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페셜 리스트의 가치 (4) >
"감독님은 한발 운전 하시는 거죠?"
"당연하지... 야 애시당초 스틱 아니면 양발 운전을 하면 안돼."
"으음. 스틱으로 살 걸 그랬나?"
"아이고. 이 무식한 자식. 난 면허가 있는 줄 알았지... 면허도 없는 놈이 차는 무슨..."
"그래도 빨리 땄잖아요. 지금은 면허 있어요."
"오늘부터 매일 문제지 풀어라. 그리고 연수 꼬박꼬박 나가고."
"알겠습니다. 걱정마세요. 제가 차 타면 얼마나 탄다고요."
"후우. 모르겠다."
감독님과 지방에서 열리는 경기장을 찾아가고 있었다.
BMW도 사고 대회도 다가오고.
하늘은 푸르고 나무는 초록초록 변해가고.
"아 좋다."
"뭐가 좋냐?"
"그냥 다요. 감독님이랑 이렇게 대회장 가는 것도 좋고."
"그러냐...? 난 싫은데."
"네? 왜요?"
"아우 귀찮어. 이제 차 사면 너 혼자 다녀."
"...감독님"
"서운한 얼굴 하지말어! 말도 안 듣는 녀석이."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가는만큼 더 깊은 감정을 나누는 것 같다.
더욱이 육상팀 주장이 되면서 감독님과는 더 많은 주제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양민구 그 친구가 제 컨디션 찾으려면 1년은 걸릴거야."
"저도 선배한테 그렇게 말했는데, 가을 까지는 폼을 찾고 싶어하더라고요. 전국체전 나가고 싶다고."
"서둘지 말라고 해라. 그나마 부상으로 은퇴한 게 아니라 다행이긴 한데. 몸이 굳어있을 거야."
"그리고 일반 팀은 체력 훈련 위주로 가는데. 벌써부터 빠지려는 사람들이 있어요."
"기록 훈련을 병행해야 돼. 그래야 목표가 뚜렷하게 잡히면서 동기부여가 된다."
"음. 동기부여. 으음."
"그래도 나갈 사람은 나갈거야. 운동이 생각만치 재미난게 아니니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선수들 이야기가 나왔다.
"웬만한 애들은 다 실업팀으로 가서 아는 얼굴이 있을까 모르겠네요."
"김진운 하난가? 너 춘계 때 같이 800미터 뛰었던."
"네. 동민이 진수. 다 실업팀으로 갔으니까요."
"김진운 그 친구도 너 없는 동안에 800미터 고교 챔피언 잡았다고 하던데. 올해는 기량이 어떨지."
"조용한 성격에 은은한 투지가 있죠. 전 진운이 뛰면 잘 할 거라 생각했어요."
"다들 자리를 잡았는데, 이상하게 그 친구 이야기가 안 들린다?"
"누구요?"
"최다빈. 니 전 여친."
"아... 네. 근데 뭐..."
"연락되는 애들 없냐?"
"다빈이는 원체 선수들이랑은 거리를 둬서. 언제 진수 만나면 한번 물어볼게요. 진수가 다빈이랑 같은 학교 였더 그 기연정이랑 친해서."
"흠. 그 정도 기량이면 기업이든 대학이든 서로 데려가려고 했을 건데."
"감독님. 근데 이렇게 불쑥 전 여친 말씀하시기 있으세요?"
"뭐가? 불편하냐? 너도 그런 걸 따져?"
"진짜 절 대체 어떻게 보시는 거에요...?"
"하하하! 이 자식. 보자. 슬슬 와 가는구나."
대회장에 도착. 사람들과 인사도 나누고, 다가오는 팬들에게 사인도 해주고. 대한 체대생 800미터 선수가 된 진운이와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아이고... 결국 구마하가 한국 육상으로 돌아 왔구나..."
"하하하~ 와야지. 그럼. 난 뭐 여기 오면 안 되냐?"
"안되지. 너가 여기 나오는 자체가 반칙 아닌가?"
"무슨 소리야. 그런 게 어딨어."
진운이가 이야기를 해주는데, 내가 아테네에서 금메달을 따면서 한국 육상계가 지금 다들 벌크 업 중이라고 한다.
"지성이도 9초 만들려고 엄청 훈련하고 있다고 그랬어."
"권지성. 그 자식이라면 할 거야."
"아무튼, 육상인의 한 사람으로서 고맙기는 한데... 야 너 때문에 다들 죽겠어... 훈련량이 장난 아니야..."
"하하하! 잘 해보자."
또 다시 100, 200, 800에서 금메달을 따냈다.
그러나 대학 4학년까지 포함되어 있는 대회에서 진운이가 동메달을 딴 건 놀라운 성과였다.
시상식을 마치고 다시 진운이를 만났다.
"오~ 김진운. 엄청 운동했나 본데?"
"말했지. 지금 모든 육상선수들 죽기 직전까지 내몰리고 있다고."
"후후후. 좋다. 역시 트랙이 좋아."
"육상팀은 좀 어때? 새로 시작한다며?"
"어. 뭐. 재미나게 하고있어."
"야! 그런 게 어딨어! 남들은 사지로 몰아놓고 넌 왜 즐겁게 운동하는데!!"
"하하하하~ 우리는 일반인들이 있어. 그렇게 했다간 아무도 운동 안 해."
보름 뒤 열릴 대학 실업팀 경기 끝나고 다 같이 모여서 놀기로 했다.
"그때는 애들 진짜 많겠다."
"그러게. 이렇게 따지면 올 가을 전국체전은 만만하게 볼 수 없겠는데."
"전국체전도 전국체전인데. 난 그보다 여름 세계선수권."
"세계선수권... 와... 다들 가겠지?"
"많이 도전할 걸. 나도 갈 거야."
"좋다."
진운이는 개인적인 목표를 올림픽이 아닌 내년 아시안게임으로 잡고 있다고 했다.
"너 두고 봐. 그때는 꼭 내가 800미터 금메달 딸 거니까."
"그래. 나도 열심히 할게."
* * *
대회를 마치고 돌아와 육상팀을 만났다.
"오늘은 마치면서 기록측정을 할 겁니다. 체력 증진이 아닌 이완에 집중하는 시간을 가져볼게요."
우리 연세대 육상팀은 주로 밤 시간에 훈련을 하는데.
그 편이 운동장을 쓰기도 좋고, 다들 학생들이라 공부하다 짧게 짬을 내 몸 풀기 식으로 뛰어서 호응도 높다.
서른 다섯 명의 팀원이 있지만, 꾸준히 훈련에 참여하는 건 주로 열 두명 정도의 열성회원들이다.
그렇다고 다른 이들이 훈련에 나설 때 뭐라 하는 일은 없다.
어디까지나 우리의 목표는 생활체육의 정착이니까. 그런 의미로 즐겁게 땀을 흘리고 있으니까.
사람들을 보면서 몸풀기 운동을 하고 있는데, 육상대회 소식을 한 사람 씩 물어보았다.
"마하야. 이번에도 우승했다며?"
"네 우승하고 왔습니다."
"뭐야? 그럼 빨리 한턱 쏴야지?"
"하하하! 곧 중간고사 기간인데 술 드시러 가실 수 있으세요?"
"그럼. 원래 공부는 술 마시면서 하는 거잖아."
"그럼 다들 시간 한번 잡아보세요."
사람들이 대회 이야기를 물어본다.
경기장 분위기는 어땠는가, 육상 시합은 어떤 식으로 하는가.
머저리 삼인방도 물을 땐 간단하게 이겼냐 졌냐로만 묻는데.
이렇게만 봐도 생활 체육이 그 종목으로의 관심으로 이어진다고 볼 수 있다.
"여름 되면 진짜 경기 많이 열리는데, 그때까지 훈련 되시는 분들은 같이 한번 참가해 봐요."
"근데 마하야. 너 여름에 세계선수권 나간다고 하지 않았어?"
"아 맞다."
"어디서 해?"
"이번엔 핀란드요."
"오오~ 북유럽."
"북유럽은 한번도 안 가봤는데."
"육상하면 여기저기 많이 가보겠다."
"그럼. 농구는 안 그래?"
"우리는 맨날 코트만 있는 거지 뭐."
다 함께 수다스런 시간을 보내고 기록 훈련을 시작했다.
"와... 먼저 구경할 때는 몰랐는데, 정식 100m는 엄청 멀구나."
"구경 하시면서 몸 굳지 않게 계속 스트레칭 해주시고요. 몸 굳으면 기록도 줄어듭니다. 아직 봄 기운 쌀쌀해요. 스파이크 없으신 분들은 맨발 인정해드립니다!"
민구 선배도 찾아오셨다.
원래 열성회원인데, 오늘 강의가 밤 늦은 시간에 끝나서 훈련을 함께하지 못했다.
"기록이냐?"
"네."
"재민이 얼마 나왔냐? 테니스라 이 녀석 다리 빠를 거 같은데."
"아직 순서 안 됐어요. 곧 시작합니다."
잔디밭에서 운동하던 축구부 사람들도 기록 측정 중이라니 자기들도 재보자며 참가하고, 야구부에서도 한 두 사람 궁금하다며 줄을 섰다.
"선배님들 새치기 하시면 안됩니다! 줄 서세요!"
민구 선배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씀하셨다.
"신기하네. 육상은 아무도 관심없는 운동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들 알아서 찾아온다."
"그런 게 어딨습니까. 축구도 뛰고 야구도 뛰고. 테니스 농구. 다 뛰는 종목인데요."
"그러니까 말이다. 후후후."
"선배님 근데, 저기 조금 도와주셔야 될 거 같은데요?"
"그러니까 축구부 새끼들 어디 감히 트랙에 와서 새치기를..."
민구 선배가 가방을 벗어던지고 출발선으로 다가가 사람들을 통솔해준다.
"야 이 새끼들아! 후배들 밀치지 말고 줄 서! 남들 한다고 뒤늦게 와서 끼어들지 말고."
"아 민구 형. 이러기 있어요?"
"좀 봐줘요. 우리도 훈련중에 잠깐 나온 건데."
"뭐가 이러기 있어! 여긴 육상부야!! 니들 사정을 왜 우리가 봐줘야 돼!"
익범이 달리는 모습을 지켜보며 애한테 필요한 훈련 코스를 추가하고 있는데, 누가 슬쩍 다가와 말을 건다.
"저기..."
"네."
어라? 처음 보는 사람 같은데 뭔가 낯이 익은데? 누구지? 우리 육상팀은 아닌데.
"나 기억 안 나요?"
"아 그게. 저도 어디서 뵌 분 같기는 한데. 기억이 잘..."
"하하하! 기억하기 어렵지. 작년 여름에 봤는데."
작년 여름?
작년 여름에 내가 학교에서 본 사람은 우리 교수님이랑 그리고. 원룸 옆방의 그...
"어? 원룸?"
"네. 맞아요. 하하! 나 알죠?"
"아~ 그럼요 알죠!"
멀리 민구 선배가 "마하야 뭐하냐!" 하면서 물으셔서 다시 트랙으로 고개를 돌렸다.
"죄송합니다 선배님! 죄송해요. 제가 지금 이거 하고 있어서."
"네. 천천히 해요. 끝나고 이야기 하면 되니까."
알지. 작년 원룸의 주인. 신음소리의 주인공. 은근 섹스 머신인 형 아니야.
"오케이. 재민이 13초 45."
"훅~ 훅~! 마하야? 빠른 거야?"
"느린 건 아니야."
"야. 그런 게 어딨어!"
그런데 재민이가 옆에 계신 분을 알아본다.
"어? 승우 형?"
"안녕."
"너 이 형 알어?"
"알지. 나랑 교양 같이 들어."
"어어~ 그렇구나."
정승우. 사회과 4학년 군필 99학번.
재민이가 나는 이분을 어떻게 아냐고 물어보는데.
"아~ 작년 여름에 학교에서 훈련할 때."
"하하하! 나야말로 유명 인사를 가까이 두면서도 못 알아봤었네."
"그러셨구나. 근데 마하야. 민구 선배가 쳐다보시는데?"
"어? 아. 죄송해요 형. 여기 제가 집중해야 돼서"
"어~ 어 그래."
* * *
"수고하셨습니다. 오늘 기록에 너무 실망들 하지 마시고요. 고등학교 때 기록이 진짜가 아니라 오늘 기록이 내 진짜 실력이라 생각하시고, 앞으로 줄여나가시면 됩니다."
운동을 마치고 사회과 승우 형을 만났다.
"으음. 신문사셨구나."
"안 그래도 구마하 꼭 한번 취재 해오라고 난리였는데. 오늘은 겸사겸사 한번 와 봤어."
"저 뭐 근데. 하하하! 아 괜히 쪽팔리는데."
"개인적인 용무도 있고."
"개인적인 용무요?"
운동장에 앉아 집에 가는 팀원들에게 인사를 해주며 대화를 나눴다.
"인기 좋네."
"주장의 특권이죠. 졸업할 때까지 절대 안 놓을 거예요."
"마하야. 형이 말 편하게 해도 될까?"
"그럼요. 편하게 하세요."
"그래. 대신 너도 말 편하게 해."
"에이. 제가 선배님한테 어떻게 그럽니까."
"뭐 어때. 너 알잖아. 작년 그 방 방음 잘 안 되던 거."
"하하하... 하하..."
"솔직히 다 들었지?"
"네. 뭐."
"그래서 소리 들으면서 혼자 했냐?"
"하하... 하하하..."
아아~ 학교에 또 이런 성격도 있구나. 연대생은 다 공부 잘하는 샌님 같을 줄 알았는데... 은근 또라이네...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 보면, 그분이랑은 헤어지셨나 보네요?"
"응... 지난 겨울에 연락이 뜸하길래 가보니까. 어라? 신음소리가 막 나오고 있네?"
"어우야..."
"그래서 설마 혼자 있나? 싶었더니. 썅년. 바람 피고 있더라고."
"저런... 안 그래도 학교에서 그 누나 만나면 무슨 표정 지어야 하나 싶었는데."
"휴학했어. 아니어도 너는 보이면 피해 다니겠지."
"하하... 그래주시면 고맙죠."
"너는? 연애 안 해?"
"하고 싶죠. 저 진짜 여자친구 사귀고 싶었는데..."
"왜? 요즘 학교 여자애들한테 니가 젤 인기 좋은데."
"모르겠어요. 다들 말은 그렇게 해주는데. 뭐 막상 저한테 체감이 와야."
"너무 사람이 돋보여서 다가오질 못하는가 보다."
"저 그냥 좆밥인데... 아차. 죄송해요."
"하하하! 뭐 어때. 야 형한테 말 놓으라니까?"
"저... 정말?"
"어쭈. 놓으란다고 진짜 놓네? 사체과 원래 개념으로 가던 거 아니었냐?"
"..."
"하하! 장난이지. 군대 갔다오면 원래 다 이래."
"아... 네."
그래도 이런 저런 장난을 쳐주는 덕에 형이랑 점점 더 편하게 이야길 나눌 수 있었다.
"저한테 용무 있으시다고."
"응. 안 그래도 저기 내 친구가 다니는 클럽에서, 요즘 누가 널 그렇게 보고 싶어 한다고 그러길래."
"네."
"거기가 완전 멤버제로 운영돼서 아무나 갈 수가 없다고 그러더라고."
"클럽요?"
"너 그런 데 가봤어?"
"아니요. 한번도."
"형도 입 터는 거 보면 막 어디 가나 존나 잘 놀 거 같지만"
또라이에 자의식이 강하구나. 음. 매력적인 사람이다.
"나도 어쨌든 공부하다 보니까. 지금까지 클럽 나이트 이런 데 한번도 못 가봐서 궁금하긴 하거든."
"근데 왜 그걸 저한테?"
"그쪽에서 너를 보고 싶대."
"그게 무슨 소리에요? 지들이 날 보고 싶으면 찾아오면 될 것이지. 왜 사람을 오라가라해요?"
승우 형은 이런 질문을 당연히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거기가 좀 그런 곳이라 하더라고."
"네? 에이 저 그런데 가면 안돼요. 여기저기 보는 눈이 있는데."
가고야 싶지. 에이 씨. 이 형은 사람 설레게 왜 쓸데없는 이야기를 가지고 와서...
"오해하지 말고 내 말은 퇴폐 뭐 이런 게 아니라."
승우 형이 말하길 그곳은 정말 아무나 받아주지 않는 그들만의 세상이라고 해준다.
"여자애들도 다 존나 이쁘다 그러고."
"오오~"
"그리고 연예인들도 되게 많대. 진짜 아무나 못 가보는 곳이라는데. 야 근데 너 오해하지마라! 나도 사회를 공부하는 한 사람으로써 그저 학구적인 관심이 생겨서 그러지!"
"...형 친구 분은 뭐하시는 분이길래 그런 곳을 갔데요?"
"내 친구 이대 무용과."
"형님. 사랑합니다. 거기가 어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