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륜기로 가버렷-101화 (101/401)

< 신촌에 내려온 운석 (1) >

2월 마지막 주. 동계 체전 시합 날이었다.

육상 연맹 천병욱 전무님과 이두희 감독님이 응원을 와주셨다.

"아이고. 귀한 다리에 이 무슨 흉측한 걸 달고 있는지... 이러다 발목 굳는 거 아니냐?"

"괜찮아요 사부님. 오히려 이거 안 신으면 다쳐요."

"거 막상 이러고 있는 걸 보니 현석이 녀석이 맞는 말 한 거 같기도 하고..."

"하하하~! 야 상률아. 현석이가 장난 아니게 뭐라고 했었다며?"

"그 형도 참... 아니 마음은 이해하는데. 하하하..."

"두희야 말도 마라. 나한테까지 전화해서 어찌나 뭐라 하는지."

대 사부님이 정준이 형과 악수를 나누며 당부의 말씀을 남기셨다.

"우리 마하 코치 선생이시라죠?"

"네. 김정준이라고 합니다."

"뭘 하든 이 녀석 안 다치게만 해주게. 알겠지?"

"걱정하지 마십시오."

"선생님... 정준 씨 우리나라 스키 에이스에요. 전문가 놔두시고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에요..."

"시끄럽다. 아이고 그냥 빨리 겨울이나 끝났으면 좋겠구나..."

"미안. 귀담아 듣지마."

"괜찮습니다. 저도 365일 눈으로 덮이면 좋겠다고 생각하니까요."

감독님이 두 분을 모셔가고 우리도 시합장으로 향했다.

정준이 형이 스키를 들어주며 저벅 저벅 로봇 걸음을 하면서 이야기를 나눴다.

"아까 그 아저씨 되게 높은 분이지?"

"연맹 전무님이요. 선수들 가운데 최고 존엄이자 지존 같은 분. 거의 구심점 같애요."

"육상은 전무님까지 찾아오는데 우리는 뭐하나 몰라? 이러니 스키가 발전이 없지..."

"하하하! 형... 왜 그러세요."

"그날 기억 안 나냐? 쓰레기 같은 인간들. 선수 등록가는데 카메라는 왜 부르고 지들이 인터뷰는 왜 해? 이런 시합은 관심도 없으면서."

"쇼트트랙도 나몰라라 하잖아요."

"그러게 말이다. 빙상이나 설상이나. 에이 썩을 인간들."

리프트에 올라 산을 오른다.

이곳은 한국 스키어들의 성지이자 마음의 고향. 용평 스키장. 정준이 형이 리프트에 앉아 코스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조심해."

"네."

"코너를 뭐 저렇게 깍았어? 기문을 저렇게 박아놓으면 초심자는 어떡하라고..."

"확실히 급하게 돌긴 하더라고요."

"그 감각을 잘 기억하면서."

활강(Downhill)은 최고의 스피드를 겨루는 만큼 부상의 위험성이 크기에, 미리 슬로프를 달려 코스를 익힌다.

다른 스키어들은 어려서부터 용평 스키장을 다녀온 만큼 이곳이 익숙하지만 난 그런 쪽에 있어서도 남들과 경험의 차이를 느낄 수 밖에 없었다.

"당연하지. 너 인마 지금 스키 3개월만에 전국체전 나오는 거야."

"하하하... 죄송해요. 뭔가 좀 건방져 보였네요."

"됐다. 모르고 니 코치직을 맡은 것도 아니고."

"형. 근데 여기 진짜 좋네요. 와~ 한국에도 이런 스키장이."

"봤을 땐 별로 안 높은 거 같은데 그치? 산이 깊고 웅장해."

"아까도 알프스 저리가라 할 정도의 코스같다 싶었어요."

"마하야. 언젠가 우리나라에서 동계 올림픽이 열린다면, 아마 여기가 시합장이 될 거야."

"오오~ 올림픽 코스."

"그렇지. 올림픽 코스라고 생각하면 느낌이 다르게 오지 않냐?"

얼마 전 2014년 평창 동계 올림픽 유치를 위해 정부에서도 많은 힘을 쓰겠다는 기사가 나왔다.

한국에서 올리는 올림픽이라...

그건 또 어떤 느낌일까?

"9년 뒤라. 그때까지 내가 스키를 탈 수 있을까..."

"할아버지도 타는데요. 형도 하시면 되죠."

"후후. 아무튼. 나는 몰라도 너는 가능하겠다."

"스물 아홉이라. 뭐. 그렇긴 하겠네요."

"자 아무튼 다 왔다."

"네!"

리프트에서 내리자 다른 참가 선수들과 코치진들이 웅성웅성 정상에 자리하고 있었다.

"역시 주목 받는 느낌이 확 오는구만."

"..."

"긴장되냐?"

"형 아시잖아요. 이래보여도 나름 주목받는 시각을 경험해 봤어요."

"하하! 이 자식."

정준이 형이 바인딩을 다시한번 체크해보고 폴을 손목에 단단히 고정시켜주며 말했다.

"기물을 놓치지 않는 것도 중요한데, 정 안되겠다 싶으면 포기하고 직선 구간에서 스피드 더 올려. 너 점프 하는 거 좋아하잖아."

"알겠습니다."

"연습 때 느낀 한계점은 잊지말고. 스키는 뭐다?"

"도전이다."

"좋아. 가라."

김정준 코치님과 작전을 나누고 선수들 가운데 줄을 섰다.

육상은 단체로 출발하지만, 스키는 혼자서 슬로프를 달린다.

물론 이것도 경쟁 종목이지만, 시합은 스스로의 도전이 되는 것이다.

삑.삑. 삐~~!

신호등에 파란 불이 들어오며 폴을 찍고 경사를 달렸다.

두 번 세 번. 속도를 높이며 상체를 바짝 숙이고 두 다리에 목숨을 건다.

2005년 동계체전을 시작으로 나의 스키 커리어도 같이 시작되었다.

쿠아아악-!!

헬멧을 뚫고 들어오는 바람 소리를 즐기며, 말 그대로 바람같이 산을 내달렸다.

* * *

구마하가 무사히 코스를 완주하는 모습을 보면서, 몇몇 선수나 코치진이 감상을 나누고 있었다.

"나쁘진 않네. 정준이가 코칭에 재능이 있구나."

"흠. 중간지점 10위라. 최종적으론 18위 정도 하겠구만."

"근데, 하도 난리법석 떨길래 뭐 얼마나 대단한가 했는데."

결승점을 지나는 구마하. 순위는 15위에 랭크. 누군가 말한 대로 남은 선수들 시합을 다 마친다면 18위 정도의 위치에 머물게 될 것이다.

"잘 한다고 하기도 뭐하고, 아니라고 하기도 뭐한 친구구만."

"경력을 따지면 잘하는 거나, 냉정하게 기대한 무언가는 아니라고 해야지. 아마든 프로든 시합은 시합이니까."

한국 눈밭을 지키던 이들은 반반으로 구마하를 지켜보고 있다.

그의 도전을 환영하고 반기는 사람. 김정준의 말대로 그의 도전을 삐딱하게 보는 사람.

어느쪽이든 구마하는 다양한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상택아 넌 어떻게 봤냐?"

"뭘 어때. 그냥 저렇게 타는구나 싶은 거지."

"상택이는 좋겠네. 운동 같이 할 후배 들어와서."

"뭐라는 거야. 저 새끼가 육상 선수지. 스키선수냐?"

"너 정준이 형이랑도 친했잖아. 너도 형 따라가. 하하하!"

"미친놈 왜 이렇게 빈정대냐?"

"누가 뭘 언제 빈정거렸다고."

박상택은 스물 넷 연세대 3학년으로 현역 한국 알파인 스키 활강과 회전 대회전 세 종목 선수로 활약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김정준의 뒤를 이어 차기 설상의 에이스가 될 재목으로 여러 주목을 받고 있었는데, 구마하가 등장하며 그에 대한 관심이 사그라들고 말았다.

"정준이 형."

"어 상택아. 몸은 좀 어떠냐?"

"형이나 말해봐. 뭐야 갑자기?"

"아~ 그렇게 됐어."

"은퇴 할 거면 말이라도 해주든가. 갑자기 뭐야?"

"야 인마. 누가 은퇴를 해. 이 새끼 말 이상하게 하고 있어."

"그럼 뭔데? 왜 갑자기 저런 애를 맡고 있어."

"하하하~ 상택아. 형 힘들어. 알잖아."

"..."

김정준이 박상택의 어깨를 툭 치면서 부탁을 건넸다.

"아무튼, 알지? 마하 니 후배로 가는 거."

"어... 뭐."

"친하게 지내라. 나중에 셋이 신촌에서 술이나 먹자."

"다른 데서 보자. 신촌은 고양이 출입 금지라."

"하하! 새끼 죽을라고. 아무튼 난 내려간다. 조심해서 타."

김정준이 리프트에 올라 산을 내려갔다.

박상택이 그가 건드린 어깨를 툭툭 치면서 말했다.

"에이 씨발... 치고 지랄이야."

구마하를 반대하는 입장에서 가장 주목 받는 선수 박상택.

앞으로 학교 생활이 재밌어 질 거 같다.

* * *

2005년 3월 2일 수요일.

아직 자취방이 확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한구 스포츠에서 잠을 청하고 부랴부랴 아침에 학교로 향했다.

"어. 형."

"너 안 늦고 잘 일어났지?"

"아 내가 애야? 참 나 진짜 걱정도 태산이다..."

"하하하~ 진짜로 형이 입학식 안 가봐도 돼?"

"제발 그런 거 좀 하지말라고... 형 나 대학생이야!!"

"그래 그래 알았다."

"끝나고 전화할게."

"마하야. 형이 늘 말했지? 낯선 환경에 가면"

"그만 좀 해 제발! 참 나 하하하~ 내가 어디 물가에 놀러갔어?"

그래도 우리 형은 끝까지 사람들 보면 어떤 상황이든 웃으면서 인사를 건네라고 난리다.

"하여간 입만 열면 잔소리 잔소리... 직원들은 어떻게 형이랑 붙어있나 몰라..."

스무살의 봄. 새싹이 피어나는 계절. 연세대학교 사회체육과 05학번이 되었다.

민주화 운동의 성지이기도 한 교문에서 잠시 학교를 바라보았다.

"..."

이야... 진짜 대학생이 된 건가?

작년 여기서 혼자 훈련 할 때만 해도 넘의 집 셋방살이 하는 거 같았는데, 이제는 소속감을 가져도 된다는 거 아냐?

그나저나 뭔가 딱 봐도 누가 신입생이고 누가 재학생인지 알 거 같다.

신입생들은 일단 옷 색깔이 조금 푸릇푸릇하고 화장도 뭔가 좀 어색해보여.

물론 어디까지나 여자애들에 한해서지. 남자한테 관심 줄 거 없잖아?

그런 가운데, 몇 몇 사람들이 부모님과 함께 교문에서 사진을 찍는 모습을 보았다.

오~ 진짜 저런 사람들이 있구나.

하긴, 원래라면 엄청 공부하고 노력해서 와야 하는 곳이니까 저런 것도 좋지.

한편으론 형이랑 같이 올 걸 그랬나? 싶기도 한 마음이 드는데."

"보자. 근데 어디로 가야 되는 거지?"

혼자다 보니까 어디로, 뭘 하러 가야 하는지를 모르겠다.

다른 사람들은 벌써 부터 친구들이 있는 듯, 서로서로 친하게 말을 거는데, 저런 건 역시 OT때 친해지고 그런 거겠지?

"저기..."

"네?"

"혹시, 구마하 아니세요?"

"아. 네 맞는데요."

혼자 두리번 뻘쭘 거리며 일단 사람들 가는 쪽으로 따라가보자 하고 있었는데, 어떤 키 큰 친구 하나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와. 진짜구나. 오~"

"아. 네..."

나도 189로 큰 키긴 하지만 이 친구도 190은 넘어 보인다.

"혹시 농구?"

"네. 맞아요."

"어어~ 선배님이세요?"

"아니요. 같은 1학년인데."

"어. 그럼 말 놔도 되지 않나?"

"하하하. 그래도 될까?"

농구부 친구 고익범을 만나게 됐다.

"키 진짜 크다. 몇 이야?"

"198."

"우와... 하긴 농구 선수니까."

"너도 멀리 보는데 엄청 큰 사람이 있길래 농구분가 했는데, 구마하를 만날 줄이야."

"아니 뭐. 내가 뭐라고..."

"사람들이 다 쳐다보고 있길래 다가오기 좀 어색했었어."

"사람 누구? 누가 날 보고 있어?"

"거진 다. 멀리서 오는데 웅성웅성 거리면서 보던데?"

"오~ 그래? 나를?"

누가? 누구? 어느 분이? 아 물론 남자들 말고. 치마 입으신 분들 중에서.

그래서 슥 주변을 둘러보는데, 익범이가 말한 그런 시선은 잘 모르겠고 다들 자기 길 가기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아무도 안 보는데?"

"하하! 야 그렇게 쳐다보면 저쪽도 시선 피하지."

"뭔가 감시 받는 기분인데?"

"아무튼 반갑다. 왜 혼자 있어?"

"그냥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뭐? 하하하! 너 구마한데?"

"구마하면 뭐... 세상 사람 아무나 가서 말 걸어도 되나?"

"그러지 않을까?"

일단 어찌어찌 익범이와 같이 입학식을 찾아가게 됐다.

대강당에 들어와 옹기종기 꾸깃꾸깃 자리를 잡고 웅성거리는 사람들 가운데 있었다.

"OT 때도 너 얘기 되게 많이 나왔는데. 애들 다 친해지고 싶다고."

"진짜? 나 그때 훈련 때문에 도저히 시간이 안 맞아서 못 갔어."

"스키는 잘 탔어?"

"어. 뭐... 그렇게 잘 한 건 아니고..."

"뭐 어때. 이미 세계 챔피언인데."

"한편으론 그냥 경험도 짧은 거 서두르지 말고 OT나 갈 걸 그랬나 싶어."

"음. 안 오길 잘 했어..."

"왜?"

뭔 소리지? 무슨 일이 있나 싶은 그때. 갑자기 익범이가 저기 계단을 올라오는 누군가를 향해 벌떡 일어나 구십도로 인사를 남겼다.

"안녕하십니까!!"

"어 그래. 왔냐?"

깜짝이야. 누군데 이렇게 큰 소리로 인사를 해? 다 쳐다보게?

익범이한테 인사 받은 사람들이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새로 사귄 친구도 걱정된 눈빛으로 나를 툭툭 치면서 눈치를 줬다.

"선배. 선배!"

그래? 우리 선배라고? 그럼 나도 인사 드려야지.

익범이 정도는 아니지만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그래. 너 구마하지?"

"네."

"반갑다. 근데 우리는 '요' 자 안 쓴다. 잘 알아 둬."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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