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륜기로 가버렷-129화 (129/401)

< 보물을 알아보는 눈 (2) >

"그럼 저도 태릉으로 가요?"

"음... 어쩌다보니까 상황이 엿같이 됐다..."

"엿이라뇨? 축하드려요 감독님! 국가대표팀 감독님이 되셨네요!!"

"집어치워. 내가 잘해서 된 거냐..."

"그럼요!"

"시끄러 이놈아."

6월. 8월 초 열리는 세계선수권 대회를 앞두고 동민이 진수 진운이. 그리고 대한 체고의 권지성까지 한국 육상계의 황금시대라 불려지는 멤버들과 태릉에 입성했다.

"후우. 마하야. 이제라도 애들 데리고 연대로 가면 안 되냐?"

"안 되죠. 축구부 훈련 있다고 운동장 맨날 뛰어다니는데."

"아 진짜 태릉. 제기랄..."

"왜 그러세요. 빨리 가요 우리."

"내가 무슨 대표팀을 맡는다고... 지금이라도 맡을 사람 없나...?"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야. 동민아 너도 뭐라고 말씀드려 봐."

"태릉... 태릉이라... 내가 태릉..."

"여기나 저기나..."

전날 동민이가 올라와 함께 이동하고 있었다.

동민이도 태극마크를 단다는 사실이 어리둥절한가 보다.

"감독님..."

"동민이 왜?"

"저는 마하 친구라고 뽑힌거죠? 그렇죠?"

"조용히 안 해? 나야말로 이 자식 안다고 지금 쓸데없는 임무 떠맡고 있잖아!"

"아 둘 다 진짜 왜 나한테 뭐라고 그래요!!"

"말도 안돼... 내가... 장애물 시작한지 반년 밖에 안 된 내가 어떻게..."

"새끼야 니가 잘하니까 뽑았겠지!!"

"그럼 나는?"

"감독님이 지도자감이니까 뽑으셨겠죠!!"

서울 노원구 공릉동 태릉 선수촌. 체육인의 성지에 도착했다.

작년 아테네 올림픽만 하더라도 뿔뿔이 흩어져 땀 흘리던 육상인들이 선수촌에 자리를 잡다니. 감격스런 순간이다.

"따지고 보면 이것도 니 녀석이 메달을 땄으니까..."

"그럼요. 구마하 없으면 육상따위야 뭐..."

"아! 말씀 진짜 그렇게 하실 거예요! 그리고 미친놈아! 넌 선수라는 자식이 따위가 뭐야 따위가! 자부심을 가지진 못 할 망정!"

속속들이 새로운 멤버들이 도착하고, 천병욱 전무님과 육상연맹 관계자 그리고 박문기 신임 회장님이 큰 플래카드를 걸고 반겨주셨다.

"어서들와라."

"대 사부님."

"그래. 마하야 회장님한테 인사부터 드리고. 취임 축하드린다고 꼭 전해드려 알겠지?"

"전 사부님이 되시길 바랬는데..."

"하하! 니 녀석은 그런 거 신경쓰지 말고 운동만 잘 하면 돼."

"네."

박문기 부회장... 아니 이제는 회장이라 불러드려야지.

작년 올림픽 직후 나를 행사인형으로 만든 장본인이다.

어른들도 별로 달가워 하지 않고, 나도 그닥 느낌이 별로지만,

여기저기 얼굴 비추고 다녔던 시간들이 연맹에 큰 후원금을 만들었고, 자금이 있어 동민이나 진수같은 친구들이 태극마크를 달고 세계선수권에 도전할 수 있음을 따져보면, 세상이 꼭 나 편할대로만 움직일 건 아닌 것 같다.

"회장님."

"마하 왔구나! 하하. 이 녀석."

"취임 축하드립니다."

"그래. 하하! 이번 세계선수권도 힘내야지?"

"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좋아 좋아. 기대하고 있으면 되겠지?"

태릉에서의 훈련이라고 크게 다를 건 없었다.

오히려 새벽부터 밤까지 운동만 신경 쓸 수 있는 시스템과 식단을 접하고 있으면, 왜 선수들이 이곳을 오고 싶어하는지, 태릉 선수촌이 왜 엘리트 체육인들의 무대인지 이해가 된다.

대학에서 느꼈던 생활의 혼란과 어려움을 잊고 오랜만에 안정감을 찾는 시간이었다.

나는 거의 체력단련실에서 시간을 보냈는데, 하계 동계 모든 시스템을 갖춘 태릉에서의 훈련은 스키 근육을 키우는데도 남다른 환경을 제시해주고 있었다.

"후우~"

혼자 열심히 쇠질을 하고 있는데 단거리 선수 김진수와 권지성이 찾아왔다.

"넌 트랙은 안 뛰냐?"

"하던 거 마저 하고 가야지. 후욱-!"

"이 형은 근력만 키우는데 왜 속도가 오르지?"

"하하! 근력을 키우니까 속도가 오르지!!"

"나도 할 만큼 하는 거 같은데, 왜 이렇게 기록이 안 줄을까...?"

"더 빠르게 뛰면 되죠."

"지성이 말이 맞다. 더 빠르게 뛰면 돼! 훅. 후욱!"

"마하야. 그런 뻔한 이야기 말고 비법 좀 알려줘."

"비법이 어딨어. 운동해. 하하하~!"

"떨려 미치겠다. 대표팀 괜히 들어왔나..."

"나도. 마하 형 때문에 사람들이 육상에 기대만 높아져서..."

"야. 운동하는 사람 옆에서 자꾸 헛소리 할래?"

"긴장된다고... 운동이 안 돼."

"저도요."

"둘 다 잘하는 놈들이 왜 이렇게 조바심을 내냐?"

"모르겠어요. 세계선수권이라고 하니까... 뭔가 보여줘야 될 거 같고..."

"그러니까. 아 괜히 연맹이 밀어가지고 더 뭔가 해내야 될 거 같애..."

"그런 게 어딨어. 박문기 좆까라고 그래. 우린 우리 운동이나 잘하면 되니까."

"감독님도 그러긴 하시지만..."

"감독님이나 형이나... 말이 편하지."

"하하하! 이 새끼들. 진짜..."

역기를 내려놓고 친구들을 보았다.

나는 내공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다.

두 녀석 다 10초 초반대로 9초의 벽을 앞두고 있는만큼, 정말 그 알딸딸한 간격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더 아쉬움을 만들어 내는 것 같다.

"얘들아. 뭐가 됐든, 침착하게 근육부터 잡어. 시간은 충분해. 베이징까지 앞으로 3년 남았어."

"형. 스키 운동은 육상에 도움 돼요?"

"많이 돼. 육상도 스키 운동에 도움이 되고. 한번 해볼래?"

"스키가 육상에 어떻게 도움이 되냐?"

"스키는 점프가 있잖아. 충격을 발목부터 무릎 골반까지 쭉 받아내는데, 그러기 위한 근육이 트랙에서 탄성을 줘."

"오오~ 그래?"

"무엇보다 코어가 단단해지니까 파워가 더 오르고."

"형. 저도 알려줘요. 어떻게 해요?"

"일단 무게 좀 빼고. 바로 하면 다치니까. 바벨 싱글 데드리프트라고 한발로 데드리프트를 하는거야."

차근차근 땀방울을 모으고, 훈련이 끝나면 친한 애들끼리 선수촌을 돌아다니며 산책을 즐겼다.

"아까 걔네 베드민턴 선수들 맞지?"

"그러니까. 여기서도 연애를 하네."

"젠장. 이래서 세상 될 놈 될이라고..."

"마하야. 넌 여자친구 없냐?"

"없어..."

"너 여자친구 없어? 미친 놈. 연대는 왜 갔냐?"

"에이 씨..."

머저리들 아니어도 이런 대화를 피할 수가 없다.

지성이까지 대화에 진지하게 나서고 있었다.

"형. 형은 그럼 다빈이 누나랑 해봤어요?"

"아 또라이 새끼 진짜..."

"안 했어?"

"꺼져 병신들아. 아 씨발 진운이한테 갈래. 미친놈들도 아니고."

"야. 하면 무슨 느낌이냐?"

"마하야 난 그것보다 어떻게 벗어? 여자가 먼저 막 벗어?"

그래. 이런 게 궁금하지. 이런 게 진자 평범한 우리들 또래의 이야기지.

"그냥 자연스럽게 돼."

"오오..."

"다빈이랑도 했었어? 왜 대답을 안 해?"

"하하하. 야 나 아는 애들한테는 여자 이야기 안 해."

"이 새끼 해봤네"

"씨발 새끼... 다빈이 그 귀여운 애를."

"아... 다빈이 누나. 참... 그 성격을 어떻게."

그러고보니 다빈이 이야기가 궁금한데, 마침. 지성이도 있고 진수도 있고 한번 물어보자.

"다빈이 연락 되는 애들 있냐?"

"니가 모르는 걸 우리가 어떻게 알어."

"지성아. 너는?"

"글쎄요. 누나 졸업하면서 사라지긴 했죠."

올림픽 끝나고 모두가 연락을 해왔었다.

심지어 별로 친하지도 않던, 누군지도 잘 기억이 안 나는 초등학교 동창들까지 연락을 했었는데. 최다빈만 끝끝내 연락이 되지 않았다.

"기연정한테 한번 물어 봐."

"야. 나 걔랑도 연락 안 한지 꽤 됐어."

"다빈이 누나 외국 갔다는 말이 들리긴 했었는데."

"외국?"

"진짜? 어디?"

"그건 모르겠어요."

그나마 지성이가 다빈이랑 친했던 만큼 흐릿한 소식을 전해준다.

"연정이한테 문자왔는데, 3학년 2학기 땐 다빈이 학교에서 거의 못 봤다고 그러네. 얘도 대회로 정신 없었고."

"또 어디 부상입었나...?"

"설마 은퇴 한 건 아니겠지?"

"그건 아닐 걸요. 그 누나 성격에 그렇게 그만둘까."

"유학이라... 그럼 미국이나 이런 데 있는건가."

"잘하면 세계 선수권에 나오겠네. 개인으로 참가할 수 있으니까."

"그러네! 세계선수권이니까."

"한번 보고싶다."

어쩌다보니 다빈이까지 그리워지는구나...

따져보면 애랑 나빴던 건 없었어. 그냥 성욕이 내 이상이 된다는 게 조금 무서웠을 뿐이지.

그것도 지금이라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건데.

아... 진짜 연애하고 싶다.

* * *

6월 한 달이 훌쩍 지나고 7월. 대학은 방학을 맞이했다.

누구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했고, 누구는 해외여행을 떠났다.

저마다 바쁜 여름을 보내는 가운데, 한수빈은 에어컨을 켜둔채 누워 TV만 보고 있었다.

[다음 소식입니다. 다음 달 핀란드 헬싱키에서 열리는 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 출전하기 위해 오늘 한국 육상 대표팀이 출국길에 올랐습니다.]

[육상연맹은 새로이 부임한 박문기 회장을 필두로 조직위를 파견해 선수들을 지원할 예정입니다. 구마하 선수를 비롯한 우리나라 젊은 대표팀은 다가오는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최고의 기량을 선보이기로 각오를 굳혔습니다.]

[구마하 (연세대) : 세계선수권은 저도 처음이라서요. 하지만, 저 혼자만 가는게 아니라 친구들도 있고, 반드시 좋은 성적 내서 돌아오겠습니다.]

"잘 살고있네..."

그날의 충격이 어찌나 컸던지, 한수빈은 지난 두달 동안 남자는 커녕 클럽도 가질 않았다.

어떻게 거기서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고자 아냐? 말만 그러지 실제론 섹스도 못 해본 거 아닌가?

어떻게 나를 두 번이나...

자신을 앞에놓고 보여준 단호하고 여유로운 태도.

구마하의 차가운 눈빛과 행동이 뇌리에서 떠나가질 않는다.

"후우..."

한수빈은 TV를 끄고 침대에 엎드렸다.

눈을 감을수록 생각나는 그 몸. 눈빛... 처음으로 느꼈던 굴욕...

무너뜨리고 싶어. 화가 나. 용서가 안돼. 건방진 자식!

무엇보다 갖고 싶다.

너무 갖고 싶어....

"하아... 사랑이라..."

이렇게 되기 전까진 그녀도 평범한 데이트를 즐기고 여기저기 소개도 받아봤다.

하지만, 그만큼 빠져들게 만드는 사람이 없었다.

무엇보다 자신과 함께하는 남자들은 자신감이 보이질 않았다.

이럴 거 귀찮게 뭐하러 연애를 하지? 그냥 섹스만 하면 되는 걸?

"연애. 연애라."

구마하를 애인으로 둔다. 그와 연애를 한다.

한수빈은 늘 자신이 우선되는 만남을 가져왔다.

하지만, 구마하라면...

"..."

지 입으로 그랬어. 여자친구가 되준다면 원하는대로 해주겠다고.

야생마를 길들이는 연애라...

"그래. 연애는 원래 종잡을 수 없는 사람과 해야지."

헬싱키로 날아가는 항공편을 검색해보는 한수빈.

그녀에게 이도형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어. 오빠."

"뭐하냐. 여름인데 통 얼굴도 안 보여주고."

"실연의 상처가 큰 가 놀 기운이 안 나."

"그거 가지고 실연은 무슨."

"아무튼, 왜? 오랜만에 전화했네."

"수빈아. 애들이 멕시코 놀러가자는데. 너 시간 어때?"

"다녀와. 난 갈 데가 있어."

"어디?"

"헬싱키."

"너 설마... 구마하 보러가려고?"

"응."

이도형이 가슴 속 차오르는 분노의 한숨을 눌러가며 말했다.

"왜... 너 왜 그렇게 그 자식한테 집착하는거야...?"

"느낌이 있었어."

"무슨 느낌?"

"첫 느낌."

"후우..."

"오빠. 왜 자꾸 한숨이야."

"야. 나도 같이가."

"오빠가 왜?"

"그냥. 너 걱정되니까."

"..."

"혼자 갈 수 있겠어?"

"알았어. 비행기 표는 내가 사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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