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페셜 리스트의 가치 (1) >
박상택은 남들보다 확실히 우월한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빌딩과 부동산을 몇 채나 보유한 집안 어른과 개인 병원을 운영하는 부모님.
여유로운 환경에서 성장한 그에게 세상은 두려울 것이 없었다.
하지만, 강물이 깊어도 바다를 채울 순 없는 법.
어디서든 자신만만하던 그도 마침내 높은 벽을 만났으니.
그것이 바로 그들만의 세상. 사교계 클럽 멤버들이었다.
재계와 정계의 울타리 안에서 성장한 이들은 부유한 환경도 평범하게 만들어 버렸다.
사회를 쥐락펴락하는 가문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 가운데 한수빈은 정점에 위치한 인물이었다.
말 그대로 멤버십의 여왕.
그녀가 구마하를 보고 싶다는 말에 박상택이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다.
"수... 수빈아? 걜 왜 여기 불러...?"
"오빠 말이 사실인지도 궁금하고. 진짜 나쁜 놈이면 우리가 혼내줘야지."
"언니. 아니면요?"
"그땐~ 음. 후후후~"
한수빈의 웃음소리가 가슴에 비수가 되어 꽃히는 박상택.
"그냥 다 같이 재밌게 놀면 되지 않을까?"
아무나 어울릴 수 없을 때 멤버십의 가치가 있다.
박상택이나 이 자리에 있는 다른 이들은 어렵게 자신의 가치를 인정 받아야 했었다.
그것을 구마하는 아무 노력 없이 손에 얻는다.
그녀가 입에 담았으니까. 여왕의 말을 누가 거역한단 말인가.
한수빈이 웃는 얼굴로 돌아보며 말했다.
"오빠가 데리고 와라."
"내가...?"
"응. 후배잖아."
그녀의 질문에 박상택이 당황한 표정을 감출 수 없다.
절대 용납될 수 없는 일을 나더러 하라니... 아무리 상대가 수빈이여도 받아들일 게 있고 아닌 게 있지!
"아 싫어! 내가 그 새끼를 왜!!"
학교와 스키장을 떠나 이제는 나만의 놀이 공간까지 녀석이 들어온단 말인가! 그것도 내 손으로 끌고 오라고!
박상택이 질색하는 얼굴로 벌떡 일어서 외치자, 친구들이 더 놀란 표정으로 그에게 따졌다.
"야... 너 왜 이래?"
"오빠. 왜 언니한테 화를 내...?"
"어? 어... 아 아니..."
"이 새끼가 진짜 미쳤나...?"
박상택도 뒤늦게 내가 무슨 짓을 한 건지 두려움이 밀려온다.
한수빈은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지만 눈빛엔 싸늘함이 담겨 있었다.
"싫어?"
"수빈아. 내가 시... 싫은 게 아니라..."
"그럼? 그 말 한 마디 하는 게 어려워?"
"그러니까 나는... 그 자식이랑..."
"뭐? 진짜 질투라도 한다는 거야?"
"..."
클럽이 어둡기에 다행이다. 안 그랬으면 얼굴이 빨게 지는 걸 감출 수 없었을 것이다.
주변에서도 그에게 쏘아붙였다.
"야. 너 진짜 그런 거야?!"
"뭐야? 오빠 설마 질투심에 없는 말 지어내고 있던 거야?"
"아...! 아니야!!"
"아닌데 왜 이렇게 화를 내? 야 우리도 그 사람 보고 싶어. 데려 와. 뭐 어때?"
내몰리는 분위기에 뒤늦게 발악하지만, 무게 추는 박상택이 아닌 한수빈에게 기울어져 있었다. 그녀가 무뚝뚝한 얼굴로 말했다.
"오빠."
"어... 수빈아...?"
"왜 이렇게 반대를 해?"
"..."
"그냥 해. 내가 뭔가 하는데 오빠 허락이 필요해?"
박상택은 답답한 심정을 어쩌지 못해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저 새끼 갑자기 또 어디가?"
"야. 상택아!"
"뭐야. 저 오빠 진짜 왜 저래...?"
"흐음~ 놔둬. 재미 없나 보지."
한수빈도 가볍게 콧김을 내쉬며 아닌 건 아니라는 듯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박상택이 클럽에서 나가도 아무도 그를 쫓아가지 않는다.
남아있는 이들에겐 얄팍한 우정보다 여왕님의 점수를 따는 것이 더 급선무였다.
"어쩐지 난 처음부터 듣는 데 좀 이상하다 했어!"
"그러니까... 구마하가 그렇게 이상한 놈이면 뉴스에서 진작 얘길 했겠지."
"저 오빠. 예전부터 유명한 선수들 보면 은근 깎아내리고 그러지 않았어?"
"다들 그만. 없는 사람 이야기를 왜 이렇게 해."
"아. 그렇지."
"미안."
"언니 죄송해요."
"됐어. 나한테 왜 그래."
다시 분위기를 바꿔 사람들이 그녀에게 물었다.
"근데 수빈아. 오늘은 혼자 온 거야?"
"언니! 그럼 우리랑 같이 놀아요!! 네?!"
"미안. 일행들이 있어."
"아 그래...?"
"으음. 아쉽다..."
"다음에. 갈 게."
한수빈은 클럽 깊은 곳으로 도도한 걸음을 옮긴다.
VIP룸 앞. 직원들이 문을 열어주자 남녀 다양한 이들이 하던 행동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본다.
"어디 갔다 와?"
"그냥. 누구 좀 만나고 왔어."
동석한 파트너 여성의 가슴을 주무르던 강세준이 다정한 말투로 물었다.
한수빈도 그의 행동을 개의치 않고 자리에 앉는다.
"누구 아는 애들 있었어? 오라고 그래."
"으음. 박 원장님 아들. 그리고... 몰라? 그 오빠 친구들인가?"
맞은편에 앉은, 다른 사람이 자리를 벗어나면 똥 싸고 왔느니 생리대 갈고 왔냐느니 성적이고 질 낮은 농담을 던지던 김원석이 물었다.
이번에도 한수빈은 그의 말에 답하는데 어떤 주저함이나 위축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홀 가운데 무게감있게 앉아있는 이도형이 한수빈을 돌아본다.
"스키 탄다는 애 말하는 거지?"
"응. 맞어."
"손님 기다리시는데 빨리 올 것이지."
"오빠 미안."
"야. 왜 나한테 사과를 하냐. 저분한테 해야지."
이도형이 한수빈 옆에서 차분히 앉아있는 유명 배우를 가리킨다.
그는 이들 멤버가 전해주는 압도적인 분위기에 기죽지 않으려 태연한 연기를 펼치고 있었다.
"일은 잘 봤어요?"
"네."
한수빈이 자리에 앉아 잔을 들자 그가 술병을 가져와 채워준다.
수빈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잔을 들며 친한 오빠들을 보며 말했다. 마치 호스티스를 대하는 행동인 것 같다.
"오빠. 근데. 그 사람 말이야"
"응?"
"뭐?"
"좀 별로지 않어...?"
"누구? 박 원장님 아들?"
한수빈은 쪼르륵 채워진 잔을 가져와 가볍게 입을 축이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응. 사람이 좀 그런 거 같애."
"왜? 뭐 어떤데?"
"어. 걔 착하던데? 애 싹싹하고."
"착해? 글쎄? 요즘 힘든 일 있나... 나한텐 짜증을 부리네?"
"하하! 걔가?"
"진짜로? 그 녀석이 너한테??"
"그 친구가 뭐라고 했는데?"
"별 말은 아니고 감정이 좀 그렇더라고..."
수빈의 이야기에 강세준과 김원석이 눈빛을 바꾸며 말했다.
"이 새끼 불러다 이야기 좀 해야겠네. 어디 감히 수빈이한테."
"야. 걱정하지마. 오빠들이 알아서 할게!"
"..."
친구들과 다르게 이도형은 조용히 잔을 들며 속으로 생각한다.
저 녀석 또 병이 도지는구나...
대화를 마친 한수빈도 고개를 돌려 옆에 있는 배우를 보며 말했다.
"오늘은 그만 가보세요."
"왜요 수빈 씨?"
"그냥. 기분이 별로라서."
"알겠습니다... 즐거웠습니다."
방송가에선 떠받들어주는 존재라도 이 자리에선 일개 호스티스 대접을 벗어날 수 없다.
가라니 더 고마운 마음으로 그가 방을 나섰다.
유명 스타가 조용히 일어나자 강세준과 김원석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야 뭐야? 니가 저 사람 불러달라며?"
"그래. 바쁜 분 모셔왔는데..."
"미안. 근데 진짜 별로야. 그쵸? 언니가 봐도 화면이 낫죠?"
"아... 네..."
수빈이 강세준의 옆에 앉은 여성에게 동의를 구하는데, 그녀는 분위기에 짓눌려 뭐라 입을 열지 못한다.
누구는 남들 앞에서 함부로 막 주물러도 누구는 깍듯하게 받아 모셔진다.
이곳에서 주의할 건 힘 있는 남자들이 아니다. 그녀의 기분이었다.
여성들은 빠르게 분위기를 읽으며 생존모드에 돌입했다.
"화... 확실히 화면발이 있더라고요. 드라마에선 멋있었는데."
"응. 그러니까. 별로였어. 혼자 무게 잡고 있는 것도 그렇고."
"수빈 씨는 그럼 어... 어떤 스타일 좋아하시는데요?"
"글쎄. 말하기 싫네."
"..."
대체 어쩌라는 말인지... 자기 말에 공감하는 대화는 받아도, 사적인 질문은 받아주지 않는 한수빈.
룸 안의 모두가 그녀에게 말려드는 모습에 이도형이 또 한번 조용히 잔을 채워 넘기고, 김원석과 강세준이 큰 결심이라도 하는 듯 말했다.
"쓰읍. 보니까 뭔가 일이 있긴 있었나 보네. 이거 물 관리 한번 해야겠어."
"그 자식 파이팅 넘친다고 좋게 봤더만. 애가 싸가지가 없구나."
구구절절 길게 말하지 않아도, 이미 오빠라는 사람들이 자신의 의중을 파악하고 있었다.
한수빈은 만족한 듯 밝은 미소를 지어 보인다.
박상택은 멤버에서 제외된다. 더는 그들의 세상에서 볼 일 없을 것이다.
그녀가 문제는 다 해결 됐다는 듯, 주변 여성들을 둘러보며 밝고 은은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들어요. 나 신경 쓰지 말고. 오늘 우리 오빠들이랑 재밌게 보내고."
"아... 네..."
"알겠습니다..."
"자~ 건배~"
한수빈이 분위기를 살리는 모습에 이도형이 물었다.
"수빈아."
"응?"
"너 아까 그 질문 답해봐. 넌 대체 어떤 스타일을 좋아하는 거냐?"
"으음. 지금은. 흐음~?"
그녀가 애교 넘치는 표정으로 고민하는 척 굴더니 익살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냥. 건강한 사람?"
"하하하! 야 그럼 그 친구 불러! 건강한 사람이면 대한민국에 그만한 애가 어딨어?"
"누구? 누구 말하는 거야?"
"걔! 그 올림픽 메달리스트. 작년에 엄청 핫했던 애 있잖아. 아 걔 이름이 뭐더라...?"
"크하하! 넌 방송국 아들이란 놈이 유명 인사를 모르냐?"
"아~ 이름이 되게 신기했는데? 아무튼, 그 새끼 진짜 빠르더라. 키도 엄청 크더만!! 190은 되는 거 같던데?"
이도형이 친구들의 대화에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구마하잖아. 한국 놈이 그 이름을 모르냐."
"맞다! 하하! 너 그 친구는 어때?"
한수빈이 모르겠다는 듯 시침을 때자, 이도형이 그녀를 향해 글라스 잔을 가리키며 물었다.
"너 그래서 박 원장님 아들 찾아갔지? 걔도 연대생이니까."
"뭐래. 오빠. 아니거든~ "
"기집애. 속 보인다."
구마하 이야기에 김원석 옆에 앉은 여성이 용기 있게 한수빈에게 말을 건넸다.
"저... 제 친구가 구마하 안다고 그랬는데..."
"진짜? 수빈아 여기 아는 사람 있단다."
"정말요?"
한수빈도 처음으로 다른 여성에게 마음을 열며 물었다.
"어떻게요? 어떻게 알아요?"
"그게... 구마하가 올림픽 가기 전에 연세대에서 훈련했었잖아요. 그때 봤다고 들었어요. 제 친구도 연대생이라."
"으음. 그럼 제대로 아는 건 아니네..."
실망하는 한수빈을 보며 그녀가 다급하게 말했다.
"아. 아니에요! 인사도 몇 번 했었다고 했어요. 사귀던 여자친구 옆방 살았다고. 그래서 자주 봤다고."
그녀의 다급한 설명에 건너편에 앉은 강세준이 능글맞게 웃으며 물었다.
"그래서? 잤어?"
"네?"
"그 친구라는 사람이랑 잤냐고?"
"아... 아니 그게..."
파트너가 모욕 당하자 김원석이 자존심이 상한듯 발끈해서 나섰다.
"야. 돌았냐? 실례하지 마."
"실례는 무슨. 지는 아까 우리 아가씨한테 더 심한 말 했으면서. 그치?"
"아니요 저는... 괜찮은데."
"뭐? 넌 자존심도 없어? 저 새끼가 아까 너 피 터졌냐고 했었잖아."
"..."
두 사람의 실없는 다툼에 모두가 불편한 기분을 느끼지만, 홀 중앙에 앉은 이도형과 한수빈은 별일 아니라는 듯 대화를 나눴다.
"사람들 귀찮게 하지 말고 그냥 니가 가서 데려와."
"싫어."
"바로 옆에 있으면서 뭐하러 그러냐?"
"그래도. 부끄럽잖아..."
"부끄럽긴. 이제와서 내숭은 무슨."
"오빠? 그런 말이 어딨어?"
그나마 이도형의 파트너가 눈치가 빠르고 뱃심이 있었다.
그녀는 이도형이 한수빈을 유일하게 컨트롤 할 수 있음을 깨닫고 과감하게 물었다.
"수빈 씨. 신촌 살아요?"
"아니요. 왜요?"
"그냥 물어봤어요..."
파트너를 믿고 물어봤는데 그조차 용납이 안 되는 건가...?
대체 뭐하는 년이길래 이렇게 기고만장한지...
이 사람들도 나름 힘 있는 집안이라면서 왜 이렇게 저년 앞에선 설설 기는지...
이도형이 파트너의 기분을 헤아려 말해준다.
"부모님이 연희동 사셔. 쟤 이대 성악과 다니고."
"오빠. 내 얘기 하지 말랬잖아."
"디바야 디바."
"..."
"아~ 그러시구나."
"왜요?"
"아니요. 그냥 궁금해서요."
"언니. 저한테 관심 있으세요?"
"아니요..."
"수빈아 그만해. 너 그러니까 오빠도 무섭다."
룸 안에 있는 모든 여성들이 한 마음으로 한수빈에 대한 평가를 내린다.
얼굴은 예쁘고 성격은 지랄 맞은 년.
말투나 행동을 보면 아마 부모 눈치도 본 적 없을 것이다.
집안이나 배경도 남다르겠지. 심지어 여성들 중 한 사람은 나이로 따졌을 때 그녀의 동문 선배가 된다.
그런들 무슨 상관인가. 어디 무서워 선배 대우나 받겠는가.
아무튼, 확실히 보통 사람은 아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 사람 알기 우습게 보는 인간들이 공주님같이 모실리는 없을 테니까...
다들 한수빈을 재수 없고 짜증나는 인간이라 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녀가 가진 미모와 파워를 너무나도 부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한수빈도 기분을 되돌려 김원석의 파트너에게 다시 묻는다.
"저. 언니?"
"네...?"
"그 친구분이라는 사람한테 부탁 좀 드려도 될까요?"
"뭐라고요...?"
"구마하 좀 데리고 와달라고? 네?"
"...한번 물어는 볼게요. 근데"
"음?"
"네. 얘기할게요..."
"고마워요~♡"
그녀가 그를 원한다.
부탁 같은 명령을 들은 이상 거절은 없다.
아니면 다시는 이런 물에 발을 들이지 않든가...
그래서 신데렐라를 동화라고 하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