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륜기로 가버렷-108화 (108/401)

< 자부심과 자긍심. 그리고 자격지심. (3) >

만나는 사람마나 육상팀에 질문을 던졌다.

"일반도 뽑아요?"

"네."

하나씩 설명이 더해지고 있었다.

운동은 선수만 하는 게 아니다.

그냥 일반인들도 운동을 하면 신체능력이 증진될 수 있고.

"집중력 체력. 이런 거 공부하는데 있어서도 굉장히 중요하잖아요."

"으음. 그렇죠."

"근데, 그럼 어떻게 운동하는 거에요?"

교수님들과 협약도 되어있어 육상팀에 온다면 체육시설 이용도 허락 받을 수 있다는 말이 가장 관심이 큰 것 같다.

"헬스 같은 거?"

"네. 헬스 관심 있으세요? 제가 몸매 제대로 잡아드릴게요."

"우리도 그런 몸이 될 수 있어요?"

"물론이죠! 제 기사 안 보셨어요? 저 운동하고 19cm 컸어요!"

"근데, 체육시설은 사체과 말고 아무도 못 쓴다고 들었는데..."

"다른 운동부 방해되지 않게 비어있을 때 이용해야죠."

"그럼 부비는요?"

"아... 부비."

어이고야 이렇게 해도 따질 게 은근 많구나.

체육이니까 활동비도 있겠지. 부실이라든지 기타등등. 와 팀 만드는 거 쉽지 않네...

"죄송합니다. 저도 지금 시작하는 단계라. 잘 모르겠어요."

"시작이라고요?"

"야. 넌 지금까지 무슨 얘기 들었냐?"

"그래. 구마하가 육상팀 만든다고 계속 얘기 했는데."

"난 중간부터 들었어."

"하하. 싸우지 마시고요. 선수들은 몇 명 있는데, 팀은 아직 없어서. 그걸 하나로 묶어서 움직이려는 거에요."

사람들이 관심이 생기는가 보다.

"한번 해볼까?"

"그러게. 시작이면 꼭 운동 아니어도 여러 역할 있을 거 같은데?"

"나도 아직 동아리 뭐 하나 확정하지 않았는데. 운동할까?"

다같이 의견을 모아주고 있었다.

일단 팀이 되려면 역시 사람이 필요하고, 많은 사람을 모으려면 홍보가 되어야 한다.

그러다 나온 아이디어가 최고의 홍보 효과를 보려면 대자보 붙이고 돌아다니는 것 보다 차라리 내가 직접 뛰는 모습을 한번 보여주는 게 어떻겠냐는데.

"오~ 괜찮네요?"

"메달리스트 훈련 장면은 보기 어렵잖아요."

"저도 궁금해요. 9초가 얼마나 빠른지 아무래도 TV로 봤을 땐 잘 몰라서."

"알겠습니다. 그것도 날짜랑 봐서 여기다 써놓을게요."

교수님과도 상의하니 좋은 생각이라고 하셨다.

"안 그래도 니가 농구부에서 서전트 뛴 게 있어서, 그런 거 하면 입소문 확 타긴 할 거다."

"정말요? 그럼 백번이라도 뛸 수 있죠!"

오후 시간. 먼저 백양로에 붙인 대자보를 찾아가 매직으로 시범경기 날짜를 적었다.

[4월 10일. 대운동장에서 100미터 시범경기를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렇지. 이렇게 육상의 간지를 알려주면 사람들도 좋아라 하겠지."

나는 빼더라도, 이 학교의 대부분은 어려서 죽어라 공부만 파서 신촌땅을 밟았을 거다. 운동이나 체력에 대해서 관심이 있을거야.

그렇다고 아주 동아리만 될 순 없으니, 다시 사체과로 가서 이야기를 나눠봐야지.

아. 바쁘다. 바뻐. 수업도 하랴. 과제도 하랴. 운동도 하랴 팀도 만들랴.

그래도 뭔가 하는 일이 있으니까 재밌긴 하네.

혼자 뿌듯뿌듯 하면서 대자보를 다시 찬찬히 읽어보고 있었다.

그런데. 옆에 흐릿한 그림자가 다가와 말을 건다.

"오~ 재밌는 거 하네?"

싸늘한 말투에 고개를 돌려보니 박상택 선배가 비웃음을 날리며 대자보를 읽고 있다.

"..."

"으음 선수 모집. 애들이 말하던 게 이거구나. 육상으로 방향을 잡았나 보지?"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일단, 인사는 해줘야지. 선배니까...

"잘 했네. 스키는 원래 아무나 탈 수 있는 게 아니거든."

"그럼요. 그래서 제가 토리노에 가고 싶은 거고요."

"뭐...?"

뭘 놀래. 이제 와서 새삼?

"너 방금 뭐라고 그랬냐?"

"토리노 동계 올림픽을 가고 싶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어이 구마하 올림픽이 씨발 애들 장난이냐?"

아무 소리 안 하고 가만히 있었다.

그러자 박상택도 지가 던진 재수 없는 질문이 되돌아가 심장에 박히는가 보다.

씩 웃으며 고개를 돌린다.

"어~ 그래. 넌 가봤다 이거지..."

가보기만 했냐? 메달도 따고 왔다 새끼야. 그것도 세 개나.

그중 2개는 세계 신기록과 올림픽 기록이고, 심지어 단거리 중거리는 엄밀히 다른 종목이다.

라고 말하기엔 너무 잔인하고. 그냥 내 스케쥴만 알려줬다.

"11월까지는 육상 시즌이니까요. 시즌 마치고 바로 스키 타러 가야죠. 그래서 내년 2월까지 국제 대회 포인트 확보하고"

"어이. 구마하."

"네. 선배님."

"남녀 포함 열 두 종목 스키에서, 우리나라 올림픽 참가표가 몇 장 나올 거 같냐..."

"두 장으로 알고 있습니다. 남녀 포함하면 네 장이고요."

"그걸 니가 받겠다고? 다른 선수들은 병신이야?"

"선배님. 스키는 개인종목 아닙니까? 제 도전에 선배님의 허락이 필요한가요?"

"아니요. 좆대로 하세요."

빈정대지마 씹쌔끼야... 내가 유명한 사람만 아니면 넌 이미 뒤졌어.

"저 박상택 선배님..."

"왜."

"왜 이렇게 저를 싫어하십니까?"

"오~ 이 새끼. 생각보다 똘똘한데? 그걸 알았어?"

"..."

운동은 즐겁게 하는 거다.

선의의 경쟁 속에 자기 발전과 도전을 이겨낸 스포츠 정신을 존중해주는 것이다.

적어도 내가 겪은 올림픽은 그런 의미가 있었다.

박상택이 지난 번 같이 대가리를 들이밀며 말했다.

"그냥. 재수 없어서."

"그러십니까."

"씨발놈아. 내가 하는 운동이 장난같냐? 메달 따니까 세상이 만만하게 보여? 우리가 놀고 있는 놈들로 보이냐고. 왜 와서 지랄이냐 좆같게."

"스키의 매력에 빠졌을 뿐입니다."

"끝까지 개겨라."

"저 선배님?"

"왜?"

"사람들이 쳐다보는데요. 얼굴 좀 치워주시죠."

"..."

박상택도 주변을 둘러보며 씩 웃는다.

"시범 경기 잘 해. 나도 보러 간다."

"그럼요. 물론이죠."

저녁엔 시간 되는 동기들을 만나 술 한잔 하면서 육상팀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같이 하자. 어?"

"아니... 우리도 운동은 하고 싶은데..."

"근데 육상이... 원래 하던 것도 아니고..."

"야. 니네가 언제 육상을 안 했어? 너네 몸풀기 할 때 운동장 안 뛰어? 제자리 뛰기 안 했어? 체력 단련은 똑같다니까? 오히려 육상은 모든 운동의 기본이잖아."

그러다 한 사람이 말해줬다.

"마하야. 우리도 알지."

"시간이 그렇게 안 돼?"

"아니... 시간이 아니라..."

여기도 박상택과 몇 몇 비뚫어진 선배들의 방해가 드러난다.

"선배들이 하면 죽인다고..."

"후우..."

"새끼야. 니가 그때 괜히 개겼어."

"야. 마하한테 왜 그래. 솔직히 얘 말도 맞지. 지는 선수면서 왜 와서 갑질인데."

"아... 진짜 씨발... 아후..."

동기들이 선배들에게 제대로 겁을 먹었다.

아무리 설득을 해도 두려움에 애들이 몸을 움직일 수 없다.

자리를 옮겨 양민구 선배 자취방으로 건너갔다.

"담배 펴도 괜찮지?"

"네. 뭐 간접흡연으로 제 폐 망가지진 않아요."

"말에 뭔 뼈가 씨... 곰국 끓이냐?"

"하하하. 선배님."

왜 왔냐길래, 동기들을 만나 들었던 이야기를 전해드렸다.

"그래. 형들이 그러면 애들은 겁먹지."

"그러니까요. 아니 제가 싫으면 싫은거지. 왜 우리 동기들한테."

"상택이 이 새끼가 그 정도로 막가는 놈은 아니었는데..."

신입생 때도 자기 프라이드는 강했지만, 저렇게 심사가 뒤틀린 친구는 아니었다는 민구 선배.

"선배님. 죄송한데요. 그 분 이야기까지는 제가 신경 쓰고 싶지 않아요."

"그래. 아무튼, 너도 괜히 싫다는 애들한테 같이하자고 부탁하고 그러지 마."

"아니 근데... 하려는 것도 못하게 막는 건."

"마하야. 내 말은, 걔들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런 놈들을 뽑지 말라고."

"..."

"차라리 니가 여기저기 말했던 일반 학우들 있지? 거기서 오는 사람을 뽑아. 알겠어?"

"왜인지 여쭤봐도."

"왜겠냐. 운동은 의지가 있는 사람이 하는 거야. 알잖아. 여긴 군대가 아니야. 대학이지."

그렇구나. 자율 의지와 선택이 의욕을 불러 일으킨다. 감독님이 나에게 하신 교육과 똑같은 방법이다.

"두고 봐. 좋다고 하면 나중에라도 찾아올 거야. 시작은 원래 그렇게 가야 돼."

"네. 선배님."

"아무튼 좋구만. 한밤중에 세계 챔피언이 이런 상담도 받으러 오고. 야 요즘 형이 니 덕에 자존감이 좀 생긴다. 어?"

"하하하. 선배님."

다음 날. 테니스 선출인 동기생 재민이와도 학식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진짜? 민구 선배가 그러래?"

"응. 의지 없는 사람은 뽑지 말라고 그러시더라고."

"...근데 마하야. 나도 솔직히 말하면"

재민이도 육상 선수가 되려는 게 아니라, 다시 테니스를 하고 싶어도 굳은 몸을 어쩌지 못해 육상을 시작하려고 하는 거란다.

"그게 왜?"

"아니. 민구 선배 이야기 들어보면 뛸 마음 없는 사람은 뽑지 말라는 거 같아서."

"야. 그건 아니지. 넌 운동을 하고 싶어서 몸을 되돌리려고 하는 거잖아."

"응."

"해. 괜찮아. 그리고 너라도 있어야 내가 의지가 돼. 아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어야지."

"너도 그런 거 따지냐?"

"당연한 거 아니냐? 뭐 금메달 따면 사교성도 갑자기 좋아져?"

재민이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옆에 커다란 그림자가 다가왔다.

보나마나 농구부 익범이 같아 인사도 하지 않고 엉덩이를 옮겼다.

"왔냐? 앉어."

"어우. 큰 놈들이 둘이나 있으니까. 숨이 막히네."

"마하야. 육상팀 그거?"

"어. 누구 하고 싶다는 애 있어?"

"나."

"니가 왜? 넌 농구부잖아."

"점프력 높이고 싶어."

익범이는 나보다 키가 크지만 서전트에서 나보다 한참이 낮단다.

"너 하는 하체운동. 그거 육상팀가면 할 수 있냐?"

"농구부에서 뭐라고 안 할까?"

"개인 훈련시간에 참가하면 돼."

"하하하~! 마하야?"

"응?"

재민이가 웃으면서 물어본다.

"야. 여기에 익범이 코칭까지 해주면, 넌 그럼 수업 언제 하냐?"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지. 선수에게 주어진 특별한 관용을 사용해야지."

말 그대로 선수는 선수니까. 운동하는 사람들이라고 교수님들께 말씀드리면 수업에 있어 조금 용이하게 빼주시는 부분이 있다.

그러자 익범이가 놀라며 물었다.

"뭐야? 넌 그럼 지금까지 수업 다 가고 있었어?"

"어. 웬만해서는. 나 지각도 없어."

"익범아 넌 수업 안 들어?"

"우린 많이 빠지지. 어쩔 수 없잖아. 훈련 시간이 안 맞는데."

"와... 진짜 선수와 비선수 대우가 완전히 다르구나..."

친구들과도 점점 의견이 모아지고, 선수 출신 아닌 일반인에서도 운동하고 싶다는 뜻이 모아져, 시범경기 전까지 모이게 된 인원이 나를 포함 총 아홉 명.

"아홉이라. 나쁘지 않은데. 그쵸 감독님?"

한구 스포츠에서 명단을 작성하고 기타등등 행정을 보고 있는데, 감독님이 물어보신다.

"너 요즘 재밌어 보인다?"

"재밌어요 감독님. 저 진짜 대학생 된 기분이에요!!"

"하하하! 그래. 공부 안 하고 딴 짓 하는 게 진짜 대학생이지."

다음 날 시범 경기 날.

민구 선배도 의견을 줬고 재민이나 익범이도 그랬는데. 나 혼자 훌쩍 뛰어서야 그게 얼마나 빠른 건지 비교가 안 된다고, 아홉명의 육상팀원들이 달리며 속도에 대한 감을 알려주겠다고 했다.

운동장으로 올림픽 때 입었던 육상복을 입고 나왔다.

다른 사람들은 그냥 체육복이라 나만 짧은 바지에 런닝 차림이었다.

모두들 물어본다.

"야. 오늘 몇 도냐?"

"마하야 안 추워?"

"이 정도야 가뿐하죠."

"와... 근데 생각보다 많이 모였는데?"

"세계 챔피언 런닝인데, 관심이 가겠지."

"아무튼 몸부터 풀까요?"

다 같이 호흡을 맞춰 운동장을 달렸다.

둘 씩 네 줄로 여덟 명을 맞추고, 내가 선두에서 팀을 이끌었다.

누군간 사진도 찍고 우리들을 보면서 싱글벙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처음으로 이 학교에 나의 보금자리와 존재감이 확립되는 기분이었다.

"와 그거 두 바퀴 뛰었는데 되게 힘드네요..."

"처음이라 그러세요. 하다보면 열 바퀴, 스무 바퀴 거뜬합니다."

아홉명의 팀원 가운데, 민구 선배를 포함해 군필자가 세 사람이었다.

"구보 뛰는 거 같네."

"그러게요. 학교에서 이런 걸 할 줄이야."

민구 선배도 슬쩍 다가와 말씀하셨다.

"마하야"

"네 선배님."

"재밌다."

"재밌으세요?"

"어. 진짜 다시 운동하는 기분이야... 되게 좋다."

"선배님."

"응?"

"파이팅입니다."

"그래. 파이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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