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륜기로 가버렷-110화 (110/401)

< 자부심과 자긍심. 그리고 자격지심. (5) >

구마하의 시범경기 날.

스키 코치 김정준이 연세대 교문 앞에서 손목시계를 보고 있었다.

"사무실도 가까운 사람이 왜 이렇게 안 와...?"

코리안 타임에 불만을 가지고 있는데, 지나가는 여학생들에게서 마하의 이야기가 들려왔다.

"오늘 학교에서 뭐 해? 운동장에 왜 저렇게 사람이 많어?"

"구마하 시범경기."

"진짜? 우리도 한번 가볼까?"

"그런 거 봐서 뭐해. 밥이나 먹으러 가자. 나 배고파."

"그래도. 궁금한데."

학생들이 지나가며 들려준 이야기에 김정준도 관심이 생겼다.

"시범경기?"

그가 멀리 고개를 빼고 있을 때, 한상률이 다가오며 인사를 건넨다.

"정준 씨~! 여기."

"아. 형님. 왜 가까이 있는 사람이 늦어요?"

"하하. 미안 미안. 누구 좀 같이 오느라."

한상률이 함께 온 일행을 소개시켜준다.

"인사해. 임한기 기자님이라고."

"아 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K-일보 스포츠 기자 임한기입니다."

"예. 전 뭐."

"알죠. 김정준 선수. 한국 알파인 스키의 자존심."

"아... 하하. 고맙습니다."

"기자님이 정준 씨 한번 만나게 해달라고 하셔서."

"저를요? 갑자기 왜요?"

메이저 스포츠 신문 기자가 알아주어 조금 놀라는 김정준. 하지만.

"구마하 선수 스키 코치님이시라면서?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고 싶어서요."

"아~ 그러시구나. 알겠습니다."

그래. 이게 현실이지... 그럼 그렇지...

한국 스키에 누가 관심을 가져준다고...

씁쓸한 마음을 미소로 감추며 김정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가실까요?"

"네. 저 근데, 오던 길에 들었는데 구마하 선수 오늘 학교에서 뭔가 하나보죠? 이름이 많이 들리던데."

"아. 이 녀석 육상팀 만든다고 이벤트 어쩌구 하던데, 그게 오늘인가 보네요."

"으음..."

"궁금하시면 보러 가시죠?"

"정말요?"

"정준 씨 시간 괜찮겠어?"

"그럼요. 형님 저도 마하 코치잖아요. 저도 이 녀석 뭐하나 궁금해요."

"그럼 다 같이 잠깐 학교 구경이나 가볼까요?"

"좋죠!"

대운동장으로 걸어가며 한상률이 임한기 기자를 보다 더 자세하게 소개해 주었다.

"진짜 모든 기자들이 다 임한기 기자님 같으면 내가 다시 언론을 믿지."

"하하하! 귀담아 들어야 할 내용이네요."

"어떤 기사 써주셨는데요?"

"주영이 기사 못 봤어? 저기 용인에 한주 고 이야기."

"아. 그거. 봤어요."

"그거랑 또 다른 것들도 몇 개 있고. 뭐 뭐 쓰셨죠?"

"보자. 제가 구마하 선수 특집 기사가..."

지난 올림픽 때 인연으로 구마하의 이야기를 심도 있게 다뤄주던 임한기.

김정준도 그의 이야기를 듣자, 바로 몇 가지 내용이 생각났다.

"아~. 그럼 그 기사도 기자님이?"

"네. 맞습니다."

"오~ 그러시구나. 와 되게 좋은 기사 많이 써주셨네요."

"하하! 저야 신랄하게 까내리고 싶지만 이거 옆에서..."

"한구 스포츠는 구마하 매니지먼트 입니다. 기자님."

"보셨죠? 다 짜고 치는 거에요."

"하하하하~"

임한기도 이주영의 근황에 대해 물어보았다.

"감독님. 한주 고는 요즘 어떤가요?"

"정신 없죠. 그 녀석도 그만한 인원은 처음 맡아봐서. 보조 코치들도 두 사람 더 뽑았다 하던데."

"한주 고도 언제 한번 가봐야겠네요. 올해 고교 육상은 관심이 클 거 같은데."

저벅저벅 걸어가는 가운데 김정준이 한상률에게 말했다.

"마하는 좋은 사람들이 많네요."

"왜 그래? 정준 씨도 그 중 한 사람이지."

"제가 뭘요. 아직 한 것도 없는데..."

기자들이 케어도 해주고 홍보성 기사도 써준다.

광고나 대중의 관심이 전부가 아니다.

성공한 선수의 삶이란 이렇게 다르구나...

함께 하면서도 어딘가 쓸쓸함을 느끼는 김정준이었다.

"어. 저깄네."

한상률과 임한기. 그리고 김정준. 세 사람이 육상팀과 야구부가 합동 훈련하는 모습을 보았다.

"오~ 이런 것도 재미난 기사감이네요. 구마하 VS 연세대 야구부."

"기자님. 왜 애들 밥그릇을 뺏으려고 합니까? 학교 신문부에서 쓰겠죠."

"그러니까 기자죠. 걱정 마세요. 오늘 제 관심은 김정준 코치님한테 있으니까."

그것이 나에 대한 관심인가? 마하에 대한 관심의 통로가 아니던가?

김정준은 두 사람 모르게 미소를 지으며 속을 달랬다.

임한기 기자가 물었다.

"올해 연고전은 조금 긴장되겠어요?"

"고연전이요? 고연전에 육상 경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 후배들이 연세대 상대하며 긴장하겠습니까."

"하하하~ 서운한 거 아니시죠? 신촌에 있다보니까."

"알죠. 농담이신데. 괜찮습니다."

양민구와 허태석의 승부가 벌어지고 있었다.

예상과 달리 야구부의 승리에 한상률도 호기심이 생긴다.

"으음. 저 친구가 양민구구나. 몸이 괜찮네. 계속 뛰었으면 잘 달렸을 건데."

"형님도 아는 학생이세요?"

"그냥 뭐. 응원해주고 싶은 친구지. 마하한테 들었어."

신입생 때 은퇴하고 다시 복귀를 선언한 그의 도전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한상률이 흐뭇한 마음으로 시선을 돌리는데, 김정준도 멀리 운동장을 지켜보는 박상택을 발견했다.

"어? 형님. 잠시만요."

"왜?"

"아는 얼굴이 있어서요. 잠깐 인사 좀 하고 올게요."

"그래 정준 씨. 다녀와."

낯선 공간에서 아는 얼굴을 만난 반가움을 뭐라 할 수 있겠는가.

김정준이 박상택에게 다가가며 둘만의 추억을 떠올린다.

오랜 시간 함께 운동한 동생. 대학까지 라이벌 학교로 진학해 그 관계는 남들보다 더 끈끈한 우정을 맺어왔다.

심지어 위치도 알파인 스키의 에이스와 차기 에이스였던 두 사람이었다.

처음엔 상택이를 봤다는 마음에 기쁨만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서자 그의 눈빛에서 생각과는 다른 살벌함이 읽힌다.

"..."

김정준도 고개를 돌려 상택이가 보는 곳에 시선을 두었다.

구마하가 사람들과 웃으며 이야기를 하고 있다.

얼마 전 마하와의 통화가 떠오른다.

'형. 박상택이라고 아세요? 어떤 사람이에요?'

둘의 갈등이 생각보다 깊은 것을 알아가며, 김정준이 다가가 박상택의 어깨를 건드렸다.

"야."

"뭐야...?"

"이 자식은 형도 못 알아 보냐?"

"정준이 형...? 형 왜 여기 있어?"

"그냥. 일 때문에 왔다가."

"..."

박상택이 출발 선으로 걸어가는 구마하를 흘겨보며 말했다.

"일 뭐? 저 새끼?"

"야. 상택아."

"씨발 재수없는 새끼..."

"..."

구마하는 야구선수와 10미터 핸디캡 대결을 앞두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박상택이 또 한번 이를 부득부득 간다.

"저 씨발놈 저게 남들 업신여기는 거 아니면 뭐라고..."

"상택아. 너 왜 이래?"

"뭐? 가. 왜 와서 아는 척이야."

"야 이 새끼야... 형이 너한테 아는 척도 못 할 사람이냐?"

"후우... 정준이 형. 그냥 나 좀 냅둬..."

그 순간, 탕~! 총소리와 소리와 함께 구마하가 달려나간다.

압도적인 차이로 10미터 차이를 따라잡고 일찌감치 결승점을 지나는 구마하.

같이 뛴 야구 선수도 월등히 벌어지는 기량에 웃으며 시합을 멈췄다.

"김태석 저 병신 새끼... 지고도 웃어? 등신 같은 놈!"

"야. 너 따라와."

"아 왜 이래! 놔 이거!!"

박상택이 악다구니를 쓰지만, 김정준이 힘으로 그를 끌고 나갔다.

주변에서 쏟아지는 불편한 시선을 지나쳐 두 사람은 조용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아 씨발 좀 놓으라고!!"

"상택아!!"

"뭐!"

"너 왜 이래 새끼야?!"

"왜 이러긴. 몰라서 물어?"

"..."

안다. 너무 잘 알아서 그의 마음이 더 안타깝게 느껴진다.

스키에 대한 자부심. 그동안 갈고 닦아온 훈련의 무게.

그러나 세상은 그들을 보지 않는다.

오직 메달을 딴 사람만이 주목을 받는다.

"상택아. 니가 이럴 필요 없어."

"아 뭐래 진짜... 짜증나게."

"야 이 새끼야. 너 자꾸 형한테"

"형. 형은 배신자야."

"...뭐?"

그의 아픔을 누구보다 이해하고 공감해 줄 수 있는 사람은 김정준이었다.

하지만, 박상택의 눈에 그는 변질자로만 비춰진다.

"너 지금 당장 마하한테 가지고 있는 그 이상한 감정 버려."

"내가 형 말을 왜 들어야 돼? 형이 내 코치야?"

"상택아... 스키의 자부심을 이런 식으로 지키려 하지마. 마하는 지가 노력해서 얻은 걸 누릴 뿐이야. 저 녀석 스스로 쌓아올린 자긍심을 너 혼자 불편하게 의식하고 있다간"

"형. 코치비 얼마 받어?"

"제발 그만해라..."

"지금도 줘? 잘 됐네. 형 맨날 돈 없다고 가난한 소리하고 다니더니. 잘 됐어. 일하지 않아도 돈 주는 놈이 젤 좋은 놈이지 안 그래?"

"이 새끼가 진짜!!"

김정준이 박상택의 멱살을 쥐어 잡자, 그도 손을 뻗어 김정준의 목덜미를 붙잡는다.

"정신차려. 이러면 너만 망가지는 거야 알어!!"

"천재? 괴물? 좆까. 난 절대 니들한테 안 져."

"..."

"이 씨발. 놔!"

박상택이 손을 뿌리치며 터벅터벅 걸어나갔다.

김정준도 한숨을 쉬며 일행들에게 돌아간다.

그들이 있는 곳은 추웠지만, 운동장은 축제라도 맞은 듯 뜨거운 열기가 차오르고 있었다. 마치 겨울과 여름 같았다.

"와~ 감독님 저게 될까요?"

"그러게 말입니다. 이건 내가 봐도 진짜 무리 같은데?"

"형님... 무슨 일이에요?"

"어. 왔어? 아는 사람은?"

"인사했어요. 근데 마하 또 뭐해요?"

"하하! 이번엔 20미터 놓고 뛴다는데. 내가 봐도 저건 안 될 거 같은데?"

"..."

"김정준 코치가 봤을 땐 어때요?"

"모르죠. 제가 육상을 아는 것도 아니고..."

구마하도 승부 예측이 어려운지 자꾸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헛웃음을 지어 보였다.

"상률이 형님..."

"응?"

"..."

"왜? 정준 씨가 볼 땐 안 될 거 같애?"

"아니요. 그냥..."

또 한번의 총소리.

구마하가 팔 다리를 크게 내저으며 바람같이 달려나갔다.

"마하는 운동할 때 진짜 신나 보이네요... 하나 힘든 내색도 없고..."

"운동한 사람 입장에서 부러운 감정이지?"

"네..."

"지 복이지 뭐."

* * *

같은 날 저녁. 서울 삼성동에 위치한 한 클럽.

이곳은 회원권이 없으면 입장할 수 없는 장소로, 재벌가 자제부터 유력 정치인의 손자 손녀. 연예인이나 패션 모델 등이 주축이 되어 젊음을 누리고 있었다.

소위 말하는 그들만의 세상 속에 스키 선수 박상택도 있다.

"아 씨발 진짜..."

박상택이 홀로 바에 앉아 술잔을 들고 있는데, 친구들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야. 뭐하냐? 궁상맞게?"

"뭐 그냥 있어..."

"오빠. 가서 춤이나 추자?"

"됐어. 니네나 춰."

"이 새끼 왜 이래?"

"놔둬. 혼자 있고 싶나 보지."

"나가자!"

심장을 찢어발기는 비트가 공간을 울린다.

번쩍이는 조명이 순간을 찬란하게 만든다.

박상택도 멍하니 친구들을 지켜보다 스테이지로 걸어나갔다.

다 함께 춤 추고 웃다 보니 기분이 풀리는 것 같다.

점점 미소를 되찾는 박상택. 파티 속에 있으니 근심걱정이 사라지는 것 같다.

"건배~~!"

"마시고 마시고!"

"그래. 먹고 죽자!"

친구들과 한쪽에 자리를 잡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한 사람이 그에게 물었다.

"야. 상택아. 근데 니네 학교에 그 사람 갔다고 하지 않았어?"

"누구?"

"구마하. 신입생으로 연대 갔다며. 너 봤어?"

"에이 씨... 그 개새낀 왜?"

"뭐야? 왜 이래? 오빠 그 사람이랑 뭐 있어?"

"맞다. 너도 사체과 아니냐? 니 후배 아냐?"

"야. 그 새끼 존나 재수 없는 놈이야."

"그래?"

"정말? 인터넷 보면 인성 좋다고 그러던데?"

"하하! 꺼지라고 그래. 내가 직접 봤는데."

박상택은 구마하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고 친구들도 그의 말에 격한 반응을 보여주었다.

"어머 어머... 오빠 진짜?"

"와. 그렇게 남들을 그렇게 무시한다고...?"

"그래. 예의도 없고 싸가지도 없어. 인성 무슨. 이미지 메이킹이지."

"흠. 보기와는 다르네."

"그러게. 운동만 아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다들 여기서 무슨 얘기해?"

박상택과 친구들 옆으로 한 사람이 또각거리는 고상한 걸음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어... 수빈아?"

"언니!"

"안녕."

어둠 속에서도 스스로 빛을 내는 인물.

그녀의 이름은 한수빈이었다.

"상택이 오빠. 무슨 얘기하고 있었어?"

"아... 그게 별 거 아니고..."

"언니. 구마하가 오빠 후배래요."

"응 알어. 봤어."

수빈이가 다가오자 박상택의 감정도 온순한 강아지가 된 듯 고요해진다.

클럽 안 모두가 그녀를 보고 있었다. 한수빈이 옆에 있는 것 만으로, 떨어지던 자존감이 올라가는 것 같다.

그녀가 박상택과 시선을 맞추며 미소를 지었다.

"오빠 그 사람 알어?"

"어. 알지..."

"나도 들려줘. 어때?"

"수빈아. 구마하 그 새끼는"

얘가 나한테 관심을...? 한수빈이 나한테?

박상택은 신이나서 구마하의 험담을 늘어놓았다.

그녀의 변화하는 표정을 읽으며 어떤 포인트에 더 관심이 가는지, 나중엔 없는 이야기까지 지어내는데.

"진짜? 그 정도야?"

"완전 쓰레기야! 세상이 그런 놈을 왜 빨아주는지 모르겠어."

"흠."

"야. 너는 인마 빨아준다가 뭐냐..."

"맞어. 언니 앞에서..."

"어. 미... 미안."

"으음. 괜찮아."

어린 친구가 그녀에게 물었다.

"언니. 언니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음."

한수빈은 매력적인 다리를 꼬고 앉아 박상택을 향해 은은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글쎄? 난 그냥 잘난 사람이 잘난 척 하는 건 별로 문제 없어 보이던데."

"어...?"

"오빠는 안 그렇게 생각하나 보다."

"아니... 저기 나는 그게..."

여왕님의 발언에 주변의 분위기도 바뀐다.

"어. 어. 나도 좀. 그만한 실력이 되니까 큰소리를 치겠지."

"그 그치! 어쨌든 구마하는 진짜 성공한 스포츠 스타고."

"..."

"후후후. 오빠는? 구마하가 왜 그렇게 재수 없다고 생각해?"

"아니. 수빈아 나는..."

"오빠보다 잘나가서?"

"..."

"하하하~ 농담이지 왜 그래?"

한수빈이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어떤 앤지 궁금하다. 우리 구마하도 여기 부르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