? 갑자기 왜 그렇게 눈이 커졌어?"

"야..."

"뭐야~ 흰 옷 입는다고 얼굴 톤도 맞춘거야? 애쓴다... 애써..."

"..."

"흰 스타킹은 또 뭐래... 무슨 유치원생이냐?"

민서도 거기에 대해 뭐라 할 말은 없는지 내내 여유롭던 표정이 일그러지며 미간에 주름이 잡힌다.

그럼에도 스팀이 받는가 "허어~" 하면서 고개를 슬쩍 한숨을 뱉는데.

"어. 크흠! 얘들아. 둘 다 좀 그만하고. 어?"

여자들 싸움도 재밌긴 하지만, 일단 뭔가 나서야만 할 거 같아 입을 열었는데, 민서가 다 죽어가는 사람 보는 듯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

"근데 마하야...? 너 왜 그렇게 서 있어?"

"응? 어? 어..."

"우리들 때문에 그래? 일로 와. 앉어."

"그래. 덩치는 산만한 게 왜 그러고 있어. 좀 앉든가. 정신 사납게 서 있지 말고."

"..."

앉으라니 일단 앉는다.

그래서 소파로 가는데, 왼쪽에는 혜정이. 오른 쪽에 민서가 각각 나뉘어져 있으니.

"..."

"..."

털썩 가운데 자리를 잡자 왼쪽으로 화가 난 혜정이 얼굴이 보고있고, 오른 쪽으로 싱글벙글 민서가 나를 보고 있다.

단복 벗고 팬티 바람에 포디움에서 애국가 끝날 때까지 카메라 받기. 얘네들 가운데서 싸움 끝날 때까지 멍하니 있기.

안 되겠다. 생각할 문제가 아니잖아. 일어나자.

"어. 얘들아 난 그냥 바닥에 있을게. 너네 거기 있어."

"으응~ 싫어. 그럼 나도 바닥에 앉을래~!"

"..."

뭐라 말리기도 전에 민서가 다가와 찰싹 안겼다.

소파에 앉아있는 혜정이를 슬쩍 올려다보니 애 표정이 아주 그냥...

"허~ 허... 허허..."

저런 걸 썩은 미소라고 한다지? 쟤도 저런 얼굴을 할 때가 있구나...

"그... 그! 저기 민서야 바닥이 너무 차갑지?"

"응? 으응 아니. 괜찮은데?"

"야. 나 추워."

"아 그러니까... 형은 꼭 보일러를 외출로 맞춰놓고 나가더라..."

보일러 온도를 높이고, 민서를 다시 소파에 앉힌 뒤 식탁 의자를 가져와 삼자대면을 했다.

혜정이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팔 다리를 꼰채 노려보고, 민서는 일부러라도 싱글벙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 진짜 미치겠네... 돌겠네 진짜.

뭐 어떻게 말을 꺼내야 되는거야...

그래. 일단, 변수부터 하나 씩 쳐보자.

"저기. 혜정아?"

"뭐? 왜?"

"아니... 왜 말도 없이 왔어..."

"뭐? 너도 나한테 그러잖아."

"..."

"하고 싶어서 왔어. 안돼? 우리 사이에 이게 이상해?"

"아니... 그건 아닌데..."

그러자 민서가 다시 혜정이를 노려보며 말한다.

"야. 이혜정. 넌 그게 뭐냐? 상대에 대한 배려도 없이..."

"뭐? 아하하하! 배~려? 배려라고? 민서야 너 그런 말도 할 줄 알어?"

"응. 문제 될 거 있나?"

"이야~ 양심도 없다 진짜..."

"난 마하 좋아. 너랑 달리 정말로 좋아해. 진심으로."

"오~ 그러세요? 너무 좋아해서 애를 그렇게 괴롭히셨어요?"

"그러는 넌? 십 년 넘게 너희 둘 모르고 지냈던 거 이제 모르는 애들 있나? 갑자기 왜 애인 행세를 하고 그래?"

귓속에 나폴레옹의 영혼이 다가와 말을 거는 것 같다.

이런 씨발 이러니까 내가 유럽을 통일했지. 아으 여자들... 어으 지겨워.

싸구려 위스키 캡틴의 위로도 통하지 않을 만큼 기분이 먹먹해진다.

두 사람의 기 싸움이 다시 시작되었다.

"야. 내가 언제 얘 애인 행세를 했다고 그래?"

"지금 이게 애인 아니면 뭐야? 단순 여자친구가 이렇게 까지 하는 게 더 이상하지 않나?"

"..."

그래. 그건 나도 좀 그렇게 생각하긴 해.

혜정이가 화내는 건 이해되지만, 우리 사이에 굳이 막 이렇게 까지 찾아와서 이럴 건 아니라고 보는데...

"너 마하 좋아해?"

민서 질문에 혜정이가 숨이 가빠지는가, 가슴을 막 들썩들썩 거리며 호흡을 고른다.

무슨 대답이 나오는지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니 애가 나를 한번 삭 돌아보는데.

"아니. 이런 애 딱 질색인데."

쳇... 뭐야... 그리고 난 또 뭐야...?

이제와서 새삼 실망할 이유도 없는 말 가지고...

"마하야. 너도 방금 들었지? 응? 그치?"

민서가 또 말리기도 전에 두다다 다가와 안긴다.

"너 쟤한테 이용 당하고 있었던 거야."

"민서야. 에이 딱히 이용이라고 하긴 좀 그렇지..."

"내 말이 틀려? 감정도 없이 그냥 몸만 노리는 게 그게 이용이 아니야?"

"자 자. 민서야. 그렇게 따지면"

아 진짜 이혜정 쟤는 왜 말을 그렇게 해서 상황을 더 복잡하게 꼬는지.

혜정이를 올려다보자, 애가 한심하게 쳐다보며 슬쩍 다리를 바꿔 앉으며 말했다.

"십 년? 으음. 맞어. 그랬어. 우리 참 오랫동안 모르고 지냈지."

"알면 이제 너도"

"근데 민서 너 그건 알어? 그래도 마하가 어릴 땐 참 밝고 친구들도 많이 사귀고 그랬었던 거?"

"..."

"근데 중학교 부턴가? 애가 갑자기 어둡게 지내는데, 그게 왜 그랬더라?"

지울 수 없는 주홍글씨를 꺼내들자 민서도 눈에 쌍심지를 켜며 혜정이를 돌아본다.

"야. 그건 우리 둘이 이미 다 끝낸 이야기라고."

"으음. 맞다. 그러고 보니 그랬던 것도 기억난다. 마하가 누구든 자길 사랑해주면 좋겠다고."

목소리를 바꿔 혜정이를 불렀다.

"이혜정. 그만해."

"..."

"그리고 민서 너도 좀 떨어지고..."

혜정이를 먼저 말리고, 매달려 있는 민서를 때어내며 말했다.

"둘 다 그만하자. 내가 무슨 복이 터져서 이런 상황에 몰렸는지 몰라도, 너희 말싸움에 내 얘기 참고 들어주긴 힘들어."

"마하야 미안. 정말 미안. 잘못했어."

"..."

"괜찮아. 사과 안 해도 돼. 그리고 혜정이 너도. 나 아직 얘랑 아무 짓도 안 했잖아. 감정적으로 그러지 마."

"뭐... 내가 뭘 감정적으로 굴었는데..."

"됐어. 이런 상황에 섹스고 뭐고 무슨 짓 하기도 그렇고. 그리고 나 지금 정말 오랜만에 집에 온 거라. 일단 좀 씻고 싶어. 둘 다 밥이나 먹고 가. 내가 요리 해줄게. 형이 나 온다고 집에 먹을 거 많이 챙겨놨다고 했으니까."

"그럼 둘이 먹든가... 난 갈테니까."

"먹고 가. 너도 오늘 집에 어른들 안 오시잖아."

"..."

"얘기하고 있어. 나 씻고 나올테니까."

민서를 택하면 혜정이를 두 번 다시 못 만나 게 될 것이고.

그렇다고 혜정이 성격 상, 민서를 보낸다고 나랑 밤새도록 있어 줄 것도 아니다.

아이고... 제기랄. 뭔 복이 터졌다고... 여자 둘이 우리 집을 한번에 찾아오냐...

아마 내가 전생에 나라를 구하다 마지막에 도망치든가 그랬을 거야.

아. 실제로 그랬구나? 젠장. 근데 그땐 애기였는데.

에잇. 셋이 하는 것도 아니고 이게 뭔지...

아 몰라. 씻고 나오면 질린 사람이 먼저 가든가 하겠지.

아니면 둘 다 갔든가.

에잇 씨... 에잇 젠장...!

* * *

그러나 구마하의 예상과 다르게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여전히 이혜정은 소파에. 채민서는 바닥에 앉은 채 서로에게 눈을 피하고 있다.

두 사람 다 물러설 수 없는 상황이었다.

자존심도 있고, 성질도 있고. 무엇보다 여자 대 여자로 용납할 수 없는 지점이 있었다.

촤아악~ 시원한 물 소리에 이혜정이 슬쩍 눈을 돌리며 처량하게 앉아있는 민서의 뒷모습을 보았다.

"..."

둘이 또 나 몰래... 구마하 이 나쁜 새끼.

그리고 민서 너도... 어떻게 우리 사이를 알면서...

이혜정은 화가 나는 걸 간신히 눌러 참고 있지만, 그 어디에도 밝힐 수 없는 비밀이 하나 있었으니.

불과 한 시간 전까지 그녀는 두 사람을 생각하며 혼자 절정에 다다랐었다.

이해될 수 없는 상황에 굳세게 오므린 골반 사이에선 아까부터 간지러운 느낌이 자꾸 새어 나온다.

마하와 민서... 상상 속에서 사랑을 나누던 두 사람을 여기서...

가슴이 두근거린다. 참을수록 이상한 욕망이 자꾸 꿈틀댄다.

정말 미친 거 아닌가?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왜 자꾸...

이혜정은 가빠지는 호흡을 참아가며 샤워실 쪽을 바라보는 민서의 옆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녀는 누가 보더라도 사랑에 깊게 빠진 여자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

남자와 여자는 성을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다.

남성이 여성의 신체와 자극되는 묘사에 성적 쾌락을 느낀다면. 여성은 남성의 신체가 아닌, 사랑이란 감정이 주는 분위기와 상황에 취해간다.

초라한 과거를 이겨내고 화려하게 성장한 마하.

불편했던 과거를 반성하고 아픔을 준 상대에게 다가가 안겨 성격이 변한 민서.

둘을 너무 잘 알고, 그들의 감정에 깊게 다가갈 수 있는 이혜정에게 구마하와 채민서의 스토리텔링이 주는 자극은 너무나도 강한 것이었다.

그것은 야한 것을 보고 싶다는 호기심이 아닌, 사랑을 나누는 두 사람의 행위가 주는 울림.

이혜정은 눈을 질끈 감으며 각오를 굳힌다.

빨리 일어나야 돼...

여기 있다간 정말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될 거 같애...

그때 민서가 구마하에게 전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냉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어쩔 생각이야?"

"뭐... 뭘?"

"..."

"뭐가? 그러는 너는? 정말 쟤랑 같이 있을 거야?"

"물론. 난 마하만 좋다면 너랑도 할 수 있어."

"......"

이혜정의 가슴이 터질 것 같다.

구마하의 샤워 소리도 끝나간다.

민서가 고개를 돌려 소파에 놓여진 가방을 가리켰다.

"나 거기 가방 좀 줄래?"

"여기..."

얘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한 거지?

떨리는 손으로 가방을 건네주자, 민서는 뒤적뒤적 절그럭 거리는 이질적인 물체를 꺼내 들었다.

"그... 그건 또 뭐. 뭐야?"

"내 각오."

수건으로 몸을 닦는 소리가 들려오고, 채민서가 가방에서 개 목걸이를 꺼내 자신의 목에다 철커덕 채웠다.

"야아! 너 뭐 뭐 뭐하는 거야!?"

"난 진심이야. 마하만 원한다면 난 뭐든지 할 수 있어."

"..."

이혜정이 두려움과 흥분에 온 몸이 굳어버린 순간.

구마하도 샤워를 마치며 밖으로 나왔다.

채민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뒤로 뻗어 원피스의 후크를 주르륵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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