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륜기로 가버렷-130화 (130/401)

< 보물을 알아보는 눈 (3) >

"감독님. 부르셨어요?"

"어. 좀 잤어?"

"아니요. 좌석은 편한데 영 잠이 안 오네요..."

"그러니까. 젠장. 부담돼 죽겠다..."

"왜요? 비즈니스 타셨으면 눈 좀 붙이셔야죠."

"그러는 너는? 너야말로 비즈니스 탔으면 푹 쉴 것이지."

헬싱키로 가는 환승 비행기를 타기위해 우리는 먼저 파리로 가고 있다.

연맹에서 비행기 표를 끊어줬는데, 감독님과 나만 비즈니스를 내주고, 다른 선수들은 이코노미에 몰아넣었다.

실력에 따른 차등대우라는 건가... 친구들이랑 있는데 불편하게 젠장...

"박문기가 이런 사람이었네요..."

"야. 회장님한테 박문기가 뭐야?"

"죄송합니다..."

"앞으로 그 새끼라고 해."

"하하... 감독님..."

"내가 이래서 팀 감독 같은 거 하기 싫다는 거야. 신경 쓸게 너무 많어... 쓸데없는 일에 눈치보고."

"제가 잘 할 게요."

"넌 그냥 하던대로 하면 돼. 근데 마하야. 아무래도 이번 대회에선 너한테 크게 신경을 못 써줄 거 같다. 국제대회가 처음인 애들이 많다보니까."

"괜찮아요. 전 올림픽 경험해 봤잖아요."

"그리고 또 하나. 가서는 여자 만난다 이런 거 하지말고."

"네? 그건 사생활인데..."

"보는 눈이 너무 많어. 올림픽 때는 무명에 다른 종목들도 있었지만. 지금은 모든 카메라가 너 하나만 보고 있으니까. 괜히 스캔들 나지않게 몸 조심 하라는 거야."

"이것도 그 새끼가 한 짓인가요?"

"..."

"왜요? 그렇게 부르시라면서요?"

"잘했어. 하지만 조금 건방져 보이니까. 그 인간이라고 하자."

"하하하하..."

"생각할수록 어리숙하게 군 거 같애. 기간은 짧고 선생님이나 현석이 형이 등 떠밀어 맡았지만... 어떻게 대표팀을 선발전도 없이 자기들이 선별해서 뽑냐..."

"..."

"그래놓고 이런 식으로 보란듯이 차별대우를 하면. 선수들이 연맹 눈치를 안 볼 수가 없잖아."

"그러게요. 저도 친구들이라 뭐라 할 수도 없고... 운동은 즐겁게 해야되는데."

"사업하던 사람이라더니 계산이 아주 철저해. 선생님이나 다른 연맹 사람들이 못 당해낸 이유를 알겠어."

"그렇다고 일부러 시합을 망칠 수도 없고요."

"그러니까 하던대로 하라는 거야. 선수는 운동만 잘하면 된다. 선생님도 그러셨잖아."

"알겠습니다."

"아직은 이런 일에 감정 낭비 하지마라. 그 얘기 해주려고 불렀어. 분명 애들 눈치보느라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있을 거니까."

"알겠습니다. 가서 쉴 게요."

"그래."

"참. 감독님. 혹시 여자 선수들 명단도 가지고 계세요?"

"있지. 왜?"

"거기 수빈이 있나요?"

"수빈이가 누구야?"

"아. 다빈이요. 최다빈."

"없어. 개인으로도 참가 안 한 거 같다."

"그래요..."

뜬금 한수빈 이름이 생각나냐 몇 달이 지났는데.

그나저나 다빈이는 어디서 뭐하고 있을까...

그 녀석 승부욕에 그냥 은퇴했을리는 없고 무슨 일이 있는 거 같은데, 보이질 않으니 걱정만 느는구나.

* * *

2005년 8월. 핀란드 헬싱키.

올림픽의 명성에 뒤지지 않는 국제경기. 세계육상선수권대회가 개막됐다.

각지에서 몰려든 선수와 관계자 그리고 관중들로 도심이 북적거린다.

인산인해를 이루는 사람들 속엔 한동그룹의 재벌 상속녀 한수빈과 그녀를 가슴에 품고있는 이도형이 함께하고 있었다.

"은근 육상이 인기있는 경기였구나."

"후우..."

"오빠."

"응?"

"왜 내가 말하는데 한숨을 쉬어?"

"아니... 어쩌다 여기까지 왔나 그거 생각하느라... 정신이 좀 멍해지는 기분이야."

"이제와서 뭔 소리야? 갈 거면 오빠가 나도 데려가라며?"

"너 또 버려지고 울고불고 할 게 뻔하니까 그랬지."

"누가 또 버려져. 말 함부로 하지마. 오빠가 뭘 안다고 그래."

"알았어. 성질 좀 죽여."

"이번에도 아니라고 하면 그땐 그냥 칼로 찔러버릴거야."

"너도 진짜 어지간하다..."

"내가 뭘?"

"천하의 한수빈이 남자에 빠져서 허우적대다니. 신기해."

"..."

"어떻게 된 거야? 어쩌다 그렇게 좋아하게 됐어? 잠깐 가지고 놀 거 아니었어?"

한수빈이 이도형을 싸늘하게 바라본다.

"뭘 그렇게 무섭게 노려보냐."

"오빠는 내가 이 인간 좋아하는 거 같애?"

"뭔 소리야. 누가봐도 그래."

"...지금 나왔다고 그러나? 왜 이렇게 안 하던 행동을 하지?"

"말싸움 할 시간 있으면 줄이나 서자. 북유럽이라고 시원할 줄 알았는데, 왜 이렇게 덥냐..."

"오빠."

"빨리 와. 여기선 너도 줄 서야 돼."

"..."

이도형이 퉁명스레 스타디움으로 걸음을 옮기고, 한수빈도 가만히 지켜보다 따라 나섰다.

경기장에 입장하자 관중들의 열기가 뜨겁게 전해진다.

한수빈의 뾰루퉁한 마음이나 이도형의 귀찮은 감정들이 함성에 묻혀버렸다.

두 사람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와~ 진짜 사람 많다."

"밖에서 보는 것보다 더 크네. 올림픽 스타디움이라 그러나."

"뭔가 월드컵 때 생각나지 않어?"

"나 그때 부대 있어서 잘 몰라."

"이랬어. 시끌시끌하고 어딘가 막 가슴이 들뜨고. 그런 에너지에 설레고."

"니가 스포츠를 좋아했구나? 십년 만에 처음 알았네."

"경기는 별론데. 이 분위기가 좋아. 관중이 있고 무대가 있는."

"..."

"그래서 내가 다른 건 몰라도 음악은 진지하게 공부하잖아. 후훗~"

한수빈이 사랑스런 미소를 지으며 돌아본다.

이도형은 두 사람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십년 전. 열 일곱의 이도형.

재벌 총수, 검찰총장. 차기 대선 후보 등, 사회 유력인사들이 참석하는 공간에 그도 아버지의 자랑이 되어 사회를 배우고 있었다.

여기선 아버지도 고개를 숙이는구나 책잡히지 않게 얌전히 있어야겠다.

한쪽 구석에 반듯하게 서 있는 그에게 열두 살 초등학생 한수빈이 다가와 말했다.

(저기요. 저쪽에 과자 다 떨어졌어요.)

(...)

(뭐해요? 움직이지 않고. 주스도 채워줘요.)

(저기... 어른들한테 말하는 게 어떨까? 난 여기 일하는 사람 아닌데.)

(그럼 일하는 사람한테 전해주세요. 빨리 채워놓으라고.)

생긴 건 예쁘장하게 생겨 대체 어느 집 딸이 이렇게 싸가지가 없는지...

나중에서야 그녀가 한동그룹 외동딸임을 깨닫고, 나서지 않고 그냥 무시하길 잘했음을 알았다.

성격을 빼버리니 드레스를 입은 인형 같은 아이만 기억에 남는다.

고등학생이 애한테 반하는 것도 제정신 아니지만, 또렷한 미모는 시간이 지나며 모두가 눈여겨보는 아름다움이 되었고, 가까워지는 시간속에 감정은 진한 색을 띄게 되었다.

"수빈아."

"응?"

"왜 아까 물은 말에 대답 안 해줘?"

"뭐? 오빠가 뭐라고 했었지?"

"어쩌다 사랑에 빠진 거냐고."

"..."

"대체 여긴 왜 온 거야?"

"휴가 차. 겸사겸사."

"니 말대로 우리 지금 외국 나와 있잖아. 오빠한테 솔직하게 말해 봐. 나한테 못 할 말 뭐 있어."

"..."

"너 정말로 구마하 좋아해?"

한수빈이 운동장을 바라본다.

높이뛰기, 원반 던지기. 그리고 무슨 종목인지 모를 트랙 경기가 경기장 곳곳에서 동시에 진행되고 있었다.

"대체 얼마나 잘났길래 나를 두번이나 깠는지. 한번 보고 싶었어."

이도형도 경기장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제대로 적수를 만났구나."

"짜증나... 지가 뭐라고..."

"뭐긴. 우리보다 낫지."

"왜?"

"너나 나나 애들. 클럽 멤버를 떠나서, 우리가 아는 모든 애들이 자기가 뭔가 이뤄서 잘난 놈 있어?"

"..."

"저 자식은 스스로가 만들어 낸 배경 위에 서 있는 놈이야. 자신감이 다를 수 밖에 없어."

그녀의 마음을 돌려세우기 위한 마지막 용기를 품고 이도형이 말했다.

"우리랑 어울리지 않는 애야. 그만 마음 접어."

"...왜 그렇게 생각해?"

"애당초 상대가 될 수 없어. 포기하는 게 너한테 좋아."

"훗. 원석이 오빠가 힘써도?"

"원석이가 무슨 힘이 있는데."

"그래도 원석이 오빠네 아저씨가 오빠가 해달라는 건 다 해주잖아."

"방송국이니까 자기 아버지한테 부탁해서 구마하 험담이라도 하겠다?"

"그럼 찍소리 못하지 않을까?"

"농담이지? 왜? 쟤가 뭘 잘못했는데?"

"음..."

"니 기분을 망치게 했다고?"

"그냥 하는 말이지. 뭘 따지고 있어."

"한동그룹 외동딸의 유혹을 거절한 구마하 그로 인해 세상의 지탄을 받는다. 너 만약 그런 일 벌어지면 국민들이 쟤를 욕할까? 한동그룹을 욕할까? 너를 욕할까? 누가 더 타격을 입을까?"

"짜증나... 그만 얘기해..."

한수빈이 턱을 괴며 고개를 돌려버린다.

이도형이 그녀의 어깨를 붙잡으며 말했다.

"놔."

"너도 세준이 원석이 못지않게 일그러진 사람이야."

"지는... 지는 반듯한가..."

"나도 일그러졌지. 나도 알어. 내가 삐뚤어진 놈이라는 거."

"..."

"수빈아. 일그러진 사람은 일그러진 사람들끼리 만나야 돼. 저런 놈이랑 어울릴 수 없어."

"도형이 오빠."

"응?"

"나 오빠가 나 좋아하는 거 알어."

"어... 그래?"

가슴이 떨려온다. 설레임이 아닌 두려움이 밀려오는 떨림이었다.

"오빠. 내가 다른 사람은 만나도 오빠 만날 일은 없어."

"...왜?"

한수빈이 차가운 눈동자로 그를 돌아 보자, 이도형은 십년 간 좁혀왔던 두 사람의 간극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오빠는 나한테 좋아한다는 말 할 용기있어?"

"..."

"없지? 저 사람은 그걸 했어."

"쟤가 너 좋데...?"

"응. 내 눈 보면서. 분명하게. 또박또박. 나 좋아한다고."

"어... 그래."

그녀가 다 들려주지 않았던 지난 호텔 방에서의 일을 언급해주었다.

사랑이라든지 연애라든지. 그가 원하는 건 단지 섹스가 아니었다는 것까지 전부.

"차라리 연애를 하자고 했다고...?"

"응. 그래서 온 거야. 과연 내가 사랑할 가치가 있는 사람인가 아닌가 직접 보고 싶었거든."

"..."

"왜 좋아하냐고? 글쎄. 왜일까? 끌려. 오빠들이랑 다르게."

"너 건강한 사람 좋다고 그랬잖아..."

"그건 표면적인 이유지."

"그럼. 뭐가 더 있어?"

"오빠가 말한 대로야. 저 사람은 자기가 뭔가를 이뤄 잘난 듯이 구니까. 내가 그런 걸 좋아하거든."

"너도 선망하는 게 있었구나."

"나는 사람 아니냐...? 나도 자립심 있는 사람들이 좋지. 누구 같이 배경 믿고 설치는 거 보단."

"..."

날카로운 발언에 이도형의 감정이 난도질 당한다.

잠깐 선을 넘었기로서니 이렇게까지 사람을 매몰차게 대하다니...

"그래. 알았어..."

"오빠가 맞어. 동감해. 우리가 우리 손으로 뭔가를 이룬 게 있을까? 뭐. 오빠는 공부라도 잘하니까 그런 게 있을 수 있겠다."

"너도 공부 열심히 했어. 왜 나한테만 그래."

"냉정하게 그 비싼 과외선생들 붙여 겨우 이대 왔으면 내가 머리가 좋다고는 할 수 없지."

한수빈은 또 한번 고개를 돌려 이도형의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

"오빠. 오빠는 싸움 해봤어?"

"아니."

"한번도?"

"아버지 직업 때문에라도 난 싸움 같은 거 하면 큰일 나."

"그럼 누군가를 이길 순 있어?"

"..."

"싸워야만 하는 순간이 온다면? 아저씨가 아닌 오빠의 힘으로 뭔가를 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알았다. 내가 미안해. 내가 실수했어. 그만해."

"뭐가?"

"일그러졌니 뭐니해서 너 지금 심술 부리는 거잖아. 그만해. 더 들으면 나도 기분 안 좋아."

"사실을 말할 뿐인데 왜 그래."

싸가지는 어릴 때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구나.

하긴 모르던 것도 아닌데 이제와서... 그런 애를 좋아한 내가 멍청한 거지...

이도형도 성질이 있어 욱하는 심정으로 받아친다.

"그러는 너도 뭔가 한 거 없잖아. 왜 나한테만 뭐라 그래."

"응. 그래도 난 여자잖아."

"..."

"오빠는 남자가 왜 이러고 살어? 패기있게 나와 봐. 나 좋아해? 말해."

"후후... 너도 참 지독하다..."

"오빠가 나한테 한 말이야. 스스로 한 말을 그렇게 체념하듯 듣지 마."

"그래..."

"뭔가를 이겨 쟁취하고 얘기해. 저 사람이랑 오빠를 비교하지마. 난 진취적인 모습이 좋아. 멋있는 건 둘째고."

"알았어. 알았다고. 어련히 알아서 좋은 놈 골랐을까..."

"꿈 깨. 알았어? 오빠를 연애상대로 보라면 내가 이렇게 오래 알고 지내지도 않어."

"..."

마침 그 순간 남자 단거리 경기가 시작되며 이도형을 구해준다.

트랙에 선수들이 등장하자 한수빈도 독기를 지우고 고개를 돌렸다.

"나 이제 경기 볼 거야. 말 걸지마."

"응..."

사랑은 이성을 마비시키기 때문에 위험하다.

바르지는 못하더라도 냉정한 지성을 자랑하던 이도형은 가차없이 한수빈에게 내동댕이 쳐진다.

그렇게 뚜드려 맞고도 그는 그녀가 아닌 구마하를 원망하고 있었다.

녀석만 나타나지 않았다면...

저 자식만 없었다면...

그럼 수빈이가 이렇게 변하진 않았을 건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