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부심과 자긍심. 그리고 자격지심. (2) >
"교수님. 저 왔습니다."
"어 그래 들어와라."
며칠 뒤 이현석 교수님과 상담 시간을 가졌다.
"앉아. 상률이한테 이야기 들었지?"
"네. 대회 일정 나왔다고요."
"국내 대횐데, 기업 주최고. 어떻게 할래?"
"무조건 가야죠. 저 대학 경기, 실업팀 경기, 해외 경기. 다 뛸 거에요."
"하하하! 기운도 좋다. 상률이랑 잘 상의해 봐. 니가 우리 학교 선수여도 소속 매니지먼트 입장은 또 다를 수 있으니까."
"네. 알겠습니다."
"이러면 분명 상률이 놈 지난 번 일로 비꼰다고 뭐라 하겠지?"
"하하하... 교수님."
"약 좀 받으라고 해야지."
대회 이야기를 마치며 교수님이 물어보신다.
"요즘 학교 생활은 어떠냐?"
"잘 지내고 있습니다. 동기들도 많이 사겼고요."
"정말로?"
"..."
"빨리 말 해. 나도 조금 이따가 회의 가야 돼."
"저 교수님. 혹시 어디까지 들으셨는지 제가 여쭤봐도 될까요...?"
"그 스승에 그 제자 답게, 니가 선배들한테 개겼다는 일방적인 주장이 들려오고 있지."
"아니요 진짜! 아 그건 아니고요..."
"그러니까 빨리 말하라고. 양측 이야기를 들어보고 화를내든가 나무라든가 결정하기로 했으니까."
"어느 쪽이든 혼나는 건가요...?"
"마하야. 무슨 이유가 있든, 신입생이 선배들과 갈등을 빚는 다는 건 우리 체육계 풍토에선 결코 좋은 이야기가 아니야."
"교수님. 저 진짜 그냥 편하게 말씀 드려도 될까요...?"
"그래. 빨리 너의 일방적인 주장을 펼쳐 봐."
박상택을 비롯해 지난 한 달 간 학교에서 겪고 느꼈던 일들을 전해드렸다.
"대학인데, 너무 학칙이 과하다는 걸 느낍니다."
"음."
"그리고 또 이것도 따져보면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선수와 비선수의 차별 대우도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 그런 입장들도 있지."
"어쨌든 몸 쓰는 사람들인데, 선생님을 해도 결국 체육 선생님이 될 거고요. 그런 사람들한테 오리걸음은 아니잖아요. 그게 무릎에 얼마나 안 좋은지 잘 아시지 않으세요?"
"예전엔 더 한 것도 많이 시켰는데. 하하하!"
"그냥 잘 못 된 걸 바꾸고 싶어요."
"너 혼자서?"
"...저도 제가 어디까지 행동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마하야. 세상 그 무엇도 혼자는 할 수 없다."
교수님도 눈을 지긋이 감으며 생각에 잠기셨다.
"글쎄다. 어려운 문제지. 나도 나이 마흔 가까워지는 옛날 사람이라 마하 니 녀석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듣기엔 감정적인 문제가 있고."
"..."
"그렇다고 너의 말을 단지 세상 물정 모르는 새내기의 투정이라고 보는 건 아니다."
교수님은 반반 문제가 있다고 말씀하셨다.
선배들은 그릇된 관행을 강요했고, 후배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대감을 비춤으로 학과 내에 불편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기회 있을 때 술 한잔 하면서 시간 보내고 서로 이해하면 좋겠지만"
"...그 선배가 절 그렇게 안 대하실 거 같은데요?"
"그렇겠지. 널 좋아하는 놈들도 있는 만큼, 싫어하는 놈도 있겠다 싶었지만, 막상 이렇게 드러나니 어렵긴 하다."
"교수님 선배님들이 그런 행동을 했을 때 얻어지는 이점은 뭔가요...?"
"일단 통솔이 잘 돼. 집단으로 움직이기 좋고. 사람을 컨트롤하기가 쉬워진다."
"..."
"우리도 그런 문화가 잘못 됐다는 건 알고 있어. 아니 이미 진작 다들 알고 있었다."
다만, 바꾸고 변화를 위한 노력을 해봐도 쉽게 떨쳐지지 않는다고 하신다.
"마치 그림자 같네요."
"그렇지. 말 그대로 체육의 그림자야."
"..."
"혼자는 무리다."
"네..."
당연히 혼자선 무리지. 누군가 도와줘야지. 왜 뻔한 말씀을 하시는 걸까...
"내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
"그냥 포기하라는 뜻 아니신가요?"
"명문대생이라는 놈이 왜 이렇게 생각이 짧어."
"그냥 계란으로 바위 치지 말라는 말씀 아니세요?"
"마하야. 계란으로 바위를 왜 쳐. 계란 아깝게."
"음..."
"가진 게 계란이고, 이걸로 바위를 부셔야 하면. 어떻게 해야 되냐?"
어떻게 해? 에네르기파라도 쓰라는 건가?
"모... 모르겠는데요?"
"야. 바위를 부셔 줄 수 있는 사람한테 계란을 주면 되잖아."
"어어~ 으음..."
"그래도 이해가 안 돼?"
"저 교수님. 제가 어떻게 메달로 운 좋게 여길 왔지. 저 머리 되게 나쁜 놈이에요..."
"하하하~ 이 자식. 솔직해서 좋겠다!"
사람을 모으라고 하셨다.
혼자는 감당 할 수 없는 일도 팀과 동료가 있다면 그것이 하나의 세력이 되어.
"부당함을 저항할 수 있는 힘이 된다는 말이다. 알겠어?"
팀. 나의 팀.
나와 뜻을 같이 해줄 수 있는 사람들...
"무슨 동아리 같은 걸 말씀하시는 건가요?"
"동아리도 나쁘지 않지만, 이럴 땐 내가 잘 할 수 있는 걸 중심으로 사람들을 모으는 게 좋지. 그래야 강한 카리스마가 생기고, 말에 설득력이 생기니까."
"제가 잘 할 수 있는 거라 하신다면..."
운동. 그리고 같은 운동중에서도.
"혹시, 육상팀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렇지. 안 그래도 연세대 육상팀을 만들까 했는데, 마하 니가 주장을 맡아라."
좋은 생각 같다.
그림도 좋고 방향도 나쁘지 않고.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복학생 가운데 몇 명은 선출도 있고, 괜찮은 애들이 보이더라고."
"네? 교수님 잠시만요. 선배들도 있는데 제가 주장을 할 수 있을까요?"
"그럼. 지금 우리나라에, 아니. 세상에 너보다 달리기 잘하는 놈이 누가 있어?"
하긴 그런가?
내가 주장이 된다면, 나에게도 팀이란 책임과 권한이 생기니까.
교수님 말씀대로 학과에 퍼져있는 군기 문화를 거부할 수 있는 목소리가 생긴다.
그런 의미를 떠나서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말씀이었다.
지금도 선배들의 강압에서 팀이 있는 애들은 자유롭게 빠질 수 있다.
물론, 그 팀 내부에서 벌어지는 부조리는 다른 이야기가 되겠지만.
어떤 울타리는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뜻 아닌가.
"교수님. 뭔가 빠르게 해답이 찾아진 거 같아요!"
"이놈아. 내가 한상률을 일 이년 알고 지냈어? 이런 문제 제기를 처음 들었을 거 같애? 나도 늘 생각하고 있던 문제야. 단지, 바꿨다 변했다 싶어도 조금 지나면 도돌이표로 오는 이야기에 지쳐서 손을 놓고 있을 뿐이지."
"양민구 선배도 그런 이야기 했었어요... 그래서 우리가 바꿔야 한다고."
"민구는 군필자라 더 잘 알겠지. 군대고 어디고 부조리다 뭐다 바꿔도 또 터지고 그러니까."
그냥 사람 사는 세상이 그렇구나 하는 식으로 받아들여 포기하면 편하지만. 변화란 오랜 시간 지속적인 관심과 노력 끝에 찾아오는 법이다.
아니어도, 할 만큼은 해봤다라는 메세지를 누군가에게는 줄 수 있다고 하셨다.
"메세지..."
"마하야. 우리 체육인들이야말로 누구보다 이런 그림자를 떨쳐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야. 남들이 아니라."
강압적인 문화가 좋다 나쁘다를 떠나, 엘리트 체육이 세상에 어떤 의미로 필요한가를 따져본 적은 있냐고 물으셨다.
"저 솔직히 엘리트 체육이 뭔지도 잘 모르겠어요."
"흠. 엘리트 체육의 본질이라."
"그냥 체고 체대 국가대표가 엘리트 체육인지, 아니면 잘난 누군가 남을 깎아내리고 때리고 그러는 게 엘리트 체육인지..."
"자부심이 높은 선수가 자만에 빠진 나머지 타인에 대한 배려가 없는 것. 그것이 엘리트 체육의 암(暗)이다."
"..."
"하지만 이런 엘리트 체육을 뿌리 뽑을 수 없는 건, 그 속에서도 명(明)이 있기 때문이라고 봐야해. 그리고 그것이 우리 체육인들이 원하면서도 문제를 외면해야 하는 이유고."
"밝은 부분이 뭔데요?"
"너."
"저요?"
"우리나라 체육은 정부의 프로파간다 선전에 활용되어 발전한 측면이 있어."
"네."
"엘리트 체육의 뿌리는 그곳에서 왔다. 그리고 어찌됐든, 그런 상황에서 체육인들이 세상의 주목을 받고 사람들에게 운동이란 매체가 넓게 퍼진 건 무시할 수 없어."
메달은 선수의 명예를 떠나, 국가 이미지와 대외 홍보를 위해서도 활용된다.
IOC도 이 점을 알고, 단순 스포츠에 드라마틱한 흥미요소가 더해져 올림픽이 되었다.
한국 뿐만 아니라 세계 모든 국가들이 올림픽이란 국제 이벤트에 선수들을 파견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세계와의 경쟁. 그곳에서 우리 한국인이 우뚝 섰다. 수많은 도전자를 무찌르고 우리가 해냈다는 성취감.
이겼다는 승리감의 대리만족을 전해주는 것이다.
"만약 그것이 아무 의미가 없는 세상이라면. 세상이 구마하의 금빛 레이스에 열광할 일도 없었겠지."
"네... 그렇죠."
부정하기가 어렵다.
내가 세상의 인정과 관심을 받은 걸 떠나, 당장 나부터도 월드컵 때 태극전사들의 승전보에 누구보다 신나고 좋아했었으니까.
그들도 엘리트 체육을 거쳐 선별되고 뽑혀진 우수한 선수들이 아니던가.
"감정에 치우쳐 문제점을 지적하는 건 누구든 할 수 있는 일이다."
"네."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면, 상황을 제대로 볼 줄 알아야 해. 취할 건 취하고 버릴 건 버려야 그때서야 변화가 시작된다."
"..."
"어려운 도전이 될 거다. 이건 육상 선수인 너가 동계 올림픽에 나가서 메달을 따겠다는 그 이상의 도전이 될 거야."
"노력해 보겠습니다."
"그래. 그럼 그렇게 알고. 난 회의 간다."
"교수님."
"응?"
"저 오늘 처음으로 연세대 와서 좋다란 마음이 들었어요. 좋은 말씀 감사드립니다."
"하하! 녀석. 힘내고."
* * *
"보자. 이쯤이면 되려나?"
학생회에 들려 대자보 허락을 받고, 백양로에서 올라오는 게시판에 하나, 체육관 앞에 하나. 군데군데 사람들이 많이 볼 수 있는 곳에 육상팀 모집 공고를 붙였다.
현재 확정된 인원은 육상 선출인 3학년 복학생 양민구 선배와. 중학교 때까지 테니스를 쳤던 동기 서재민. 둘.
팀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빈약한 인원이지만, 학생회도 내가 중심이 되어 육상팀을 모집한다니 많이 몰릴 거라며 큰 관심을 보여줬었다.
"저기. 구마하 맞으시죠?"
"아 네 맞습니다."
"이거 동아린가요?"
"아니요 일단 선수로 뽑고 있는 건데요."
"아~ 네. 그러시구나."
"..."
"수고하세요."
그래. 어쩌면 여기가 변화의 시작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저기요!"
"네?"
"일반으로 오셔도 같이 운동하실 수 있어요."
"근데 전 그냥 학생인데. 선수까지는."
"생활 체육으로 같이 하시는 거죠."
선수만 가려 뽑을 게 아니야.
오히려 선수들만 있으니까 체육의 뿌리 깊은 문화가 뽑히지 않는 걸 거야.
지나가다 다가온 학우분을 붙잡고 열심히 설득을 시작했다.
"육상이 그렇게 어려운 운동이 아니거든요. 또 하시다가 실력이 나아지면 자기평가 차원에서 대회도 한번 도전해볼 수 있고요."
"맨날 달리기만 하는 거 아닌가요?"
"절대 아니죠. 다양한 운동을 해야 몸이 빨라집니다."
"저 달리기 18초 정도 나오는데, 여기서 더 빨라질 수 있어요?"
"그럼요! 훈련 여하에 따라서 얼마든지 나아질 수 있죠."
한 사람과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어느덧 여섯명이 붙어서 관심을 가져준다.
"육상이 다리가 빨라야 잘 뛴다고 알고 계시는데, 오히려 다리는 그냥 자동차의 바퀴라고 생각하시고, 진짜 엔진은 바로 이 몸통. 코어에서 힘이 나와야"
하나씩 해보자.
어차피 1학년이잖아.
시간은 선배들이 아닌 내 편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