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륜기로 가버렷-121화 (121/401)

< 여왕의 시선 (6) >

"마하야. 뭔 소리야. 너 어차피 오늘 무용과 애들 만나려고 왔었다며."

"네. 근데 무용과 아니잖아요."

"하하하... 재밌네."

"하하! 저도 농담이죠."

실없는 소리로 무마하려해도 도형이 형의 표정이 바뀌질 않는다.

한수빈도 다급하게 물었다.

"마하 씨. 내가 싫어?"

"아니요. 그건 아닌데."

"근데 왜 가...? 나랑 있자. 응?"

"죄송해요. 진짜 가야돼요. 훈련 때문에."

"자... 잠깐만. 잠깐..."

"다음에요. 오늘 재밌었어요. 갈게요."

밖으로 나와 복도를 지나는데 방안에서 들었던 소리는 들려오질 않는다.

"..."

아까는 벽이 얇아서 들을 수 있었던 건가...

가서 말려야 하나...

아니다. 어떤 상황인지도 모르는데 엮이지 말자...

더럽게 찝찝하네. 빠져 나오길 잘 한 거 같다.

후우. 진짜 사람 무섭다 무서워...

* * *

"그래서 갔다고?! 진짜로?"

"음..."

"이런 미친 새끼가... 씨발 우리는..."

일을 마친 강세준이 벨트를 채우며 방으로 돌아왔다.

음식은 다 뒤집어져 있고 술병은 깨지고 룸안이 난리도 아니었다.

"수빈이는... 얘도 갔어?"

"화장실. 울어."

"아 그렇다고 이걸 왜... 놀지도 못 하게..."

"뭐 어때. 지 맘이지."

"후우..."

한수빈이 까이는 일은 처음이다. 아니 오늘 저녁 구마하와 함께한 모든 시간이 그들에겐 처음 겪는 감정의 연속이었다.

강세준이 룸 안에 붙어있는 화장실 문을 두드린다.

"수빈아. 오빤데"

"꺼져!!!"

한수빈이 울먹이며 나와 그들에게 히스테리를 부렸다.

"오빠들이 자꾸 이상한 짓 하니까 그러는 거 아냐!!!"

"아니... 난 뭐..."

"수빈아. 그만해."

"애시당초 그런 애들을 여기 왜 데려오는데!!!"

한수빈이 성질을 부리며 강하게 밀치자 강세준은 저항없이 소파에 쓰러지듯 앉는다.

스트레스가 밀려온다. 애들도 지가 싫다고 억지로 했거늘... 안 그러면 며칠 더 데리고 놀 수 있었는데...

이도형이 다가와 한수빈을 말리며 말했다.

"진정하고."

"흑. 흐윽... 이런 게 어딨어. 나만 놓고 가는 게 어딨냐고..."

"야. 원석이는?"

"그 새낀 지금 신났지..."

"..."

"흑 흑... 어떻게 이럴 수 있어... 어떻게..."

강세준이 이도형한테 눈짓을 주며 좀 말려보라고 작은 소리로 말한다.

다가올 선거에 있어 한동그룹은 아버지에게 큰 동앗줄이었다.

이도형이 주저앉아 울고있는 한수빈을 다독였다.

"그만 좀 울어. 뭐 어때. 이제 알았으니까 다음엔 오빠가 데리고 올게."

"됐어! 나도 그딴 새끼 관심 없어!!"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

이도형도 지칠 때가 있다.

아무리 여왕님이여도 뒤치닥 거리나 계속 한다는 건 남자로서 자존심이 상한다.

"그럼 구마하 이제 안 볼 거지?"

"미쳤어! 내가 그딴 새끼를 왜 봐!!"

한수빈이 바람을 맞는 것도 처음이고, 구마하 같은 놈을 상대해 본 것도 처음이었다.

그럼에도 이도형은 모든 일이 끝나고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잘 생각했어."

* * *

덜컹덜컹 지하철 안.

승우 형과 2호선을 타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고 있었다.

밤 11시가 막 지난 시간이라 자리는 널널하지만 가던 때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후후후후..."

"왜 웃어?"

"뭔가 갑자기 밝은 세상으로 나온 거 같아서요... 조용하고."

"후후. 너도 그러냐? 나도 그런데."

아직까지 클럽의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그 미친 분위기. 감각을 현혹시키는 레이저 조명과 음악들.

와~ 지하철의 밝은 형광등이 그렇게 평화로울 수가 없다.

"택시 타도 됐는데. 형이 낸다니까."

"지하철 다니는데요. 뭐하러 돈 써요."

"아직도 환청이 들리는 거 같네... 난 앞으로도 클럽은 무리겠다."

"..."

"너는? 저런 애들 아니면 또 가겠어?"

"네? 뭐가요?"

"뭐야. 내 말 안 듣고 있었냐? 너도 귀 먹었어?"

환청이란 말에 아까 룸에서 들었던 불편한 소리가 떠올랐다.

강세준과 김원석이겠지. 여자들은 분명 그 사람들이고...

나였으니 들을 수 있는 소리였다.

룸에 있던 두 사람은 자기 친구들이 그러고 있는 걸 모르나? 아니면 알면서도 그냥 있었던 걸까... 갑자기 그게 너무 궁금해졌다.

"저. 승우 형."

"응?"

"아까 그분들은 뭘까요?"

"뭐? 로열 패밀리잖아."

"그런 걸 떠나서, 대체 어떻게들 그렇게 뭉쳐 있는건가 싶어서."

"뭐긴 뭐야 친구지."

"오빠랑 동생인데 친구라고 해요?"

"오늘 나오기로 했던 무용하는 친구도 나보다 세살 어려. 스물 넷. 우리도 친구라고 해."

"친구... 친구라..."

끼리끼리 어울린다고 우리 친구들도 병신들만 모였으니, 거기도 그런 거라 봐야하나...

한수빈도 형 말대로 위험한 사람이었을까...?

그렇게 생겨서? 세상 모든 사랑은 다 받고 지낼 거 같은 사람이 그런다고?

너무 이해가 안 된다...

"왜? 한수빈이랑 친구라도 될 걸 그랬다 싶어?"

"후우... 형 근데 진짜..."

"예뻤다. 인정해. 솔직히 나도 그 사람 생긴것만 따지면 너한테 미안하긴 해."

"..."

"넌 그런 애들 본 적 있냐?"

"한 두 명 있긴 한데, 흔하게 볼 수 있는 외모는 아니죠."

"예쁜 장미에 가시 박혔다 생각해라."

"장미에 가시라... 시적이네요."

"문과잖아."

덜컹덜컹 당산대교를 지나면서 서울의 풍경을 보았다.

상경 두 달 째. 아직 여자친구는 커녕 섹스도 못해봤다.

"승우 형."

"응?"

"오늘 일 저한테 미안하다고 하셨죠?"

"왜? 소개팅이라도 시켜줄까?"

"안 될까요... 저 진짜 여자친구 사귀고 싶은데..."

"마하야. 너가 소개해 달라면 애들 줄 서고 다가올걸?"

"흠... 그건 뭔가 아닌 거 같기도 하고..."

"그리고 내 주변에 한수빈 같이 생긴 애는 없어."

수빈 씨. 시간이 지나니 자꾸만 그녀의 얼굴이 아른 거린다.

"박상택은 아까 왜 그랬을까."

"형 말대로 계급사회에서 떨어진 뭐. 몰락 귀족? 그런 거 아닐까요?"

"하하하!"

"그래 맞다... 상택 선배도 있구나...."

"괜찮을 거야. 니가 쫓아낸 것도 아닌데 뭘 걱정해."

"걱정 안 해요. 그냥 짜증나니까 그러지."

그래. 지금 한수빈 그리워할 때가 아니구나.

며칠 뒤 차가 온다. 나는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었다.

* * *

"오오~"

"허이고... 진짜 저 차가 들어오네."

며칠 뒤. X5가 집으로 도착했다.

감독님과 같이 차를 인수했다.

"여기 서명해 주시고요."

"네."

"그리고 저 따로 사진 한 장만 부탁드리면 안 될까요? 구마하 선수 만난다고 제가 카메라 챙겨 왔는데."

"아우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이리 주세요. 저 감독님 저희 사진 한 장만?"

감독님은 푸른 빛이 영롱한 새 차를 보며 계속 한숨을 쉬고 계셨다.

"미치겠네 진짜... 이걸 타라고 해야 되는거야 말라고 해야 되는거야..."

"감독님! 새 차 앞두고 왜 자꾸 한숨이세요."

"후우. 후우! 후우!! 에라이 망할놈아. 후우!!!"

"아. 침..."

"기사님. 혹시 스무살이 이런 차 타는 애들이 또 있나요?"

"많죠. 강남 이쪽은 없어서 난린데요. 몇 달 기다려야 돼요. 여기는 본사 차원에서 구마하 선수 탄다니까 빨리 보내준 편이세요."

"하하하... 감사하네요."

"진짜 감사하네요... 어이고 우리 자랑스런 마하 좋겠네?"

"...사진이나 찍어주세요."

기사님을 보내드리고 감독님과 다시 차를 보았다.

"어쩌겠냐. 이왕 산 거 조심해서 타고 다니라고 해야지."

"네."

"대신, 약속은 약속이다. 아무것도 못 준다. 니가 벌어서 낸다고 했어."

"물론이죠!"

"차는 멋있다. 너랑 잘 어울리네."

"이제 여기다 스키 홀더 장착하고."

"뭐? BMW에다가 뭘 한다고?!"

다음 날. 두근두근 떨리는 마음으로 학교에 차를 끌고갔다.

"확실히 주목은 끄는구나... 외제차 나만 타는 것도 아닌데..."

선팅 좀 진하게 할 것을...

안전 문제 때문에 선팅을 약하게 했더니 학우분들이 다들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 이것은 시위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큰 돈 쓰지 않았던가.

쫄지 마. 위축되지 말라고.

그러나, 며칠 전 클럽 일도 있고, 뭔가 돈 가지고 지랄하는 모습이 한심스럽게 느껴진다.

"아무리 많아봐야 더 많은 사람들이 있지..."

모르겠다. 너무 복잡해. 이미 물은 엎질러졌어.

운동하는 선배들도 몇 사람 보면서 깜짝 놀라고 있는데 그냥 밀어 붙여.

마침. 체육관 뒤 차를 세우려는데 박상택이 보였다.

"..."

오케이. 나가자.

시동을 끄고 차에서 내려 선배님을 보며 90도로 인사를 건넸다.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

박상택도 놀란 듯 다가오며 묻는다.

"너 이 새끼 지금 뭐하는 거야?"

"아시잖아요. 대회 있으면 지방 갈 일 많은 거."

"..."

"컨디션 생각도 해야되고. 전 선수니까요."

"하하하... 이 새끼가... 야 구마하."

"네. 선배님."

클럽에서 쫓겨나는 모습 들켰고, 새파란 후배는 끝까지 도전을 피하지 않고. 박상택의 마음도 이제 한계가 온 거 같다.

"너 지금 뭐하냐?"

"뭐가 말입니까."

"잘 나가서 좋겠다? 선수라는 새끼가 클럽도 가고, 외제차도 끌고."

"선배님도 클럽 오셨잖아요. 아. 입장이 안 됐었나?"

"야. 너 진짜 돌은 거 아니지...?"

주변을 둘러보며 사람들을 확인 했다.

적당히 우리 둘만 있는 것을 보며 박상택에게 귓속말을 건네준다.

"어이 적당히 하지?"

"..."

"선배 선배 해주니까 내가 좆으로 보이냐?"

"이 미친 새끼가...!"

"쳐 봐 씨발놈아. 가만 안 있을 테니까. 싸울 거면 둘 다 선수 생명 걸고 맞다이 제대로 까보자."

"......"

"내가 놀면서 메달 땄냐? 왜 지랄인데. 당신 나같이 하라면 할 수 있을 거 같애? 죽어. 그만 좀 해. 좆같으니까."

"허허허... 그래서? 이제 승리의 영광을 즐기시겠다?"

"영광 좀 즐기면 어때. 당신도 국가대표 됐다고 거들먹 댔었다며? 왜 나한테만 난린데."

"어떤 새끼가 그러냐. 내가 국가대표 됐다고 거들먹 거린다고."

"다. 우리 과 사람들뿐만 아니라 이 학교 사람들이 다!"

"이런 씨발것들이 뒤에서..."

"그만 좀 하죠 선배님. 애들 괴롭히고 이럴 시간에 저라면 훈련을 하겠습니다."

박상택이 툭 밀치면서 거리를 둔다.

"좋다. 선수 생명 걸자."

"네. 좋습니다. 싸우죠."

"아니. 내기를 걸자."

"..."

뭐야 이건 또?

박상택이 내기를 제안했다.

"너 나. 둘 중 누구 하나 올림픽에 나갈 수 없다면 그땐 은퇴하는 건 어떠냐."

"..."

"빨리. 어떻게 할래?"

"안 싸우고요?"

"미쳤냐. 니 새끼랑 나랑 체급이 있는데."

진짜 끝까지 병신이구나... 찌질한 새끼...

그래도 받아주마. 우리는 스포츠 맨이니까.

싸움 보다는 그게 낫지.

"선배님. 전 학교에 스키 타시는 선배님 계시다고 했을 때 즐겁게 운동할 수 있는 그런 장면을 기대했습니다."

"야 이 새끼야. 내가 니 기대 채워줄 사람이야?"

"앞서 큰 경험을 해오신 선배님을 믿고! 부족한 저를 더 단련시키고!! 그렇게 따르고 싶었습니다."

"..."

"좋아요. 받아들이죠. 안 된다면 선수 그만둘게요."

"후후. 분명히 약속했다."

"대신, 제가 올림픽에 나가더라도 선배님은 운동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뭐?"

"정준이 형을 보면서도 느꼈습니다. 한국 설상엔 선배님들 같은 선구자들이 필요하다고요."

"이 씨발새끼가... 나를 평가해?"

아무도 없었는데 그 사이 구경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몰려들어 박상택도 눈치를 보며 자리를 피했다.

"후우..."

재민이와 익범이도 멀리서 보고 달려왔다.

"야! 너 뭐해?"

"아 진짜 마하야... 너 저 선배랑 자꾸 왜 이래..."

"됐어... 별거 아냐."

"이 찬 또 뭐야? 니 꺼야?"

"샀어?"

"나중에 얘기해 줄게."

그날 밤. 정준이 형에게 박상택과의 일을 전화로 알렸다.

"그래..."

"죄송해요. 안 싸우고 싶었는데. 자꾸 지랄하고 또 지랄하는 바람에."

"마하야. 형도 부탁 하나만 하자."

"뭔데요?"

"이렇게 된 거. 우리 올림픽도 나가고, 메달도 목에 걸자."

"..."

"그래야 될 거 같다. 그러지 않으면 상택이는 절대 물러서지 않을 거야."

"걱정하지 마세요."

차는 그날 하루 타고 집에 세워만 뒀다.

어차피 자랑하고 여자들 꼬시려고 하던 게 아니라 크게 타고 다니지 않아도 상관은 없었다.

무엇보다 이현석 교수님까지 주변을 조금 생각하는 게 어떠냐고 하셔서 고분고분 말을 들었다.

"그리고. 너가 상택이랑 싸웠다는 걸 본 애들이 있는데."

"..."

"너 이 자식 보기보다 열정 넘치는 놈이구나?"

"열심히 하겠습니다 교수님..."

"그래. 대학이지 고등학교 아니잖냐. 행동에 대한 책임만 진다면 뭐라 할 말은 없다."

"..."

"뭐 하고 싶은 말 있어?"

"교수님. 상택 선배는 저한테 왜 그럴까요..."

"마하야. 열등감은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열등감. 남이 아닌 내 안에서 피어나는 악마.

그래서도 그것을 떨쳐내기가 쉽지 않다.

"저도 그래서 운동 미친 듯이 한 건데요..."

"그래서 메달을 땄겠지."

"..."

"스스로 넘어서야 할 문제다. 남들 신경쓰지 마라."

"교수님. 세계 선수권 꼭 우승해서 죄송한 것 갚겠습니다."

"후후. 그래. 잘하자."

박상택은 그날 이후 눈앞에서 보이질 않았다. 정준이 형 말에 의하면 여름이 되면 뉴질랜드로 스키어들이 전지 훈련을 떠나는데, 미리 갔을 거란다.

그 인간이 없으니 학교생활은 순탄하게 흘러갔다.

무엇보다 후배들을 괴롭히던 선배들이 다들 나한테 학을 떼면서 이제 그런 것에서 관심을 떨쳐낸 것 같다.

잘한 짓일까? 사체과의 문화는 문화로서 가져갔어야 했던 걸까?

그렇다고 나만 잘난 듯이 기합에서 외면받고 동기들은 끙끙거리는 꼴을 보고 싶지는 않다.

그냥 에이스는 에이스의 숙명이 있다 여기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큰 내용은 없어도 과제를 제출해 교수님들께 수고했다는 말을 듣고, 운동도 꾸준히 해서 다시금 모든 것이 안정적이 되었다.

그런데.

"미친... 이건 또 뭐야?"

5월 중순. 카드 값이 나왔는데...

뭐야. 이거 대체 왜 이래? 딜러한테 들은 것 보다 너무 많이 나왔잖아...

"아. 네. 네. 그렇다고요..."

"아직 스무살이고, 그리고 뭐 여러 가지가 있어서도 할증이 붙으니까요."

"..."

"그날 다 설명해 드렸었는데?"

후우. 씨발. 돈이 진짜 존나 무서운 거구나...

이걸 어떻게 메꾸지? 백만원으론 택도 없는데? 이거 이 상태면 상금을 부어도...

"뭐야. 난 뭐 먹고 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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