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륜기로 가버렷-126화 (126/401)

< 첫 느낌 (3) >

"어. 마하야. 왜?"

"남수야. 너 버스 탔냐?"

"아직 기다리는 중. 퇴근 시간이라 그러나 줄을 서 서 버스를 타네?"

"여기 남부 터미널에서 그렇게 안 먼데, 데리러 가면 너 올래?"

"됐어. 니 여자 만나러 가는데 날 왜 데려가."

"..."

"너 설마 쫄았냐?"

"병신아 누가 쫄았다고 지랄이야! 그런 거 아니야."

아니다. 존나 쫄린다. 차에 앉아 지켜보는데 도형이 형이나 다른 사람들이나, 하나같이 호락호락한 인간들이 없는 것 같다.

역시 혼자선 뭐랄까 너무 낯선 공간 같다...

"와보니까 식당이더라고. 불러놓고 밥도 못 먹이고 보내서 미안하니까 그러지."

"집에가서 먹으면 돼. 그렇게 늦은 시간도 아닌데 뭐."

"다음에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

"그러자고. 그분은 만났어?"

"아직 안 온 거 같애. 그리고 남수야 내가 호구 같이 굴어?"

"하하하! 이 새끼. 것 봐 쫄았네!"

"아 씨 놀리지 말고... 너도 봤잖아. 신경 쓰인다고."

"마하야. 아무렴 니가 호구겠냐. 그냥 애가 착하니까 그러지."

"내가 착해?"

"그래. 걱정되는 게 다른 게 아니야. 어딜가나 좋은 사람들이 손해 보는 세상이니까 그러지."

"흠."

"그런 의미에서 한 말이야. 니가 막 호구같이 굴거나 그러진 않어. 너 연대생이야."

"그게 공부로 들어간 거냐.... 아무튼, 그래도 뭔가 본 게 있으니까 그런 소리가 나왔을 거 아냐? 나 막 못 미덥고 그래?"

"너 애들이 놀려도 크게 화 안 내잖아. 가끔은 아 이건 좀 심한데? 싶어도 그냥 꾹 참고."

"씨발새끼 지는 아니었다는 듯이 말하네. 너도 내 뒷담화 존나 까잖아 새끼야."

"야. 내가 언제 그랬냐."

"꺼져 이 간사한 새끼야. 지 이미지만 좋게 포장하고 있어."

"하하하하! 욕 하는 거 보니까 기운이 좀 살아나는 거 같네."

남수가 다시한번 말해준다.

"마하야. 넌 우리 주변에서 젤 멋진 놈이야. 얼지 마. 알았지?"

"알겠어. 병신같이 굴지만 않으면 된다는 거 아냐."

"사람이 착하게 살아야 되지만, 아무한테나 그럴 필요는 없잖아."

"오케이."

"잘해라. 예쁘긴 진짜 예쁘더라."

나는 이미 수빈 씨를 좋아한다.

처음 클럽에서 봤을 때부터 사랑에 빠졌고 그날의 키스는 진심이었다.

진지하게 여자친구로 보고있고, 하룻밤 원나잇이 아닌, 연애를. 사랑을 꿈꿀 수 있는 그런 상대로 보고 있다.

다만, 친구들이 건네준 말들과 의혹을 무시하진 않겠다.

지금은 감정보다 이성을 우선 하겠어.

난 특별한 사람이니까.

"..."

그런데 과연 그게 마음같이 쉽게 될까?

* * *

"얘들아 잠깐만. 나 담배 좀 피고올게."

이도형이 레스토랑 밖으로 나와 담배를 꺼내무는데, 그에게 큰 그림자 하나가 저벅저벅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도형이 형."

"음? 어...? 너..."

"하하. 뭘 그렇게 놀라고 그러세요?"

처음엔 너무 반듯한 차림세라 못 알아보았다. 하지만 다시보고 또 봐도 그는 구마하였다.

이 자식이 왜 여기있지...?

압도적인 존재감에 이도형의 눈빛이 떨려온다.

"형도 담배 피세요? 그날은 안 피는 거 같던데."

"어. 가끔..."

"형들은요?"

"세준이 원석이? 걔네는 이런 데 관심 없어."

"으음. 그렇구나."

"마하야... 어떻게 알고 온 거야?"

"수빈 씨가 오라고 했어요."

뭐야? 안 본다면서...? 왜 말을 바꿔. 한수빈 니가 그런 사람이었어...?

대체 누구를 움직인 걸까... 감정에 내몰린 그녀가 나 아닌 다른 누구를 의지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원석이는 아닐 것이고...

이도형이 차분하게 구마하를 보면서 물어본다.

"마하야 혹시 세준이 만났어?"

"아니요."

"그럼 어떻게..."

"아. 음악회요? 수빈 씨가 학교로 찾아와서 말해주던데?"

놀라움의 연속이다.

걔가 직접 움직였다고...? 지가 뱉은 말이 있는데 그걸 바꿔가면서까지...?

설마 진짜로 이 자식을 좋아하기라도 하는 건가...?

"형 왜요? 저 뭐 못 올 데 왔어요?"

"어... 아니. 그럴 리가. 그냥 음악회 있는 거 다들 잘 모르고 있는데 어떻게 왔나 해서."

"확실히 분위기 있긴 하더라고요. 저도 수빈 씨 말고 다른 분들 공연할 때는 조금 졸았어요."

"하하. 다들 그렇지 뭐..."

이도형은 불편한 기운을 억누르며, 최대한 태연한 척 물었다.

"...그럼 아까 제일 앞에 있던 두 사람 중 하나가 너야?"

"네. 옆에는 제 친구."

"음... 그렇구나."

"여기는 그냥 밥 먹는 데죠?"

"밥도 먹고, 아마 끝나고 계속 놀 거야."

"그렇구나. 형 저 배고파서 그러는데, 들어가서 뭐 좀 먹고 있을게요."

"어 그래... 이따가 보자."

방탕한 도련님도 순애(純愛)가 있다.

이도형은 한수빈을 가슴에 품고 있었다.

지금은 애가 어리고 성격이 감당되질 않아 다가가지 못하고 있을 뿐. 언젠가 반드시 나를 보게 만들 것이다. 의지하고 믿고. 그렇게 흔들 수 없는 사랑을 만들어 가는 중이었다.

그래서 한수빈이 남자들을 만나고 하룻 밤 상대로 치워가며 즐겨도 묵묵히 감수해 왔다.

하지만, 이번엔 상황이 다르다.

하룻밤 상대라고 하기엔 그녀가 구마하에게 보이는 마음이 너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이도형이 묵묵히 담배 연기를 허공으로 뿌리는데, 한수빈의 포르쉐가 주차장으로 들어선다.

공연을 마친 그녀가 가벼운 드레스로 갈아입고 차에서 내렸다.

이도형이 다가가 맞이해준다.

"수빈아."

"어? 오빠 왜 나와있어? 밥 먹고 있지."

"저기..."

"뭐? 나한테 뭐 할 말 있어?"

"저기. 그러니까... 구마하가 와 있는데..."

"응! 내가 오라고 했어."

"..."

이도형은 솔직한 마음을 꺼내들지 못하고 피식 웃음을 보였다.

"어이구... 다시는 안 본다고 울고 불고 난리를 치더니, 뭐하러 그렇게까지 하냐?"

"뭐. 그럴 수 있지."

"그렇게 급했어? 차라리 오빠한테 말하든가. 니가 왜 움직여. 모양 빠지게."

"어떻게 하다보니까. 연락처도 없고. 한번 연대로 가보자 운명이면 만나겠지 했는데, 그때 딱 나오더라고..."

한수빈이 말 끝을 흐리며 가방을 뒤적거린다.

손 거울을 꺼내들어 화장을 고치며 표정을 관리하고 있었다.

이도형은 절박한 마음으로 재차 태연히 물었다.

"...너 쟤 좋아해?"

"뭐래. 내가 그럴 애가 아니잖아."

"..."

"오빠. 나 어때?"

"예뻐. 반하겠다."

"후후후. 두고 봐. 오늘은 쉽게 안 보낼 거야."

다른 놈들과 호텔로 향하는 그녀를 볼 땐 아무렇지 않았는데...

구마하와 같이 있을 그녀를 상상하니 이도형은 가슴이 찢어지는 거 같다.

* * *

오우... 스테이크. 양은 적은데 맛은 있어. 이게 바로 고급의 맛인가? 여기서 내 뱃속 채우려면 얼마가 나오려나?

레스토랑에 들어와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다들 뭔가 끼리끼리 아는 사람들 같길래 눈치 볼 거 없이 혼자 있고 싶었다.

섹스각은 아닐거야. 아니겠지. 그냥 공연 와준 게 고마워서 밥 한 끼 사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면서 조용히 고기나 썰고 있는데, 누가 툭 어깨를 건드렸다.

고개를 돌리자 수빈 씨의 환한 미소가 나를 향해 웃어준다.

"마하 씨! 왜 혼자 있어요?"

"어? 어. 네. 오셨어요."

"친구는?"

"아 먼저 갔어요."

"정말? 밥 먹고 가지. 여기 맛있는데..."

옷이 바뀌어서 그러나, 무대 위 공주님 같은 모습이 아닌 클럽에서 봤던 화려한 치장이 어울리는 모습이다.

또 한번 멍하게 반하며 인사를 나누고 있는데, 그녀가 옆 자리 의자를 빼서 앉았다.

"오늘 와줘서 고마워요."

"와..."

"왜요?"

"수빈 씨는 대체 왜 이렇게 볼 때마다 예뻐지세요...?"

"아하? 하하하! 뭐야~? 갑자기 그런 말을 하고있어. 사람 민망하게."

"하하하... 친구들한테 가봐야 하는 거 아니세요? 보니까 다 수빈 씨 친구들 같던데. 아까 도형이 형도 있었고."

"인사했어. 마하 씨 혼자 있다고 하길래 이리로 왔어."

"허허허... 제가 뭐라고."

"내가 초대한 사람인데. 내가 챙겨야지."

수빈 씨가 앉으니 웨이터가 다가와 이것저것 음식을 내준다.

"나 여기서 밥 먹어도 되죠?"

"그럼요. 주인공을 제가 어떻게 밀어내요."

"후후후. 오늘은 정장 입었네? 잘 어울린다."

"아 그때 그 디자이너 선생님이 골라주셨어요."

"진짜! 그날 뭐야? 왜 갑자기 모델을 하고 있었어? 나 완전 깜짝 놀랬잖아."

"알바죠 뭐."

"세계 챔피언이 알바도 해요? 마하 씨 광고 많이 찍지 않았어?"

"하하하... 돈 너무 쓴다고 감독님이랑 형이 카드를 다 막아버려서..."

"정말? 너무 현실적인 거 아냐? 아하하~!"

다른 걸 다 빼고 이렇게 둘만 있으면 말도 잘 통하고 분위기도 나쁘지 않다.

역시 내가 너무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걸까...

연애라... 섹스가 아닌 진짜 연애...

사랑으로 가는 길은 대체 어떻게 열어야 하는 거지?

"그래서 나 아까 마하 씨 보는데 너무 떨려가지고"

"진짜요? 하나도 틀린 거 모르겠던데?"

"어땠어요? 공연은 재밌었어요?"

"네. 수빈 씨한테 조명 딱 쏘아지는데 내공이 느껴지더라고요."

"하하하하~ 내공이 뭐야~"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웃어주고 크고 화려한 리액션.

역시 함께 있으면 빠져들 수 밖에 없는 사람이 아닐 수 없다.

"근데 수빈 씨 언제까지 여기 계실 거에요?"

"왜 갑자기 서운하게 그러지? 설마 또 가려고?"

"아니 그게 아니라. 어쨌든 오늘 주인공인데. 늦게까지 있을 거면 먼저 인사드리고 가는 게 나을 거 같아서."

"그럼 나도 갈래."

"..."

"진짜로. 오늘은 안 보내줄 거야."

그래. 섹스도 사랑의 과정이다.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을 써보자.

"오케이. 다 드셨어요?"

"응."

"다 안 먹었는데? 남기면 돈 아깝잖아요."

"하하하~ 그게 뭐야."

"사람들 인사하고 와요. 나 차 시동걸고 있을게요."

"같이 가."

한수빈이 팔짱을 끼고 걸어 나온다.

알아보는 사람들한테 인사는 하지만 아무도 그녀를 왜 이렇게 빨리 가냐고 붙잡지 않는다.

어딜가나 자기 마음대로 해도 되는 사람인 것 같다.

* * *

"차 좋다. 새 차네?"

"네. 근데 수빈 씨 차가 더 좋은 거 아닌가요?"

"음. 난 이렇게 큰 차 어울리는 사람이 좋더라."

지난번에 이어 또 한번 섹스 각이 뜨는데...

좋아하자니 뭐하고 거부하자니 그건 본능적으로 아닌 거 같고.

진짜 애매해 미치겠네.

사람은 좋은데 마냥 좋아하기가 왜 이렇게 걸리지?

"그래서? 마하 씨? 우리 어디로 가요?"

"호텔로 가실래요?"

"...갑자기?"

그러게 이렇게 갑자기? 내가 말하고도 좀 어이 없는데...?

"아 요즘 운동 때문에 피곤해서요..."

"후후후. 너무 멋없다."

"..."

이렇게 보니까 이혜정 말도 일리가 있구나.

섹스는 길을 알아도 연애는 모른다...

침대 위에서 흥분 시키고 만족시키는 방법은 알아도, 마음을 붙잡는 방법을 아무것도 모르겠어.

난 사랑을 하고 싶던 게 아닌가?

뼛속 깊이 뿌리내린 외로움을 채워 줄 그런 사람을 찾고 있던 거 아니었어?

단순 성욕을 채우는 게 전부가 아니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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