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륜기로 가버렷-116화 (116/401)

< 여왕의 시선 (1) >

혜정이도 어느정도 생각이 정리된 듯, 조리있게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넌 니가 특별하다는 걸 알아야 돼."

"내가 뭐가 그렇게 특별해? 유명해졌다고? 메달 땄다고?"

"그런 걸 떠나서..."

"떠나서 뭐?"

"아무튼! 말 끊지 말고."

특별해진 만큼, 조심하고 사람들도 거를 줄 알고 아닌 건 아니라고 할 줄도 알아야 한단다.

"그러고 있다니까."

"그리고. 그리고 또... 그... 그러니까."

"뭐? 말해."

"아! 아무튼! 넌 니가 멋진 애라는 걸 알아야 된다고..."

뭔가 커다란 천기누설이라도 폭로한 듯 혜정이가 말 끝을 흐리며 조용해졌다.

"..."

"......"

"...뭐?"

"됐어. 할 말 다 했어..."

"하하하! 뭐하냐 갑자기? 혼자 화내다 갑자기 왜 칭찬을 해?"

"이게 칭찬으로 들리냐!!"

새겨 들으란다. 나는 멋있는 사람이고 누가봐도 나를 그렇게 볼 것이란다.

그러니 이제는 타인이 아닌, 스스로가 나를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했다.

"거절 못 하는 것도 너가 너 자신을 인정하지 않아서 그래."

"네. 네 그럼요."

"마하야. 니가 지금 하는 행동이 절대 쿨한 게 아니야. 잠깐의 거절이. 거기서 오는 불편이 싫어서 덮고 있을 뿐이라고. 그러다 결국 너만 상처 받게 돼."

"요즘 무슨 책 읽냐? 내용이 괜찮네. 다 보고 나도 좀 빌려주라."

"후우. 모르겠다..."

"걱정하지마. 알아서 해."

떠들다보니 어느덧 아파트 앞. 차를 세우는데 혜정이도 핸드폰을 꺼내본다.

"어. 엄마. 다 왔어. 차 타고."

"올라가서 인사나 드릴까?"

"누구긴 누구야 마하지. 됐어. 얘 가야 돼. 얘 서울 살잖아. 엄마가 집 구해줘놓고 왜 그래? 선생님 차 빌려왔데."

혜정이가 전화를 끊으며 말했다.

"엄마가 운전 조심하래..."

"장모님이 사위 걱정이 많구만."

"후우..."

"하하하. 왜? 뭐?"

"진짜 너 같은 놈이랑 누가 결혼을 하려는지..."

혜정이도 한숨을 내쉬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왜? 아직도 뭐 할 말 있어?"

"마하야. 나 진짜로 이렇게 너 안 볼 거야. 아니. 보지 말자."

"...저기. 우리가 오늘 뭐 했어?"

"나 요즘 학교에서 분위기 좋은 사람 있다고 했잖아."

"뭐 그 OT때 만났다는 애...?"

"걔 말고. 다른 사람 새로 생겼어."

"음. 뭐 그래."

"그 말 해주려고 오늘 너 보자는데 나온 거야."

또 잠시 침묵이 길어졌다.

"그래서 그랬구나. 오는 길에 계속 뭐라고 한 게..."

"야. 그건. 너가 칠칠맞게 행동하는게 짜증나서."

"하하하. 와~ 진짜 내가 뭘 어떻게 했다고..."

"마하야. 잘들어. 지금까지는 그래도 내가 옆에 있을 수 있었지만"

"니가 언제 내 옆에 있었냐? 서울 와서 얼굴 두 번 봐놓고..."

"야 자꾸 따질래!"

"알았어 알았어. 얘기해."

그럴 수 있는 거지. 그럴 수 있어.

늘 뭐 그렇게 될 거라고 알고 있었잖아.

둘 다 그렇게 하자고 얘기했던거고. 실망할 거 없어

"너 진짜 조심해야돼. 세상에 무서운 사람들 많어."

"혜정아. 나도 남자로서 조언 하나만 해줘도 될까?"

"뭐?"

"콘돔 안 한다고 하는 놈들은 걸러라. 여자는 임신하면 끝이다."

"하하. 하하하..."

"하하하하~!!"

혜정이는 어이 없어 웃고, 난 그냥 웃음이 나와서 웃었다.

"뭐하는 사람이냐?"

"..."

"얘기 해 봐. 뭐하는 친구야? 니네 과? 동갑? 아니면 선배?"

혜정이는 대답 대신 고개를 흔들었다.

"싫어. 말 안 할래."

"왜? 지는 다 물어봐 놓고. 나한테 막 뭐라고 해놓고."

"그냥. 너한테 미안해 질 거 같애."

"에휴... 야 너는 나한테 특별한 사람이야."

"..."

"그런 걸로 나한테 미안해 할 거 없어."

덤덤하게 아파트 입구를 보면서 말해줬다.

"좋은 놈 만나라."

"응."

"그리고 내 걱정 좀 그만하고."

"잘하면 걱정을 하질 않지..."

"가."

"너도 피곤하면 오빠네 가서 자고 가."

"됐어. 감독님 내일 차 쓰셔야 돼. 올라가야지."

"피곤하지 않겠어?"

"뭘 피곤해. 넌 내 체력 알잖아?"

"그래. 체력하면 구마하지."

"정력해도 구마하고."

"후우..."

"하하하! 한숨 좀 그만 쉬어."

"이러니 짜증난다는 거야. 이러니까..."

혜정이가 차에서 내릴 준비를 하면서 말해준다.

"마하야. 진짜로 연애를 해. 좋은 사람 만나. 난 너가 그러면 좋겠어."

"오케이. 가서 보고 괜찮으면 사귀자고 할게."

"약속."

"응. 약속."

새끼 손가락 손에 걸며 서로 좋은 사람 만나기로 했다.

혜정이도 남자친구 사귀는데, 나도 꼭 예쁜 여친 만들고 와야지.

클럽에서!

* * *

"마하야."

"네 형."

약속된 클럽을 찾아가는 날이었다.

신촌역에서 승우 형을 만나 지하철을 타고 삼성동으로 향했다.

2호선 끝에서 끝이라 그런가, 같은 서울인데 은근 멀다.

"너 오늘 멋있다?"

"형도 괜찮은데요."

"그러냐? 아 나도 이런 클럽 이런 델 잘 안 가봐가지고."

"홍대에도 클럽은 많잖아요?"

"몰라. 홍대 클럽은 더 뭔가 잘 노는 애들 가는 분위기라... 기죽어."

"형도 잘 노는데."

"하하하! 뭐냐 그건?"

승우 형과는 몇 번 만나지 않았지만 내적으로 친밀한 사이가 되었다.

아마 그건 우리가 작년 뜨거운 여름을 알기 때문에 더 그럴거라 생각한다.

"굳이 불편한 이야기는 입 밖으로 꺼내지 말자... 쪽팔리니까."

"진짜 그때는 이게 대학이구나. 이게 바로 상아탑의 가치구나. 우와~ 대학생 대단하다 했는데. 형은 저한테도 조금 연예인 같은 존재세요."

"하하하! 새끼."

"그분 말고 다른 여자친구는 없으셨어요?"

"없지. 야 나도 최근 들어서야 겨우 마음 추슬렀어. 상처 존나 받았어."

"바람이라. 끔찍하긴 하다..."

"넌 여자친구 없었냐?"

"좋아하는 애는 있는데, 이제는 남자친구 사귄다고..."

"진짜? 너 같은 애도 바람을 맞어?"

"형. 저 좆밥이라니까요."

"뭔 좆밥이야. 야 지금 지하철에 여자들 너만 보고 있어."

신림을 지나며 지하철에 젊은 사람들이 우르르 타고 있었다.

진짜 승우 형 말대로 몇 사람이 쳐다보는 게 느껴진다.

"에이 그냥 알아보는 거겠죠..."

"그게 그거지. 가서 말 걸어 봐."

"형. 우리 지금 클럽 초대받아서 가는 자리 아니었어요? 이대 무용과가 있는데 왜 한눈을 팔아요."

"너도 그런데 환상이 있구나."

"당연하죠. 무용과는 일단 그 타이즈부터... 뭔가 아련한 느낌을 주고, 그리고 예쁘잖아죠."

"넌 예쁜 애들 좋아하냐?"

"누구나 그러지 않을까요?"

"글쎄? 난 막 예쁜 애들은 오히려 연애는 좀 어렵다는 생각이 있어서."

여자 취향 이야기에 우리는 학벌이 아쉽지 않은 심도깊은 대화를 나눴다.

"긴 머리 좋지. 근데 머리가 길면 목도 좀 가늘고 길어야 돼."

"그렇죠. 그래야 머리 묶을때 예쁘고. 딱 그 자세 있잖아요."

"오오~ 니가 뭔가 아는구나."

"최근에 넌 취향도 없냐는 말을 들었는데. 확실히 전 좀 외모를 따지는 편인 거 같애요."

"왜?"

"그냥. 예쁘면 좋으니까?"

"새끼. 잘생긴 놈이 그러면 우리 같은 애들은 어떻게 살라고."

"네?"

"뭘 놀라고 그래?"

"잘생긴 놈이요? 누가요?"

"하하하! 너 인마!"

"..."

"왜? 내가 뭐 실수 했어?"

"형. 저 못 생겼어요."

"와~ 이 새끼. 와... 마하야 진짜 욕해서 미안한데, 내가 널 죽여버릴 수도 없고..."

뭔 소리야... 누가 잘 생겼다고 그래?

어두컴컴한 창문을 보았다.

난데? 여전히 그 좆같은 얼굴인데?

"뭘 그렇게 봐?"

"제 얼굴요..."

"니 얼굴을 왜?"

눈을 껌벅이면 창문 속 나도 눈을 껌벅인다. 손을 들면 창문 속 나도 손을 든다.

턱을 만지면 저놈도 턱을 만지고 있다.

"이게 잘 생겼다고요?"

"뭐라고 해줘야 되는거야..."

"형. 농담이 아니라. 이게요? 이 얼굴이?"

"어."

"..."

뭐라는 거야 대체??

혜정이도 그러고, 승우 형도 그러고.

세상에 멋지고 잘생긴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왜 나한테 이래...?

* * *

삼성역에 도착. 승우 형이 무용과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디래요?"

"주소만 듣고 찾아가긴 어렵고, 그냥 택시타고 가달라고 하는게 편하다고 그러네."

"그럼 택시 타시죠. 제가 낼게요."

"야! 이 자식 여긴 형이 낸다. 하하! 과외비 들어왔거든."

택시를 타고 큰 길을 지나쳐 여기저기 골목길을 꺾어가니 기다란 줄이 보였다.

"형. 저긴가 본데요?"

"뭐야 얘는? 갑자기 왜?"

승우 형이 핸드폰을 보면서 놀란 얼굴로 말했다.

"왜요?"

"아니... 마하야 이걸로 계산하고 나와."

형이 먼저 내리면서 어딘가로 전화를 건다.

택시 기사님한테 잔돈을 받고 따라 내렸다.

시끄러운 야외로 나왔는데도 승우 형은 목소리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왜! 아니 이제와서 그러는 게 어딨어?!!"

뭐지? 무슨 문제가 생겼나?

멀뚱멀뚱 통화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니. 형도 "알았어... 쉬어." 라면서 힘 빠진 모습으로 돌아본다.

"야. 아 씨... 진짜 미안해서 어떡하냐..."

"왜요? 친구 분 못 오신데요?"

"어... 아 얘는 그럼 진작 말을 해주든가. 사람을 여기까지 오게 해놓고."

"..."

안녕. 무용과...

안녕. 백조들이여...

안녕 쪽진 머리와 타이즈...

"진짜 미안하다. 아까 역에서 전화 할 때도 별 말 없더니 갑자기 여기와서 이러네."

"괜찮아요... 무용과랑 못 놀면 어때요... 그냥 인연이 아니었구나 해야죠..."

"목소리가 하나도 안 괜찮은데?"

"그럼 형 우린 어떻게 해요?"

"근데, 얘가 좀 이상한 말을 하는게...?"

"뭐요?"

"입구에 가서 니 이름 대면 될 거라고 그러던데?"

승우 형도 그게 이해가 안 간다고 말했다.

듣는 나도 도통 알 수 없는 소리였다.

"제가 왜요? 저 여기 처음 왔는데?"

"그러니까... 뭐 말로는 아무나 못 오는데라고 하더니..."

"흠."

고개를 돌려, 둠칫둠칫 음악소리가 흘러나오는 클럽 입구를 보았다.

기껏 새옷까지 사입고 먼 길 왔는데 그냥 돌아가기도 뭐하고.

"그럼 일단 줄이라도 서볼까요?"

"그래도 되겠어?"

"뭐 어때요. 이런 경험도 있는 거죠. 들어가려면 줄 설 수 밖에 없는 상황이기도 하고."

"그래. 그럼 형이랑 오늘 재미나게 놀아보자!"

잘 알지도 못 하는 사람이랑 클럽 같은 새로운 문화를 접하는 게 신기하지만, 승우 형도 클럽이나 나이트 같은 곳은 원래 모르는 애들끼리 번개해서 놀러오고 그런단다.

"형 이런데 안 와보셨다면서요? 뭘 많이 아시네요?"

"들은 게 많지... 정말 들은 게 많았어."

"뭘요?"

"너도 진짜 모르는 구나."

형 말이, 나이트나 클럽 문화는 단지 그곳에서 음악과 춤을 즐기는 게 전부가 아니다.

"그럼?"

"원나잇이지."

역시. 오스트리아랑 한국도 똑같구나.

알면서도 모르는 척 순진하게 굴고 있었다.

"부킹이 다 그런 거래. 그래서도 어차피 뿔뿔이 흩어질 거. 모르는 애들끼리 돈 합쳐서 번개 오고 그런다 하더라고."

"오오~"

"걱정마라. 형 알바비 받았으니까. 오늘 메달리스트랑 홈런 한번 쳐보자."

홈런이라... 인터넷 썰 게시판에서나 보던 단어를 내가 들을 줄이야.

이대 무용과는 날아가버린 상황이었다.

그렇게라도 오늘 하루 즐겁게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그들만의 클럽이라고 하더니 이 줄은 뭐죠?"

"그들만의 클럽이니까 줄을 서지. 누군지는 몰라도 그들은 바로 입장하고."

"음. 그렇구나."

"그리고 예쁜 애들은 그냥 들여보낼 걸. 어. 저기 봐 봐."

"어디요? 오오~ 진짜."

둘이서 사람들 구경하며 쑥덕쑥덕 거리고 있는데. 뒤에 있던 여자들이 톡톡 어깨를 건드렸다.

"네?"

"저기..."

"네. 왜요?"

"혹시 일행 있으세요?"

입질이 오는 소리에, 형과 나는 빠르게 서로를 마주치고 다시 여성분들로 시선을 옮겼다.

여기도 두 사람이었다.

얼마 전에 혜정이를 보고 와서 그런가 얼굴은 그렇게 예쁜 거 모르겠는데. 화장을 멋지게 잘 했고 일단 키가 크고 옷이 진짜 엄청 야했다.

딱 달라붙는 드레스에 힐을 신고 있었다.

정말 온 몸으로 멋진 클러버라는 것을 보여주는 여성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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