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륜기로 가버렷-132화 (132/401)

< 보물을 알아보는 눈 (5) >

"감독님. 마하 저 새끼 진짜 장난 아니었네요..."

"동민아. 저놈이 아무리 특별해도 니 옆에서 기초부터 배운 건 변함 없다."

"그게 무슨 상관인데요..."

"하하하. 녀석. 진수는 왜 이렇게 말이 없냐?"

"마하가 우리 친구라는 걸 떠나서, 막상 눈앞에서 이런 걸 보니까 뭔가 좀 울컥해서요..."

"진수 형? 뭘 울컥해요. 우리도 열심히 하면 되지!"

"지성이가 맞다. 다들 열심히 하면 된다."

한상률은 새로운 대표팀 제자들과 구마하의 시상식을 지켜보고 있었다.

올림픽을 넘어 이제는 세계선수권. 수제자는 또 한번 자신의 클래스를 증명해냈다.

시상식을 마치고 대표팀에게 다가오는 구마하에게 모두가 진심으로 우승의 영광을 축복해준다.

"축하한다 개새끼야!"

"땡큐."

"뭐야? 별로 놀라는 눈치도 없어?"

"크하하. 메달 한 두 번 따보나!"

"아하하! 이 새끼가! 재수없게!!"

"와 진짜 난 욕도 안 나온다."

"거짓말이죠? 형도 지금 기분 좋잖아요."

"당연하지! 나도 어떻게 될 지 몰랐어. 하여간 인간들 존나 빨러..."

친구들과 웃고있는 구마하에게 유진 볼트가 다가와 악수를 건넸다.

"Hey. champ."

"여."

"Next time."

"Of course."

유진이도 그렇고 로버트 아저씨도 그렇고 다들 우승은 축하해주지만, 눈빛 속에 지울 수 없는 경쟁심리를 비추고 있었다.

좋다. 덤벼라. 그것도 에이스의 숙명이라면 받아들이겠다.

구마하가 당당하게 도전자들과 악수를 나눴다.

"감독님. 로버트 저 사람은 이번 세계 선수권이 은퇴라고 그랬죠?"

"음. 다음 시대가 열리는 거지."

"다음 시대라... 아 장애물 달리기는 아무도 안 나오면 좋겠다..."

"동민이 형은 아무도 없으면 자기가 우승할 줄 아나 봐."

"뭐 이 새끼야?"

한상률도 구마하에게 축하인사를 건넸다.

"고생했다. 이번엔 별로 신경도 못 써줬는데."

"감독님 축하드려요."

"축하는 무슨. 니가 우승했는데. 빨리 형님한테 전화부터 드리자."

"네! 그리고 대 사부님이랑 교수님이랑."

"하하! 가족부터 챙겨 이놈아."

한국에서 오매불망 전화연결만 기다리고 있을 사람들을 생각해 핸드폰을 꺼내드는 구마하와 한상률.

그들에게 박문기와 육상연맹 고위직들이 다가왔다.

"역시! 난 마하가 이번에도 해낼 줄 알았다!"

"고맙습니다. 회장님."

"하하하! 자 빨리 가자. 기자회견이 준비되어 있으니까."

"네? 어. 저..."

"왜? 아직도 뭐 할 게 남아있나?"

구마하가 한상률을 돌아보니 고개를 끄덕여준다.

연맹 회장이니, 구마하도 그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다.

"아니요. 다 끝났습니다."

"하하하! 이야~ 육상도 와서 보니까 느낌이 다르구나. 어?"

"재밌으셨어요?"

"그럼! 역시 경기는 이겨야 제 맛이지!"

한상률이 뒤에 남은 선수들의 어깨를 다독여준다.

"흘려 들어라. 너희의 시간이 아직 안 왔을 뿐이야."

"네. 감독님."

"..."

"얼굴들 펴고. 지성이도. 신경쓰지 마."

"전 상관 안해요."

한국은 깊은 새벽 시간이었다.

마냥 사람들을 기다리게 할 수도 없는지라 한상률이 마하를 대신해, 구마윤이나 천병욱 이현석에게 대신 전화를 걸어 감사 인사를 전했다.

"네. 지금 인터뷰가 잡혀서요. 제가 대신 연락드립니다."

"보고 있습니다 감독님. 감독님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래. 상률아. 애한테 몸 관리 잘하라고 전해주고, 남은 시합도 기대하고 있으마."

"야. 내가 안 가길 잘했다! 보는데도 왜 이렇게 조마조마하냐... 어우 떨려라."

주변에서 축하 인사를 건네주는 건 일도 아니었다. 박문기야말로 구마하의 승전보에 누구보다 열정을 터트리고 있었다.

"남은 200미터. 그리고 중거리 800미터! 마지막으로 계주까지. 우리 대한민국 육상연맹이 반드시 메달을 목에 걸어 돌아가겠습니다!"

육상이 트랙 경기만 있는 게 아닌데... 연맹 회장이란 인간이 마라톤이나 필드 경기는 관심도 없다니... 골치아픈 인간이 감투를 썼구나... 대표팀도 빨리 사퇴해야지... 오래 엮이다간 피곤해질 게 뻔하다.

박문기를 보며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는 한상률이었다.

* * *

"아우..."

"역시 세계의 벽은 높구나... 마하 형이 있었는데..."

"됐어. 왜 그래. 이게 시합이지."

"미안하다 마하야... 우리가 부족해서..."

"아니에요 선배님. 준결승까지 온 것만도 대단하죠. 더 열심히 노력해서 다음을 노려요 우리."

이어지는 세계선수권에서 나는 100m에 이어 200m도 우승을 차지해 금메달을 목에 걸었지만, 800은 결승에는 나갔으나 메달 획득에는 실패했고, 마지막날 벌어진 4X100계주에선 한국 최초 준결승에 진출하나 결승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계주만 안 뛰었어도 니가 800우승 했을 건데..."

"그러니까... 우리가 결국 형 우승을 막았어..."

"미친 놈들 개소리를 씨발... 영향이 있으면 스키 훈련이지, 계주는 중거리 뛰는데 아무 상관 없었어."

스키 훈련을 거치며 몸이 더 튼튼해진 건 좋지만, 중거리와 단거리의 미세한 벨런스가 어긋나고 말았다.

몸이 완전히 단거리로 맞춰져 있었다.

그렇다고 내가 800미터 메달리스트라는 게 변하는 것도 아니고 크게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확실히 국내와 세계의 레벨이 다르구나. 한국에선 너보다 빠른 800선수 없었는데."

"진운이 너가 2차 예선 통과했잖아. 앞으로 니가 메달 따면 돼."

"너무 그러지 마. 내가 뭐라고..."

800미터 선수 김진운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이녀석 말에 진수와 지성이가 목소리를 높였다.

"아. 형! 형이 그렇게 말하면 우리는 뭐가 돼요!"

"그러니까 이 싸가지 없는 새끼!! 우리는 1차도 떨어졌어!!"

"하하... 미안... 대신 계주 준결승 나갔잖아."

"후우... 진짜 빡시게 훈련해야지."

"나도. 다음엔 꼭 메달 걸 거야."

"후후후. 좋다. 동민아 너는?"

"난 그냥 내년에 아시안게임 메달 획득하면 거기서 깔끔하게 운동 그만둘래."

"그래! 우리 다 내년 아시안 게임에서 사고 한번 쳐보자!"

실업팀과 대학팀.각자 자기 위치에 만족하지 않고 한 단계 발전하자는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세계선수권이었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다 같이 헬싱키 시대의 펍으로 옮겨 승리를 축하하는 파티를 보냈다.

한국 육상의 변화한 위상을 이곳에서도 만날 수 있었다.

외국인 팬들이 다가와 인사를 건네주고 사인을 부탁하는가 하면, 주변 선수들을 보면서도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감독님?"

"응?"

"...솔직히 박문기 이 인간 좀 삐딱하게 봤는데. 그래도 이렇게 친구들과 다같이 세계무대에 오니까 좋네요."

"그래? 그럼 또 행사인형 하고 다닐래?"

"그건 싫고요. 일정 좀 잘 조율해주세요."

"이 녀석아. 대표팀 감독이 선수 개인 일정을 왜 관리하냐?"

"설마. 계속하시려고요?"

"아니. 돌아가는 그날 사직서 낸다. 진짜 못 할 짓이다..."

몰랐는데, 감독님도 최근 선을 보셨단다.

이주영 감독님 소개로 만나셨는데 진지하게 결혼을 생각하고 계시는 것 같다.

"오오~ 어떤 분이세요?"

"그냥 소박하고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이야. 은행 다녀."

"예쁘세요?"

"적어도 내 눈에는 괜찮지."

"오... 우와..."

"야. 니가 왜 그런 얼굴을 하냐?"

"나한텐 맨날 운동 게을리 하지 말라고 하셔놓고 여자는 또 언제 만나셨데."

"야 인마! 나 지금 결혼 안 하면 겨울이면 또 동계 올림픽 오고. 내년엔 아시안 게임 오고. 나도 시간 없어. 그리고 그건 다 니 녀석 때문이고!"

"알죠. 저도 감독님 장가 가시는 거 좋아요..."

"근데 왜 그렇게 서운한 얼굴을 하고있어?"

"그냥. 제가 연애를 못 하는데, 남 잘 된다니 심통나서 그러죠..."

"마하야 비교할 걸 비교해라. 이제 스무살 된 너랑 서른 넘은 나를 어떻게 같은 선상에 놓고 이야길 하냐. 양심이 있어야지."

"아... 연애하고 싶다..."

펍에서의 시간을 마치고 호텔로 돌아와 동갑내기 친구들과 술 한잔을 더 했다.

"야 넌 술 마시다 말고, 갑자기 뭐 봐?"

"응. 건너건너 여자 단거리 선수들 명단을 구했는데. 혹시나 다빈이 이름이 있나해서."

"뭔 소리야. 걔가 있었으면 보였겠지."

"혹시 모르잖아. 귀화 했을 수도 있고...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시합치루고 갔을 수도 있으니까."

"병신. 상상력도 좋다. 너 아직도 다빈이 좋아하냐?"

"근데, 나도 마하 심정 이해가 가는 게, 최다빈이 그렇게 선수를 포기할리는 없는데. 너무 감쪽같이 사라졌어."

"하하하! 니네는 작년에도 그러더니, 아직도 다빈이 얘기해? 마하 너랑 헤어졌다고 하지 않았어?"

"그랬는데... 뭔가 애가 종적을 감춰 버린 게 좀 걸려서."

"진운아. 너는 여자친구 있어?"

"학교에 관심가는 애는 있지. 아직 말은 못 걸었어."

"오~ 뭐? 육상?"

"아냐. 종목은 말 안 할래."

"그래 맞다! 진운이 얘도 대학생이었잖아!!"

"야. 니네는 연애 어떻게 하냐? 선수끼리 만나?"

"하하! 왜 너까지 그래? 넌 신촌에서 생활하잖아."

여자 이야기에 우리는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떠들었다.

누구가 괜찮았지. 누구가 예뻤지. 이번 선수권에서도 동유럽 멀리뛰기 애들은 역시 인종이 다르더라 등등.

"다빈이도 있었으면 대표팀 뽑히면서 인기몰이 확 했을 건데."

"그 정도 기량에 스타성이면 기업팀에서도 서로 데려가겠다고 했을거야. 근데 어디서도 소식이 안 들렸어."

"음..."

"마하야. 근데 넌 왜 이렇게 다빈이를 찾냐? 다시 사귀려고?"

"그냥 어떻게 지내나 궁금하잖아. 잘 사나. 어디 아픈 데는 없나."

"전 여친이잖아. 새끼들아. 우리가 모르는 둘 만의 시간이 있겠지."

"따져보면 우리 중에 그나마 연애 해본 건 구마하 밖에 없네."

"국제대회에서 메달 있는 것도 구마하 밖에 없지."

"이 새끼는 술 맛 떨어지게... 갑자기 메달 이야기를 왜 하냐?"

"...동민아. 넌 나랑 욕하고 이런 사이는 아니지 않았나?"

"하하하! 이 새끼 소심하게 뭐하는 거야?"

"그러게 진운아. 아 씨 쪽팔린다."

"이 새끼... 야 이 씨 좀 친하게 지내면 안되냐...? 우리도 알고 지낸 시간이 있는데, 존나 서운하네..."

"하하하! 야. 너도 그냥 동민이한테 욕해. 병신이라고 해봐."

"이 새끼들 나는 뭐 욕 몰라서 안 하는 줄 아나..."

세계선수권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여자는 못 만났지만, 동료애가 깊어지는 시간이었고 대표팀으로서 새로운 마음가짐을 가져갈 수 있는 계기가 됐었다.

다음 날 모든 일정을 마치고 다 같이 공항에 모여있었다.

"마하야. 어제 니가 다빈이 얘기해서 그러는데. 쟤 좀 닮은 거 같지 않냐?"

다시 프랑스 파리에서 환승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진수가 멀리 키 작고 귀엽게 생긴 한 여성을 가리켰다.

"야. 다빈이가 낫지. 걘 그래도 스타일이 있는데."

"너 진짜 여자 까다롭게 본다."

그 까다로운 시선에서도 잊혀지지 않는 한 사람이 있었으니.

한수빈. 진짜 존재감 하나만큼은 장난 아니었지...

섹스를 한 것도 아니다. 딱히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잊혀지지 않는 이 강렬함은 대체...

사람을 밥상에 비유할 건 아니지만, 난 차려진 진수성찬을 거절한 걸까? 제 복을 발로 찬 건가... 아 그냥 섹스라도 할 걸 그랬나...

진짜 돌아가면 연애고 뭐고 이혜정 말 다 무시하고 그냥 여자들 막 만나고 다닐까?

"진운아."

"응? 왜?"

"신촌에 있으면 원래 연애하기 좋아?"

"연대생이 뭐라는 거야...? 놀리냐?"

"아니. 나 진짜 학교에서 운동만 해서 그런 거 잘 몰라."

"니네 학교에 너 좋다는 애들 많지 않어?"

"글쎄다. 하나 보긴 했는데, 이야기가 길어서..."

"마하야. 너 우리나라에 노래방 비디오방이 제일 빨리 생긴 지역이 어딘지 알어?"

"홍대?"

"신촌! 왜일까?"

"모텔의 수요를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인가..."

"그렇지!!"

그래 섹스다! 안 되는 연애에 목매달지 말고 다시 섹스나 하고 다니자!

젠장. 대학생 되고 반년이 지났어!!

뭐하고 있는 거야. 시간만 버리고. 운동하려고 대학 왔어? 아니잖아!

여러 기대감을 안고 귀국길에 올랐다.

올 때는 제각각이었지만, 갈 때는 한구 스포츠에서 육상 팀에 비즈니스 클래스를 제공했다.

"와~ 진짜 좌석이 다르네. 일단 다리를 뻗을 수 있어."

"너 우리한테 미안해서 돈 쓰는거냐?"

"뭔 개소리야. 한구 스포츠에서 나가잖아. 내 돈 아냐."

"형. 형은 퍼스트 타봤어요?"

"그건 뭔가 차원이 다른 금액이라... 엄두가 안 나지."

한번 비행에 몇 백도 큰 돈이지만, 몸을 생각하면 몇 백은 쓸 수 있다.

하지만 퍼스트는 단위가 천으로 올라간다.

한번 비행에 천 만원을 태워? 아이고 아무리 돈이 많아도 그 짓은 못하지.

한수빈 같은 인간들 아니고서야 어떻게 그 돈을 쓰겠냐.

"오~ 기내식이... 고기가..."

"젠장 이불도 뭔가 재질이 다른 거 같은데..."

"억울하면 성공해야죠. 전 내일부터 바로 운동시작합니다."

"지성아. 시차는 챙겨."

"그런 거 없어요. 바로 학교 가서 뛸 거에요."

"그래 동민아. 우리도 존나 열심히 하자."

"옳지 김진운. 씨발 억울하니까 성공하자고."

그래. 우리 다 같이 성공하자. 그래서 영광을 함께 나누자. 오래도록.

친구들의 시끌벅적하던 비즈니스 클래스 감상도 금방 코고는 소리로 바뀌었다.

다들 피곤이 몰려와 하나 둘 깊은 잠에 빠지고 있었다.

나도 잠이 올 때까진 멍하니 영화를 보며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퍼스트 쪽에서 커튼이 슥 걷히며 누군가가 다가온다.

스튜어디슨가 하고 고개를 들어보니

"어?"

"쉿."

한수빈이었다.

"어? 수빈 씨. 어떻게 여기?"

"쉬잇. 다들 자잖아요. 빨리 이쪽으로."

"어. 네..."

그녀가 내 손을 붙잡고 퍼스트 쪽으로 넘어갔다.

뭔가 홀린듯이 그냥 그대로 따라 나서고 있었지만.

솔직히 말해 여기서 그녀를 만나 너무 기쁘고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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