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물을 알아보는 눈 (4) >
"허우우..."
"지성아 떨리냐?"
"심장 터질 거 같애요..."
"괜찮아. 잘 할 수 있어."
"형은 긴장 안 되죠...?"
"뭔 소리야. 나도 긴장되지."
"근데 어떻게 이렇게 태연할 수 있어요?"
"재밌잖아."
"형은 시합이 재밌어요?"
"그럼. 즐겨. 메달 못 따면 어때. 뛰는 자체가 재밌는데."
"글쎄요. 난 한번도 경기를 재밌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그럼 왜 뛰냐? 고생스럽게 땀만 빼고."
"아 진짜... 형이야 맨날 이기니까 그러지..."
"하하하! 진수가 너도 맨날 이기고 다녔다며?"
"몰라. 젠장..."
예선전을 앞둔 선수 대기실. 앞 뒤 조에 배정된 구마하와 권지성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까 형한테 와서 인사하고 간 사람은 올림픽 때 만났죠?"
"그렇지. 저기있는 유진이 같은 경우는 작년에도 같이 파티 가고 그랬고."
"유진 볼트라... 나랑 갑이라고 그랬나? 키 진짜 크던데."
"생긴 건 존나 아저씨 같지 않냐?"
"글쎄... 흑인들은 뭔가 좀 다른 존재 같아서."
"작년까진 200만 뛰더니 올해부터 100미터도 하나보네. 기록 얼마 나오려나?"
"빠를 거 같던데."
"라이벌이다 지성아. 이겨내야지."
"내 라이벌인가 형 라이벌이지..."
"하하! 너도 내 라이벌이야."
육상세계선수권대회 예선전이 시작되었다.
구마하가 트랙에 등장하자 관중석에서 커다란 함성이 쏟아져 내렸다.
아테네 올림픽 세계신기록과 단거리 중거리 세 종목 금메달리스트의 명성은 1년이 지나도 꺼질 줄 모르고 있었다.
"우와..."
권지성이 차례를 기다리며 구마하의 경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자신이 아닌 그에게 쏟아지는 함성에도 불구하고, 같은 국기를 가슴에 걸고 있다는 자부심이 생긴다.
이것이 승자의 영광이구나...
나도 베이징 땐 꼭 마하 형 같이 되야지.
* * *
관중석에 앉아있는 한수빈도 구마하의 존재감을 체감한다.
국제적인 열기. 관중들이 보여주는 뜨거운 관심과 함성은 한국에서 느꼈던 인기와는 차원이 다르다.
어찌됐든 그녀는 무대 위에 서는 사람이라 군중들의 에너지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살면서 단 한번도 이만한 함성을 들어본 적 없는 그녀로선 가슴 설레이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오빠..."
"응?"
"...내가 정말 저런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
"뭔가... 오빠 말대로 우리와는 너무 다른 앤 거 같애."
"너도 우리가 봤을 땐 보통 사람은 아니야."
"난 그냥 운 좋게 부모를 잘 만나 태어났을 뿐이야."
경기가 시작되고 구마하는 압도적인 격차로100미터 1차 예선을 통과했다.
질투심에 사로잡힌 이도형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실력이었다.
확실히 그는 뭔가 다른 선수들과 기량이 달랐다.
"수빈아. 잘해 봐. 얼지말고."
"괜히 독하게 말해서 미안..."
"됐어. 내가 널 하루 이틀 본 것도 아닌데."
"말에 뼈가 있어."
"하하! 우리 사이에 뭘."
전광판에 시합을 마친 구마하의 얼굴이 클로즈업 되고 있다.
웃고 있었다. 힘든 기색이 보이질 않았다. 자신을 불러주는 외국인 관중들에게 손을 들어 여유롭게 인사를 건네주며 그가 경기장 뒤편으로 빠져나갔다.
이도형도 허탈한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뭔가 저렇게 보니까 아는 사람이라는 게 신기하다."
"그러니까... 심지어 난 쟤랑 호텔까지 갔었는데..."
"그 말 지금 들으니까 되게 비현실적이라는 거 아냐?"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있었네. 이만한 존재일 줄이야..."
잘난 놈이 잘난 척 하는 게 뭐가 문제냐. 너무 쉽게 말했구나... 그 대상이 나를 넘어 설 줄은 몰랐어... 저 친구 입장에서 뻐팅기고 물러날만 하네.
한수빈은 자꾸만 가슴이 두근 거렸다.
스스로의 가치를 만든 남자. 그 어떤 배경도 주늑들게 만들 수 없는 존재.
쉽게 가질 수 없는 상대.
대체 어떻게 해야 그를 사로잡을 수 있을까...
돈이 아닌, 섹스가 아닌. 대체 무엇을 제시해야...
* * *
"요~ 챔프."
"유진. 컨디션은 좀 어때?"
"오~ 영어가 많이 늘었는데?"
"지난 1년간 하드하게 공부 했지."
1차 예선을 마치고. 김진수나 권지성이 탈락하고, 2차 예선을 앞둔 구마하는 유진 볼트와 만나 시간을 보냈다.
"생각보다 한국 선수들이 많이 나왔어."
"강한 애들이 많지."
"요즘도 빅토리아랑 연락해?"
"하하! 빅토리아는 올림픽 마치면서 끝났어."
"진짜? 유럽까지 왔는데 연락해보지?"
"지금 시즌 중이잖아. 투어 돌겠지. 잘 하고 있을거야."
구마하의 영어 실력이 늘어나며 두 사람이 나눌 수 있는 대화도 풍부해졌다.
"스키는 뭐야?"
"그걸 니가 어떻게 알어?"
"기사가 났어. 올림픽 챔프 새로운 도전 뭐 그런 제목으로."
"말 그대로 한번 도전해봤어."
"육상은?"
"육상도 계속하고. 그러니까 지금 이렇게 번호표 붙이고 있지."
"지저스 크라이스. 대체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거야?"
"맞다. 안 그래도 애들이 너 보면 안부 좀 전해달라고 했었는데."
"유어 프렌드들? 크레이지 가이들?"
"크하하하!"
두 사람은 경쟁자가 아닌 사석에서 만난 친구들같이 웃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하하하! 다들 보고 싶어지네."
"태윤이는 요즘 기타 친다고 정신없고. 정석이는 취직했어. 남수도 여자친구 사귄다고 잘 살고 있고."
"게임하던 사람 중에 누가 정석이였지?"
"키 좀 작은 애. 머리 이렇고."
"기억나. 뭔가 시리어스한 느낌을 줬었는데."
"한번 놀러와라. 안 그래도 얼마 뒤에 브라운도 행사 때문에 온다고 했는데."
"챔프. 초대해준 건 고맙지만, 나는 아직 영광을 누릴 때가 아니야."
"무슨 소리야? 누가 영광을 따진다고."
"브라운도 NBA 스타고, 챔프 너는 아틀레틱의 히어로야. 하지만, 나는 아직 무명에 가깝잖아..."
"유진. 갑자기 왜 퍽킹 스튜피드 한 소리를 하고있냐."
"오~~! 너 방금 나한테 욕 한 거 맞어?"
"퍽큐다. 새끼야."
"하하하! 퍽 큐 투!"
1년만에 만난 유진 볼트는 구마하에게 라이벌 의식을 불태운다.
친구이자 반드시 넘어서고 싶은 상대.
도전은 언제든지 받아주겠다며 두 사람은 뜨거운 악수를 나눴다.
"컴 온. 요즘 여기저기 덤비는 사람들 많지만, 너와의 승부는 피하지 않겠어."
"챌린저가 또 있어? 너랑 같이 온 코리안 가이들?"
"그냥 여기저기."
유진의 의지에 구마하는 스키의 박상택을 떠올렸다.
리스펙이 담긴 도전과 승부는 가슴을 뜨겁게 만들지만 박상택은 그런 게 아니니...
"..."
내공을 보는 눈을 가지고 나서 처음으로 국제대회를 찾아왔다.
이곳에 있는 선수들이 얼마나 위대하고 강한 시간을 이겨내 왔는지 알 것 같다.
저들 빛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메달을 목표로 더더욱 자신을 갈고 닦을 것이다.
100미터를 끝내면 200미터와 800미터. 심지어 이번 세계선수권은 김진수, 권지성. 그리고 선배 단거리 선수까지 포함 4x100 계주도 참가하고 있었다.
앞으로도 도전자가 나오겠지. 언제까지 정상을 지킬 수 있을까...
챔피언이란 고독한 자리구나. 갈 길 없이 지켜내야만 하는 싸움이라니.
거 참. 이 말을 내가 하게 될 줄이야... 무거우면서 감개무량하네.
부담감을 느낄수록 책임감을 가지는 구마하.
정상이란 자리가 건네주는 다양한 의미를 알아가고 있었다.
일정은 차질없이 진행되어 준결승. 그리고 준준결승을 마쳤다.
구마하는 결승에 올라 또 한번 메달을 앞둔 도전을 펼치게 되었다.
한국에서 생중계를 펼치고 있는 이현석 교수를 비롯, 육상 팬들이 늦은 시간까지 TV앞에 모여 앉아 올림픽에 이어 세계선수권에서 또 한번의 기적이 탄생하길 기다리고 있었다.
관중석의 한수빈도 이도형과 이야기를 나눴다.
"오빠. 세계 신기록이니까 꼭 이기겠지?"
"모르지. 경기가 어떻게 풀릴지."
"후우... 아 제발 이겨라..."
구마하의 승리를 기원하는 한수빈.
운동장엔 그를 비롯 다양한 선수들이 나와 몸을 풀고 있었다.
한수빈이 조마조마한 감정으로 두 손을 꼭 잡는 모습을 보며 이도형이 어깨를 다독여 준다.
"근데, 수빈아."
"말 걸지마. 기도하는데 부정 타."
"마하가 세계선수권 우승하면 그땐 진짜 너도 볼래야 볼 수 없는 애가 될 건데 그래도 좋아?"
"아... 그러네... 근데, 지는 모습은 보고싶지 않은데..."
"너도 참... 욕심은..."
"어떡하지? 이기는 것도 보고싶고 남들이 데려가는 것도 싫어!"
"하하하!"
이도형이 생각에 잠긴다.
한수빈이 직접 말했듯 그녀와 자신이 이어질 가능성은 없다.
하지만, 구마하가 수빈이와 연인관계가 되는 것도 보고싶지 않다.
그가 자기 위치에서 성공하는 건 관계없다.
단지, 자신이 해내지 못한 남자의 역할을 맡게 된다는 것이 싫었다.
"..."
"제발 제발..."
나라는 놈은 생각보다 치졸하구나. 깔끔하게 포기가 안 되네.
좋다 구마하. 어디 한번 수빈이를 품어봐라.
그녀가 얼마나 감당하기 버거운 존잰지... 내가 해내지 못한 것을 니 녀석이 할 수 있을까?
선수로서 너를 인정한다. 응원하고 앞으로도 건승하길 비마.
하지만, 남자로는 절대 용납할 수 없어.
"있다."
"뭐가?"
"너랑 마하가 만날 수 있는 방법."
"어떻게?"
"돌아가는 비행기라면 되지 않을까?"
"오빠... 오빠 정말 천재다!!"
그래. 사귀어라. 만나. 그리고 망가져라.
그녀는 사람을 병들게 만드는 존재니까...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반드시 승부를 내. 아니면 너 진짜 쟤 다시는 못 볼 거야."
"응!!"
"후후후. 좋아?"
"그럼~ 당연하지!"
잔인한 녀석... 내 마음을 알면서도 어떻게 이리 환하게 웃을 수 있을까...
십 년을 옆에서 헌신해준 존재를 그 정도 취급밖에 해주지 않다니...
하지만, 그런 너니까 반드시 구마하를 망가뜨릴 수 있겠지...
잠시 뒤. 선수들의 이름이 호명되며 결승전이 시작된다.
수만 명 관중들이 소리를 죽이고 트랙을 지켜본다.
고요한 분위기. 이제 곧 다음 세계선수권이 열리는 2007년까지 지구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가 결정된다.
[Ready]
선수들이 각자의 트랙에 자리하여 자세를 낮췄다.
[Get set]
8명의 사나이가 엉덩이를 높이 치켜들며 달려나갈 준비를 갖췄다.
[탕!]
그리고 마침내 총성과 함께 인간 탄환들이 발사된다.
관객들은 광기어린 함성을 질러댔다.
누가 이길 것인가. 올림픽 챔피언 구마하인가, 은퇴를 선언한 베테랑 미국의 로버트인가. 아니면, 새로이 육상 단거리의 샛볓로 떠오르는 자메이카의 유진 볼트인가.
50미터. 60미터. 세 사람의 순위는 우열을 가릴 수 없다.
"제발 제발!!"
이도형도 질투심을 거두고 승부에 집중하는 순간.
70미터를 지나며 구마하가 내공을 쥐어짜 막판 스퍼트를 올렸다.
"꺄아악!!"
한수빈이 벌떡 일어나며 기쁨의 함성을 지르는 순간. 구마하가 두 팔을 넓게 벌려 누구보다 빠르게 결승선을 통과했다.
올림픽에 이어 세계선수권에서 우승을 차지한 구마하. 기록은 9.76. 아테네에서 달성한 세계신기록을 넘진 못했으나 대회 기록을 세워 본인은 만족하는 얼굴로 전광판을 보며 숨을 헐떡였다.
"아아악~ 이겼어!! 오빠! 어떡해!!"
"그래... 축하해."
구마하의 100미터 우승 소식에 같은 시각 새벽잠을 설치던 한국도 난리가 나고 있었다.
이현석 교수는 또 한번 큰 소리로 편파적인 중계를 쏟아냈고, 새벽까지 TV앞을 지키고 앉은 이주영과 한주 고 후배 선수들. 구마윤의 가게에 모여든 단골 손님들이나, 구마하의 친구들 모두 기쁨의 포옹을 나누며 승리의 축배를 들었다.
이혜정도 집에서 가족들과 경기를 지켜보며 문자를 보냈다.
"우승 축하해. 잘했어."
* * *
경기를 마치고, 사람들은 단상에 올라서는 그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쳐준다.
수만명의 에너지를 끌어모으며 승리의 메달을 목에 거는 그를 보며 한수빈이 말했다.
"오빠."
"응?"
"나 쟤랑 연애 안 해. 그건 좀 아닌 거 같애."
"왜 또 갑자기 생각이 바뀌었어?"
"결혼 할 거야."
"하하하하! 수빈아 서둘지 마."
"진짜야. 쟤야. 저 사람이야말로 내가 그토록 바랬던 모든 것을 가지고 있어."
한수빈은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는 빛나는 보석같은 존재다.
삼고초려를 해서라도 반드시 갖고야 말겠어.
자존심을 따질 때가 아니야. 너무 갖고 싶어. 그는 내 꺼야.
"만약 이번에도 거절하면 그땐 진짜로 목에 칼침이라도 꽃아넣을거야..."
"후후후. 그래. 응원할게."
그래. 그 일그러진 마음이다.
반드시 사랑을 쟁취해라.
그래서 꼭 녀석을 부셔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