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륜기로 가버렷-128화 (128/401)

< 보물을 알아보는 눈 (1) >

"어째 오늘은 운전만 하는 날 같네."

X를 애물단지라고 여겼는데 차가 있으니 이런 게 좋구나.

어디든 가고 싶을 때 아무 때나 갈 수 있다. 그래서 성남으로 가고 있었다.

호텔에서 그리 멀지도 않고, 무엇보다 혼자 있기 싫었다.

퇴근시간도 지났나 아까와 다르게 길도 쭉쭉 빠지길래 단숨에 남수네 집앞에 도착했다.

"어디?"

"니네 집 앞에 치킨 집 있잖아. 나와. 맥주나 한 잔 하게."

"그러니까... 니가 왜 여깄어? 뒤풀이는?"

"나오면 얘기 해 줄게. 안 오면 나 치킨 먹고 간다."

잠시 뒤 가게 벨소리를 울리며 남수가 들어왔다.

"여~ 오늘 자주 보는구만."

"야? 왜 여깄어?"

"왜 있겠냐. 치킨 먹으러 왔지. 앉자. 치킨도 방금 나왔어."

"개소리 그만하고. 어쭈? 술까지 먹네? 운전 어쩌려고?"

"대리 쓰지 뭐."

"신촌까지?"

"몇 만원 안 할 걸?"

"형한테 가. 여기 니 집 없는 것도 아니고. 왜 돈지랄하고 있어?"

"하하하! 아무튼 앉어. 사장님. 저희 500하나 더 주세요."

남수가 앉자마자 물어본다.

"뭐야 어떻게 된 건데? 한수빈이랑 잘 안 됐어?"

"호텔까지 가긴 갔는데."

"근데?"

"야. 여기 맛있다. 맨날 지나만 가서 오늘 한번 들러 봤는데. 맛집이네."

"미친놈아. 얘기하다말고 헛소리를 꺼내고 있어."

사장님이 포크와 맥주를 가져다 주신다. 껄껄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사장님! 얘가 사장님 치킨 헛소리래요!"

"뭐? 너?"

"아... 아니에요!! 이 새끼가 미쳤나?!"

"크하하하!"

"재밌냐 병신아?"

"어. 존나 재밌어."

"뭐야? 차이고 실성한 거야?"

이러저러 쩝쩝 냠냠 거리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해줬다.

친구랑 여자 이야기 하니까 좋구나. 마음이 편하네.

"그래서? 그냥 나왔다고?"

"응."

"어이 구마하...?"

"뭐?"

"아니... 내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거기까지 갔으면 오케이 아냐?"

"오케이지. 그쪽도 섹스만 하고 싶다고 했어."

"...근데 왜 나와?"

"하하하! 이 새끼."

뭐가 그렇게 이해가 안 가는지, 남수는 했던 말 또 하고, 물은 거 또 묻고. 고장난 MP3 마냥 자꾸 시간을 복귀하고 있었다.

"그렇게 된 거라고. 끝."

"야. 내가 진짜 이해가 안 가서 마지막으로 물어보는데, 자기 말 들으라는 게 왜 그렇게 화가 나는 거야?"

"몰라. 그냥 빡치데."

"..."

"뭐? 니가 호구같이 굴지 말라며?"

"아니. 아무리 그래도..."

"기분도 그렇고. 난 연애가 고픈 사람이지 섹스가 고픈 건 아니라."

"허허허. 허허허허... 뭔가 좀 어이가 없는데? 여자경험 많으면 다 그렇게 되는거냐? 아니면 니가 특이한 거냐?"

"서로 원하는게 달랐을 뿐이지."

"섹스나 연애나. 100미터나 마라톤이나. 같은 거 아냐?"

"어따 비교를 해! 그리고 마라톤이랑 100미터는 애초에 종목이 달러!"

"결국 육상이잖아."

"새끼야 그럼 10종 경기는? 7종 경기는? 근대 5종은?"

"따지고 있어..."

"니가 먼저 시작했잖아."

"아니, 결국 그러기 위한 연애를 하는 거 아니냐고? 그리고 원래 넌 섹스가 목적인 놈이었고."

"후우..."

"마하야. 너 외롭냐?"

"..."

"뭐야. 다 말해 봐. 내가 진짜 이해가 안 가서 그래. 왜 그런 사람을 거부해?"

오스트리아에서 머문 짧은 시간은 빼더라도, 잠자리를 먼저 한 사람들과 끝이 좋은 경험이 없었다.

늘 남녀 관계에 있어 섹스를 먼저 한 게 실수가 아닐까 싶다.

그러지 않고서야 쓰리섬까지 같이 한 애가 날 밀어낼리 없을 테니까.

혜정이 뿐만아니라 다빈이도 그랬고. 빅토리아도 그랬었다.

다들 날 좋아해주지만 뭔가... 뭔가 좀 아니었다.

"이번엔 다르게 가고 싶었어."

"연애를 우선으로?"

"응."

"연애가 그렇게 어려운 거냐? 섹스가 더 어려운 거 아냐?"

"몰라. 나한텐 반대라."

"좆밥 소시민이라 유명인의 마인드를 따라가기가 어렵네..."

"미친 놈. 빈정대고 지랄이야."

아무튼, 이리 된 거 오늘 애들이나 부르자니, 정석이는 내일 출근 때문에 잘 것이고, 태윤이도 요즘 학교 동아리에서 지내느라 집에 없을 거란다.

"정석이는 그렇다 치고, 태윤이 뭐하는데?"

"밴드부. 그 새끼 요즘 기타 친다고 신났어."

"오~ 그래? 공연하면 가봐야겠네."

"시간을 보나 장소를 보나 그나마 불러서 나올 애가 딱 하나 있긴 하지만..."

"하하하... 이 새끼."

"근데, 걔는 너 있다면 절대 안 나오겠지?"

짧게 건배 하며 입을 축였다.

"크으~ 시원하다. 야. 내가 혜정이 이야기 해줄까?"

"됐어. 하지 말라고 소리 지를 땐 언제고."

"내가 얘랑 어떻게 했는지 아냐?"

"하지마. 새끼야. 그런 얘길 왜 해?"

"니네가 맨날 물어보잖아."

"아니 우린 그냥 둘이 했냐 아니냐만 알고 싶은거지. 디테일하게 들어가고 싶진 않어."

"후후후. 한번만 해달라고 울면서 빌었다."

"병신. 지랄을 해요... 하여튼 미친 놈이라니까..."

"진짜야. 그때 크리스마스때 우리 집에 모였었잖아. 그날 그랬어."

"..."

"그 휴지는 아니고. 아 이 새끼 진짜 대가리에 뭐가 들어차가지고."

섹스를 갈망하던 마음은 사랑을 원하는 마음이었고, 사랑을 원한다는 건 내 안에 큰 상처가 있다는 것을 그날 알았다.

"모든 고통을 토로한 끝에 애가 안아줬지..."

"...뭔가 우리가 생각했던 거랑 많이 다르네."

"하하하. 니네는 뭘 우리가 무슨 사인 줄 알았는데?"

"그거야 뭐. 당연히 둘이 몰래 사귀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런데 니가 개새끼라 혜정이 찬 거고."

"야. 내가 채였다니까... 몇 번을 까였는데..."

"이번에도 구란 줄 알았지."

"와 진짜 돌겠네. 내가 언제 구라를"

"안 쳤다고 해라 새끼야. 죽여버릴라."

"그냥. 그때 그때 조금 변명이 있었던 거지..."

혜정이 이야기를 꺼내자 대화가 더 깊어진다.

"시작은 그랬다 쳐. 근데, 그 다음은 잘 모르겠어."

"뭐가?"

"걔가 날 좋아했던 건지. 그냥 불쌍해서 안아주는 건지. 아니면 그냥 날 이용한 건지... 만나면 좋은 소리는 안 하고 잔소리나 퍼붓고 있지."

"에이 설마. 혜정이가 아무렴. 걔가 그럴 앤가."

"야, 얘 성깔 장난 아니야. 니네가 모르는 거야."

"어쨌든 둘이 가까워 진 건 맞네. 거의 뭐 사귄 거랑 다르지 않게 지낸 것도 맞고."

"...남수야. 그래서 괴롭다고."

"..."

"그 이상이 되고 싶었는데. 그렇게 될 수가 없잖아..."

생각할수록 한수빈이랑 빨리 끝내고 나오길 잘한 거 같다.

오늘도 섹스로 마치는 관계였다면 가슴은 더 허전해졌을 테니까.

"가끔 그런 생각을 해. 만약 그날 내가 애한테 매달리지 않고. 그냥 혼자 꾹 참고 이겨내서 메달 따고 그러고 돌아왔다면"

"마하야. 마셔라."

"그럼 얘가 날 남자로 봐줬을까...? 좋아했을까? 그럼 지금 이 자리에 나오라고 불러도 되고, 학교도 그렇고. 서울에서 동거같이 지내고."

"야 첫사랑이 원래 다 그런 거야. 나도 헤어졌어."

"너도 그때 그 친구 이야기 하고 싶으면 해."

"됐어. 난 지금 좋아하는 사람 있어."

"후후후 넌 어떤 상황이냐?"

모두가 아닌 남수와 단 둘이서 술마시긴 처음이다.

다 같이 나누는 시시껄렁한 농담과 즐거운 시간도 좋지만, 이거도 나쁘지 않구나.

생각보다 대화에 깊이가 있어. 이건 또 이거대로 즐겁네.

"뭔가 조금 확신이 없어..."

"넌 걔 좋아하는 거 맞고?"

"나는 그렇지. 은정이가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다는 거지."

"뭐 어떻게 생긴 애냐? 다음에 졸업앨범 좀 찾아봐야겠네."

"사진 잘 안 나왔어. 너 진짜 모르냐? 은정이는 너 알던데?"

"세상 사람 모두가 나를 알어. 난 몰라도."

"오 존나 패기있어."

"하하하~"

떠들다보니 술이 부족해진다.

500이 아니라, 3000 큰 거 가져다 놓아도, 뭔가 부족해 2000 짜리를 더 마셨다.

"그냥 형네 가서 자. 너 꽤 마셨어."

"됐어. 오줌누면 다 깨. 맥준데 뭐."

"운동하는 놈이 작정하고 마시니까 장난 아니네."

"그리고 지금 형 혼자 있는 것도 아닌데 갑자기 찾아가면 놀래."

"누구랑 같이 계셔?"

"먼저 겨울에 나가 있었잖아. 그때도 형 여자친구가 왔던 거 같더라고. 아마 지금도 같이 있을 거야. 정석이도 슬쩍 물어보는 게 요즘 같이 지내는 거 같애."

"뭐 그럴 수 있지. 니네 형이 애도 아니고."

"그럼. 우리 형도 결혼 해야지. 나도 수정이 누나 좋아. 자주 못 봐서 그렇지."

"...그래도 가족인데 너무 신경쓰는 거 아니냐?"

"니 말대로 나라는 인간이 존나 착하잖아."

"병신. 지 입으로 그러고 싶냐?"

"우리 형 진짜 고생 많이했어. 이제 나 같은 놈 떨쳐내고 행복하게 살아야 돼."

"흠."

남수가 뭔가 말하려다 그냥 맥주 잔을 들었다.

"할 말 있으면 해 병신아. 뭔 눈치를 봐."

"아니. 근데 그러면 넌 더 외로워 지는 거잖아..."

"하루 이틀이냐. 그리고 형수님이 생기는데 내가 왜 외로워. 가족이 늘어나는데."

"흠. 그것도 그렇네."

"넌 니네 누나 남자친구 사귀면 외롭냐? 너 그거. 그거 뭐지? 시스콤?"

"하하하! 진짜 미친 새끼 아니랄까봐."

"아. 오늘까지 학교 축제였는데. 아쉽네."

"니네 학교 축제 가보고 싶었는데."

"역시 나한텐 운동밖에 없는 거 같다. 그치?"

"그러게. 큰 대회가 오고 있다."

"존나 빡시게 해야지. 요즘 내 운동이 조금 부족했어."

"연애는?"

"세계 선수권 끝나고 하지 뭐. 또 아냐? 나가서 좋은 인연 만날지?"

* * *

"형님."

"어. 한 감독 왔어."

며칠 뒤 연세대학교 대운동장.

훈련을 지켜보는 이현석의 곁으로 한상률이 다가왔다.

두 사람은 땀과 열기를 피워올리며 타이어를 묶고있는 구마하를 지켜본다.

"야. 저거 니네가 알려준 훈련이지?"

"네."

"시대가 언젠데 무식하게 타이어가 뭐냐 타이어가... 실미도도 아니고"

"우리도 세 개 올리라고 한 적은 없어요."

"하나 갖곤 저항이 안돼. 저것도 그만 하라는데, 지가 두 개 더 올려서 뛰고 싶다고..."

"놔두세요. 저녀석 타이어 끄는 거 좋아하니까."

"부상이라도 오면 어쩌려고... 선수라는 놈이 무식하기는."

"다칠 거 같으면 지가 하나 풀겠죠. 봐요. 저 놈도 사람은 사람이라니까. 하하!"

구마하도 타이어 세 개는 무리임을 깨닫고 두 개를 묶어 훈련을 시작했다.

한상률은 먼지를 피워 올리는 구마하에게서 눈을 때어 이현석을 보았다.

"그래서 저는 왜 오라고 했어요?"

"전달 사항이 있어서."

"전화로 하시지?"

"이 자식은 진짜... 형이 부르면 그냥 '네' 하는 일이 없어."

"하하하. '네!' 말씀하세요."

"나 세계선수권대회 못 가."

"왜요? 이번에 형님이 저 녀석 데리고 갔다 온다고 그러셨잖아요. 표까지 다 예매해 놨는데?"

"연맹에서 대표팀 보낸다고 마하도 그쪽으로 합류하라고 하더라."

"세계선수권을 연맹이 지원해준다고? 진짜!?"

올림픽, 아시안게임과 다르게 세계선수권대회 같은 경우, 선수 개인이 참가와 일정을 책임진다. 모든 경비는 개인 부담이 원칙이나 대표팀이 움직인다면 연맹이 이를 맡게 된다.

"오~ 파격적인데?"

"파격적이지. 연맹도 지원을 아끼지 않을 예정인 거 같더라."

"선생님 힘 쓰셨네. 아닌가? 두희 선밴가?"

"두 분 다 아니야. 그리고 두 번 째. 대표팀 감독 바뀐다."

"그건 먼저 들었어요. 두희 선배 물러나신다고."

"코치진 경영진 만장 일치로 한 사람을 뽑았어."

"누구요?"

"너."

"뭔 소리야... 나한테 그런 말 한 마디도 안 했으면서."

"그러니까 지금 불러서 이야기 하고 있잖아. 너 연맹 소속 코치 아냐? 올림픽 때 등록했잖아."

"..."

"니가 하래. 선생님이 전해달라고 하셨어. 경영진도 너라면 오케이라 그러고."

"형님. 저 바빠요. 우리 회사 일도 정신없고."

"올림픽 금메달을 키워내고 세계선수권대회 참가 경험도 있다. 이번 대회에 너만한 지도자가 어딨냐?"

"아 몰라. 안 해. 연맹 빠지는 것도 정신 없어서 못 했을 뿐이야. 다른 감독 찾으라고 해요. 난 빠져요."

"마하도 가잖아. 팀이 젊어. 니가 아는 실업팀 애들도 몇 명 있고. 해. 그냥."

"동민이 진수 이런 애들?"

"그래."

"...형님. 연맹에 무슨 일 있어요? 갑자기 왜 이렇게 후해졌지?"

"상률아. 제발 귀 좀 열고 살아라... 이번에 회장 바뀌었잖아."

"누구로?"

"박문기..."

"그 재수없다는 인간?"

이현석이 부드득 이를 갈았다.

전임 회장의 은퇴 발표와 함께 새로이 회장 선출 회의가 열렸다.

모두들 천병욱 전무가 회장직을 맡을 거라 믿고 있었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뽑힌 사람은 다름아닌 부회장이었던 박문기.

"그 사람 뭐 한 거 없다면서? 어떻게 그렇게 됐지?"

"사업수완이 좋은 인간이라..."

좋게 말해 수완이 좋고 나쁘게 말해 개새끼였다.

다들 지난 올림픽 때 정신없이 선수들 지원하기 바쁠 때 박문기는 한국에 남아 있었다.

아테네에서 연이어 들려오는 메달 소식과 공로를 그가 가로챘다.

우리 연맹은 선수들에게 아낌없는 지원을 해왔으며.

우리 연맹은 진작부터 구마하 선수를 발굴하고 육성해 왔고.

언론을 상대해주는 줄 알았더니, 어느순간 박문기가 곧 육상연맹의 얼굴이 되어 있었다.

"표면적으로 바뀌는 건 없어. 천병욱 사단은 실무진이니까 계속 하던 일 하고. 선생님도 박문기가 자금을 많이 끌어올 수 있으니 회장직을 맏는 게 맞다고 하셨어..."

"그런 의미의 대표팀이면 더 꺼려지는데?"

"부탁하자. 그나마 너니까 선생님이 괜찮다고 하시는거야."

"왜요?"

"박문기는 힘있는 사람에게 꼼짝 못 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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