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부심과 자긍심. 그리고 자격지심. (1) >
"자 그럼 트럭도 갔고. 슬슬 시작해 볼까."
"어이 구마하 잠깐만. 너 이삿짐 나르라고 우리 불렀냐?"
"응."
"새끼 대답 단호한거 봐라..."
"어떻게 사람이 일말의 양심이나 미안함이 없냐...?"
"뭐. 어차피 우리 다 그러고 사는 거지. 끝나고 맛있는 거 사줄게. 좀 도와줘. 이거 몇 개 안 돼."
"하여간 있는 새끼들이 더 지랄이야..."
"야 씨발 그냥 사람 써!!"
"하하하! 제대로 말렸네. 어쩐지 자고 가라고 할 때부터 이상하다 했어..."
"그러냐? 난 그냥 이 새끼가 서울로 오라고 할 때부터 분위기 좆같았는데."
마포 자취집으로 이삿날이었다.
가구를 거진 새로 사는 바람에 누굴 부르기도 뭐하고 그냥 애들 불러 다 같이 이삿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침대는 뭐 이렇게 큰 걸 샀냐?"
"내 몸이 크잖아."
"미친놈 대체 여자를 몇 명이나 부를라고?"
"하하! 닥쳐 병신아."
"마하야 이건 어디다 놔?"
"저기. 소파는 거실."
"아니 방에다 넣고 침대를 거실에 놓자."
"왜?"
"그게 게임하는데 좋지 않겠어? TV랑 거리도 가깝고."
"오~ 남수가 맞네. 그럼 소파는 방으로. 정석아 거기 들어봐."
"오케이. 으쌰~!"
"하여간 미친놈들 아니랄까봐... 우리 집 인테리어를 왜 니들끼리 결정해?"
시끌벅적 가구배치를 끝냈다.
이삿날엔 짜장면이지. 고생한 친구들을 생각해 이것저것 요리를 잔뜩 시켜 술판을 벌였다.
졸업식 이후 오랜만에 넷이서 만나는 자리였다.
다들 팬티 한 장 걸쳐입고 밤이 새도록 떠들고 있었다.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누구 하나 중심이 아닌 서로 자기 이야기 하기 바쁘다.
"경치봐라. 이래서 한강뷰 한강뷰 하는구만"
"아늑하네. 이제 서울 오면 잘 곳 생겼다."
"오는 건 괜찮은데, 오기 전에 꼭 전화하고 와라."
"왜? 여자랑 있으니까?"
"미친놈들. 그래 새끼들아! 하하하~!"
"구마하 솔직히 말해 봐. 그동안 몇 명 만났냐?"
"한명도 못 만났어."
"꺼져 병신아."
"씨발년 하여간 입만 열면 구라. 맨날 구라."
"진짜야 미친놈들아! 여자 만날 시간도 없어!"
"아. 생각할수록 아까 남수 아이디어가 아깝네. 방을 거실로 꾸미고 게임기도 하나 갖다 놓고."
"그러니까. 놀기엔 그게 좋은데. 화장실도 바로 붙어있고. 그치?"
"꺼져! 나중에 니네 집이나 그렇게 꾸미든가!"
태윤이는 기계공학과라 남자들만 있어 불편 할 건 없지만 조금 심심하다 그러고, 정석이도 일하는데 점점 손이 익고 사람들 대하는데 여유가 생긴단다.
남수도 2월 말 뒤늦게 추가합격이 결정, 경원대로 새롭게 보금자리를 옮겼다.
다들 각자의 위치에서 자리를 잡아가는데, 나만 적응 못 하고 있는 것 같다.
"난 김태윤 이 새끼도 서울로 가는 줄 알았는데."
"우리 학교 이공계는 다 수원이라고 몇 번을 말하냐?"
"내가 대학생이냐? 내가 그걸 어떻게 알어!!"
"누가 알래! 말을 해주면 기억을 하라고!!"
"야 야 소리 지르지 마. 옆에서 뭐라고 해."
"태윤아 그럼 넌 집에서 학교 가?"
"어. 버스가 있어. 기숙사 잡을까 했는데, 그렇게 먼 거리도 아니고. 2학년 때 차 살려고."
"어이 구마하. 대학 왔다고 집 사고 자취 하는 놈 너 말고 없을 걸?"
"맞어. 먼저도 보니까 혜정이도 통학하는 거 같던데. 버스 타는 거 봤어."
통학 이야기, 알바 이야기. 그래도 친구끼리 떠들다 보면 결국 여자 이야기가 제일 불탈 수밖에 없다.
"근데 너 진짜 아무도 안 잤냐?"
"진짜라니까! 운동할 시간도 빡세!"
"혜정이도?"
"아 미치겠네 진짜. 혜정이가 왜 나와. 걔 요즘 남자친구 사귄다고 머리 염색하고 난리 났는데, 걔가 나를 왜 만나냐고?"
"새끼. 연대 갔다고 존나 여기저기 막 따먹고 다닐 줄 알았는데."
"한심한 새끼. 우리가 널 그렇게 가르쳤냐!!"
"여자랑 자도 난리. 안 자도 난리 이 새끼도 피곤하겠다."
"나도 이야기가 길다..."
"야. 마하야 너 우리 학교 김은정이라고 아냐?"
"몰라. 누군데 걔가?"
"동창인데, 이번에 대학에서 만났거든."
"그래서?"
"너 잤던 애 중에 그런 애 없어?"
"하하하! 남수야."
"크하하하! 저 새끼가 젤 나쁜 놈이야. 야 구마가 학교 여자애들 다 따먹었냐?"
"아니였어?"
"이 병신은 뭔... 씨발놈이 뒷통수를..."
"확실하게 말해. 너 걔 알어 몰라? 우리 학교야. 동창이고. 기억 안 나?"
"안 잤어 미친놈아. 누군지도 모르는 애를 내가 뭔..."
"마하야. 남수는 됐고, 너 솔직하게 말해 봐. 스키장에서 누구랑 했냐?"
"아 진짜 미친놈들... 끝이 없네 끝이 없어."
아마 우리는 평생 이런 대화를 벗어날 수 없을 거다. 그러니까 우리가 베스트 프렌드라 하는 거고.
"니네가 아다라 그러는데, 상대방 생각하면 그런 말 쉽게 못 한다고."
"와... 존나 빡치네... 구마하 주제에 뭔..."
"하하하. 태윤아. 우리 서울도 왔는데 나가서 빡촌이나 갈까?"
"그럴까? 억울해서 살 수가 없구만."
"오~ 구마하 때문에 김태윤 이정석의 논쟁이 드디어 결론이."
"태윤아. 너 빡촌 가봤어?"
"꺼지라고 미친년아!! 지는 한 마디도 안 하면서 남 사생활은 왜 들춰 보는데?"
"저 새끼. 가봤네."
"와 미친 놈. 진짜냐?"
"아 닥치라고!!"
이런 평범하고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얼마나 반가운지.
대학에 와서 처음 느끼는 느긋한 분위기에 그동안의 스트레스가 날아가는 것 같다.
"생각해 보면 황당하지. 구마하만 후다고 우리는 아직."
"그만큼 절박했잖아. 섹스하고 싶다고 우는 놈이 어딨냐."
"하하하하~ 또라이들 진짜 좀 잊어라. 어?"
"그래도 해냈잖아. 목 마른 놈 우물 판다는 옛 말이 틀린 게 없어."
"난 솔직히 아직도 이 새끼 금메달 딴 거 보다 여자랑 했다는 게 더 안 믿겨."
"어! 나도!"
다시 중구난방 각자 떠들기 시작됐다.
"뭘 해야 빨리 차를 살 수 있을까? 차라도 있으면 연애하기 좋을 건데."
"과외해. 너 머리 좋잖아."
"성대생 누가 과외선생 써주냐?"
"마하야 넌 사장님 여자친구 봤어?"
"수정이 누나? 당연히 봤지. 요즘엔 바빠서 못 만났는데. 왜?"
"아니. 그냥."
"야. 이거 문자 좀 봐 봐. 은정이가 보낸건데, 이 정도면 진짜 거의 넘어온 거 아니냐?"
"남수야. 그냥 안부 문자잖아. 니 혼자 착각하는 거라고. 여자애들 원래 다 친절해."
"그래? 마하야 니가 봐도 그렇냐?"
"어디 봐 봐."
잡다한 이야기 가운데 태윤이 차 이야기가 관심이 생겨 물었다.
"태윤아 넌 차 뭐 사려고?"
"글쎄다. 그냥 아반테 정도."
"야 산타페 이런 거 비싸냐?"
"꽤 하지."
"디젤차가 비싸."
"왜? 너도 차 사게?"
"어이 구마. 넌 집에 차에. 다음은 결혼이냐? 대학생이 씨발 공부는 안 하고."
"아니 그게 아니라."
스무살과 자동차. 그래. 이게 이상한 게 아니야. 태윤이를 봐도 정상이라고.
"후우. 좀 깝깝한 얘기라서."
"뭔데?"
"한숨까지 쉴 뭐가 있어?"
"우리 학교 이야긴데..."
친구들의 기대와 다르게 신촌 생활의 막막함을 들려주었다.
박상택 이야기에 애들도 기겁한다.
"왜? 지도 차 타면서 애들한테 왜 그래?"
"몰라 미친 놈이야..."
"그 새낀 차 뭐 타는데?"
"방금 말한 산타페. 그래서 얼만가 궁금해 가지고."
"군대냐? 아니 군대도 그런 이유로 사람 갈구진 않을 걸?"
"연대가 그런다고? 니네 학교는 그런 거 없다고 들었는데?"
남수는 대한 체대 유도선수 출신 사촌형이 있어 체대 문화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었다.
"맞어. 그런 식이야. 말 조심하고, 행동 존나 무슨 RT고..."
"체대가 다르긴 다르구나. 우리는 남자 선배들 다 그냥 형 동생 친하게 지내는데. 맞담배 막 피고."
"그러니까. 대학이 그래야 하는 거 아니냐고. 체대 씨발... 아 짜증나."
"마하야 설마 때리진 않지?"
"때려? 대학생이? 학생들끼리 때린다고? 미친새끼들 왜 때려? 선배라고?"
"너 맞어? 우리 형이 넌 아무도 못 건드린다 그러던데?"
"우리도 때리진 않는데, 그런 분위기가 아주 없는 건 아니야."
아무튼, 여러 좆같은 일을 겪으며 요즘 목표가 생겼다고 알려줬다.
"엘리트 체육을 박살낸다라... 잘은 몰라도 무겁게 들리는데."
"뭐하러 그러냐? 피곤하게? 남들 뭔 상관이라고?"
"그래. 싸우는 건 아니지... 선배라면서..."
"싸우는 게 아니라. 그냥 그런 걸 없애고 싶어."
"마하야. 무슨 계획이 있어?"
"없어. 그냥 나 혼자 잘나서 지랄하는 놈들 찍소리도 못하게 하는 거야."
"그게 그렇게 말처럼 쉽게 될까?"
태윤이와 남수가 말했다.
"야. 과 문화라는 게 있잖아. 혼자 겉돌아야 결국 혼자 아냐?"
"그래. 너만 아웃사이더 될 거 같은데. 사람들한테 잘난 척 한다는 소리 들을 거고."
"그래서 나도 선배들 다 적으로 돌린다는 게 아니라 박상택 이 새끼만 조지려고."
"야. 싸움은 안된다. 너 그냥 일반 선수 아냐. 국가대표지. 너 싸우면 사회면 뜬다."
"어이 구마. 그 박상택이란 인간은 너한테 왜 지랄인 거야?"
정석이한테 박상택이 나에게 느끼는 자격지심이나 시기심에 관한 이야기를 해줬다.
"자세한 건 몰라. 그냥 이것도 내가 스키 탄다고 그 사람이 비추는 감정으로 추론해 본 거라."
"아니. 딱히 추론이고 자시고 없어. 느낀 게 맞을 거야. 좆같은 감정은 보통 잘 들어맞거든."
"너 오기 전에는 그 새끼 혼자만 국대였다며? 지 잘난 맛에 살긴 했겠네."
"그때는 별로 학과에 관심도 없었다고 들었어."
"남들은 운동 안 하는 애들도 수두룩한데, 그냥 선수도 아니고 국가대표 출신. 거기다 집도 좀 사는 도련님. 성격이 좆같을 수 밖에 없겠네."
"야. 집에 돈 있는 애들이라고 다 성격 좆같냐?"
"그래. 국가대표가 다 인성 쓰레기들이냐?"
"이 사람은 그럴 수 있다는 거지. 왜 나한테 지랄들이야? 지가 말해놓고서"
"근데, 존나 웃기네. 대학가지 간 새끼가. 그것도 운동한다는 놈이 그런 걸 따지고 있나..."
"많어. 솔직히 내가 양지 바른 곳에서 좋은 사람들 만났지, 승부의 세계에 시기 질투가 없을 순 없어."
다빈이도 그런 감정을 가지고 있었고, 권지성이나 기타등등.
오히려 동민이 같은 친구들이 누굴 질투하지 않고 자기 일을 한다.
엘리트 출신이라 자부하는 선수들이 잘난 사람들을 고깝게 보던 시선은 분명히 존재했었다.
"정리하면 이런 거네. 니네 선배라는 인간이 스키 종목 차기 에이슨데, 너네 코치 형 빠지고 지가 주목 받는 줄 알았더니, 웬 씨발 이상한 새끼 나타나서 스포트라이트는 다 뺏어가고."
"하필 또 과 후배라 안 볼 수도 없는데. 근데 이 새끼는 이미 메달도 존나 따고 스포츠 스타니까 더 빡치는 거고."
"근데 그러면 본인이 노력하면 되는 거 아냐? 왜 사람을 괴롭혀? 그것도 당사자도 아니고 다른 사람들을?"
"그러니까 못난 새끼라는 거지."
어쩌다 박상택 뒷담화가 됐는데. 뭐 어때. 지도 지 주변 인간들 모아서 내 욕하고 있을 건데.
"그래서. 나도 이사 끝나면, 이 새끼 신경 긁을라고 차 살까 말까 하고 있긴 했었거든."
"편의가 아니라 한 사람을 빡치게 하려고 돈을 쓴다?"
"씨발년 돈지랄 하는 거 봐라 존나 재수없네. 그 새끼도 빡치긴 할 거다."
"하하하! 제대로 엿 먹어라 되긴 하겠는데?"
애들이 차는 뭐로 보고 있었냐고 물었다.
"그래서 나도 차 이런 거 잘 모르니까. 산타페 이상은 끌고가야 그 인간이 빡치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 말이 실수였던 거 같다.
그때부터 여자고 대학이고 의미가 없어지고, 차 문제로 세 놈이 팽팽하게 대립하기 시작했다.
"BMW지!!"
"벤츠지 병신아!!"
"야. 근데 국산도 산타페보다 좋은 건 많잖아?"
"꺼져 이 새끼 돈 많어 어디 국산을"
"근데... 난 국산도 상관은 없는데."
"야. 미쳤냐? 국산 탄다고 그 새끼가 화 낼 거 같애?"
"그래. 이렇게 된 거 더 급을 올려서 끝판왕으로 가자."
"끝판왕이 뭔데?"
"페라리. 사서 나 좀 빌려주라."
"나도!"
"마하야 나도. 페라리 한번 타 보자."
"하하하! 미친놈들."
친구들과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다음 날. 한상률 감독님과 점심을 먹으며 여쭤보았다.
"차?"
"네. 차 하나 사려고 하는데요. 이왕 사는 거 감독님도 같이 타시면 좋으니까요."
"안된다."
"네? 왜요?"
"야. 형님이 너 집 사고 가구 사고 이러면서 돈 다 끊으라고 하셨어."
"...형이 왜요?"
스무살이 뭔 집이니 차니 돈을 막 쓰냐면서, 형이 자금을 동결해 버렸단다.
"아 감독님!"
"나도 마윤이 형님 의견이랑 같애. 너 돈 너무 써."
"저 뭐 쓴 거 없어요?"
"마하야. 스무살 용돈 100만원이면 남들보다 충분히 쓰고도 남어. 안돼. 차 같은 건 꿈도 꾸지마."
"아... 감독님..."
"됐으니까. 슬슬 대회 준비해라."
어느덧 4월 벚꽃이 만개하는 시간이 다가왔다.
육상의 계절이 돌아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